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바울을 알면 로마서가 보인다!

바울을 알면 로마서가 보인다!


바울을 모르면 로마서를 오해하게 된다

생애의 빛 선교기관에서 편집일을 하면서 가끔씩 받게 되는 질문 가운데는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율법의 행함이 아니라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말을 여러 번 강조하였는데, 왜 생애의 빛에서는 계명과 순종을 강조하는 구원론을 강조하는가”라는 항의였다.

그런 항의 어린 질문들을 받으면서 내 마음 속에는 한가지 의문점이 떠올랐는데, 그것은 “왜 바울은 로마서를 그렇게 기록함으로써, 믿음과 행함에 대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이상한 혼돈을 갖도록 했을까? 그가 좀 더 이 문제를 분명하게 설명하였다면 오늘날 기독교에 존재하는 구원에 대한 이상한 오해들은 없었을텐데…” 라는 의구심이었다. 사람들은 로마서에 기록되어 있는 다음과 같은 성경절들을 읽으면서 믿음과 행함에 대한 이상한 견해를 갖게 된다.

로마서 3:28,30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이시니라”

로마서 4:2,5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서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느니라 … 일을 하지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로마서를 읽다 보면 사람들에게 혼돈을 주기 쉬운 이와 비슷한 말씀들이 나온다. 뿐만 아니라 인간은 본성적으로 죄를 승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말씀들도 여러 군데서 강조되고 있다. 그 중 대표적인 말씀은 로마서 7장의 말씀이다.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롬 7:14,15.

얼핏 이런 성경 절들만을 뽑아서 읽으면 믿음과 행함에 대한 오해를 갖기 쉽다. 그런데 바울은 왜 이런 말씀들을 로마서에 기록하였을까? 우리가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은,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의 율법의 종으로 살아가던 경험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에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는 영적 경험을 모두 기록했다는 사실이다. 로마서는 율법에 매여 살던 참혹한 상태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영혼의 평안과 자유를 찾게 된 과정과 환희를 기록한 체험의 글이다. 로마서는 죄의 종으로서, 율법에 매인 종으로서 하루하루를 힘겹고 참담하게 살면서 양심의 고통을 누구보다도 깊이 느끼며 살던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깨달은 후에 얻게 된 환희와 기쁨을 체험적으로 설명한 편지서이다. 그래서 로마서에는 율법으로부터의 해방과 정죄로부터의 자유가 그토록 강조되어 있는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실패와 성공을 직접 체험한 그리스도인이었다. 행함을 통해서 구원에 도달하려다가 철저하게 실패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한 믿음을 통하여 드디어 거룩한 순종의 삶을 살게 되었다는 간증이 로마서의 배경에 흐르고 있는 주제이다. 그러므로 그는 행함을 통한 구원을 철저하게 부정하는 말씀을 로마서에 기록하였고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의 승리를 강조하였던 것이다.

율법을 지키기 위하여 그것에 매달렸을 때에는 오히려 실패와 좌절만이 있었는데, 그가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분 안에서 발견한 복음을 통해서 드디어 율법이 요구하는 의를 이루는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바울의 삶을 이해하고 나면, 바울이 기록한 로마서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로마서를 통하여 바울은 율법을 무용지물로 만들거나 폐지시키려고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는 유일한 방법을 찾아낸 그의 체험을 설명하려고 애썼다. 거듭남의 경험 없이 인간의 힘으로 율법을 지키려고 애쓰는 행위로서는 결코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지만,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만나고 그분 안에서 거듭난 경험을 한 그리스도인은 그 마음의 중심이 변화되었기 때문에 힘들게 애쓰거나 인위적인 노력 없이도, 자연스럽게 자신의 생애와 품성 가운데 열매가 맺히게 된다는 것이 로마서가 말하는 핵심 내용이다.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롬 6:14, 22.

