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둘째 아담과 십자가

둘째 아담과 십자가


예수께서 싸우신 싸움, 그분께서 당하신 고난과 죽음이 과연 어떤 것인지에 대한 진정한 이해를 가지고 있는가?

우리의 영적 눈이 열려서 그분의 희생의 참된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면, 더 이상 사단에게 협력하거나 굴복하는 비참한 일은 없게 될 것이며, 나약한 상태에서 벗어나 용감하고 담대한 그리스도인들로 변화될 것이다.

예수께서는 어떤 종류의 죽음을 당하셨을까? 성경은,“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셨다고 말하고 있다(히 2:9). 잠시 이것을 생각해 보도록 하자. 그분은, 나의 죽음을, 여러분의 죽음을, 그리고 다른 모든 사람들의 죽음을 대신 죽으셨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그렇다면 우리의 삶의 끝날에 우리가 죽음을 경험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인가? 바로 여기에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이루신 일의 신비와 경이가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대신해서 첫번째 사망(일반적인 죽음)을 당하신 것이 아니다. 그분께서는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의 둘째 사망(영원한 멸망)을 대신 경험하셨던 것이다.


첫째 아담이 남긴 결과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바울의 말에서 우리는 몇가지 의문점을 갖게 된다. 한 사람이 죄를 지었는데 왜 모든 사람이 죽어야 하는가? 왜 우리가 다른 사람의 죄 때문에 우리가 형벌을 치루어야 하는가? 아담이 에덴 동산에 있을 때, 그는 세상에 태어나게 될 모든 사람을 대표했다. 인류의 시조로서, 그는 마치 자신이 모든 사람인 것처럼 하나님 앞에 섰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 독자들도 아담 안에 있었다. 아담의 형상을 닮은 자손들이 태어났는데, 그들은 아담의 유전인자와 염색체를 가지고 태어났으며, 아담의 몸과 본성을 이어받았다. 아담의 모든 후손들은 그들이 받은 영향을 자신들의 후손들에게 똑같이 전수하였다. 아담은 우리의 조상이며, 아담 안에는 세대마다 되풀이 되는 유전법칙이 존재하고 있었다.

아담에게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것이 자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말인가?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에 한 시험을 두셨다. 그 시험은 단순하고 직접적인 것이었다. 순종하면 살고 불순종하면 죽는다는 시험이었다. 우리는 동산 중앙에 있던 나무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다. 하나님께서는“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셨다(창 2:17). 아담이 계속해서 그 완전한 에덴 동산의 환경 가운데서 살 수 있는 것은, 그의 순종에 달려 있었다. 아담의 행복한 미래는 금지된 나무의 열매를 따먹지 않는 것을 조건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했다.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할 경우, 형벌을 제하거나 가볍게 하기 위한 어떠한 대책도 없다. 시험은 분명했다. 순종하여 살든지, 불순종하여 죽든지 둘 중의 하나였다. 아담이 불순종하자, 아담의 나이 930세 때에 그 선고는 집행되었고, 그는 결국 죽어서 땅에 묻혔다.

죄의 결과로 인하여 연약해진 육체를 타고나는 아담의 후손들은 아담처럼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죽음은 아담의 죄로 인해서 받게 되는 형벌이 아니다. 아담의 모든 후손들은 유전법칙에 따라 죽을 수 밖에 없는 본성(mortal nature)을 전수받았기 때문에 죽는 것이다. 그들의 죽음은 아담이 후손들에게 물려준 퇴화된 육체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담의 죽음은 자신의 죄에 대한 형벌이었다.

그때부터 죄는 세상에서 움직일 수 없는 요지부동한 존재가 되었고, 모든 인간은 한번은 죽을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개입하지 않으셨다면, 모든 사람들의 죽음은 영원한 죽음으로 끝났을 것이다. 아담의 생명은 그가 범죄했을 때에 이미 끝났다. 첫번째로 주어진 생명은 사단의 시험에 굴복하는 순간에 끝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죽음 즉, 더 이상 희망이 없는 영원한 죽음이 아담을 기다리고 있었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 후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않으셨다면, 아담과 그의 모든 후손들에게는 그것이 영원한 끝이 되었을 것이다.

