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그대도 물 위를 걸을 수 있다!

그대도 물 위를 걸을 수 있다!


물 위를 걸은 베드로

그대는 물 위를 걸을 수 있는가? 물론 그대는 걸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대 스스로 걸을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대가 물 위를 걸을 수 없다고 믿는 그 믿음이 그대로 하여금 물 위를 걸을 수 없도록 만들고 있다.

그대는 예수께서 그대에게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능력을 주실 수 없다고 생각하는가? 물론, 언제나 그리고 누구나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대에게 물 위를 걸어서 오라고 말씀하시면, 그대도 걸을 수 있지 않은가?

새벽 미명의 갈릴리 바다를 연상해 보자. 희뿌연 회색빛 안개를 뚫고 다가오는 희미한 존재가 있다. 배 위에는 무서워 떨고 있는 열두명의 남자들이 있다. 그 때, 파도를 가르며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니 두려워 말라.” 생기를 되찾은 베드로가 재빨리 말하기를, “주여, 만일 당신이시거든 나로 물 위를 걸어 당신께 가게 하소서.” 예수께서는 즉시로 “오라!” 고 말씀하셨다. 베드로는 차갑고 시퍼런 파도가 치솟아 오르는 것을 보았다. 그는 자신과 예수님과의 거리를 측정해 보았다. 그는 생각하기를, “아니,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내가 어떻게 물 위를 걸어.” 그는 망설였다. 순간적으로 의심이 그를 삼키워 버렸다. “지금까지 어떤 사람도 물 위를 걸었던적이 없었쟎아!”

이러한 장면이 베드로에게 일어날 뻔했다. 그는 검푸른 바다 속을 내려다보면서 움추러들 수 있었다. 그의 믿음은 시작도 하기 전에 힘을 잃고 사라질 수 있었다. 만일 베드로가 파도 위로 그의 발걸음을 내밀지 않았더라면, 베드로가 물 위를 걷는 장면이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을 것이며, 그것을 통하여 믿음에 관한 놀라운 교훈을 배울 수도 없었을 것이다. 믿음은 물 위를 걷는 것과 같은 것이다.
                               

실에 묶여 있는 코끼리의 믿음

한번은 동물원을 방문했었었다. 그 곳에서 높이가 1미터도 채 안되는 한 거대한 코끼리가 울타리 안에서 어슬렁 거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코끼리는 이리저리 움직이며 서성거리고 있었지만 한쪽 다리에 얇은 쇠사슬이 묶여져 있었고, 쇠사슬은 작은 말뚝에 매여져 있었다. 코끼리를 지키는 사람이 그토록 약한 구속력을 가지고 코끼리를 붙잡아 둘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사실이 내게는 우스꽝스럽고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사람을 실로 묶어서 성냥개비와 같은 말뚝에 매어 놓은 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매여져 있는 코끼리를 계속해서 보고 있는 동안, 코끼리에 대한 구속력이 확실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코끼리를 지키는 사람이 나타나자, 나는 그에게 이처럼 작은 쇠사슬과 말뚝을 사용한 이유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그는 말하기를, 그 코끼리는 힘없는 애기처럼 울타리 안에서 잘 구속당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코끼리가 모든 구속력, 즉 울타리와 쇠사슬을 극복하고 도망할 수 있는 충분한 힘을 소유하고 있지만, 자신이 그런 일을 결코 할 수 없다고 생각하도록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지금도 쇠사슬과 말뚝을 힘없이 뽑아버리고 달려나갈 수 있지만, 그렇게 하기엔 자신을 구속하고 있는 힘이 너무나 크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감히 그러한 도전조차 하지 않는 것이었다.

실제에 있어서 코끼리는 쇠사슬과 말뚝에 의해서 구속당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믿음에 의해서 구속당하고 있는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 역시, 적고 연약한 쇠사슬과 말뚝이 코끼리의 자유를 빼앗은 것처럼, 그들의 삶에 있어서 반신 반의 하는 믿음으로 인해서 죄와 시련에 대한 승리를 잃버린채 살아가고 있다.
                          