로마서를 읽기 전에 우리는 먼저 바울이 짊어졌던 영혼의 고통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로마서 7장에서 그는 거듭나지 못한 자신의 과거 모습 즉, 육체와 죗된 본성으로 인하여 죄의 종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처참한 모습을 묘사하였다. 그러나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의 경험인 로마서 8장을 기록하면서 “그러므로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고 극적인 선언을 하였다. 바울은 율법의 종으로 살아 온 영혼의 고통이 지긋지긋하였을 것이다. 그는 영혼 깊은 곳으로부터 양심의 자유와 평안을 갈구하였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맛보게 된 자유와 쉼이 너무나 소중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오랜 세월 동안 정죄를 받아 온 바울이 로마서 8장의 첫머리에서 밑바닥부터 끓어오르는 심정으로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고 외치는 간증을 이해하는 사람은 결코 바울의 글을 오해할 수 없다. 우리도 바울과 같은 그러한 간증을 할 수 있을까?

로마서 8장은 그가 만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생애에 가져다 준 복음의 능력에 대한 찬양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가짜 복음도 로마서 8장에 비추어 보면 그 허상이 분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계명과 행함에 대한 어떤 교리도 로마서 8장으로 검증해 보면 그 진위가 쉽게 드러난다. 왜냐하면 로마서 8장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좇아 행하는 자들은 율법의 요구를 이루며,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반드시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라고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기 때문이다(롬 8:12~14). 로마서 1장부터 7장은 8장을 말하기 위한 서곡이다. 로마서 8장에서 자유와 평안과 승리를 강조하기 위해서, 먼저 바울은 행함으로 구원을 얻고자 하는 허망함을 설명했고, 인간의 타락한 본성과 의지의 무력함을 묘사했던 것인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마치 바울이 율법을 폐하고 죄를 승리할 수 없다고 믿었던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

계명을 폐지시키기 원하는 이유

사실, 바울 당시에 유대 땅의 수많은 바리새인들 앞에 예수께서 나타나셨다. 그들 앞에서 설교를 하셨고, 기적을 행하셨다. 그러나 바리새인들 중에 바울만이 예수 안에서 진리를 발견하였다. 왜 다른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은 예수 안에서 아무것도 찾지 못했는데, 바울은 진리와 평안을 찾았을까?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양심과 영혼의 고통이 없었지만, 바울에게는 너무나 힘든 고뇌와 고민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이 오랜 세월 동안 겪어온 양심의 가책으로 인한 고통스런 생애가 바울로 하여금 진리와 평안에 대하여 간절한 목마름을 갖도록 하였다.

죄를 범했을 때에 우리의 양심은 마땅히 그에 상응하는 고통과 가책을 받아야만 한다. 그러나 꾀가 많은 우리 인간들은 죄를 짓지만 양심은 가책을 받지 않고 문제를 해결하는 평화스런(?) 삶을 원한다. 이러한 사람들의 요구 때문에 오늘날 온 기독교회는 신신학과 자유주의 복음으로 뒤덮이게 되었다. 양심의 소리와 가책을 잠재우기 원하는 목사들과 신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교리를 세워 놓았다. 이 두 가지 교리 중 어느 하나를 받아들이면, 알고 있는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게 되고, 또한 알고 있는 죄에 대하여 양심의 가책을 갖지 않게 되는 두려운 일이 생긴다.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교리를 믿고 따라가는 사람들의 양심은 서서히 마비되어 가고, 죄책감은 점점 사라지게 된다.

1. 십자가에서 십계명이 폐지되었다

십자가에서 율법이 폐하여졌다는 가르침을 받아들인 사람은 더 이상 계명을 지킬 필요가 없게 된다. 빨간 불이 켜졌을 때 지나가는 차는 불법이다 라는 교통법규가 폐지되면, 빨간 불이 켜졌을 때에도 운전자들은 아무런 양심의 가책이나 조심 없이 주행을 계속하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계명이 폐지되면 사람들은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하나님의 법을 폐하는 부도덕한 삶을 살게 되며, 그러한 삶 속에서도 여전히 구원은 보장되는 것으로 착각하게 된다. 이러한 교리를 받아들인 사람에게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는 삶을 살도록 호소하는 음성을 들려주시기 어렵게 된다. 양심은 죄에 대하여 점점 더 무감각하게 된다.

