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진리를 찾아가는 경로

진리를 찾아가는 경로


바울의 생애를 들여다 보면 그가 진리를 발견하기까지의 경로가 보인다. 바울의 생애를 들여다 보면 한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까지의 영혼의 고통이 보인다. 바울의 생애를 들여다 보면 어렵게 느껴지던 바울의 글이 쉽게 풀린다. 바울의 생애를 들여다 보면 내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까지의 신앙 여정을 미리 볼 수 있게 된다.

바울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우리는 빌립보서 3장 4~6절에서 그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만하니 만일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내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다” 그렇다. 바울은 율법으로는 흠이 없던 자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불행하였으며 그의 영혼에 평안이 없었다. 그가 율법에 순종하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죄 아래 팔려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할 뿐이었다. 그는 유대 교회 안에서 자부심을 갖고 살 수 있을 정도의 교인이었지만, 그의 마음 속 깊은 곳에는 처절한 절망감과 패배감이 가득 차 있었다. 겉보기에는 신실한 유대교인이었고, 성공적인 사회인이었지만, 그러나 동시에 철저하게 불행한 사람이었다.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까지 그의 영혼의 고통은 그칠 날이 없었다. 바울은 왜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까지 고통과 고뇌의 삶을 살아야만 했을까? 바울의 생애를 들여다 보면 그 이유를 알게 된다. 성경의 이곳 저곳에 기록된 바울의 생애에 관한 기록들을 통해서 그의 생애와 신앙경험을 추적해 보면 다음과 같은 모습들을 그려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까지의 바울

“내가 팔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다” 빌 3:4. 바울은 대부분의 유대인들처럼 어렸을 때부터 엄격하고 경건한 부모 밑에서 구약 성경의 율법을 외우며 자랐을 것이다. 나이가 들어 철이 들면서 바울은 자신의 생애가 율법에 비추어 볼 때 너무나 더럽고 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그의 말과 행동 그리고 동기와 목적들을 거룩한 성경에 비추어 볼 때마다 그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은근한 교만과 거짓과 위선으로 얼룩져 있다는 사실을 보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그런 것들을 개혁하고 고쳐서 율법의 의를 이루기 위하여 굉장한 노력을 하였을 것이다. 아마도 청년기에 그는 이런 결심을 했을지 모른다. “나는 이제부터 내 말과 행실을 완전히 뜯어 고치겠다. 다시는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 남을 비평하거나 중상하지 않겠다. 정욕을 억제하겠다. 게으름을 피우지 않겠다. 곡마단의 서커스 같은 것은 쳐다보지도 않을 것이며, 어떤 종류의 유희도 즐기지 않겠다. 원수를 사랑하겠다. 스스로 높아지고자 하는 정신을 버리고 겸손하겠다.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겠다. 나는 친구들과 주변 사람들에게 나의 전격적인 개혁을 선언함으로써 굳게 결심한 이 마음을 바꾸지 않겠다”

한 동안 그의 결심과 개혁은 잘 진행되었을 것이다. 그의 헌신은 정말 대단한 것이었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로부터의 칭송이 한동안 그치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개혁이 너무나 전격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그의 그러한 변화를 싫어하는 어떤 친구들은 바울 곁을 떠났을 것이다. 그의 새벽 기도는 정말로 뜨거웠고, 길었을 것이다. 그는 말의 실수를 줄이기 위하여 하루의 대부분을 침묵으로 지내는 때도 여러 날이었을 것이며, 그와의 대화 속에는 항상 성경절들이 인용되었을 것이다. 가끔씩 자신이 마치 에녹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는 듯한 느낌을 느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개혁이 유익한 것이긴 했지만, 인위적으로 조작된 성결은 오래가지 못했을 것이다. 바울은 율법의 의를 이루는 성화된 삶을 진정으로 사모하고 추구했지만, 그의 마음은 거듭나지 못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경험을 이해하지 못한 채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겉모습만을 흉내 내는 생활은 오래 지속될 수 없었다. 그의 언행과 생각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옛 상태로 돌아가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의 부자연스러운 개혁은 주변의 가족들과 친지들을 매우 불편하고 어색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바울의 개혁은 주변 사람들뿐 아니라 자신까지도 부자유스럽고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그의 굳은 결심은 이런 생각으로 흔들리기 시작했을지 모른다. “왜 내 신앙은 다른 사람들에게 불편을 줄까? 나만 올바르고 다른 사람들은 다 틀렸다는 말인가? 조금씩 적당하게 타협하면서 살면 안될까? 원칙에 대한 약간의 타협이 내 구원에 무슨 지장을 가져올까? 나의 지나친 침묵과 죄를 범하지 않으려는 노력은 오히려 내게 우울증을 가져올지도 몰라” 라는 생각들이 머리를 들기 시작했을 것이다.

