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실패와 성공의 차이

실패와 성공의 차이


사업가가 장사에 실패했다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음악가가 콘서트에 실패했다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배우가 연기에 실패했다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축구 선수가 경기에서 패배했다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선교 사업에 실패했다면, 결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우주의 왕, 만왕의 왕인 하나님의 사업을 하는데, 실패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이 우주의 금과 은이 모두 하나님의 것인데, 어떻게 선교 사업이 망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나 현실은 그리스도인도 실패합니다. 오히려 불신자들보다 더 많이 실패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문제인가요?

문제는 “무엇이 진정한 성공이고 무엇이 실패인가?”라는 것입니다. 성공과 실패의 기준은 무엇인가요? 교회 내에 끌어들이는 사람의 숫자가 성공과 실패를 가늠하는 기준인가요? 신축한 교회 건물의 크기와 규모가 사업의 성공을 입증하나요? 이번 기사에서는 교회의 성장과 선교 사업의 성공을 위하여 애쓰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쓰여졌습니다. 생애의 빛 편집실
                          

(성공에 대한 빗나간 확신)

기독교는 사람을 진지하게 만든다.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거듭나면, 철부지 소년은 어른다운 사상을 가지게 되고, 앳띈 소녀는 조심스러움과 정숙함을 가지게 된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기독교의 진리 속에는 사람의 속 마음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삼류 소설을 좋아하던 사람이 성경의 역사를 탐구하게 되고, 야심적인 명예심에 마음을 팔아버린 사람이 자신을 낮추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 진리를 위하여 봉사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된다. 술에 쩔어있던 술주정뱅이는 금주를 선언하고 깨끗한 생활을 살게 되고, 남의 물건을 훔치고도 양심의 아픔을 느끼지 못하던 사람이 훔친 물건을 되돌려 주고 머리를 수구린 채 용서를 구하게 되며, 코메디와 경마를 좋아하던 사람이 그것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리게 만드는 것이 기독교회가 가진 위력이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에게 나타나는 또 하나의 확실한 변화가 있는데, 그것은 선교 사업에 대한 정열이다. 선교 사업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정열은 누구도 쫓아갈 수 없다. 어떤 장사꾼도 통과할 수 없던 아프리카 대륙의 깊숙한 곳을 리빙스턴이라는 선교사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기 위하여 횡단하였다. 사람들은 리빙스턴과 같은 거듭난 선교사를 보면서 이렇게 결론짓는 경향이 있다. “자신이 부자가 되기를 기도하는 것은 죄이다. 그런 기도는 하나님께서 결코 들으시지 않는다. 명예를 구하는 기도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하려는 기도는 하나님께서 항상 기뻐받으시고 그런 기도는 반드시 응답받고 그런 선교 사업은 반드시 성공한다.” 이러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만사를 제쳐놓고 자신의 선교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당당한 모습으로 사업에 뛰어든다. 물론, 처음부터 세상에 의지하거나 높은 사람에게 굽신거림으로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내가 의지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다”라는 말이 선교 사업을 시작하려고 하는 모든 사람들의 구호이다.

이 시작의 때야말로 보람과 희망의 때이다. 아무런 장애도 없고, 실패라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이다. 성공은 필연적이라고 생각한다. 저 하늘에 하나님께서 존재하시는 한 나의 사업은 실패할 수 없다고 확신한다. 세상의 장사꾼들과 사업가들이 실패하는 이유는 그들이 자신을 위하여 계획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그들과 그리스도인의 사업은 다른 것이다. 그들의 사업은 돈을 위한 것이지만, 자신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만일 그리스도인이 선교 사업에 실패한다면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되며, 진리는 거짓으로 오해받게 될 것이 아닌가!

그러나 현실은 그리스도인도 선교 사업에 실패한다는 것이다. 수년간의 기도와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때가 너무나 많이 있다. 실패로 인하여 늙으신 부모님과 아내와 자녀들이 깊은 절망 가운데로 빠질 뿐 아니라, 세상의 비웃음 거리가 된다. 친구들은 그리스도인의 무모함을 책망하고, 원수들은 그의 실패를 보면서 손뼉을 친다.
                           

