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복을 비는 신앙

복을 비는 신앙


    기독교회의 성서적 신앙을 제외한 이 세상의 모든 종교들은 믿음의 댓가로 복을 약속한다. 하나님을 제외한 모든 가짜 신들은 자신을 믿는 믿음의 댓가로 복을 약속한다. 바로 이것이 기독교와 다른 종교를 구별하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차이점이다.

    오래 전부터, 사단은 사람들은 복을 받기 위하여 하나님을 섬긴다고 주장하였다. 그러한 사단의 주장이 욥기에 기록되어 있다. "주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라." 욥 1:10.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경배를 받기 위한 수단으로서 축복을 뇌물로 사용한다는 것이 사단의 주장이다. 만일 사단이 욥에게 승리하였다면, 사람들을 기복 신앙으로 유도하려는 사단의 논리는 설득력이 있었을 것이고,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순결하고 비이기적인 신앙이란 무가치하고 의미없는 것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욥은 고난과 재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였고, 불평을 토해내지 않았다. 그의 순결한 신앙은 위기 속에서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고 그분께로부터 무엇을 얻어 내야 하기 때문에 잘 믿으려고 노력하며 의롭게 살려고 애쓰고 있는가? 아니면, 그대를 위하여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이 너무나 크고 감사하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거룩한 생애를 살고자 하는가? 고통과 재난 속에서도 순결한 믿음을 지킨 욥의 경험은 우리 모두에게 이 질문에 대한 분명한 답을 제시해 준다.

    오늘날에도 욥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무엇을 얻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그분을 사랑하기 때문에 섬기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오늘날에도 자신이 처한 상황이 어떠하든지 간에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순종하는 소수의 충성스런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의 경배를 유도하기 위하여 복을 미끼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단의 궤변을 지지하고 있다. "교회에 열심히 나오고 잘 믿으면, 당신의 사업체와 가정을 하나님께서 축복하실 것입니다"라는 설교들이 점점 더 빈번하고 대담하게 하나님의 교회에서 울려 퍼지고 있다. 이러한 설교에 귀가 솔깃해진 세속적이고 어리석은 양들은 보다 많은 헌금과 열성적인 교회 활동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얻어내려고 애쓰고 있다. 그러한 사람들은 자신의 믿음과 하나님의 복을 거래할 수 있다고 믿는 자들이다.

    비록 매 주말마다 교회에 다니고 있지만, 한번도 하나님께 온 마음을 바쳐본 경험이 없는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나 많이 있다. 그들은 돈과 명예와 자랑에 관심이 많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도 자신들처럼 그러한 것들을 중요하게 생각하실 것이라고 착각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제공하는 것이 하나님의 관심거리가 아니다. 하나님의 유일한 관심사는 그리스도인들을 좁은 길로 인도하여 그들의 성품과 생애가 결정적으로 변화되어 영생에 이르도록 인도하는 것이다. 만일 세속적 물질이 하나님의 관심사라면,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갈망하는대로, 거대한 교회를 짓는 일을 도와 주셔야 하며, 그 건물을 채울 수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인도해 들이셔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식으로 그리스도인들의 간구를 들어주시지 않으신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러한 사람들의 간청과 기도를 응답해 주신다면, 하나님께서는 빵과 생선으로 사람들을 유혹하여 끌여 들여서 자신을 경배하도록 이끌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단의 고소가 옳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가난한 나라에 파송된 선교사들이 빵과 밀가루를 나누어 줌으로써 사람들을 교회 안으로 끌어 들이듯이, 하나님께서도 사람들에게 먹을 것과 건강과 물질적 축복을 나누어 주심으로써 사람들의 경배를 유도하고 계신 것일까?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러한 방법으로 일하지 않으신다. 의인들과 악인들에게 모두 비를 주시며, 햇빛을 주신다. 그분께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고 정당하게 역사하신다. 잘 믿는 자는 복을 많이 받고, 믿지 않는 불신자들은 복을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현실은 이와 정반대이다. 오히려 하나님을 잘 믿는 자들에게 어려운 일들이 더 많이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방법으로 그리스도인들을 인도해야만, 순결하지 않은 동기를 가진 사람들이 하나님을 따르지 않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댓가를 바라보고 당신을 따라오는 자들에게 결코 당신의 제자 직분을 맡기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한 사람들은 오히려 당신의 구속 사업에 커다란 방해가 될 뿐인데, 왜냐하면 마귀와 세상이 그러한 사람들을 가리키면서 하나님의 교회를 조롱할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대가 기복 신앙을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의 맹목적인 보호가 어떤 결과와 영향을 가지고 올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만일 믿음이 좋은 그리스도인들에게만 하나님의 보호와 축복이 약속된다면, 사람들은 고통과 고난을 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교회에 몰려들 것이다. 그러나 결코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이기적 동기와 목적을 가지고 교회에 찾아오는 사람들로 당신의 왕국을 채우지 않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잘 믿는 사람들에게만 축복을 주신다는 것은 사단의 거짓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단의 이러한 거짓말은 교회를 파고 드는데 성공하였다. 그래서 믿음이 좋은 사람은 하나님께 복을 받아서 부유하게 되고, 믿음이 적은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받지 못해서 어렵게 산다는 식의 논리가 현대 기독교회에 편만하게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세상을 보면, 오직 그리스도인만이 번영한다는 증거를 거의 찾을 수 없다. 오직 적은 숫자의 그리스도인만이 부자이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부와 재물을 획득하는데 있어서 공평한 기회를 부여받고 있다. 사실, 엄격한 정직과 순결함을 유지하는 사람들은 부자가 되기 매우 어려운 세상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부자가 되기를 진정으로 원한다면, 그는 자신의 신앙과 양심을 어느 정도 타협해야만 자신의 목적을 성취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교회들에서, 하나님을 잘 믿어야만 그 분의 인정하심을 받아서 물질과 건강의 축복을 얻을 수 있다는 식의 설교가 인기를 끌고 있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호의를 얻어 내기 위해서 열심히 믿고 많은 헌금을 드리는 이상한 모습이 그리스도 교회 안에 생기게 되었다. 더우기 거듭나지 못한 성직자들이 이러한 풍조를 이용하여 교회를 성장시키는데 이용하고 있는 모습은 정말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만든다. 복을 비는 기복 신앙과 각종 거짓 은사들을 사용하여 교회를 성장시키려고 애쓰는 성직자들의 숫자가 점점 증가하고 있다. 교회가 눈에 보이는 축복을 받는 장소로 여겨짐에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몰리게 되었고, 그러한 거짓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안에서 압도적인 수를 차지함에 따라서 세상은 교회를 거룩한 사람들의 모임으로 보기 보다는 이기적 위선자들의 집단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믿음의 댓가로 축복을 구하는 신앙은 잘못된 신앙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을 축복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진리와 고결함 속에서 굳건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 날마다 필요한 것들이 공급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성경에 나오는 모든 다른 약속처럼, 이 약속도 조건적인 약속이다. 일하지 않는 사람은 먹지도 못할 것이다. 이러한 원칙은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에게 공히 적용되는 원칙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돌보신다는 것은 진리이다. 그러나 그들 역시 하나님을 모르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인생의 일반적인 원칙들에 순종해야만 한다. 그들이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축복이 그들에게 흘러 들어가게 될 것이다. 씨를 뿌리는 자들만이 수확을 거둔다는 것은 믿는 자와 불신자들에게 모두 적용되는 원칙이다. 하나님의 기적과 축복은 우리의 노력과 의무를 대신하지 않는다.

