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그대는 들소인가? 연어인가?-제1부

그대는 들소인가? 연어인가?-제1부


교회 안에 들소가 있고, 연어가 있다. 교회 안에 두 종류의 그리스도인이 있는데, 한 종류는 들소의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고, 다른 하나는 연어와 같은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다. 들소와 같은 사람은 어떤 사람이고, 연어와 같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이제부터 이 문제를 살펴보도록 하자.
                                                      

아프리카 들소 이야기

한번은 아프리카의 넓은 평원에 수백 마리의 아프리카 들소 떼들이 풀을 뜯고 있었다. 그런데 뱀이 그 중 한 마리의 발목을 물었다. 들소는 깜짝 놀라서 껑충 뛰더니 갑자기 뛰기 시작하였다. 한 마리가 뛰기 시작하니까 옆에 있던 들소들도 영문도 모르고 함께 뛰기 시작하였고 나중에는 수백 마리의 들소 떼 전체가 한 방향으로 뛰기 시작하였다. 수많은 들소 떼들이 뛰고 있는데 뛰는 이유를 아는 들소는 오직 한 마리뿐이다. 왜 나머지 들소 떼들은 정확한 이유도 모르면서 뛸까? 다 뛰는데 나만 혼자서 가만히 있으면 괜히 불안하기 때문에 뛰는 것이다. 마음의 안정과 평안을 위해서 뛰는 것이다. 수백 마리의 들소 떼들이 함께 뛰기 때문에 혼자만 가만히 있을 수도 없다. 뛰지 않으면 다른 들소 떼들 발에 밟혀 죽기 때문이다.

얼마 후에 절벽이 나타났는데 선두에 서서 뛰던 들소가 멈추어 서려고 했지만 뒤에서 밀려드는 들소 떼에 밀려서 절벽 아래로 떨어져 수많은 들소들이 죽고 말았다.

이것이 군중 심리이다. 군중 속에 있으면 판단력을 잃어버리고, 비판의 능력을 잃어버린다. 개인적인 책임감을 잃어버린다. 한 마리의 들소가 뛰기 시작하니까 다른 수백 마리의 들소들이 아무런 생각없이 뛰다가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는 것처럼, 사람들도 군중 속에서는 판단하지 않고, 생각하지 않은 채 사람들이 걸어가는 대로 걸어간다. 내가 왜 이 길로 걸어가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도 없고, 나를 따라오는 사람들에 대한 책임감도 없다. 아무도 이 길을 걸으면 안 된다고 외치지 않는다. 그냥 입을 다물고 끝까지 가는 것이다. 남들이 다 뛰는데 혼자 가만히 있으면 눈총을 받고 따돌림을 당하게 된다. 함께 뛰지 않는 자는 그 사회에서 매장당하게 된다.

내가 왜 장로교회를 다녀야 하는지, 내가 왜 침례교회에 다녀야 하는지, 내가 왜 수많은 교회를 놔두고 이 교회를 다녀야만 하는지에 대한 개인적인 판단이 없다. 그냥 다수의 사람들이 그 교회를 다니니까 나도 그 교회에 나가는 것이다. 내가 왜 지금 여기서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명확한 이유와 목적이 없는 그리스도인은 한번 자문해 보아야 한다. 혹시 내가 들소 같은 그리스도인이 아닌가 하고 말이다.
낭떠러지에 떨어져 수많은 들소들이 죽었지만 어떤 들소도 그것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았던 것처럼, 군중 심리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잃어버리고 멸망하지만 누구도 그것에 대하여 책임을 지지 않는다. 이것이 들소 같은 그리스도인들이 당하게 되는 위험이다.