2. 비록 십계명은 폐지되지 않았을지라도, 타락한 본성을 지닌 인간은 십계명을 온전하게 지킬 수 없다

사도 요한은 죄의 정의를 계명을 범하는 것이라고 규정하였다.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요일 3:4. 그런데, 인간은 타락한 본성을 타고 태어났기 때문에 도무지 죄를 이길 수 없다고 주장하는 교리를 믿는 사람들은 비록 계명을 폐하지는 않을지라도, 계명의 존재를 유명무실하게 만들고 만다. 이런 교리는 죄를 도무지 승리할 수 없는 골리앗과 같은 것으로 설명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계명을 범하는 죄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인간은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각종 교통법규들을 준수할 수 없다고 믿는 운전자는 교통법규들을 범하는 운전을 하면서도 자신이 저지르는 불법에 대하여 언제나 타당한 이유를 갖게 된다. 원하는 마음은 있지만 육신이 약해서 하나님의 법을 지킬 수 없다는 핑계가 항상 준비되어 있기 때문에 심각한 양심의 가책 없이 불법한 삶을 살게 된다. 자유주의적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계명을 범하는 죗된 삶을 살면서도 자신의 죄에 대한 신학적 핑계를 갖게 되기 때문에 양심의 가책이나 성령의 세미한 음성을 듣지 못하게 되며, 또한 죄를 범하면서도 여전히 구원에 대한 헛된 안전감을 가지고 살아가게 된다.

물론 타락한 인간의 본성으로는 계명을 지킬 수 없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오직 거듭난 그리스도인만이 계명을 지키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바울 역시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는 계명을 지키는 거룩한 삶을 살지 못했다. 거듭나지 않은 그리스도인은 계명을 매우 지키기 어렵고 무거운 것으로 생각하게 되는데, 왜냐하면 그의 육이 항상 영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의 사도 요한은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우리 모두에게 이 문제를 분명하게 조명해 준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요일 5:3,4.

죄를 회개하고 버리는 대신에 양심의 가책과 성령의 음성을 잠재우려고 할 때, 그리스도인은 위에 언급한 두 가지 교리 중 어느 하나를 받아들이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바울의 경험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바울이 율법을 지키기 위하여 처절하게 싸워보지 않았다면, 과연 그가 인간의 행함과 노력으로 의를 이룰 수 없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얼마나 깊게 이해할 수 있었을까? 그가 율법의 정죄를 받고 깊은 고통과 고뇌 속에서 진지하게 살아보지 않았다면, 과연 십자가의 복음을 통해서 율법의 정죄로부터의 해방과 자유를 얼마나 깊이 이해할 수 있었을까? 그가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라는 자유주의적 복음을 믿고 살았다면, 과연 그가 로마서에 기록된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실패와 승리의 경험을 그토록 완전하게 묘사할 수 있었을까? 바울처럼 고뇌하지 않았던 사람은 바울의 글을 오해하게 된다. 신신학과 자유주의 신학에 빠져 있는 사람은 결코 죄의 깊이와 사람을 변화시키는 복음의 능력을 바울이 말하는 깊이대로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은 오히려 바울의 글을 핑계삼아 죄를 더욱 더 담대하게 범하도록 유도하는 교리를 받아들이게 된다.

호소

진실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작게나 크게 바울의 경험과 같은 경로를 거치게 된다. 행함을 통하여 율법의 의에 도전했다가 실패하고 좌절하는 패배감.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 원칙과 규칙을 지키려고 애쓰다가 얻게 되는 좌절감. 이런 실패 때문에 많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계명과 원칙을 포기하는 쪽으로 신앙의 방향을 바꾸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정죄를 피하는 길을 발견하지 못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타협과 포기의 길에 들어서고 있다. 진리 안에 존재하는 자유와 참된 평안과 행복의 길을 찾지 못한 사람들은 결국에는 다른 복음을 찾아 먼 길을 떠나게 되는데, 바로 이것이 우리가 복음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찾아야만 하는 이유이다.

