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방법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방법


과학은 실험으로 증명할 수 없는 양심을 인정하지 않지만, 그리스도인은 양심의 소리에 의지하여 살아간다.
                         

어린아이가 들었던 큰 소리

개구장이 어린아이가 정원에서 놀고 있는데, 작은 거북이 한마리가 연못 밖에 나와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돌을 들어서 내리 치려고 할 때, 갑자기 그 아이의 마음 속에서 “그러면 안돼!”라고 말하는 분명한 음성을 듣게 되었다. 한번도 그런 음성을 들었던 적이 없는 그 아이는 깜짝 놀라서 엄마에게 달려가 “엄마, 내가 거북이를 돌로 치려고 하는데, 갑자기 내 마음 속에서 ‘그러면 안돼’라는 커다란 말소리가 들렸어요. 그것이 누구의 음성이죠?” 엄마는 눈물을 글썽이면서, “사람들은 그것을 양심이라고 부르지만, 엄마는 그것은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믿는단다. 네가 그 음성에 순종하면 그 음성은 점점 분명해지게 되고 너를 올바른 의의 길로 인도해 줄 것이란다. 그러나 네가 그 음성을 듣지 않고 불순종하면 점점 그 소리는 들리지 않게 될 것이고, 너는 어두움 속으로 빠지게 될 것이란다. 네 생애는 너의 마음 속에서 들리는 그 작은 소리를 듣는데 달려 있단다” 라고 대답해 주었다. 이것이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양심의 소리이다.

양심의 문제는 오늘날 기독교회에서 자주 다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다루기를 꺼려하는 문제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이 양심의 문제는 그리스도인의 신앙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21세기를 사는 현대인들은 양심의 소리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왜냐하면 양심의 소리는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 없는 것이며, 또한 그것은 많은 경우에 우리의 마음을 괴롭히거나 불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성경이 말하는 양심

성경은 양심을 나타내는 말로 가득차 있다. 물론, 구약 성경에는 직접적으로 양심이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지만, 양심을 의미하는 말씀은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잠시 그 실례를 살펴보도록 하자. 창세기 3장에는 범죄한 아담과 하와가 “두려워서 숨은” 이야기가 나온다. 그들은 왜 숨었는가? 왜냐하면 그들이 양심의 가책을 느꼈기 때문이다. 창세기 42장에는 요셉의 형들이 과거에 요셉에게 잘못한 사실을 기억하면서 “그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였도다”라고 말하는 가책의 장면이 나온다. 이와 같이 구약 성경에는 양심이라는 단어가 직접적으로 나오지는 않지만, 양심에 대한 은유적 표현은 많이 나온다. 잠언 28장 1절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교훈을 가르쳐 주고 있다.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니라” 주님 안에서 양심이 정결해진 자는 누가 무슨 말로 정죄한다고 할지라도 주안에서 담대함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불안해서 도망치게 된다. 왜 도망가는가? 바로 양심의 소리 때문에 그렇다.

신약성경에는 “양심”이라는 단어가 40번 이상이나 등장한다. “율법이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로마서 2:14,15.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롬 9:1.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요일 2:20. 이 말씀은 성령께서 온전하게 자신의 마음 속에 거하시는 사람들은 모든 것을 양심 속에서 속삭이시는 성령의 음성을 통하여 알 수 있게 된다는 의미이다. 진리와 오류, 참과 거짓,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게 된다.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요일 2:27.

그런데,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나 쉽게 오류를 받아들이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 그들이 성령의 음성을 제대로 분간하지 못하거나, 다른 영의 음성을 따라가기 때문이다. 마지막 시대에는 온갖 거짓 가르침이 섞인 바벨론의 포도주에 기독교회가 취하게 될 것이라고 요한계시록은 경고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성령 안에서 양심의 세미한 음성을 듣는 일에 익숙한 사람들은 비록 성경 지식이 부족하다고 할지라도, 오류와 진리를 구별할 수 있다. 왜냐하면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잘못된 교리를 접하게 될 때일지라도, 성령의 음성에 따라서 그 문제에 대하여 성경을 깊이 연구하게 되기 때문이다.
                    

