34 변화와 해방의 기쁨

변화와 해방의 기쁨


십자가를 통한 변화의 길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사도행전 4:12. 오직 그리스도만이 구원하시는 힘을 가지고 계시다.

모세의 율법을 몸에 두르고 엄격하고도 청렴한 바리새파인 다소 출신의 바울도 그 마음의 고뇌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자신의 재능과 학식을 분토로 여기고 나사렛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참회하며 용서함을 받은 후에야 비로소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었다.

독일에 한 청년이 있었다. 성령께서 그의 마음을 번뇌케 하여 그는 불안한 나머지 단식과 절제를 통하여 선을 쌓기 위해서 수도원에 들어갔다. 그러나 어쩌랴, 그가 외모를 꾸미면 꾸밀수록 악한 생각이 끊임없이 마음에서 솟아나왔다. 그 때에 스승인 슈타우비츠의 한마디가 그에게 영감을 가져왔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나님은 루터의 죄를 용서하셨고 온 우주는 버림받았던 자식을 건져 올렸다. 그 후로 루터는 믿음과 성결을 강조하는 강력한 종교 개혁자가 되었지만, 오늘날 그의 후예들은 루터가 말한 믿음을 “죄를 겁없이 범할 수 있는 보험카드”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그래서 믿기만 하면 어떠한 생애를 살던지 간에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설교를 하게 된 것이다.

영국의 베드포드에 한 대장장이가 있었다. 그는 순박하고 단순한 심령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마음 속에 역사하는 사단의 세력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무진 애를 썼다. 회개하는 눈물이 그의 눈에서 그칠 날이 없었으며, 용서를 비는 기도 소리가 듣는 자로 하여금 그를 동정하게 할 정도였다. 그는 도덕적 양심을 가지지 않은 동물의 처지를 부러워 하곤 하였다. 악마들이 그에게 몰려와서 그의 죄가 용서받지 못했으므로 지옥불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속삭이곤 하였다. 그런데 이 무거운 짐을 진 여행객도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도 모르게 무거운 짐이 벗겨지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경험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아, 이제 내 눈에는 그리스도를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없게 되었다. 나는 드디어 하나님의 아들과 하나가 되는 경험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그분의 의, 공로, 승리가 모두 내 것이 되었다.” 바로 이것이 천로역정의 저자인 존 번연의 간증이다.

나 역시 죄가 가져온 온갖 고뇌와 고통 속에서 방황하다가 모든 기력을 탈진하고 나서야 아버지의 자비만을 바라보면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범한 죄에 대해서 변명하지 않고, 내가 행한 의와 선한 행위를 내세우지도 않았다. 다만 태초 이전부터 예비해 두신 하나님의 어린양이 이루어 놓은 속죄만을 바라보았다. “하나님이시여,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시고 나의 용서할 수 없는 죄를 용서해 주십시요. 저는 이제 당신께 드릴 선행이 하나도 없습니다. 저의 의로움을 주장할 수 있는 선행이라곤 하나도 없습니다. 제가 드릴 수 있는 것은 피곤에 지친 몸과 정신, 그리고 깨어진 마음 뿐입니다.” 이러한 기도와 함께 하나님의 은혜가 내 영혼 깊숙히 스며 들었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기도에 대하여 “너의 제물은 받아들여졌다. 너는 낡은 옷을 벗고 내가 너를 위하여 준비해둔 의의 옷을 입어라” 라고 말씀해 주셨다. 이제 나의 기도에는 내 소원을 요구하는 주장이 없어졌다. 다만 그리스도의 뜻대로 이루어지게 해달라는 간청만이 있을 뿐이며,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찬송이 넘칠 뿐이다.

이제 유일한 나의 의무는 단지 하나님의 명령을 기다리는 것이다. 나의 기대는 노력과 희생에 대한 보수에서,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신뢰에 대한 약속된 보상으로 달라졌다. 나는 지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막대한 청구를 할 수 있게 되었고, 하나님께서는 나의 노력과 봉사에 대해서 최선의 선물로 축복해 주셨다. 먹고 입는 것에 대한 근심은 사라져 버렸고, 나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도 무가치한 것으로 여겨졌다. 오직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라는 말씀에 대한 느긋한 신뢰가 생겼다(롬 8:32).

더 이상 나는 의무로서 선을 행하지 않게 되었다. 전도든지 자선이든지 간에 즐거움과 만족한 마음을 가지고 행할 수 있게 되었다. 나의 말과 생활에는 순결한 유머와 여유가 넘치게 되었고, 이전보다 훨씬 더 깊고 의미있는 희생과 봉사를 하나님과 사람들을 위해서 바칠 수 있게 되었다. 희생, 절제, 극기와 같은 것들이 더 이상 하기 힘든 의무로 여겨지지 않게 되었고, 나를 구원하신 구세주를 위해서 바칠 수 있는 다시 없는 특권으로 생각되었다. 하나님께로부터 최고의 선물인 의를 받았기 때문에, 더 이상 썩어 없어질 인생들로부터 명예와 부를 얻고자 애쓸 필요가 없었다. 이제 나도 영국의 크롬웰처럼 “주여, 비록 내가 처참하고 비천한 죄인일지라도 은혜로서 당신과 계약 가운데 있습니다.” 라고 기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베푸신 구원에 참여하게 된 이후부터 선에 대한 의무는 즐거움으로 바뀌게 되었고, 죄를 짓는 것은 더할 수 없는 고통이 되었다. 선을 사랑하기 때문에 선을 행하게 되었고, 악을 미워하기 때문에 악을 행하지 않게 되었다. 율법은 더 이상 내게 무거운 짐이 되지 않았으며, 다음과 같은 사도 요한의 말이 이해되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요일 5:3.

