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내려놓아야 하는 이유

내려놓아야 하는 이유


얼마 전에 한국에 있는 친구가 “내려놓기”란 책을 보내주었습니다. 오래간만에 발견한 참 좋은 책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책을 읽은 감동을 글로 옮겨 보았습니다.

이 기사를 통하여 “나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는 것”이 무엇인지를 볼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독자 여러분 모두에게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 편집실
                                 

내려놓을 수 있는 확실한 이유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 마음에 “주님 말씀만 하세요. 제가 듣고 순종하겠습니다”라는 결단이 없기 때문이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우리는 “하나님, 일단 말씀해 보세요. 먼저 들어보고 좋을 것 같으면 그대로 하구요. 제 생각이 더 나으면 그때 봐서 적당하게 절충하지요”라는 자세를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 달라고 구한다. 우리가 인생의 백지 수표에 서명해서 그것을 주님께 드리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뜻을 듣고 분별하기 어렵다. 자신의 전 인생을 주님께 맡기지 않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 달라고 기도할 때, 결국에는 하나님의 뜻 보다는 자기의 뜻을 더 높은 곳에 두게 되기 때문에 자기 기만에 빠져서 하나님의 뜻을 오해하고 잘못 판단하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께 당신의 뜻을 묻지 않는 이유는 그분으로부터 들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님의 뜻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 이유는 기꺼운 마음으로 순종하고자 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 계획표를 백지인 채로 하나님께 넘겨드리기를 주저한다. 그 대신에 하나님께서 우리가 작성한 계획표를 보시고 결재해 주시기를 바란다. 마치 사장실 문 앞에서 결재 서류를 들고 조마조마하게 기다리는 직원처럼 말이다. 우리가 이렇게 인생의 계획을 하나님께 맡기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여쭈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주지 않으실 것을 걱정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이러한 불신의 모습을 보면서 사단은 즉시로 접근하여 이렇게 속삭인다. “하나님께 인생전체를 걸면 너는 그때부터 망하는 거야. 인생의 재미도 끝이고 네가 하고 싶었던 모든 일로부터 너는 손 털어야 해. 지금까지 네가 하던 일을 다 내려놓고 어떻게 하나님이 시키는 일을 할 수 있어!” 하나님께서 우리가 붙잡고 있는 것들을 내려놓으라고 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내려놓을 때 그것이 진정으로 우리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주인 노릇을 하고 있는 사단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붙잡고 있으라. 끌어 모으라”고 유혹한다. 하나님께 내려놓은 순간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겁을 주면서 후히 주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의심케 만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내려놓으라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더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해서이다. 내려놓을 때 주어지는 가장 좋은 것은 세상이 줄 수 없는 자유와 평강이다.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는 이유

예수께서는 우리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것은 단지 두 주인을 섬겨서는 안 된다는 금지의 법이 아니라 둘을 동시에 섬기는 것이 불가능함을 뜻한다. 우리가 세상과 하나님을 둘 다 누리고 싶어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잡고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세상을 잡고 있는 것이다. 양쪽에 발을 걸쳐 놓으려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결정적인 순간에 십자가가 아닌 세상을 택하게 된다. 우리가 자신의 일을 내려놓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 손에 움켜쥐고 있는 것을 내려놓는 과정에서 우리는 반드시 십자가를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자아가 죽고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과정 중에 꼭 거쳐야 할 단계이다. 붙들고 있던 세상을 내려놓을 때 드디어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라 일컬음을 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 한 분만이 인생의 주인이 되심을 인정할 때 우리는 참 평안을 누리게 된다.
                                

그리스도인의 행복

현대인들은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다 한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새벽에 일어나 몇 시간씩 기도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무슨 대가를 치르고라도 하나님을 찾는다. 행복은 그들의 신이 되고 하나님은 그들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도구로 취급된다. 그러나 우리가 행복해지려는 열망과 행복해 질 수 있는 권리를 하나님 앞에 내려놓지 않고서는 우리는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없다. 우리가 자신의 권리로 여기던 무엇인가를 내려놓는다는 것은 진짜 행복을 얻었다는 증거이자 우리가 성장했다는 증거이다.

어린아이 이야기 1 : 밖에서 하루 종일 일하고 들어 온 아빠가 가여워서 “아빠, 나 아빠하고 놀고 싶지만 아빠가 너무 피곤하시면 나하고 놀아주지 않아도 돼요. 이제 저는 참을 수 있어요”라고 말하는 우리의 어린 자녀의 배려에 감동되고 기쁘듯이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영적 성장을 보고 깊은 감동과 기쁨을 얻으실 것이다. 우리의 고집과 움켜 쥐고 있던 것들을 내려놓는 모습을 보시는 하나님의 표정은 어떠할까? 하늘 아버지에게 감동과 기쁨을 주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참된 행복이 되어야 한다.