(마귀의 제안과 성령의 음성)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마음을 아프게 파헤치는 것은 다음과 같은 마귀의 속삭임이다. “이 바보야, 방법과 수단이 성공의 비결임을 모르니? 신앙과 마음의 순결함만으로는 안돼! 성공한 사람들의 사례를 살펴보렴. 크리스챤 학교를 세워서 수만명의 그리스도인 청년들을 배출하기 위해서는 의롭지 못한 자들에게 무릎을 꿇고 아부의 웃음을 웃어 주어야 하며, 그들의 불의를 어느정도 인정해 준다는 표시를 해주어야 해. 섭리는 언제나 강한 군대와 함께 한다라고 말한 나폴레옹의 말은 지금 네가 받아들여야 할 교훈이란다. 아무개 목사도 설교 단상에서는 항상 믿음과 진실에 대해서 설교하지만, 자신이 교회를 건축할 때에는 거룩한 목적을 완성하기 위하여 세상에서 흔히 사용하는 방법과 수단을 따르고 있쟎니? 진실과 순결함은 천사들의 나라에서는 통할지 모르지만, 이 땅에서는 어느 정도의 술책이 섞이지 않으면 결코 성공할 수 없어. 이제부터라도 조금 더 성숙한 어른처럼 사업을 하기 바란다. 너무 진리나 거룩함을 강조하지마. 사람들은 그런 것보다는 외형과 숫자에 시선이 집중되지. 그들은 어떤 것이 진리이며, 누가 진리를 가르치는가에는 무관심하지. 그들의 눈과 귀는 어느 교회에 더 많은 사람이 모이며, 누가 더 재치있고 재미있게 교회를 운영하는가에 집중되어 있어. 자네가 지금처럼 진리에만 매달리면 결과는 항상 실패일 뿐이야. 죄없는 네 부모와 처자까지 너의 무모함 때문에 슬픔과 비애 속에서 일생을 보내게 되는 걸 생각해 보렴. 비록 네가 아무리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순수한 목적을 가지고 일한다고 할지라도, 네 방법을 고치지 않으면 아무런 결과도 얻지 못할거야. 죽어가는 영혼들을 위하여, 불쌍한 부모님과 처자식을 위하여 왜 너의 자존심을 버리지 못하는가? 하나님은 네게 불가능하거나 무리한 것을 요구하지 않으신단다. 적당한 수단과 방법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야. 너의 실수를 올바로 잡는 일에 있어서 주저하지 말고 용기를 내라. 수단을 부리는 것과 거짓말을 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야! 알겠니?”

