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내가 깨달은 오해

내가 깨달은 오해


죄에서 벗어나는 길

죄란 무엇인가? 노하는 것, 도둑질 하는 것 등이 죄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왜 노하고 도둑질하는가? 어찌하여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하는 것일까?

악이란 음행, 더러움, 방탕, 우상숭배, 마술, 원수맺기 ... 질투, 술주정을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육체의 죗된 행위는 마음에 깃든 병이 겉으로 드러난 증세이지, 병 자체는 아닌 것인가?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육체의 죗된 행위 하나 하나와 싸우는 일을 중단하기로 결정하였다. 왜냐하면 그러한 노력을 통해서는 결코 죄에 대해서 승리하거나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만일 겉으로 드러난 죗된 행위 자체가 악의 본질이 아니라면, 선한 행위 자체도 선이 아닐 것이다. 이름을 날리기 위한 자선, 더 좋은 것을 얻어내기 위한 기부금은 자선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복음을 전하는 것도 반드시 선은 아니다. 야심적인 목사, 세속적인 신앙인처럼 더러운 것은 세상에 다시 없다. 선은 정신이지 행위가 아니다. 왜냐하면 선한 행위는 선이 겉으로 드러난 결과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비록 내 모든 소유를 나누어 주고,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준다고 해도 내게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도 없다”고 증언하였던 것이다(고전 13:3).

한번은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께 와서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라고 물었다. 이 질문에 대한 그리스도의 대답에는 기독교 신앙의 진수를 담고 있다. “네가 어찌 선한 일에 대해서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니 곧 하나님이시다.” 무엇이 선이냐는 질문에 대해서 그리스도는 “선은 하나님이다”라고 답변하셨다. 효 도 선이고, 인 도 선이다. 그러나 효와 인은 선의 결과일 뿐이며, 선 자체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을 알면 의인이 될 수 있다. 선을 배우면 하나님께 가까워진다. 선을 구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서 선을 행할 수 없다. 종교와 도덕적 행위와 신앙은 서로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이다. 한쪽을 버리고서는 다른 쪽을 이해할 수 없다. 선이 하나님이라면, 악은 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을 떠나는 것을 말한다. 도둑질, 살인, 간음은 하나님을 떠난 결과이지 죄의 근본 원인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의 율법을 의도적으로 범하는 죄를 짓는 것은 내가 마음 속에서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고 내가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 결코 죄를 범할 수 없으며 죗된 생각이 나를 주장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께 온전히 돌아갈 수만 있다면 나는 의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죄에서 벗어나는 길, 영혼의 평안을 찾는 길, 그것은 오직 이 길 뿐이다!
                

아는 것과 믿는 것의 차이

신앙이란 믿을 수 없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다. 신앙이란 납득할 수 없는 일을 믿는 것이 아니다. 신앙이란 양심과 성경에 근거해서 의로운 선택을 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 교회에서 말하는 신앙이란, 지적인 동의가 아니라, 마음과 심령의 전적인 동의를 말한다. 그런데 마음과 심령의 하는 일은 의지와 양심의 선택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신앙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려면, 양심이 도덕적으로 올바른 선택을 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진리를 아는 것과 진리를 믿는 것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사슴은 사슴이요 말은 말인지를 알지만, 정치가들이 정권에 아부할 때에는 사슴을 말이라고 하지 않는가? 둘에 둘을 더하면 넷이 된다는 진리를 정확히 아는 장사꾼도 2원짜리 물건 두개를 5원에 팔고 있지 않은가? 아무리 부도덕하고 부절제한 목사라도 성경에 기록된 진리대로 순종하는 사람만이 최후의 승리자가 될 수 있다는 설교를 하지만, 과연 몇명의 목사들이 자신이 설교하는 진리를 믿으면서 그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는가? 그러므로 나는 다음과 같은 그리스도의 계시적 말씀에 머리를 수그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볼 수 있겠는가?” 누가복음 18:8. 사도 바울은 별다른 사람이 아니다. 그는 자신이 믿고 있는 진리대로 살다가 일생을 마친 사람에 불과하다. 마틴 루터나 요한 웨슬리가 오늘날까지 존경을 받는 이유도 그들이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과는 달리 자신이 인정하는 진리대로 살다가 죽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교회에 나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이 믿는 바대로 그대로 산다면, 이미 복음 사업은 끝마쳐졌을 것이고 우리 모두는 지금 하늘에 가있을 것이다.
                   