양심에 문제가 생긴 현대 기독교회

오늘날 현대 기독교회가 갖고 있는 가장 치명적인 질병은,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공언하는 사람의 양심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죄를 범하고 있으면서 그것이 죄인지도 모른다. 너무나 양심이 무디어져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너무나 엉뚱하고 파렴치한 죄 가운데 있으면서도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의 숫자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죄에 대해서는 매우 민감하게 정죄하면서, 자신은 동일한 죄에 빠져 있으면서도 양심 속에서 죄에 대한 책망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 왜 양심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올바로 들을 수 없는가? 양심이 병에 걸렸기 때문이다. 성경은 질병에 걸린 양심을 “약한 양심”과 “더럽혀진 양심”과 “화인 맞은 양심”으로 나누어서 설명하고 있다.

1. 약한 양심 : “그러나 이 지식은 사람마다 가지지 못하여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고로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 고전 8:7. 그 당시, 시장에서 파는 고기들은 대부분 이방 신전에서 제사를 드렸던 제물들이었다. 사도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우상에게 바쳤던 고기는 먹지 말라고 권면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고기를 우상에게 바쳤다고 해서 변질되거나 부패되지는 않는다고 변명하면서 과거의 습관대로 우상에게 바쳤던 고기를 먹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사람들의 양심을 약한 것으로 표현하였다. 그러나 예민한 양심을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이 우상에게 바쳤던 고기를 어떻게 먹을 수 있냐고 말하면서 먹기를 거절했다. 물론, 고기를 먹는 것이 죄는 아니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상에게 바쳤던 고기를 먹음으로써 양심을 약하게 만들지 말라는 것이 사도 바울의 충고였다. 어떤 것이 직접적인 죄가 되지 않는다고 해서 성경의 교훈을 무시한 채 자신이 원하는대로 결정하고 즐기는 사람은 약한 양심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사람들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예민하게 다듬어 질 필요가 있다.

한번은 어머니가 시장에 가면서 아들에게 다음과 같은 주의를 주었다. “얘야, 엄마가 없는 동안에 부엌에 있는 과자를 먹으면 안된다!” 그러나 엄마가 나가자 아이는 과자를 하나씩 먹기 시작하다가 나중에는 하나도 남김없이 몽땅 먹어 버렸다. 엄마가 돌아와서 비어있는 과자 상자를 보고서 아이를 야단치자, 아이가 대답하기를 “엄마, 내가 먹지 말아야 할 것을 알았어요. 그러나 너무나 먹고 싶어서 울면서 먹었어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마치 이 어린아이처럼 죄를 지으면서 살아가고 있다. 양심 속에서 “그것은 죄다” 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죄를 범하고 있다. 그러한 사람들은 “주님, 제가 알지만 연약하오니 저를 불쌍히 여겨 주세요”라는 기도로서 양심의 소리를 잠재우고 평안을 찾으려고 애쓴다. 이러한 사람들은 영적 스태미너가 부족한 사람들이다. 영적 스태미너가 부족하다는 말은 양심의 소리를 들을 때에 그 음성의 요구에 순종하는 힘이 약하다는 의미이다. 바로 이것이 거듭나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나타나는 대표적인 증세이다.

2. 더러워진 양심 :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저희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 디도서 1:15. 똑같은 그림을 보고서, 어떤 사람은 “참 이 그림 정말 아름다운데!”라고 감탄하지만, 어떤 사람은 그 그림을 보면서 과거에 자신이 보았던 추한 장면을 연상한다. 죄의 습관들로 더럽혀진 마음을 지닌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피로 양심을 씻어내는 일이 필요하다. 더러워진 양심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양심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신뢰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 음성은 하나님의 음성이 아니라, 육체의 죗된 욕구일 수 있기 때문이다. 더러워진 양심을 가진 사람은 양심의 소리와 육체의 요구를 구별할 수 있는 영적 분별력이 부족하다. 이러한 사람들의 양심은 진리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정결하게 씻어질 필요가 있다.