얼마 후, 바울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서서히 개혁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고 있었을 것이다. 그가 유대 교회의 교인이라는 표시는 매 안식일 마다 냉랭한 마음으로 회당에 가는 것과, 아침 저녁으로 머리를 숙여서 드리는 무의미한 기도와, 율법을 생명력 없는 음성으로 읽는 낭독으로 명맥을 유지하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율법과 원칙을 타협하지 않기 위하여 피나는 노력을 기울였을 것이다. 그가 과거에 가지고 있던 죗된 습관이 살아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날마다 조심스럽고 긴장된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유대 교회의 지도자들과 제사장들의 신임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하여 겉으로 드러나는 모든 것을 잘 관리하려고 노력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영혼 깊숙한 곳에서는 “도대체 나의 신앙은 왜 나의 옛 습관 하나를 확실하게 끊어내지 못한단 말인가? 왜 내 마음에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모세와 다윗에게 주셨던 평화와 위로가 없을까? 도대체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내 자신도 율법을 준행하지 못하는 위선자인데, 어떻게 내가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강론할 수 있는가?”라는 울부짖음이 있었을 것이다. 이런 좌절감이 청년 바울의 온 생애를 뒤엎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이 붙잡고 있던 율법의 원칙들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무척이나 애를 썼을 것이다.

바울의 그러한 노력과 투쟁의 모습을 보는 주변 사람들은 바울의 그러한 내적 고통을 알 수 없었기에 그를 가리켜 율법에 있어서는 흠이 없는 자라고 평가했다. 사람의 눈으로 볼 때, 그는 흠이 없는 자였지만, 하나님의 법 앞에서는 여전히 위선자고, 살인자며, 도둑질 한 자였다. 바울은 그러한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죄를 범할 때마다 말할 수 없는 고통과 고뇌가 그를 압도하였다. 자신의 영혼을 짓누르는 율법의 정죄를 잊어버리고, 유대 교회와 하나님 앞에 공로를 세우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단자들을 잡는 일에 몰두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기독교회 첫 번째 순교자가 되는 스데반 집사의 순교 현장을 목도하게 되었다.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스데반)에게 달려들어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의 바울의 이름)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행 7:57~60. 무리들이 던진 돌에 맞아 무참하게 죽어가는 스데반의 얼굴에 나타난 거룩한 영혼의 평안을 보면서 바울은 깊은 혼란 가운데 빠졌을 것이다. “나는 유대 교회의 정통이고 스데반은 이단 예수 당원인데, 어찌 죽어가는 그의 얼굴에 나에게는 없는 하늘의 평화가 나타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그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까지 그의 생애는 선을 행하기 원하지만 결국에는 악을 행하게 되는 괴로움과 고통의 연속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울을 택하신 이유

얼마 후, 그 날도 그는 예수 당원을 잡기 위하여 다메섹으로 가고 있었다. 바울은 그 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써, 그의 생애에 있어서 놀라운 전환점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갖게 된다. “왜 예수께서는 하필이면 바울에게 나타나셨을까? 유대 땅에 수만명의 제사장과 바리새인들 그리고 율법사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 왜 바울에게만 예수께서 나타나셔서 진리를 보여주셨을까?” 예수께서는 오랫동안 바울의 정직한 고통을 눈여겨 보셨을 것이다. 다른 바리새인과 율법사들 역시 죄 중에 살았지만, 아니 바울보다도 훨씬 악하고 대담하게 율법을 범하는 삶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영혼 속에는 죄로 인한 고통과 고뇌가 없었다. 그들은 양심 속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과 죄책감을 무시한 채 살았다. 그러나 바울은 비록 그것이 너무나 힘들었지만 늘 율법의 정죄를 정직한 마음으로 인정하며 살았다.