나의 오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왕과 신하의 관계가 아니다. 그것은 자애로운 어머니와 갓태어난 아기의 관계와 같은 것이다. 아기는 어머니께로부터 만가지를 받지만, 아기는 어머니께 하나도 드리지 못한다. 하나님께 대하여 가지고 있는 우리의 신뢰 자체도 하나님의 사랑과 보살핌을 깨달았기 때문에 생긴 선물이다. 우리가 우리의 재산과 몸과 영혼을 하나님께 바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되돌려 드리는 것에 불과하다. 하나님은 주시는 자요, 인간은 항상 받는 자이다. 우리에게는 사랑이 없지만, 하나님은 그분 자체가 사랑이시며 사랑의 원천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기 원하는 사람은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봄으로써, 그분의 사랑이 자신의 마음 속에 새겨지도록 허용해야만 한다.

그렇다! 나는 하나님을 믿었다. 그분의 선하심을 알았다. 그리고 의롭고 선한 삶을 살고자 하는 결심도 하였고, 어느 정도 그분의 사랑도 알았다. 그러나 나의 모든 것을 바쳐서 그분을 신뢰할 정도로 그분의 사랑을 알지 못했다. 부모의 사랑을 제대로 깨닫지 못한 자식이 부모를 버리고 배반하는 탕자가 되거나, 비록 부모 밑에 있을지라도 의무감에서 어쩔 수 없이 순종을 하면서 마음 속에 불만이 가득한 자식으로 자라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충분히 알지 못하는 그리스도인 역시 일상 생활의 모든 국면에서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게 된다. 나는 내 영혼이 구원을 받기 전에 성인의 거룩한 행위를 흉내내려고 했다. 나의 선행을 통하여 하나님의 관심과 호의를 얻어 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의 선한 행위와 의로서 하나님의 친구가 되고, 나중에는 나의 구원에 대해서 그분과 대등한 계약을 맺으려고 계획했었다. 나는 지음을 받은 자면서도 지은 자의 흉내를 냈던 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아기이면서 우주의 창조 사업에 동참했던 그의 파트너나 된 것처럼 행동하였다.

아, 나는 얼마나 미련했던가! 영원한 사랑의 하나님이 은혜와 사랑을 주려고 호소하시면서 나를 찾아오셨건만, 나는 오히려 “왜 나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까? 왜 나를 사랑해 주지 않습니까?” 라고 하나님께 대들었던 것이다. 지나간 생애 동안에 하나님께서 나의 선한 행위에 대해서 감사하다는 말을 하실 때까지 기다렸던 적이 얼마나 많던가? 그분의 무한하신 사랑에 대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그분의 손에 나를 온전히 맡기는 것이다. 나의 잘못은 마음 문을 활짝 열고 그분의 사랑을 충분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었다. 나는 언제나 “나 같은 죄인이 어떻게 무한한 사랑을 받을 수 있겠는가? 먼저 내 자신을 깨끗하게 하고 난 후에 하나님께 나아가야지” 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어떻게 내 스스로 나를 깨끗케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 이외에 누가 나를 죄로부터 깨끗케 할 수 있단 말인가? 어머니의 손을 놓음으로 흙탕에 빠지게 된 어린아기가 스스로 자신을 깨끗하게 씻을 때까지 어머니께 올 수 없단 말인가? 사랑의 어머니는 오히려 아이가 머뭇거리면서 더디 온 것을 책망하고 곧 새옷으로 갈아 입힐 것이다. 하물며 사랑의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대하시겠는가?
                