3. 화인 맞은 양심 :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딤전4:2. 이 말씀은 양심에 화인을 맞아서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거짓을 말하는 모습을 말한다. 마지막 시대에 짐승의 표가 내릴 때에는 양심에 화인을 맞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대핍박의 사건이 생긴다. 예수께서도 이 문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경고를 그리스도인들에게 남겨 주셨다.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할 뿐만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 요 16:2. 마지막 시대의 대쟁투는 세상 사람과 그리스도인 사이의 전쟁이 아니다. 마지막 시대의 쟁투는 양쪽 다 양심의 소리를 듣는다고 공언하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쟁투이다. 한쪽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하나님의 진리로 씻겨진 양심을 가진 진짜 그리스도인들이고, 다른 한쪽은 더럽고 화인 맞은 양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내적 음성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검증해 보는 일 없이 죗된 육체의 음성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아들이는 거짓 그리스도인들이다.

마귀는 양심이 완전히 죽은 존재이다. 양심에 조용히 속삭이는 음성을 무시하거나 소홀히 여기면,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된다. 양심은 참 이상한 것이어서, 그 소리는 자신만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조용히 들려오는데, 그것을 오래 동안 듣지 않거나 거절하면 더 이상 들리지 않는 것이 내적 음성의 법칙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양심이 아직도 살아서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감사히 여겨야 한다.
                         

거듭나야만 하는 양심

아무리 선하고 윤리적인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진리 안에서 회개하고 거듭난 참 그리스도인이 아니면 그는 올바른 양심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착하거나 도덕적이라고 해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성령에 의해서 거룩하게 변화된 양심을 가진 자만 하늘에 들어갈 수 있다. 바로 이 사실을 오해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타락한 육체와 양심을 가지고 이 땅에 살게 된다. 정직한 양심은 본성적으로 이어받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양심은 그리스도의 은혜와 진리에 의해서 새롭게 태어나야만 신뢰할 수 있는 음성을 발할 수 있다.

양심은 심판관이고, 경찰관이며, 우리의 눈이고, 내 속의 음성이다. 올바른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는 것이 양심이 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양심에 병이 생기면 그리스도인 신앙과 삶에 심각한 문제가 초래된다. 우리가 양심 문제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면을 주의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1.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 2. 양심 자체는 법이 아니며, 하나님의 말씀이 법이고 판단의 기준이다. 3. 평화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지, 양심이 주는 것이 아니다.
                                           