아! 누가 마귀의 이 교묘한 논리에 맞설 수 있겠는가? 결론은 확실하다. 그것은 경험을 통해서 더욱 확실해 진다. 그리스도인이 방법과 수단을 부리지 않는 한, 실패는 정한 이치이다. 다음과 같은 의혹이 마음을 스치고 지나간다. “혹시 조금 전에 귀에 들린 음성은 마귀의 음성이 아니라 성령의 음성이 아니었을까?” 바로 이때에 또 하나의 음성이 양심 깊숙한 곳에서 조용히 들려 왔다. “의는 의고, 불의는 불의다. 진실은 진실이고, 부정직은 부정직이다.” 아, 누가 이 음성에 항거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 넘어지고 코가 깨어지더라도 그리고 돌이키지 못할만큼 실패할지라도 의와 진실은 지켜져야만 한다. 이 순간,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렇게 기도할 것이다. “그렇습니다. 의는 사업보다 중요합니다. 조그만 일에 정직을 지키는 일이 위대한 사업을 일으키는 것보다 크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선교 사업은 의에 이르는 길에 불과할 뿐입니다. 의가 사업의 시녀로 전락될 수는 없습니다. 교회도 학교도 선교도, 모두 의를 배우고 거기에 이르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사업의 목적은 사업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통하여 인내, 믿음, 극기와 같은 신앙을 배우는 데에 있습니다. 교인들이 모두 교회를 등지고 떠날지라도, 학생이 학교를 떠나 교실이 텅비게 될지라도, 나는 이 땅에 하나님의 의를 세우겠습니다. 아멘.” 하나님께서는 사업보다는 정신을 존중하신다. 왜냐하면 정신과 신앙은 영원까지 들고 갈 수 있지만 사업은 내가 이 땅을 떠날 때에 두고 가야하기 때문이다. 어떤 중국 선교사는 40년 동안 전도하고도 단 하나의 교회도 세우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기쁘게 세상을 떴다. 그는 정말 아무 것도 얻지 못한 것일까? 결코 아니다. 그는 값진 실패의 경험과 믿음을 가지고 무덤 너머 저편에 있는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갔다. 어떤 목사나 신부가 아시아 전체를 헤집고 다니면서 100만명 이상에게 침례를 베풀었다고 할지라도, 그가 이 땅에서 실제적으로 얻은 참 성과는 무명의 중국 선교사에 전혀 미치지 못할 수도 있다. 바로 이것이 눈에 보이는 결과로 선교 사업의 실패와 성공을 평가할 수 없는 이유이다. 아, 선교 사업이여, 얼마나 많은 위선과 거짓과 비열한 수단과 질투와 싸움이 너의 이름으로 자행되었던가! 선교 사업에 투신하는 그리스도인들이여, 조심하라! 그대의 목적과 간증이 아무리 고상하다고 할지라도, 그대의 방법과 수단이 거룩하지 않으면 그것은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선교 사업에 실패하였다고 해서 반드시 그것이 그 자신의 죄와 무능력 때문이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셨다는 결정적 증거도 아니다. 그의 기도와 노력이 부족했거나 무의미했다고 말할 수도 없다. 선교 사업의 목적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일진대, 사업을 의로운 방법으로 추진하다가 실패했다면 그 자체가 별坪?것이다. 의와 정직과 진실을 지키면 성공한 것이다. 사업의 성공을 위하여 위선과 거짓과 아첨의 수단을 사용했다면 그 사업은 결과에 상관없이 이미 거기서 실패로 끝난다. 큰 교회 건물이 세워지고 수천 수만의 사람들이 그곳으로 몰려든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이룩하는데 사용된 자금의 성질과 설립 정신이 성공과 실패를 가늠하시는 하나님의 저울이다. 충분히 성공할 수 있지만, 의와 진실을 세우기 위하여 실패를 자원하는 것,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인 선교사가 걸어야만 하는 좁은 길이다. 진리의 옆에는 오류가 따라다니고, 진실의 옆에는 위선이 쫓아다니는 것처럼, 하나님의 선교 사업에도 명예욕과 자신을 만족시키는 정신이라는 위험이 늘 붙어다닌다. 바울이 했던 사업을 뒤따라 하면서 바울의 정신과 신앙을 소유하지 않은 그리스도인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정치나 연예계를 움직이고자 하는 욕망의 덫에 걸려 들게 되며, 리빙스턴이 걸었던 길을 뒤따르면서 리빙스턴의 믿음과 신앙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은 위대한 탐험가로 이름을 떨치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 잡히게 된다.

선교의 성공을 위하여 이 사람의 손을 잡아주고, 저 사람과 원수가 되며, 여기에 아첨하고, 저기를 배신하는 따위의 정치술은 철저한 실패의 지름길이다. 의인은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인은 신앙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군대와 군함을 늘리고, 경제를 활성화시키기만 하면 성공했다고 믿는 정치가, 캠퍼스를 아름답게 짓고 학생들을 많이 모집하면 성공했다고 믿는 교육가, 교회당을 웅장하게 지어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이면 성공했다고 믿는 목사, 이런 사람들은 모두 육안으로 사는 사람들이지 영안으로 사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어린아이일 뿐이다. 나무와 돌 앞에서 절하는 우상숭배자들이다. 황금이 곳간에 쌓이는 것을 보면서 숨어서 웃는 수전노이다. 그들은 결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예수님의 선교 정신)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선교 사업을 바라보셨던 눈으로 선교 사업을 바라 보아야 한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공생애가 시작되는 시점에 마귀로부터 선교 사업에 얽혀 있는 명예와 자기 만족에 대한 시험을 받으셨다. 그분은 40일 동안 광야에서 굶주렸다. 굶주려 있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마귀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마 4:3. 예수님은 마귀가 제안하는 수단과 방법을 거절하였다. 예수님은 돌들을 사용하여 자신도 배부르고 배고픈 수억의 인간들을 당장에 배부르게 만들 수도 있었다. 그러나 굶주림을 채워주는 것은 일시적인 사업이었다. 구원의 역사는 영원에 이르는 것이어야 한다. 억만 개의 빵이 있다고 해도 인류의 구원을 이룰 수는 없다. 오직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진리의 말씀만이 참 양식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귀의 제안을 이렇게 거절하셨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마 4:4. 예수님은 인간의 육을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라 영을 구원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다.