들소 같은 그리스도인들 속에 있으면 그들과 함께 따라가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이 가는 대로 따라가지 않으면 주변 사람들에게 따돌림 받고 눈치 받게 되는데 그들 중 대부분은 결국 군중의 뜻에 굴복하게 된다.
                                                               

연어와 같은 그리스도인

들소와 같은 그리스도인이 있는가 하면 연어와 같은 그리스도인이 있다. 군중들의 요구와 기대에 맞추어서 사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군중들과 충돌하면서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는데 그들이 연어와 같은 그리스도인이다. 이제 연어의 삶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한번은 텔레비전에서 연어의 일생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미국 서북부의 포트랜드에 있는 강의 상류에는 연어 부화장이 여럿 있는데, 연어가 그곳에서 알을 낳아 새끼들이 자라면 그것들을 강에 방류시킨다. 수백만 마리의 연어 새끼들이 강을 따라서 바다로 나가는 장면은 정말 장관이다. 과학자들은 그들을 추적하여 몇 년 후에 그들이 다시 돌아오는 장면을 취재하였다. 성인이 된 수많은 연어들이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장면은 정말 놀라웠다. 다른 물고기들은 물의 흐름과 먹이감을 따라다니느라고 정신없는데 연어들은 강을 거슬러 역행하는 것이다. 댐이 나오면 댐을 헤엄쳐 오르고, 물살이 매우 빠른 바위 계곡이 나오면 10번, 20번 실패하더라도 헤엄쳐서 빠져나간다. 그래서 결국에는 자신이 태어난 부화장을 찾아가서 그곳에서 알을 낳고 자신은 죽는다.

연어의 삶의 목적은 본향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군중 심리와 역행하는 삶도 마다하지 않는다. 연어의 삶 속에는 전혀 군중 심리가 없다. 연어는 주변에 다른 물고기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어디로 가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 아무도 그에게 강요하지 않지만 땀을 흘리며 줄기차게 강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간다. 연어는 오직 하나님께서 그의 두뇌 속에 넣어 주신 뜻을 따라서 살아갈 뿐이다.

천신만고 끝에 부화장으로 다시 돌아온 어미 연어들을 보면 깜짝 놀라게 된다. 그들의 온 몸이 상처투성이기 때문이다. 물줄기를 역행하여 오면서 바위에 부딪히고 댐을 헤엄쳐 올라오는 동안 여기저기 찢겨서 성한 데가 없다. 그런 연어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것은 본향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피 흘리며 투쟁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다.

아무나 연어처럼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뜻이 마음속에 새겨진 그리스도인만이 연어처럼 살 수 있다. 반드시 본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소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만이 연어처럼 살 수 있다. 연어와 같은 그리스도인은 세상이 흘러가는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거슬러 살기 때문에 세상과 충돌하면서 살게 된다. 세상과 함께 흘러가는 것이면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부딪치게 된다. 그것이 세상이든지 교회든지 상관하지 않는다. 연어는 늘 충돌하기 때문에 그 삶이 고달프다. 오해하지 말라. 세상이나 군중과 충돌한다는 말은 사람들의 멱살을 잡는다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거스르는 정신을 깨뜨리면서 앞으로 나간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뜻에 거스르는 군중의 요구나 기대에 굴복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그리스도인이 있는데, 하나는 군중을 따라서 세상과 함께 흘러가는 사람들이고 다른 하나는 세상(군중)과 충돌하면서 거슬러 올라가는 그리스도인이다. 두 종류의 그리스도인들이 있는데, 하나는 들소와 같은 그리스도인이고 다른 하나는 연어와 같은 그리스도인이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들소와 연어

사도 바울은 연어 같은 그리스도인과 들소 같은 그리스도인에 대한 정의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갈 1:10).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 사는 것, 바로 그것이 연어 같은 그리스도인이고 하나님께 내 자신을 바친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이다. 사람을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다. 사람도 만족시키고 하나님의 뜻도 따라가려고 어중간하게 애쓰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만을 만족시키면서 사는 사람이다. 사도 바울의 이 말씀에 의하면 들소 같은 그리스도인은 어떤 그리스도인인가? “사람들을 기쁘게 하며 사람의 요구를 만족시키려고 애쓰는 사람들”이다. 들소란 군중의 요구와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는 사람들이다.

교회가 군중 심리에 휩쓸려가기 시작하면 그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음성이 더 이상 나오기 힘들다. 왜냐하면 군중 심리에 취해 있는 목회자나 장로나 교회 지도자는 결코 군중의 요구나 기대에 역행하는 설교나 원칙을 세울 수 없기 때문이다. 교회 안에 연어 같은 지도자가 없고 들소 같은 사람들이 모여 있으면 그런 교회에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수 없다. 사람의 눈치를 살피면서 주변 사람들의 기대를 만족시키고 기쁘게 하고자 하는 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수 있겠는가?
                            