    기복 신앙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벌주시는 수단으로 고통과 시련을 사용하신다고 믿는다. 그래서 건강한 사람들은 하나님께 복을 받아서 건강하고,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 대하여 공개적이거나 비밀스런 죄를 범했기 때문에 벌을 받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고통이나 시련이 항상 죄에 대한 처벌로 내려지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이 병에 걸리거나 시련 속에 처한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렸거나 인정하지 않으신다는 확실한 증거가 되지 못한다. 또한 어떤 사람의 건강이나 사업이 매우 잘 되어 간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신다고 단언할 수도 없다. 감옥 속에서 외롭게 살다가 목이 잘리운 침례 요한, 거꾸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베드로, 밧모섬에서 외롭게 죽어간 요한을 생각해 보라. 그들이 가장 힘들고 어려웠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가장 가깝게 계셨다.

    욥은 재난을 당해야 할 어떤 죄도 범한 적이 없다.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욥기 2:3. 욥은 재난을 받을 만큼 큰 죄를 범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무런 이유없이 재난을 당했다. 그러므로 고통과 재난이 항상 자신이 범한 죄의 결과로 인하여 생긴다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복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조금만 어려운 일을 당해도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받았다고 생각하게 되어서 헤어나오기 어려운 절망의 늪으로 빠지게 된다. 기복 신앙을 믿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만, 그들의 마음 깊숙한 곳에는 항상 하나님의 형벌에 대한 두려움이 숨겨져 있다.

    형제 자매들이시여, 늦은 밤, 물 한그릇을 떠놓고 조상신에게 복을 비는 시골 아낙네의 기도와 그대의 기도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가? 성황당 산신령에게 치성을 드리면 복을 받을 수 있다고 믿는 신앙에서 빠져 나오라. 하나님께서는 그대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공급해 주실 것이다. 그러나 그대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대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시간에 최선의 방법으로 공급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그분께서 그대에게 허락하시는 모든 것에 대하여 감사하라. 비록 그것이 고통이나 시련의 모습으로 그대를 찾아올지라도 말이다. 만일 그대가 복을 비는 신앙을 고집한다면, 그대는 그대를 고통과 시련의 좁은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결코 깨닫지 못하게 될 것이다.

    조용한 시간에 마태복음 5장부터 시작되는 팔복을 읽고 명상해 보라.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되며, 무엇이 그분의 축복인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