다음에 마귀는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로 데리고 올라 갔다. 눈 아래 수많은 군중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았다. 마귀는 다시 방법과 수단을 제안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뛰어 내리라.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라” 마 4:6. 마귀의 제안은 이런 것이었다. “예수, 당신의 현재 모습과 배경으로는 이 수많은 군중들의 시선과 관심을 끌지 못합니다. 당신의 진짜 능력과 재능의 참 가치를 알아주는 자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몸을 저 아래로 던져 사람들의 주목을 이끌고 또한 기적을 통하여 당신의 능력을 보여 주십시요. 그러면 군중들은 당신의 능력에 압도되어 놀라움으로 당신을 따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과 진리는 기적이나 위협적인 공갈로 전해져서는 안된다. 일단 군중들에게 인기를 모으고 그 다음에 복음을 전하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며, 자기를 속이는 일이다. 그러한 종류의 방법과 수단은 구원의 도를 전하는 데에 있어서 무가치한 것이다.

사단의 시험이 계속되었지만, 예수께서는 “사단아 물러가라!”는 말씀으로 단호히 그의 제안을 거절하였다. 당장 눈 앞에 보이는 구제를 못할지라도, 그리고 압도하는 기적을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사람들에게 자신의 존재가 알려지지 않은 채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생애를 마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이스라엘과 세상 앞에 분명하게 나타나지 못하더라도, 예수께서는 복음과 진리에 합당한 길 이외의 다른 모든 방법과 수단은 거절하였다. 물론, 5천명에게 떡을 나누어 준 것처럼 가끔?기적을 사용하신 적이 있지만, 그 때마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군중의 우매함을 꾸짖으시고 그들을 쫓으시거나, 그 자리를 급히 떠나심으로 그들을 피하셨다. “먹은 사람은 여자와 아이 외에 5천명이나 되었더라. 예수께서는 자신이 사람들을 흩어 보내시는 동안 즉시로 제자들을 재촉하사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게하시고” 마 14:21,22. 예수님의 그러한 생애는 사람들을 화나게 만들었고, 따라서 세상의 명망은 하나도 그에게 돌아가지 않았으며, 그는 악인으로서 또한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로서 처형당했다. 때때로 하나님의 의는 사람들을 화나게 만든다. 천사가 예루살렘에 사는 헤롯왕과 유대교회 지도자들 대신에 베들레헴에 있는 천한 목동들에게 나타나서 구세주의 탄생을 알렸을 때에 유대 지도자들은 시기와 질투로 분노하였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독생자를 애비없는 자식으로서 말구유에서 태어나게 하심으로써, 마귀와 인간이 높이 평가하는 모든 명성과 방편과 수단을 거절하셨다. 예수께서는 단 하나의 교회나 크리스챤 학교도 세우지 못했으며, 어떤 놀라운 선교기관도 설립하지 못했다. 다만 겉으로 보아서 형편없이 보이는 열두 명의 제자를 길렀을 뿐이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의 선교 사업의 전부였다. 철저하게 실패한 모습이었지만, 그것은 완전한 성공이요 승리였다. 예수님은 당신의 생애를 통하여 사람들 앞에 완전한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 보이셨기 때문이다. 선교 사업이 실패했다고 안절부절하는 목사나 신부나 선교사가 있는가? 그들은 그리스도의 실패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교회 주차장에 꽉 찬 자동차를 보면서 자족하는 눈으로 바라보는 성직자가 있는가? 혹시 그리스도의 실패와 그대의 성공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살펴보라.

나는 지금 선교 사업이나 자선 사업의 무가치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는 불교나 어떤 다른 종교보다도 자선 사업에 왕성한 의욕을 가진 종교이다. 선행 자체에는 가치나 공로를 두지 않으면서도 선행을 격려하고 일으키는데에 있어서 가장 힘이 있는 종교가 기독교이다. 그리스도인은 자선 사업과 의료 선교 사업을 해야 한다. 그러나 자선 사업이 빵을 나누어 주는 데서 끝나면 아무런 의미도 없다. 의료 사업이 병을 고치는데서 끝나면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리스도의 자선 사업이 단순히 5천명에게 떡을 나누어 주는 것으로 끝났다면, 그리고 그분의 의료 선교 사업이 단순히 문둥병자를 고치고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것만으로 끝났다면, 기독교회는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는 능력을 가진 종교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분은 그 모든 과정에서 하나님의 의를 굳게 세우셨다.