성경에 나오는 연어들

이 세상과 오늘날 현대 교회에는 아프리카 들소들이 너무나 많이 있지만 성경에는 연어와 같은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 중에서 누가 연어처럼 살았으며 누가 들소처럼 살았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노아 : 노아는 연어처럼 살았다. 왜 노아를 연어처럼 살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왜냐하면 노아는 세상에 충돌하면서 살았고, 그 당시 세상과 함께 흘러가고 있던 교회와 충돌하면서까지 하나님의 기별을 전했기 때문이다.

홍수가 나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담과 하와 그리고 에녹과 같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생존해 있었다. 므두셀라는 홍수가 나던 해까지 살아 있었다. 진리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널리 퍼져 있었던 때였다. 그러므로 노아의 때에도 많은 교회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있었다. 왜 하나님께서는 그 당시 수많은 교회 지도자들을 놔두고 노아를 택하셔서 홍수에 대한 기별을 주셨을까? 하나님께서 그 당시 가장 인기 있던 지도자에게 기별을 주셨다면 보다 효과적으로 전파될 수 있었을 텐데 왜 노아에게 기별을 주셨을까? 왜냐하면 심판의 기별은 연어만이 전할 수 있는 기별이기 때문이었다. 들소 같은 사람은 결코 심판의 기별을 전할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군중에게 굴복하지 않는 사람, 하나님의 진리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세상과도 충돌할 수 있는 사람을 찾으셨던 것이다. 아무리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할지라도 연어와 같은 특성이 없으면 결코 하나님의 기별자가 될 수 없다. 만일 노아가 교인들의 눈치나 보면서 그들을 기쁘게 하려고 애쓰는 들소 같은 사람이었다면 결코 심판의 기별을 있는 그대로 전할 수 없었을 것이다.

노아 방주 이야기는 군중 심리에 대한 가장 극적인 예증이다. 그는 군중의 요구나 기대와 정면으로 충돌하였다. 만일 노아가 군중 심리를 조금이라도 따랐다면 산 중턱에 방주를 짓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관심은 오직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에만 집중되었다. 온 세상 사람들이 그를 조롱했지만 그는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일에만 골몰하였다. 그는 세상과 충돌하며 살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의 군중들은 어떠했는가? 노아를 미친 할아버지 취급하였다. 방주가 완성되자 하나님께서는 초자연적인 기적을 통하여 동물들을 방주 안으로 불러 모았지만, 군중 심리에 붙잡혀 있던 사람들은 서로 눈치만 보았지 방주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그때 사람들의 마음은 매우 크게 흔들렸지만, 아무도 노아의 손을 잡고 방주로 들어가지 않았다. 자칫 잘못하여 노아의 지지자로 낙인 찍히면 그것은 그 사회에서 매장되는 것이었다. 군중의 압박은 초자연적인 현상이나 기적보다도 훨씬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결국 군중 심리에 붙잡혀 있던 아프리카 들소 같은 그리스도인들은 멸망했고, 연어 같은 그리스도인만 방주에 들어가서 구원받았다.

예수님 : 예수님의 생애는 태어날 때부터 군중의 기대를 깨뜨리면서 시작되었다. 하늘 왕이 이 땅에 오셨는데 베들레헴의 말구유에 거적 같은 포대기를 깔고 태어나셨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방식으로 이 땅에 오시지 않았다. 그렇게 태어나셨기 때문에 4천 년 동안 메시아를 기다려 오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거절하게 되었던 것이다.

영광의 왕께서 자기를 낮추시고 인성을 취하셨다. 그분이 거했던 지상에서의 환경은 거칠고 열악하였다. 예수께서는 모든 외적 장식을 피하셨다. 왜냐하면 재물, 세상의 명예, 인간적인 위대함은 결코 영혼을 사망에서 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군중은 이 세 가지, 즉 재물, 명예, 인간적인 위대함을 매우 좋아한다. 그래서 교회 안에 이 세 가지가 들어오면 교회는 들소 떼들로 가득 차게 된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교회가 정결하게 되어서 이 세 가지 정신이 교회 안에서 사라지게 되면 그런 교회에는 연어들이 몰려들게 된다. 예수께서는 연어만이 그 진정한 가치를 알아볼 수 있는 모습과 방법으로 이 땅에 오셨다. 예수께서는 철저하게 군중들의 취향과 충돌하면서 당신의 생애를 시작하였다.
               