나는 계명에 대한 순종을 강조하는 보수적인 복음을 받아들인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예수 그리스도 밖에서 찾는 모습을 보아 왔다. 또한 신신학과 자유주의 복음을 받아들인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와 사랑을 말하면서 불법과 부도덕 속에서 원칙과 양심을 타협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아 왔다. 이 두 부류의 사람들 모두에게 문제가 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 돌아와야 하고, 또한 계명을 지키는 삶으로 돌아와야 한다. 그래서 성경은 마지막 시대 성도들의 특징을 다음과 같은 말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계 12:14. 독자 여러분의 신앙에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이 하나로 묶여져 있는가?

성경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 구원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또한 너희가 믿는 대로 될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정말로 하나님을 알면 우리의 생애는 달라지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무섭고 엄격하며 냉정한 분으로 아는 사람은 그런 믿음을 갖게 될 것이고, 하나님을 값싼 사랑의 소유자로 믿는 사람들은 그런 믿음을 갖게 될 것이다. 우리는 어떤 하나님을 믿고 있으며,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분이신가? 우리가 믿는 대로 우리의 성품과 생애가 꼴 지워질 것이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알면, 죄를 범할 때마다 깊은 가책을 느끼게 될 것이다. 철이든 자식이 늙은 부모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가슴 아파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가족과 이웃과 교우에게 저지른 모든 악들을 기억할 때마다 마음에 깊은 고통을 느끼면서 그들에게 다가갈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모든 높아지고자 하는 정신과 교만을 버리게 될 것이다. 그는 돌아온 탕자처럼 감사와 찬송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우리의 육신적 성향이 하나님의 성령으로 교정되지 않으면 그 속에 도덕적 죽음의 씨앗을 간직하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과 생명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면 우리는 방종과 자아 본위의 마음과 죄의 유혹과 같은 세력들을 저항할 수 없다. 계명을 지키기 위한 최선의 노력을 하되, 하나님과의 생명적 관계 속에서 그것이 이루어져야만 열매가 맺히게 된다. 그렇다면, 생명적인 관계란 어떤 것인가?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했던 것이 바로 생명적인 관계였다. 바울은 이 생명적인 관계에 대하여 로마서 8장에 이렇게 기록하였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느니라” 롬 8:14,15. 그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이다. 아들이 아버지를 무서워하고, 불신하면 사랑이라는 생명적 관계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아버지에 대한 불신이나 의심이 있으면 아들은 아버지를 완전하게 신뢰할 수 없다. 이런 아들은 아버지를 가까이 하지 않은 채 아버지한테 혼나지 않기 위하여 아버지의 말을 듣는 척하며 살아가게 될 것인데 이런 관계는 생명적 관계가 아니다.

또 하나의 중요한 질문은 “어떻게 하면 생명적 관계를 가질 수 있는가?” 이다. 성경은 오직 한 길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그리스도를 바라 보”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분을 바라보면 생명적 관계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바울의 경우 이 경험은 그의 생애에 놀라운 부흥과 개혁을 가져다 주었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이 집 나간 탕자이고, 부모의 사랑을 저버린 불효 자식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거기서 아버지와 아들의 생명의 관계는 맺어질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모른 채 구원을 위하여 맹목적으로 하나님을 믿으려고 노력하면서 보다 많은 공로와 선을 쌓으려고 애쓰고 있다. 그러나 신앙의 성패는 하나님의 심정을 아는 데에 달려 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도 전도를 잘하고, 설교를 잘 할 수 있지만, 내 가족과 이웃과 교우들, 그리고 하나님의 심금을 울릴 수는 없다. 바울이 걸었던 길을 걸으면, 바울이 만났던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