우리는 그런 바울의 모습을 보면서 깊은 연민의 정을 느끼게 된다. 어렸을때 부터 율법에 둘러싸여 자란 바울. 부모와 선생과 제사장들로부터 늘 성경 말씀에 순종하라는 엄격한 지침을 받았던 바울. 최선을 다하였지만, 언제나 모자람을 느껴야만 했던 바울. 정죄 받는 느낌과 양심의 가책을 무시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던 바울. 우리는 이런 바울을 보면서 정직한 그리스도인의 고뇌를 엿보게 된다. 그의 양심은 항상 심한 자책으로 고통 받았지만, 그의 양심을 위로해줄 위로자를 만나지 못했다. 죄를 범할 때마다 양을 잡아 성소에 갔지만, 그곳에서도 바울의 영혼에 평안을 줄 수 있는 분을 만날 수 없었다. 바울은 죄책감을 해결하지 못한 채 고통 속에서 긴 세월을 보내야만 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런 바울의 모습을 놓치지 않으셨고 그를 불쌍히 여기셨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다메섹으로 가는 바울을 찾아가셨고, 그를 당신의 사도로 택하기로 결정하셨다.

오늘날에도 이런 상황은 정확하게 반복되고 있다. 죄로 인한 영혼의 고통을 어찌할 줄 몰라서 괴로워하는 정직한 그리스도인이 있는가 하면,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죄에 대한 고민과 고뇌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살아가고 있다. 죄 가운데 살고 있지만, 양심의 가책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있다. 이런 사람들이 과연 복음을 이해할 수 있을까? 자신의 죄에 대하여 깊은 절망을 느껴보지 못한 사람들이 어떻게 복음이 주는 평안을 맛볼 수 있을까? 어떻게 그런 사람들이 십자가의 희생이 주는 구원의 기쁨을 충분히 느낄 수 있을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의 바울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바울은 드디어 그의 죄 짐을 받아 주실 수 있는 분을 만나게 되었다. 바울은 드디어 정죄로부터 벗어나는 자유를 얻었다. 그의 영혼을 수십년 동안 붙잡고 있던 죄책감으로부터 해방되었다. 바울은 십자가의 용서와 은혜를 뼈 속 깊이 체험할 수 있었다. 용서받은 감동이 그의 온 몸을 전율케 하였다. 그는 마침내 하나님과 개인적인 교제를 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러한 경험은 그의 생애에 놀라운 변화를 가져왔다. 인간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과 교제하고, 유한한 자가 무한하신 분과 교제할 때에 몸과 마음과 영혼에 임하는 결과는 측량할 수가 없다. 이와 같은 하나님과의 교제야말로 인간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교육이다. 이러한 산 교육을 통하여 그의 믿음과 신앙은 놀랍게 발전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와 만난 이후, 바울은 더 이상 율법의 한 조목 한 조목을 지키려고 애쓸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의 마음 전체가 율법과 완전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랑스런 말을 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의 마음에 있는 충만한 사랑과 은혜는 아름다운 언어가 되어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미워하지 않으려고 애쓸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의 마음 속에는 원수와 미움이 없었기 때문이다. 교만하지 않으려고 애쓸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의 마음 어디에도 교만이 없었기 때문이다. 거짓말하지 않으려고 조심할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의 순결한 영혼 어디에도 거짓이 발붙일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에는 그토록 노력해도 안되던 것들이 예수를 만남으로써 모든 것이 한꺼번에 가능하게 되었다. 날마다 그의 생애는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헌신과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동정으로 점철되었다. 더 이상 율법 아래서 고통 받을 필요가 없었다. 더 이상 정죄함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 더 이상 죄책감으로 인한 영혼의 고통도 없었다. 육이 아니라 영을 좇아 사는 바울의 생애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율법의 요구를 완전하게 만족시키는 것이 되었다. 그의 생애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 그가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은 율법을 무시하거나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을 더욱 더 굳게 세우는 강력한 원동력이 되었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롬 3: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