성안과 성밖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는 예루살렘 성밖에서 시작되어 성밖에서 끝났다. 천사들이 메시아의 탄생 소식을 가지고 가장 먼저 어디를 찾았을까? 예루살렘 성안을 먼저 찾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곳에 유대교회의 지도자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천사들이 하늘의 소식을 가장 반대 없이 효과적으로 전파되기 위해서는 성밖에 있던 이름없는 목동들보다는 예루살렘 성안의 대제사장에게 전해야 했을 것이다. 천사들이 성안을 살펴보았지만 거기에는 들소 같은 군중들밖에 없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성밖으로 나가 연어들을 찾았던 것이다.

메시아를 영접할 수 있는 기회는 성안과 성밖에 똑같이 주어졌다. 예수살렘 성안에도 메시아의 탄생에 대한 소식이 전해졌지만, 그 소식은 철저하게 무시당했다. 왜 무시당하게 되었는가? 메시아의 탄생 소식이 성밖 사람들에게 먼저 전해졌기 때문이다. 성안의 지도자들과 군중들은 자존심이 상했던 것이다. “어떻게 하늘의 천사가 우리를 제껴두고 성밖의 저들을 찾아갈 수 있는가?” 라는 생각 때문에 메시아의 탄생 소식을 무시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당시 예루살렘 성밖에 어떤 사람들이 살았는가? 가난한 목동들, 문둥병자 같은 전염병 환자들과 같이 그 당시 유대 사회로부터 철저하게 무시당하던 사람들이 성밖에 살고 있었다. 그래서 구속의 위대한 사건은 철저하게 성밖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어린 아기를 메시아로 인정하는 것은 이스라엘 교회 전체의 핍박을 자초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4천 년 동안 기다려왔던 일이 이루어졌지만 예루살렘 성안이 그렇게 조용했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도 성밖에 세워졌다. 대제사장 집 앞마당에 세워지지 않고, 산헤드린 회당 앞에 세워지지 않았다. 성안 사람들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조롱과 조소의 대상이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성밖에 사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 되었다. 가난한 목동들과 문둥병자들, 멸시받던 사람들을 위한 것이 되었다.

그 당시에 누구도 허물어뜨릴 수 없는 유대교회의 전통이 있었는데, 그것은 하늘의 기별은 오직 예루살렘 성안에 있는 교회 지도자들, 즉 하늘과 지상을 연결하는 공식 채널을 통해서만 내려온다는 것이었다. 그 공식 채널을 벗어나서 전달되는 어떤 기별이나 기적도 유대교회 안에서 인정받지 못했다. 그러한 편견에 사로잡혀 있던 사람들에게 있어서 메시아의 탄생과 십자가는 완전히 가리워졌다. 성안의 지도자가 이끄는 대로 아무 생각 없이 따라다니던 아프리카 들소 같은 군중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였다.

예루살렘 성안에 있던 들소 같은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의 초림을 맞이하는 데 철저하게 실패했던 것처럼 마지막 시대에도 들소 같은 군중들은 재림을 준비하는 일에 있어서 철저하게 실패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연어로 살지 않고 철저하게 자신이 소속되어 있는 교단의 높은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만을 의지하면서 아무 생각 없이 따라가는 들소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마지막 시대에 자신이 소속된 교단을 예루살렘 성으로 생각하여 성밖에서 들려오는 기별과 진리에 귀를 막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말세에 당신을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주시는 기별을 거절하게 될 것이다.

군중 심리에 굴복하지 않고 세상과 충돌하면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께서는 그 길을 인도해 주실 것이다. 어떤 경우와 상황 속에서도 성경에 기록된 진리만을 찾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게 된다. 우리 모두 연어와 같은 정신과 신앙으로 살아가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자!

다음 호에서 연재되는 제2부 “마지막 시대의 군중심리”를 기대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