다시 주어진 두번째 기회

아담이 범죄한 후, 하나님께서는 즉시 여자의 후손(창 3:15, 동정녀 마리아에게 태어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을 통한 구속의 경륜을 발표하시고 그에게 새로운 시험을 주셨다. 이 두번째 기회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형벌을 대신 짊어지시고 돌아가실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것을 조건으로 하고 있다. 이 두번째 배려를 통하여 아담과 그의 모든 후손들에게 새로운 희망이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첫번째 시험에 실패한 결과를 변경하거나 없애버리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이해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변할 수 없는 우주의 법칙이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매우 엄숙한 질문을 던져준다. 어떻게,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첫번째 실패에 대한 형벌인 죽음을 집행하심으로써 당신 자신의 존엄성과 율법의 권위를 유지하실 뿐 아니라, 동시에 또 한번의 기회를 아담과 그의 후손들에게 제공하심으로써 모든 사람들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실 수 있을까? 하나님께서는 매우 놀랍고도 단순한 방법으로 이 어려운 문제에 대처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의롭게 살든지, 또는 악하게 살든지를 불문하고, 제한된 일정한 삶의 기간을 가진 후에 죽을 수 있도록 계획하심으로써, 또 한번의 영생의 기회를 인류에게 허락하셨다.

사람이 자신의 수(나이)를 채우고 죽는 첫번째 죽음은 첫 시험에서 아담이 실패한 결과로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영원한 운명은 두번째 시험에 의해서 결정될 것이며,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조건을 그들이 충족시키느냐 충족시키지 못하느냐에 따라서 결정될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두번째로 주어진 시험에서 실패한다면, 그는 더 이상의 기회를 갖지 못할 것이며, 둘째 사망(최종적인 영원한 죽음)이라는 죄의 값을 치루게 될 것이다. 이제 사도 바울의 말이 더욱 분명하게 이해될 것이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2.


둘째 아담이 시험에 응함

지금까지는 첫째 죽음과 두번째 기회에 대하여 공부했으므로, 이제는 첫째 아담과 둘째 아담의 역할을 살펴보도록 하자. 에덴 동산에서 아담이 전 인류를 대표했던 것처럼, 둘째 아담이신 예수께서도 모든 사람을 대표하신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 5:18,19.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죄를 범한 첫번째 아담에게 일어났던 것은 무엇이나 그가 대표했던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쳤다. 이와 마찬가지로 둘째 아담의 경험도 모든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것이 바울의 말하고자 하는 바이다. 창조주이신 예수께서는 인류의 가족이 되셔서, 마치 그분 안에 모든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 서셨다.

예수께서는 첫 아담이 실패한 것을 만회하기 위해서 오셨기 때문에, 그분께서는 인류와 동일한 육체를 취하셔야 했다.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히 2:17. 죄를 저항하는 면에 있어서, 예수께서 그분의 형제들보다 어떤 유리한 초자연적 능력을 가지셨었다면, 예수께서는 사단으로부터 공정하지 못하다는 비난을 들으셨을 것이다. 사단은 오래 전부터, 하나님께서는 불합리하고 불가능한 순종을 인간에게 요구하신다고 비난해 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육체를 취하신 상태에서, 하나님의 요구들을 충족시켜야 하셨다. 또한 그렇게 함으로써만, 사단의 거짓 고소를 반박하실 수 있었는데, 이는 누구든지 하늘 아버지에 대한 믿음과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서, 죄와 유혹을 승리할 수 있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둘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승리로 인하여, 첫째 아담의 가족들이 구원받을 수 있는 문이 열리게 된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놀라운 소식이 아닌가?


둘째 아담이 남긴 결과

첫째 아담은, 육체적인 출생을 통하여, 죄로 인해 연약하고 타락한 육체와 죽음을 후손들에게 물려주었다. 그러나 둘째 아담은, 영적인 출생(거듭남)을 통하여, 당신의 죄없고 순결한 경험인 신의 성품, 승리,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당신의 영적 자녀들에게 물려주셨다. 첫째 아담이 실패함으로써 발생된 모든 결과와 영향들이, 둘째 아담에 의해서 완전히 회복되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영적인 출생 즉, 새로 태어남을 통해서만 예수 그리스도의 가족의 일원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인간의 마음과 영혼 속에서 재 창조가 일어나게 되는데, 바로 이것이 인간을 희망 없고 속절 없는 상태에서 구원에 이르게 해주는 것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자신이 속해 있는 족보가 바뀌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그리스도인의 경험 중의 하나이다. 모든 아담의 가족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새롭게 태어나는 경험을 갖게 되는데, 이로써 믿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족이 되는 것이다. 새로 태어나는 거듭남의 경험은 어떤 어려운 이론이 아니며 신비적인 경험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과 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실제적인 경험이다. 가족들이 서로 닮은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새로 거듭난 그리스도인도 하늘 아버지의 품성을 닮게 된다. 우리가 하늘 가족에 입적될 때, 우리는 새 아버지와 맏형님을 닮기 시작한다.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골 3:10. 태초에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웠다. 창세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되 ... 아담이 일백삼십세에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았다는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창 5:1~3).