어린아이 이야기 2 : 장난감 가게에서 우리의 어린 자녀가 다음과 같은 말을 할 때 우리 마음에는 어떤 감동과 기쁨이 생기는가? “그런데 아빠 이거 안 사주셔도 돼요. 그냥 보기만 할게요.” 우리가 하나님께 그런 말과 결정을 하게 될 때 하나님께서도 동일한 감동과 기쁨을 느끼게 될 것이다. 부모인 우리가 자녀들에게 무엇이든지 다 주고 싶듯이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고 싶어 하신다. 부모인 우리가 자녀에게 어떤 것을 주고 싶어도 주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하신다. 하나님께서도 때로는 주지 않고 기다리신다. 왜냐하면 우리가 더 훈련되고 성장해야 하기 때문이다. 많은 경우에 우리가 갖고 싶어하는 것이 우리의 성장을 방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고 싶지만 때로는 주지 못하는 마음,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가지신 마음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게 되면 우리가 가진 것을 하나님께 빼앗길 까봐 두려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게 된다.

어린아이 이야기 3 : 아빠와 장난감 가게에 들어 간 아이가 원하는 장난감을 선택했다. 계산대에 장난감을 올려놓고 바코드 판독기에 통과시켜야만 하는데 아이는 두 팔로 장난감을 꼭 껴안은 채 요지부동이었다. 억지로 장난감을 빼앗아서 점원에게 넘겨주려 하자 아이는 울면서 발버둥치기 시작하였다. 장난감이 진정으로 자신의 소유가 되기 위해서는 잠시 계산대에서 그것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아무리 원하는 것을 움켜쥐고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것을 주셔야 진정으로 우리 것이 되는 것이다. 그것에 대한 영원하고 완전한 소유권을 갖기 위해서는 잠시 그것을 이 세상에서 내려놓아야만 한다. 그러나 영적으로 어린아이 상태에 있는 그리스도인은 잠시 내려놓는 것을 빼앗기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더 세게 움켜 쥐면서 추한 모습으로 살아가게 된다. 그렇게 하는 한 그것은 진정한 우리의 소유가 되지 못한다. 우리가 움켜쥔 것이 오히려 우리를 더욱 조이고 찌들게 만들 뿐이다. 우리가 내 것이라고 주장하는 많은 것들 중에 얼마나 많은 것들이 아직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은 것들인지 모른다.

어린아이 이야기 4 : 아이가 밖에서 놀다가 흙이 잔뜩 묻은 손으로 들어왔다. 할아버지에게서 생일 선물로 새 옷이 온 것을 보고서 아이가 더러운 손으로 그것을 붙잡으려고 하였다. 아빠는 그 아이의 손을 멈추게 해야만 하였다. 아이는 울어댔지만 아빠는 세면대에 데려가 먼저 손을 깨끗하게 씻어주었다. 그렇게 한 후에야 아빠는 아이가 원하는 새 옷을 입혀 줄 수 있었다. 하나님께 내 인생을 내려놓는 일에는 이렇게 씻는 과정이 포함된다. 씻지 않은 더러운 손으로 하나님의 계획 속으로 들어갈 때 우리는 그 안에서 위선과 정욕과 세속이라는 무게에 짓눌리게 될 것이다. 자신을 씻어야 된다는 것을 이해하기까지 우리에게 길고 긴 광야 생활이 필요하다. 세속을 털어버리기 위한 시간과 경험이 필요하다. 아이가 아버지의 마음과 계획을 이해하기 위하여 오랜 세월이 필요한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과 계획을 이해하기까지 오랜 광야 생활이 필요 된다.
                               

광야, 하나님을 깊이 만나게 되는 곳

하나님께서는 길을 열어 놓으셨지만 우리의 눈에는 닫혀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순종을 기대하실 때에는 미래의 모든 것을 보여주신 다음에 선택하도록 하지 않으신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시 119:105) 라는 말씀처럼 주의 말씀은 내 발 앞을 비추어 주어서 넘어지지 않고 걸어갈 수 있을 만큼만 보여주신다. 멀리 있는 것에 대해서는 방향만을 제시할 뿐 그곳에서 실제로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를 가리우시고 보여주지 않으신다. 그것은 오직 순종으로 그 길을 선택하여 걸어가는 과정 속에서만 볼 수 있도록 허락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서만 믿음이 성장하고 강해지기 때문이다.

