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노아의 가족만 구원받았던 신학적 이유

노아의 가족만 구원받았던 신학적 이유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눅 17:26. 이 말씀은 노아의 때에 있었던 징조와 사건들이 마지막 시대에 예수께서 재강림하시기 직전에도 그대로 되풀이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또한 이 말씀은, 마지막 시대인 오늘날 우리들의 눈 앞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살펴보면, 노아의 때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가를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는 말씀은 “오늘날에 되는 것과 같이 노아의 때에도 그러했느니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논리적 성경 해석에 근거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노아 시대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방주가 필요없다는 신학이 나온 이유

홍수를 위한 대비책으로 지어진 엄청난 크기의 노아 방주에 오직 노아의 식구 8명만 들어가는 비극이 벌어지게 된 배경에는 그 당시 성직자들의 잘못된 설교와 가르침의 역할이 매우 컸다. 그 당시의 성직자들이 어떤 가르침을 가르쳤길래 온 동물계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쌍쌍이 방주 안에 들어가는 모습을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노아의 식구 8명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노아 방주에 들어가지 않기로 결심했을까?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노아의 시대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편만해 있던 시대였다. 아담은 9백여세를 사는 동안 자신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에덴 동산에서 일어났던 죄의 시작, 그리고 인류의 죄에 대한 용서와 구원을 위하여 메시야를 약속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자손들에게 말해 주었다. 노아의 시대는 하나님과 3백년 동안 동행하다 하늘로 승천한 에녹이 있었으며, 최고의 장수를 누린 무두셀라가 살아 있던 시대였다. 이러한 위대한 신앙인이 있었기에 노아의 시대는 복음에 관한 어두움의 시대가 아니라 광명의 시대였다. 그렇다면, 어째서 거의 모든 사람들이 노아의 방주에 들어가기를 거절하고 홍수에 빠져 죽음을 당하게 되었을까? 그 당시의 상황을 오늘날의 상황과 비교 회상해 보도록 하자.

노아는 곧 전 세계적인 대 홍수가 온다는 사실을 전파했다. 그러나 마지막 시대인 오늘날의 사람들이 예수께서 하늘을 가르시고 재림하시는 엄청난 초자연적인 믿지 않는 것처럼, 노아 시대의 사람들도 단 한번도 하늘에서 엄청난 양의 물이 쏟아져 내려오는 초자연적인 현상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노아 홍수를 믿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아는 120년 간의 고된 수고 끝에 마침내 하나님의 지시대로 방주를 완성하였다. 노아가 오랜 시간에 걸쳐서 방주를 짓는 동안 그의 주변을 떠돌며 괴롭히고, 함께 일하던 사람들의 마음에 때때로 의심과 회의를 불러 일으켰던 성직자들이 있었는데, 그들과 노아의 대화를 살펴 보면 그 당시의 상황과 오늘날의 상황이 매우 유사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성직자들 : “노아, 당신은 정말 하나님을 신뢰합니까? 당신은 오직 그분께서만이 다가오는 폭풍우로부터 당신을 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정말 믿소? 당신은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능력을 믿소? 아니면, 당신이 지은 이 배를 믿소? 우리들이 보기엔 당신은 하나님보다는 배를 믿는 것같소. 당신은 보잘 것없는 나무로 만든 이 배를 믿기 보다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법을 배워야만 합니다. 배가 작으면 작을수록 당신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으며, 아예 배를 짓지 않고 하나님의 구원만을 바라본다면,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가장 확실한 믿음이 될 것입니다.”

노아 : “여러분들의 말과 신학은 매우 논리정연하게 들립니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의 신학이 진리라면, 왜 하나님께서는 120년 전에 이 엄청난 크기의 방주에 대한 청사진을 주셨겠습니까?”

성직자들 : “노아,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이 청사진을 주신 것은 당신이 영적으로 너무 교만하고 당신이 자신의 행위에만 의존하려고 애쓰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어렵고 불가능하게 보이는 대 공사를 주심으로써, 당신 자신의 무력함과 속절없는 형편을 깨우쳐 주시길 원하신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임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고집스럽게 스스로의 힘으로 배를 지어서 홍수를 피하겠다는 기만 속에 빠져 있는 것이오. 만일 다가오는 대 홍수에 당신이 만든 배가 견딘다면, 당신의 배에 탄 생존자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대신에 당신에게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고,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서는 잊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배를 포기하고 이제부터는 우리와 함께 순수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전파합시다. 당신이 해야 할 일은 그저 작은 구명선을 준비하거나, 아니면 그저 맨 땅 위에 서서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보는 것뿐이요. 이 방주를 불태워 없애 버림으로써,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능력에 대한 당신의 믿음을 나타내 보이십시요.”