아들이 아버지를 닮듯이, 아담은 하나님을 닮았었다. 그러나 죄 때문에 그 닮음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래서 아담의 아들은 하나님을 닮을 수 없었으며, 죄를 범한 아담을 닮게 되었다. 그러나 참된 거듭남을 통하여, 인간은 범죄한 아담의 모습을 잃어버리게 되며, 자기를 새로 지으신 예수를 닮기 시작한다. 이것은 실제적인 닮음일까? 아니면 상징적인 닮음일까? 이것을 단지 상징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실제적으로 죄를 승리할 수 있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한 생애를 살 수 있음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바울은 매우 분명히 말하고 있다.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 5:19. 하늘 아버지의 자녀가 됨과 동시에, 그리스도인은 아버지 하나님과 맏형님 예수 그리스도를 닮게 되는데, 바로 이 새로운 영적 출생으로 인해서 참된 그리스도인은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본성을 극복할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죄인에게 찾아오는 필연적인 형벌인 둘째 죽음(영원한 멸망)으로부터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첫째 시험에서 아담이 실패함으로써 받게 된 형벌인 첫째 죽음을 취소시키지 않으시고 그대로 집행하셨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둘째 시험에서 그분을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둘째 죽음을 폐하여 주셨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대신하여 둘째 사망의 그 무서운 형벌을 대신 당해 주셨기 때문이다.


어떻게 십자가가 용서를 제공해 주는가?

이제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희생을 좀더 자세하게 설명해 주는 하늘 드라마의 또 다른 면을 살펴 보도록 하자. 어떻게 한 사람, 둘째 아담(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죄지은 모든 사람에게 용서를 제공해 줄 수 있는가? 성경은,“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다고 말한다(히 9:22). 여기서 사함이란 물론 용서를 말한다. 문제는, 어떻게 그리스도의 죽음이, 죄의 용서를 가능하게 만들었는가 하는 것이다. 이 질문이야말로 지금까지 우리가 배운 모든 것들의 핵심이다. 죄인을 용서하는 권리를 얻기 위하여, 예수께서는 죄인들이 당하게 되는 둘째 죽음(영원한 형벌의 죽음)을 당하셔야만 했다.

용서는 죄인이 스스로 할 수 없는 것이다. 만일 한 사람이 물건을 훔치다가 붙잡혀서 감옥에서 십년 징역을 살아야 한다는 선고를 받았다면, 그는 자기의 행위로 의롭게 될 수 있을 것이다. 자기가 선고받은 기간만 감옥에서 채우면, 법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선고된 형을 감옥 속에서 마침으로써, 자신의 행위로 죄의 댓가를 지불하였기 때문에, 의롭다는 인정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자신에게 선고된 형벌의 양이 10년이 아니라 사형이라면, 그 죄인이 행위로 자신을 의롭게 만들 수 있는가? 결코 그럴 수 없다! 왜냐하면 비록 그가 100년동안 열심히 일을 한다고 해도 법은 여전히 그에게 죽음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도 없느니라 ... 이와 같이 그리스도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히 9:22~28.

바로 이것이 죄인이 행위로서는 구원받을 수 없는 이유이다. 죄의 값은 10년 징역이나 50년의 강제 노동이 아니다. 율법은 죄인에게 죽음을 정죄하였기 때문에, 피를 흘리는 일이 없이는 결코 법의 요구가 충족될 수 없다. 하나님의 보좌가 뒤엎어 질 수 없는 것처럼, 율법이 선언한 사형선고 역시 취소될 수 없는 것이다. 과거에 지은 죄를 오늘 내가 행하는 선한 행위로 지울 수 없다. 법이 죽음을 요구하는한, 죄인은 자기의 생명을 영원히 잃어버리지 않고서는 그 요구를 만족시킬 수 없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한 대속의 죽음을 십자가에서 치루실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분의 사랑이 우리에게 내려진 죽음의 선고를 대신 받도록 만드셨던 것이다! 율법은 모든 범죄자들에게 자신이 저지른 것에 비례하여 댓가를 치룰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용서는 범죄자가 받아 마땅한 형벌로부터 그를 구해준다. 그러나 용서하는 자는 범죄자가 형벌을 받지 않고 무사히 생명을 유지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자신이 대신하여 죄의 댓가를 치루어야만 한다.