의심

세상에 태어나서 속아온 사람일수록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못한다. 이 죄악의 세상에서는 믿음이라는 신성한 특성을 키울 수 있는 여건이 잘 주어지지 않는듯하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믿으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를 인도하겠다” 라고 말씀하시지만, 사람들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보여주소서. 그러면 믿겠나이다” 라고 요구한다. 인류는 하늘 아버지를 찾고 있다. 하늘에 걸려 있는 별들과 들에 핀 백합화가 모두 창조주의 사랑을 나타내고 있지만, 사람들은 태풍과 지진과 독초를 보면서 의심함으로써,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께 돌아가는 신앙을 배우지 못하고 있다. 인류의 6천년 역사는 하나님의 섭리가 꿰뚫고 있음을 증거하지만, 사람들은 수천번의 전쟁과 노예 매매와 인종 학대와 종교 전쟁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인류의 고통을 외면하고 계시다는 의심의 미로를 헤멘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그리스도인들 마저 자신의 죄가 용서받았다는 증거를 얻기 위해서 자꾸 눈에 보이는 특별한 기적과 은사를 요구하고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성경에 기록해 놓으신 용서에 대한 증거의 말씀을 부인하는 것이 된다.
                     

십자가를 통한 변화의 길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사도행전 4:12. 오직 그리스도만이 구원하시는 힘을 가지고 계시다. 모세의 율법을 몸에 두르고 엄격하고도 청렴한 바리새파인 다소 출신의 바울도 그 마음의 고뇌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자신의 재능과 학식을 분토로 여기고 나사렛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참회하며 용서함을 받은 후에야 비로소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었다.

독일에 한 청년이 있었다. 성령께서 그의 마음을 번뇌케 하여 그는 불안한 나머지 단식과 절제를 통하여 선을 쌓기 위해서 수도원에 들어갔다. 그러나 어쩌랴, 그가 외모를 꾸미면 꾸밀수록 악한 생각이 끊임없이 마음에서 솟아나왔다. 그 때에 스승인 슈타우비츠의 한마디가 그에게 영감을 가져왔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나님은 루터의 죄를 용서하셨고 온 우주는 버림받았던 자식을 건져 올렸다. 그 후로 루터는 믿음과 성결을 강조하는 강력한 종교 개혁자가 되었지만, 오늘날 그의 후예들은 루터가 말한 믿음을 “죄를 겁없이 범할 수 있는 보험카드”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그래서 믿기만 하면 어떠한 생애를 살던지 간에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설교를 하게 된 것이다.

영국의 베드포드에 한 대장장이가 있었다. 그는 순박하고 단순한 심령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마음 속에 역사하는 사단의 세력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무진 애를 썼다. 회개하는 눈물이 그의 눈에서 그칠 날이 없었으며, 용서를 비는 기도 소리가 듣는 자로 하여금 그를 동정하게 할 정도였다. 그는 도덕적 양심을 가지지 않은 동물의 처지를 부러워 하곤 하였다. 악마들이 그에게 몰려와서 그의 죄가 용서받지 못했으므로 지옥불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속삭이곤 하였다. 그런데 이 무거운 짐을 진 여행객도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도 모르게 무거운 짐이 벗겨지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경험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아, 이제 내 눈에는 그리스도를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없게 되었다. 나는 드디어 하나님의 아들과 하나가 되는 경험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그분의 의, 공로, 승리가 모두 내 것이 되었다.” 바로 이것이 천로역정의 저자인 존 번연의 간증이다.
나 역시 죄가 가져온 온갖 고뇌와 고통 속에서 방황하다가 모든 기력을 탈진하고 나서야 아버지의 자비만을 바라보면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범한 죄에 대해서 변명하지 않고, 내가 행한 의와 선한 행위를 내세우지도 않았다. 다만 태초 이전부터 예비해 두신 하나님의 어린양이 이루어 놓은 속죄만을 바라보았다. “하나님이시여,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시고 나의 용서할 수 없는 죄를 용서해 주십시요. 저는 이제 당신께 드릴 선행이 하나도 없습니다. 저의 의로움을 주장할 수 있는 선행이라곤 하나도 없습니다. 제가 드릴 수 있는 것은 피곤에 지친 몸과 정신, 그리고 깨어진 마음 뿐입니다.” 이러한 기도와 함께 하나님의 은혜가 내 영혼 깊숙히 스며 들었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기도에 대하여 “너의 제물은 받아들여졌다. 너는 낡은 옷을 벗고 내가 너를 위하여 준비해둔 의의 옷을 입어라” 라고 말씀해 주셨다. 이제 나의 기도에는 내 소원을 요구하는 주장이 없어졌다. 다만 그리스도의 뜻대로 이루어지게 해달라는 간청만이 있을 뿐이며,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찬송이 넘칠 뿐이다.