노아 : “당신네 신학이 요즈음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인기를 얻고 있으며 오직 믿음만을 강조하는 순수한 복음처럼 들리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당신들의 주장이 진리라면, 왜 하나님께서는 내게 이런 청사진을 주어서 120년이라는 오랜 세월동안 노력과 희생을 하도록 섭리하셨을까요? 우리 가족은 이 엄청난 크기의 배를 짓는 동안 수많은 시련과 고난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자금이 부족하고, 어려움에 봉착할 때마다 우리 가족은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눈물로 간구했어야만 하였습니다. 그러한 위기의 순간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셨는데, 그러한 경험들이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신뢰를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굳건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어려운 일들이 닥칠 때마다 우리 가족은 서로가 격려하고 위로하였고, 그것은 아름다운 사랑의 열매가 되어 우리의 가정 안에 풍성하게 맺혔습니다. 비록 방주 짓는 일이 매우 어렵고 희생을 요구하는 일이긴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순종하였습니다. 우리들 자신의 순종과 희생 자체 때문에 홍수의 때에 구원받는 것은 아니지만, 단순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 결과 때문에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구원의 방주 안에서 우리는 피난처를 찾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행한 행함과 순종의 댓가로 하나님의 구원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신뢰하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에 순종할 뿐 입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방주 짓는 일을 조롱하고 야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 가족이 이렇게 큰 방주를 지어야만 되는지에 대한 정확한 이유를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하게 아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 모두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입니다. 우리 가족은 그분의 사랑과 지혜를 거절하기 원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오직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길만이 우리의 안전을 보장하기 때문이죠. 믿음은 게으름과 불순종에 대한 이유가 될 수 없으며, 방종에 대한 핑계가 될 수도 없습니다. 순종은 하나님께서 마련해 놓으신 구원의 계획에 인간의 입장에서 감사한 마음으로 협조하는 것입니다. 순종이 없는 믿음으로는 하나님께서 이미 마련해 놓으신 구원의 계획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며(약 2:17),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기 때문이죠(약 2:22). 여러분들이 빠져 있는 가장 큰 자기 기만은, 자신의 삶이 아무리 부도덕하든지 간에, 그리고 자신이 알고 있는 하나님의 뜻과 율법에 불순종하는 생애를 살지라도, 진리에 동의하고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얻게 된다는 생각입니다.

성직자들 : “노아여, 우리의 생각은 당신의 생각과 다르오. 당신은 바리새적이고 율법주의적입니다. 우리는 앞으로도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에 순종하려고 애쓰는 것은 율법주의라고 설교할 것이며, 우리의 행함과 순종에 상관없이 하나님께서는 오직 믿는 자들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가르침을 전파할 것입니다. 당신의 신앙은 믿음이 아니라 자신의 쌓은 공로와 행위에 의하여 구원을 얻고자 하는 행함 위주의 율법주의입니다.

이것이 노아와 성직자들 사이에 있었던 마지막 대화이다. 얼마 후, 홍수가 왔으며, 노아의 신앙을 비웃고 조롱하던 사람들과 성직자들은 아무런 피난처도 발견하지 못한채 물 속에 잠기고 말았다. 그 사건이 있은지 수천년 후에 사도 바울은 노아 홍수가 주는 교훈을 되새기면서 노아의 믿음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하였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의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히 11:7.

그리스도인 형제 자매들이시여, 역사 이래로 없던 엄청난 마지막 심판이 우리들 앞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제는 “믿기만 하면 구원 얻을 수 있다”는 잘못된 인상을 심어주는 어떤 성직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말아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얻지만, 심판은 우리의 행위에 따라서 베풀어진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죄와 세상을 이기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생애로 우리의 삶 전체를 이끌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한 믿음은 가짜입니다. 구원을 위하여 방주를 짓되,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신 정확한 청사진대로 지어야 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추측하여 짓는 방주는 마지막 환난이 왔을 때에 결코 피난처가 될 수 없기 때문이죠.
                     

Q & A

문: 신약시대의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십계명에 구속 받을 필요가 없다는 말을 종종 듣게 되는데 정말 그런가요?

답: 개신교회가 세워진 이후 수 세기 동안 기독교회는 십계명의 준수를 매우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정직하게 말해서, 오늘날의 기독교회가 세속에 물들어 감에 따라서 계명과 진리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는 가르침들이 퇴락해 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비록 현대 기독교회는 하나님의 법에 대한 중요성을 올바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개신교회를 세우고 키워온 종교 개혁자들과 선구자들은 계명과 순종에 관한 문제를 강조함으로써, 교회를 세속과 악의 조류로부터 보호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개신교회의 몇몇 선구자들의 견해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 칼빈 :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이 우리를 율법의 권위로부터 해방시켰다고 상상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법은 그리스도인의 생애가 거룩한 삶으로 흘러가고 있는지를 판단하는 영원불변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공의를 포함하고 있는 율법은 마땅히 존재해야만 하며 변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법은 그 권위에 있어서 조금도 감소되지 않았다. 우리는 하나님의 법에 대하여 언제나 동일한 존경과 순종을 표해야만 한다.” Commentary on a Harmony of the Evangelists, trans by William Pringle

마틴 루터 : “하나님의 법이 폐지되어야 한다는 이론이 어떻게 나올 수 있는가? 나의 논리로는 그와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없다. 법이 폐지되었다는 논리를 주장하는 사람을 만나서 그가 어떻게 그러한 말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들어보고 싶다. 죄에 묶여서 죄를 범하고 있는 사람이 어떻게 법을 없애 버릴 수 있단 말인가?... 법이 없는 곳에 어떻게 죄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누구든지 법을 없애려고 하는 사람은 죄를 없애려는 것과 같다.” Wider die Antinomer” in Sammtliche Schriften, ed. By Johann walch vol.20, cols. 1613, 1614

드와이트 무디: “호렙산에서 모세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십계명은 구약시대 이후로 지금까지 인간을 구속하고 있다… 사람들은 십계명이 여전히 우리들을 묶고(구속하고) 있다는 사실과 그것을 범하는 죄에는 반드시 형벌이 따른다는 사실을 이해해야만 한다… 바울은 말하기를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사랑이 율법을 폐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Weighed and Wanting, p 1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