예를 하나만 더 들겠다. 어떤 아버지가 자신의 아들을 죽인 살인자를 용서해주기를 원한다고 가정해 보자. 살인자가 범법자로서 받아야 할 형벌을 받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법이 살인자에게 요구하고 있는 형벌인 사형을 자신이 떠맡아야만 한다. 자신의 아들에게 저지른 범행에 대한 형벌을 대신 받아들임으로써, 그는 법적으로 살인자에게 가해져야 할 형벌을 대신해서 충족시켜야 한다. 이 예증은 우리로 하여금 대속의 뜻이 무엇인지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준다. 죄에 대한 대속에는 항상 양편이 관련된다. 잘못을 당한 쪽과 잘못을 범한 쪽, 즉 잘못을 당한 쪽은 하나님이시고, 죄를 저지른 쪽은 인간이다. 공의는 죄에 대한 합당한 배상을 요구한다. 이 경우에 있어서 방법은 오직 두 가지 밖에 없다. 법과 공의에 의해서 이미 규정된 형벌을 집행하든지, 아니면 피해자 쪽이 자비로운 용서를 베풀어야 한다. 그런데 만약 용서가 베풀어지기 위해서는, 용서하는 자가 상대방이 저지른 죄의 결과를 대신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에, 상대방을 대신하여 법이 정하고 있는 댓가를 치루어야만 한다. 율법이 정하고 있는 죄의 대한 형벌은 죽음이다. 그러므로 법이 죄인에게 요구하는 형벌인 둘째 사망의 고통을 그리스도께서 기꺼이 당신의 몸으로 당하셔야만 했던 것이다.

죄에 대한 형벌은 첫째 죽음이 아니라 영원한 멸망인 둘째 죽음이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 상에서 그리스도께서 받으셨던 깊은 고뇌를, 일반적인 죽음을 당하는 순교자의 고통과 비교할 수 없는 이유이다. 예수께서는 가장 악한 죄인이 유황불 못으로 던져지는 고뇌와 두려움을 느끼는 무서운 정죄를 경험하셨다. 그분의 예민한 본성은 더러운 강간, 살인, 흉악한 죄들을 대신 지심으로써, 심한 충격과 상처와 수치를 받았다. 그분께서는 죄에 대한 형벌이 멸망받을 자에게 내려지는 것과 똑 같은 방법으로 댓가를 치루시기 위해서, 즉 율법의 두려운 진노가 당신 자신 위에 떨어지도록 하기 위해서 죄 자체가 되셨다.

겟세마네 동산에서부터, 예수께서는 인류가 쌓아놓은 죄를 당신의 찢어진 가슴으로 지셨다. 하늘 아버지께로부터 오는 한 줄기의 빛도 십자가 위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께 닿을 수 없었다. 하늘 아버지와의 완전한 분리된 상태에서, 여러분과 나의 죄를 지시면서 고뇌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을 생각해 보라. 죄인들을 위한 용서를 제공해 주시기 위해서, 죄인들의 죄과를 대신 취하시는 주님의 정신적인 고뇌와, 더 이상의 아무런 소망도 없이 영원한 둘째 사망을 당하는 죄인들이 느끼는 고뇌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어야 했다.

하나님께서는 둘 중의 어느 하나를 택하여야만 하였다. 우리를 법의 정죄 아래에 내주시고 당신의 아들을 살리시든지, 아니면 당신의 아들을 법의 정죄 아래로 내어주시고 우리를 살리시든지 둘 중의 하나였다. 그분께서는 그밖의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왜냐하면 하늘의 법이 범하여졌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품성을 반사하는 거룩하고 완전한 율법은 변경되거나 폐지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율법이 폐지되거나 변경할 수 있는 것이라면,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변경시키거나 폐지시킴으로써 인류도 구원하고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도 죽음의 고통에 내주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분께서는, 그렇게 엄청난 댓가를 치르고 제공된 용서와 구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영원한 생명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아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주 적은 소수가 당신을 사랑하며, 당신의 아들의 대속적 죽음을 감사함과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당신의 말씀에 순종하는 거룩한 생애를 살므로서 영생에 이를 것을 아셨다. 바로 이러한 진짜 그리스도인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의 고통으로부터 돌아설 수 밖에 없으셨으며, 당신의 아들이 짓지도 않은 죄의 짐 아래 눌려서 두번째 사망의 고통 가운데서 죽는 것을 허락하셨던 것이다. 태양마저 그 무서운 장면으로부터 자신의 얼굴을 가리워서 칠흙같은 어두움이 십자가를 에워쌌고, 땅도 저항하여 떨었지만, 예수께서는“다 이루었다”라고 크게 외치시며 당신의 생명을 내어 주셨다(요 1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