이제 유일한 나의 의무는 단지 하나님의 명령을 기다리는 것이다. 나의 기대는 노력과 희생에 대한 보수에서,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신뢰에 대한 약속된 보상으로 달라졌다. 나는 지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막대한 청구를 할 수 있게 되었고, 하나님께서는 나의 노력과 봉사에 대해서 최선의 선물로 축복해 주셨다. 먹고 입는 것에 대한 근심은 사라져 버렸고, 나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도 무가치한 것으로 여겨졌다. 오직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라는 말씀에 대한 느긋한 신뢰가 생겼다(롬 8:32).

더 이상 나는 의무로서 선을 행하지 않게 되었다. 전도든지 자선이든지 간에 즐거움과 만족한 마음을 가지고 행할 수 있게 되었다. 나의 말과 생활에는 순결한 유머와 여유가 넘치게 되었고, 이전보다 훨씬 더 깊고 의미있는 희생과 봉사를 하나님과 사람들을 위해서 바칠 수 있게 되었다. 희생, 절제, 극기와 같은 것들이 더 이상 하기 힘든 의무로 여겨지지 않게 되었고, 나를 구원하신 구세주를 위해서 바칠 수 있는 다시 없는 특권으로 생각되었다. 하나님께로부터 최고의 선물인 의를 받았기 때문에, 더 이상 썩어 없어질 인생들로부터 명예와 부를 얻고자 애쓸 필요가 없었다. 이제 나도 영국의 크롬웰처럼 “주여, 비록 내가 처참하고 비천한 죄인일지라도 은혜로서 당신과 계약 가운데 있습니다.” 라고 기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베푸신 구원에 참여하게 된 이후부터 선에 대한 의무는 즐거움으로 바뀌게 되었고, 죄를 짓는 것은 더할 수 없는 고통이 되었다. 선을 사랑하기 때문에 선을 행하게 되었고, 악을 미워하기 때문에 악을 행하지 않게 되었다. 율법은 더 이상 내게 무거운 짐이 되지 않았으며, 다음과 같은 사도 요한의 말이 이해되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요일 5:3.