1.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

“너희가 우편으로 치우치든지 좌편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말 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정로니 너희는 이리로 행하라” 이사야 30:21. 바로 이것이 양심의 음성이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역사하실 때, 어디에 역사하시는가? 성령은 우리의 마음에 역사하여 양심 속에서 말씀하신다. 양심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기관이다. 이 양심의 소리 때문에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책망을 듣지 않아도, 우리를 괴롭히는 죄책감이 생기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앙갚음을 하고 싶은 마음이 솟구칠 때, 감정과 정욕의 소리를 듣는 대신에 양심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거짓과 부정직으로 사업을 하고 장사하고 싶은 육체의 욕구가 치밀어 올라올 때, 마음 속에서 조용히 속삭이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바로 이것이 의인이 걷는 길이다.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진리에 대한 이해와 올바른 교리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사람들이 죄를 범하는 경우, 그들이 진리나 교리를 모르기 때문에 죄를 범하는 것이 아니다. 비록 그들이 진리를 알고 교리적으로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양심 속에서 속삭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무시하기 때문에 죄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가끔 조용히 방에 혼자 있을 때가 있지만, 실제로는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이다. 하루의 일을 끝마치고 조용히 혼자 있을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오늘 낮에 했던 그러한 말과 행동은 “참 잘못된 것이다”라는 양심의 음성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오늘 네가 이런 계획을 세웠는데, 그것은 너의 지나친 욕심이란다”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한 쪽에서는 조용히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오는데, 다른 한 쪽에서 자신의 체면과 욕심이 올라와서 하나님의 음성과 치열하게 다투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가? 바로 그 장면에서 진실한 그리스도인은 양심의 소리를 선택한다. 만일 우리의 내면으로부터 양심의 소리가 들려오지 않는다면, 그대는 죄에 의해서 완전히 장악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성령의 역사는 이 양심의 소리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최근에 꽤 흥미있는 통계가 발표되었다. 어떤 정신분석 학자들이 귀신들렸다가 풀려난 사람들과 일련의 상담을 한 후, 그들은 대부분의 귀신들린 사람들이 양심의 소리를 무시하는 삶을 살기 시작한 이후부터 악령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고 발표하였다. 양심을 통하여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계속해서 거절하는 삶을 살면, 결국에는 마귀의 영에 의해서 지배받게 된다는 것이 그 연구 보고서의 결론이다. 그러나 거품을 입에서 흘리면서 괴성을 지르는 사람만이 귀신들렸다고 판정해서는 안된다. 악한 습관으로 인하여 죄의 노예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어떤 의미에 있어서는 귀신들린 사람들이다.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하여 분명한 가르침을 우리에게 주고 있다. 부절제에 빠져 있는 사람들, 마약에 빠져 있는 사람들, 도박에 빠져 있는 사람들, 알콜중독에 빠져 있는 사람들, 거짓과 위선에 빠져 있는 사람들, 돈과 명예의 탐욕에 빠져 있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마귀의 영에 붙잡혀 있는 것이다. 왜 그런가? 이런 사람들은 양심의 소리를 오랜 기간 동안 무시하는 삶을 산 결과로 인해서 그러한 죄의 노예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의지력은 마귀의 요구에 도무지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었다. 귀신들린 것을 입에서 거품을 흘리고, 괴성을 지르는 것과 같은 겉모습으로만 판단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귀신들렸다는 말은 마음과 양심이 마귀에게 점령당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2. 양심 자체는 율법이 아니다!

양심은 마치 판사나 경찰관 같은 역할을 하는 내적 음성이다. 그러나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양심 자체가 법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양심은 다만 법을 상기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양심은 올바르게 판단할 수 있는 훈련을 받아야 한다. 정확한 시간을 알기 위해서는 시계를 종종 표준 시간에 맞추어야만 하듯이, 우리의 양심도 하나님의 율법과 진리에 의해서 교정되어야만 한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과 조화되지 않는 어떤 일을 하면서도 “나는 양심에 꺼리낄 것이 전혀 없습니다” 라고 말한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신의 양심이 모든 일을 판단하는데 있어서 법이 된다고 착각한다. 자신이 어떤 것을 옳다고 느낀다고 해서 그것이 항상 진리이고 선이 되는 것은 아니다. 진리와 선은 하나님의 율법과 말씀에 의해서만 판단될 수 있다는 사실을 오해하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있다. 양심의 나침판이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를 향하여 똑바로 고정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성서적 진리로 입증된 것이라고 할지라도 자신이 양심적으로 가책을 느끼지 못할 경우에는 그것을 거절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신의 양심이 성경 진리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의 양심은 반드시 진리에 의해서 훈련받아야 한다. 어떤 사람은 잘못된 가르침을 가지고 너무나 오랫동안 살아왔기 때문에, 자신이 믿는 오류와 거짓 가르침에 대해서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못한다. 그러한 사람들은 성서적 진리에 맞추어서 자신의 양심을 재교육, 재훈련시켜야만 한다. 한번은 어떤 그리스도인에게 성경에 나오는 중요한 진리를 소개한 후, “자, 이제는 지금까지 공부한 진리를 받아들이고 진리가 요구하는 바에 따라서 생애의 방향을 바꾸시겠습니까?” 라고 물었더니, 그 사람은 “목사님, 저는 지금까지 공부한 그것이 성서적 진리라는 사실을 믿습니다. 그러나 나는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그대로 살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내 삶의 방향을 바꾸지 않더라도 저는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기 때문이죠.” 어떤 면에 있어서, 이것이야말로 오늘날, 하나님의 진리를 거절하는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즐겨 사용하는 대답이다.
양심은 그것이 훈련받는데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양심을 절대적인 판단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된다. 절대적인 판단 기준은 하나님의 율법과 진리 뿐이다. 그래서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는 독일 의회 앞에서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했던 것이다. “나는 나의 양심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확신을 얻을 때까지는 내가 한 개혁에 대해서 참회하지 못한다. 나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묶여져 있다 ... 성경, 오직 성경만으로 나를 설득해 주기를 바란다.”