구세주의 사업은 크게 두가지로 나누어 진다. 첫째는 인류에게 완전한 생애를 가르치는 것이고, 둘째는 인류의 죄를 당신 자신이 직접 짊어지심으로써 제거하시는 일이다. 전자는 최종 목적이고, 후자는 전자로 인도하는 필요 수단이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죄인을 인도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의 죄를 속죄해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죄인이 하나님께로부터 진실로 용서받은 경험을 하지 못하면, 그 죄인은 결코 죄를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진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현대 기독교회는 속죄의 교리를 죄에 대한 값싼 용서에 국한시킴으로써, 신자들로 하여금 구세주의 모본을 쫓아서 따라가는 성화의 경험을 빼앗아 버렸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내 죄를 속하셨으니 이제 나는 애써 선행을 하지 않아도 되며, 죄를 범해도 구원에는 지장이 없다”고 믿는 사람은 아직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살리요” 롬 6:1. 내 경우에 있어서 처음에는 모세의 율법이 부각되었고, 그 후에는 그리스도의 은혜가 다가왔다. 어떤 의미에서 율법의 엄한 밧줄로 자신을 얽어 맨 적이 없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이해할 수 없다. 오늘날 교회에는 속죄의 교리를 가지고 자신의 죄와 부도덕함을 가리우려고 하는 자들이 많이 있다. 하나님의 아들의 피로 이루어진 은혜가 눈 먼 자들에 의해서 희롱당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깊은 염려와 슬픔에 잠기게 된다. 그리스도의 속죄는 의를 사모하는 자들의 휴식처이지, 악인의 은신처가 아니다. 구약의 엄격한 십계명을 가르치지 않고, 신약의 은혜만을 부드럽게 설교하는 목사야말로 하나님의 어린양들을 소리없이 죽이는 늑대이다.

나는 하나님을 향하여 언제나 이러한 불만을 토로했다. “아, 하나님이시여 내가 당신을 찾고 있었는데 당신은 어찌하여 문을 열어 주시지 않았습니까? 내가 길 가에서 방황하고 있는 모습이 당신께는 가련하게 보이지 않으셨습니까? 내가 진리를 보지 못함으로 고통에 고통을 더하고 있을 때, 당신은 팔짱을 끼고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계셨습니까?” 그러나 이제 은혜로운 한 음성이 내게 이렇게 대답해주셨다. “나의 은혜와 인내가 네게 족하단다. 네가 괴로워하는 것을 보면서 나도 함께 괴로워 했단다. 내가 너를 구하지 않았던 이유는 너를 구원하기 위함이었다. 너에게 반생 동안의 방황과 번민을 허락했던 이유는 너로 하여금 자신을 의존하는 정신에서 벗어나서 온전히 나를 의지하도록 하기 위해서 였다. 너를 괴롭힌 것은 네 자신이었다. 이제부터는 나만을 의지해라. 지혜는 네가 아니라 나에게 있다는 사실을 있지 말아라. 나는 네 죄를 속하여 선에서 선으로 이끌어 너로 하여금 나를 위하여 세상을 구원하는 힘이 되게 하고자 한단다.” 이제 나는 온 정성과 마음을 다하여 이렇게 응답할 수 있게 되었다. “아버지여 그러하옵나이다. 모든 것이 그렇게 된 것은 거룩한 뜻에 합당하옵니다.” 마11:26

이제 나는 자신의 부족과 연약함을 깊이 인식한 채 자선 사업에 종사할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용서가 당신의 완전하신 심판과 공의에 어긋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나는 모든 정성과 힘을 다하여 그분을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다. 나를 깊은 멸망의 수렁에서 건져주신 그분의 은혜를 어떻게 저버릴 수 있는가? 전에는 그분의 율법에 압도 되었지만, 이제는 그분의 엄청난 은혜에 압도되었다. 하늘은 내가 가지기 원하는 모든 것을 나에게 주었다. 임마누엘,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니 인생은 한번 살아볼 만하지 않은가!
나는 평안과 구원의 길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길을 안 것이 반드시 그 길을 걷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나는 단지 깨달았을 뿐이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평안과 행복한 마음을 가지고 그 길을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질문과 대답
          

문: 무엇이 유이며, 무엇이 무입니까?
답: 하나님이다. 세상이다.
문: 누가 사람이며, 누가 짐승보다 못한 존재입니까?
답: 신자이다. 거짓 신자이다.
문: 무엇이 가장 추하며, 무엇이 가장 아름답습니까?
답: 신자의 뒷걸음질이다. 죄인의 회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