구세주의 사업은 크게 두가지로 나누어 진다. 첫째는 인류에게 완전한 생애를 가르치는 것이고, 둘째는 인류의 죄를 당신 자신이 직접 짊어지심으로써 제거하시는 일이다. 전자는 최종 목적이고, 후자는 전자로 인도하는 필요 수단이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죄인을 인도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의 죄를 속죄해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죄인이 하나님께로부터 진실로 용서받은 경험을 하지 못하면, 그 죄인은 결코 죄를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진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현대 기독교회는 속죄의 교리를 죄에 대한 값싼 용서에 국한시킴으로써, 신자들로 하여금 구세주의 모본을 쫓아서 따라가는 성화의 경험을 빼앗아 버렸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내 죄를 속하셨으니 이제 나는 애써 선행을 하지 않아도 되며, 죄를 범해도 구원에는 지장이 없다”고 믿는 사람은 아직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살리요” 롬 6:1. 내 경우에 있어서 처음에는 모세의 율법이 부각되었고, 그 후에는 그리스도의 은혜가 다가왔다. 어떤 의미에서 율법의 엄한 밧줄로 자신을 얽어 맨 적이 없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이해할 수 없다. 오늘날 교회에는 속죄의 교리를 가지고 자신의 죄와 부도덕함을 가리우려고 하는 자들이 많이 있다. 하나님의 아들의 피로 이루어진 은혜가 눈 먼 자들에 의해서 희롱당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깊은 염려와 슬픔에 잠기게 된다. 그리스도의 속죄는 의를 사모하는 자들의 휴식처이지, 악인의 은신처가 아니다. 구약의 엄격한 십계명을 가르치지 않고, 신약의 은혜만을 부드럽게 설교하는 목사야말로 하나님의 어린양들을 소리없이 죽이는 늑대이다.

나는 하나님을 향하여 언제나 이러한 불만을 토로했다. “아, 하나님이시여 내가 당신을 찾고 있었는데 당신은 어찌하여 문을 열어 주시지 않았습니까? 내가 길 가에서 방황하고 있는 모습이 당신께는 가련하게 보이지 않으셨습니까? 내가 진리를 보지 못함으로 고통에 고통을 더하고 있을 때, 당신은 팔짱을 끼고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계셨습니까?” 그러나 이제 은혜로운 한 음성이 내게 이렇게 대답해주셨다. “나의 은혜와 인내가 네게 족하단다. 네가 괴로워하는 것을 보면서 나도 함께 괴로워 했단다. 내가 너를 구하지 않았던 이유는 너를 구원하기 위함이었다. 너에게 반생 동안의 방황과 번민을 허락했던 이유는 너로 하여금 자신을 의존하는 정신에서 벗어나서 온전히 나를 의지하도록 하기 위해서 였다. 너를 괴롭힌 것은 네 자신이었다. 이제부터는 나만을 의지해라. 지혜는 네가 아니라 나에게 있다는 사실을 있지 말아라. 나는 네 죄를 속하여 선에서 선으로 이끌어 너로 하여금 나를 위하여 세상을 구원하는 힘이 되게 하고자 한단다.” 이제 나는 온 정성과 마음을 다하여 이렇게 응답할 수 있게 되었다. “아버지여 그러하옵나이다. 모든 것이 그렇게 된 것은 거룩한 뜻에 합당하옵니다.” 마11:26

이제 나는 자신의 부족과 연약함을 깊이 인식한 채 자선 사업에 종사할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용서가 당신의 완전하신 심판과 공의에 어긋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나는 모든 정성과 힘을 다하여 그분을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다. 나를 깊은 멸망의 수렁에서 건져주신 그분의 은혜를 어떻게 저버릴 수 있는가? 전에는 그분의 율법에 압도 되었지만, 이제는 그분의 엄청난 은혜에 압도되었다. 하늘은 내가 가지기 원하는 모든 것을 나에게 주었다. 임마누엘,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니 인생은 한번 살아볼 만하지 않은가!
나는 평안과 구원의 길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길을 안 것이 반드시 그 길을 걷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나는 단지 깨달았을 뿐이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평안과 행복한 마음을 가지고 그 길을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질문과 대답
                

문: 무엇이 유이며, 무엇이 무입니까?
답: 하나님이다. 세상이다.
문: 누가 사람이며, 누가 짐승보다 못한 존재입니까?
답: 신자이다. 거짓 신자이다.
문: 무엇이 가장 추하며, 무엇이 가장 아름답습니까?
답: 신자의 뒷걸음질이다. 죄인의 회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