우리들의 모든 생활과 태도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이 아무리 양심의 가책이 없다고 할지라도, 나의 스타일과 개성 때문에 다른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주면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의 양심을 비추어봐서 무디어졌거나 둔해진 양심을 다시 소생시켜야만 한다. 사도 바울은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한다고 해서 자신에게 아무런 잘못과 죄가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경고하였다.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 고전 4:4. 우리는 우리의 양심을 스스로 판단할 수 없다. 우리의 양심을 판단하실 분은 오직 주님 뿐이시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고후 5:10. “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약 2:12. 여기서 말하는 “자유의 율법”은 바로 앞 성경절인 야고보 2:10,11절에 나온 것처럼 “십계명”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십계명의 요구가 나의 양심보다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3. 평화는 양심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마음 가운데 죄책감(양심의 가책)이 생기면, 그것이 생기는 원인을 없애려고 하기 보다는, 죄책감을 잠재우려고 애쓰는데, 이것은 매우 위험천만한 일이다. 오직 진정한 회개만이 우리의 영혼에 평안을 가져다 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마음에 죄책감을 일으키지 않는 교리나 거짓 평안을 주는 교회나 목사를 찾아간다.

회개와 용서 그리고 하나님의 자비 때문에 생기는 평안만이 하늘이 인정하는 평화이다. 우리는 양심의 소리를 잠재움으로 스스로를 기만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누리고 있는 평안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평안인지, 아니면 우리의 양심을 죽임으로써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평안인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진짜 평안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같지 아니하니라” 요 14:27. 그리스도인들 중 많은 사람들이 마귀(세상)가 주는 평안과 하나님께서 주는 평안을 혼돈하고 있다.

“이것이 정로니 이리로 가라’는 조용한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게을리 했거나 소홀히 여기는 사람들은 양심을 통하여 역사하는 하나님의 음성과 마귀의 음성을 분별하지 못하는 혼돈에 빠지게 된다. 그리스도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기도와 명상을 할 때에 들었던 음성, 자신이 꿈을 꾸었을 때 보고 느꼈던 감정, 그리고 자신의 눈으로 본 어떤 영들의 말을 무조건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무엇을 들었는가? 그대가 들은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하는가를 확인해 보라. 무엇을 보았는가? 기도하는 마음과 성경으로 그대의 경험을 살펴보라. 그리고 그대의 양심이 그리스도의 보혈과 진리로 치료받을 필요가 있는지를 살펴 보라.
                    

이런 사람은 위험한 사람

자기 생각이나 판단을 성경의 가르침보다 위에 놓는 사람
자기 느낌이나 감정을 성경의 가르침보다 위에 놓는 사람
자기 이론이나 사상을 성경의 가르침보다 위에 놓는 사람
기도 중에 떠오른 생각을 성경의 가르침보다 위에 놓는 사람
명상 중에 들었던 음성을 성경의 가르침보다 위에 놓는 사람
꿈에서 보았던 장면을 성경의 가르침보다 위에 놓는 사람
자신이 경험한 기적을 성경의 가르침보다 위에 놓는 사람
육체의 죗된 요구를 성경의 가르침보다 위에 놓는 사람
타락한 양심의 음성을 성경의 가르침보다 위에 놓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