일상적인 환경 속에서 모든 것이 잘 되어 갈 때는 하나님을 만나기 어렵다. 그러나 붙잡을 것이 없고 기댈 곳이 없는 환경 속에서 살다가 보면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때때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더 깊이 만나 주시려고 멀고 깊숙한 광야로 우리를 이끄신다. 광야 속에서 우리는 내 안에 숨어 있는 성취욕, 세상을 향한 야심을 만지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 겉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산다고 말하지만 하나님의 것과 내 것이 뒤섞여 있었는데 그것들이 고난을 통해 정제되어 갔다. 거룩한 것과 세속적인 것이 엉켜져 있는 삶이 광야 속에서 정결해 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내 능력의 한계에 부딪혀 절망할 때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성장하고자 하는 열망이 자라나게 된다. 성경의 역사를 살펴 보면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사용하시고자 하는 다수의 인물들을 광야로 몰아가셨다. 그곳에서 그들을 만나 주셨고 그곳에서 그들을 훈련시키셨다.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고향 땅을 떠난 이후 줄곧 광야에서 방랑하면서 하나님의 복의 통로가 되기 위한 과정을 밟았다. 야곱도 외삼촌 집에서 고단한 타향살이를 하며 광야를 경험한 다음에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하나님께로부터 얻게 되었다. 그와 반면 광야를 경험하지 못하고 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은 야곱의 형 에서는 하나님께 순종하고자 하는 모험보다는 세상의 안락을 취했으며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 한 결과 자손 대대로 하나님의 백성들과 대적하는 원수가 되었다. 요셉도 타향인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는 광야의 삶을 살았으며 모세도 애굽의 궁전을 마다하고 광야로 나가 거기서 40년간 훈련을 받은 후에야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해 내는 지도자가 되었다. 다윗 역시 광야에서 하나님을 깊이 만나는 경험을 하였다. 사울 왕의 시기를 받아 목숨을 연명하기 위한 길고 긴 도피 생활을 살면서 혹독한 광야의 훈련 학교를 다녀야만 하였다. 엘리야 역시 긴 광야 길을 걸어야만 하였다. 바알을 숭배하는 아합 왕과 거짓 선지자들과 싸워서 승리하였지만 두려움에 휩싸여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도주하는 광야 길을 걸었고 그곳에서 하나님을 더욱 깊이 만나게 되었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 역시 바벨론이라는 타국에 살면서 풀무불에 들어가기도 하고 사자굴에 넣음을 받기도 하면서 험난한 광야 생활을 살았다. 그리고 우리의 구세주 예수께서도 성령의 이끄심을 받아 광야에 머물면서 사단의 시험을 받았다. 그분의 공 생애 기간 동안 “머리 둘 곳”조차 없는 나그네의 삶을 사셨다(마 8:20).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땅에서는 나그네요 이방인으로 살아가게 된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를 광야로 내몰아가는데 그 주변에서 재물과 풍요의 신을 섬기는 사람들이 부와 명예를 누리는 모습을 보면서 살아가게 된다. 이것이 광야를 통과하는 나그네들이 만나게 되는 시험이다. 구약시대에도 가난하고 가진 것이 없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를 40년간 방황할 때 주변에서 이방신을 섬기는 사람들이 누리던 편리함과 부요함은 거절하기 어려울 정도로 힘든 유혹이 되었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복의 근원이라고 불리웠지만 정작 그가 살았던 곳은 복이 없는 광야 땅이었다. 그리스도인은 복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복의 근원이 되어 주변 사람들에게 복을 나누어 주는 삶을 살아야 한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우리 자신이 복의 근원이 되려고 하기 보다는 복을 찾으려고만 한다. 돈이 있고 복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려고 한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장소가 어디인가에는 관심이 없고 보기 좋고 살기 좋은 곳을 찾기 위하여 인생의 대부분을 보낸다. 물질적 환경은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하늘 아버지와 함께 있을 때 우리는 모든 것을 얻게 되고 행복해진다. 하나님을 소유하면 모든 것을 가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어느 곳에 있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이 지금 나와 함께 하시는가 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하나님 앞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세상에 발 하나를 걸쳐 놓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결코 자신의 것을 포기할 수 없게 된다. 마지못해 빼앗길지는 모르지만 자기 스스로 내려놓지는 못하게 된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세상에 보내는 것이 마치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라고 말씀하셨다(눅 10:3). 이 세상에는 이리와 늑대가 득실거린다. 세상에 발 하나를 걸쳐 놓는 그리스도인은 이리와 늑대에게 잡혀 먹히게 된다. 왜냐하면 양은 이리나 늑대를 결코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양이 이리나 늑대를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목자 곁에 꼭 붙어 있는 것이다. 양이 시선을 세상으로 돌리고 목자로부터 떨어지는 순간 양은 이리의 먹이가 될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있기를 원하는 곳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서 있는 것, 바로 그것이 그리스도인 삶의 전부이다. 광야에서 광야로 가는 것이 나그네의 삶인데 그것은 두려움과 불안의 길이 아니라 형통과 평안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광야 생활은 붙잡고 있던 것을 내려 놓는 것을 배우는 훈련 학교이다.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먼저 이루시고”시편 37장 5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