그리스도는 인기와 명망과 수단을 이용해서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파되기를 원치 않으셨다. 진리 자체를 통하여 복음이 전파되어야지, 진리와 복음을 멋있게 포장하여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서는 안된다. 의면 의이고, 불의면 불의다.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의와 불의를 섞는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는 안된다. 유명 연예인을 앞세워 복음을 전파하려고 노력하는 사람과 교회당의 장엄한 건축물로 신도들을 모으려고 하는 사람은 모두 마귀가 광야에서 그리스도를 두번째로 유혹할 때에 사용했던 덫에 걸린 사람들이다. 또한 사람을 모으기 위하여 기적을 사용하는 자 역시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불경하는 자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방법과 수단을 거절하심으로써, 당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진실과 정직의 참 가치를 알려 주셨다.

만일 그리스도가 대정치가로 사셨다면 어떠했을까? 그분은 시이저를 압도하면서 당시의 로마제국을 통일하고 노예 제도를 폐지하며, 중국의 요순 시대를 훨씬 능가하는 태평성대를 이 땅 위에 건설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길은 하나님의 의를 분명하게 드러낼 수 있는 길이 아니다. 그분의 목적은 지상낙원의 건설이 아니라,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의가 무엇이고 어떤 것인지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이었다. 바로 이것이 모든 선교 사업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이 주목해야 할 주제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선교 사업에는 의롭지 못하고 거룩하지 못한 방편과 수단들이 철저하게 배제되어야 한다.

수단과 방편과 핑계가 허용된다면, 기독교회에서 순교자란 나올 수 없다. 수단과 방편과 핑계가 허용된다면,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풀무불 안에 들어 갈 필요가 없었다. 수단과 방편과 핑계가 허용된다면, 다니엘이 사자굴 속에 들어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수단과 방편과 핑계가 허용된다면, 십자가의 죽음과 치욕은 없었을 것이며 인류의 구원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 성공을 위해서 선교 사업을 하지 말고, 철저한 실패를 각오하고 사업을 시작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이 수단과 방편을 거절한 결과로 인해서 선교 사업이 실패했다고 해서 낙심하거나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의를 세우기 위하여 실패한 자는 의의 왕국에서 주춧돌이 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깨달은 자만이 선교 사업을 하면서 자유와 평안과 여유를 즐길 수 있다. 선교 사업은 의의 꽃이요 열매이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의를 구해야 한다. 그리하면 사업은 자연스럽게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우리의 수단과 방법에 의해서 맺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를 통하여 자연스럽게 맺히는 것이다.


(수단과 방법을 거절한 어떤 학교 이야기)

이 이야기는 미국 버지니아에 있는 어떤 크리스챤 학교에서 있었던 이야기 입니다. 그 대학은 그리스도인들이 보내주는 헌금에 의존하여 운영되었는데, 필요에 의해서 예배실을 신축해야만 하였습니다. 헌금을 호소하는 편지를 각지로 보내고 기도하면서 좋은 소식이 있기를 기도했습니다. 드디어 “좋은 소식”이 왔습니다. 어떤 부자가 새로운 공사에 소요되는 전체 비용인 50만불을 기부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한가지 조건이 있었습니다. 그 부자는 헌금을 하는 조건으로 자신의 아내의 이름을 그 건물의 이름으로 명명하고 그것을 현관에 붙힐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대학의 직원들과 이사들은 모여서 이 문제를 신중하게 의논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그 부자의 요구를 거절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들이 거절한 이유는 하나님의 성전에 어떤 개인의 이름이 붙혀지면, 그것을 볼 때마다 사람들이 성전 공사에 개입하신 하나님의 섭리와 도우심을 기억하는 대신에 부자를 기억하게 될 것인데,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워지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부자가 약속한 기부금은 취소되었습니다. 이러한 소식이 학생들과 그 학교를 사랑하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알려졌습니다. 여기 저기서 조금씩 헌금이 모여들게 되었고, 학교는 정해진 날짜 내에 아담한 예배실을 완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완전한 의를 위하여 방편과 수단을 거절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