나의 경험

나 역시 과거에 자유를 빼앗긴 코끼리와 같은 경험을 하였다. 나는 20살이 채 되기 전인 청소년기에 침례를 받았다. 그 당시 나는 매우 신실하여서 100% 진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소원했다. 침례를 받기 위한 준비로 성경 공부를 시작했는데, 그 공부는 믿음은 무엇이며, 어떻게 사는 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생애인가에 대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일련의 성경 공부 후에 침례를 받게 되었고, 결국 나의 이름은 교회 명부에 올라가게 되었다. 그 때부터 나의 인생에 있어서 자아와 죄에 대한 치열한 투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사단의 강력한 동맹자인 자아와 죄는 진짜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하는 나의 결심을 쉽게 허물어뜨렸다. 패배감과 실망이 나를 압도하였다. 젊은 시절 동안, 나는 계속해서 교회 안에 머물러 있었지만 나의 실망과 좌절의 곡선은 아래 위로 계속해서 오르내렸다. 어떤 때는 심하게, 어떤 때는 약하게....

그러나 여전히 나는 신실하였고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하는 나의 소원은 계속되었다. 그러는 동안에 나는 신학교의 학생이 되었고, 또한 목사가 되었다. 성경을 연구할 때마다 나는 죄를 정복할 수 있는 분명한 가능성을 엿보았지만, 유혹과 시험에 대한 만성적인 패배감에 시달려온 나는 내 자신의 입장을 합리화할 수 있는 성경절들을 찾으려고 노력하였다. 겉으로는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가운데 최선을 다하여 투쟁하겠다는 결심을 되풀이 하였지만, 실제에 있어서 죄에 대한 승리를 전혀 기대하지 않은 상태로 살아가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쇠사슬은 만들어졌으며, 말뚝은 땅에 점점 깊이 박히기 시작하였다.

죄에 대한 승리를 약속하는 수많은 성경절들을 읽었지만, 그러한 말씀과 나의 연약한 경험 사이에서 나는 깊은 혼돈 가운데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하여 결국에는 성경에 기록된 승리를 약속하는 말씀들을 내 자신의 경험에 맞추어서 해석하게 되었다. 지금도 성경책의 테두리 여백의 곳곳에는 당시에 내가 가졌던 의문과 다른 의미로 해석하려고 애썼던 노력이 여러가지 표현으로 남아 있는데, 그것은 성경이 말하고 있는 죄에 대한 승리의 약속과 전혀 상반되는 것이었다. 나는 죄에 대한 승리가 실제적으로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성경은 죄로부터의 자유를 약속하고 있었지만, 나는 계속되는 패배의 경험에 의해서 묶여지고 철저하게 길들여져 있었다.

나는 물 위를 걸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인간은 결코 물 위로 걸을 수 없다고 단정지었기 때문이다. 나도 물 위를 걸을 수 있다는 충분한 증거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만, 나는 그것들을 믿을 수 없었다. 나는 그 약속과 증거들을 받아들일 수 없었는데, 왜냐하면 과거에 나의 거듭나지 않은 육적 경험을 통하여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나는 성경의 약속과 증거보다는 내 자신의 경험을 더욱 신뢰하였다.

내가 물 위를 걸을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실험실에서 간단하게 증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니, 구태어 실험을 할 필요도 없다.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날마다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을 통해서 그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베드로가 물 위를 걷기 전까지, 사람들은 인간은 결코 물 위를 걸을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세상에서 인정받고 있는 보편적인 수압의 법칙에서 해방된 자들만이 물 위를 걸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우리는 믿음이 지식을 앞서간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지식과 경험을 통하여 믿음을 제한해서는 안된다. 인간은 언제나 “먼저 나에게 증거를 보여 주십시요! 그러면 믿겠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믿어라, 그리하면 내가 네게 증거를 주겠다”라고 말씀하신다. 만일 베드로가 믿음을 활용해서 예수께서 명하신대로 행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물 위를 걸을 수 있다는 지식을 소유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믿음을 실행에 옮김으로서 자신도 물 위를 걸을 수 있다는 지식을 얻게 되었다.
                                  

오라!

“만일 주님이시거든 내게 물 위를 걸어 오라고 말씀하소서.” 베드로의 호소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허락이 아니라, 명령이었다. “오라!” 예수께서는 그 이상의 어떤 다른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설명을 부가하지 않으셨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짧은 명령에 의존하여서 확신을 가져야만 하였다. 그러나 주님의 단순하고도 짧은 명령은 베드로에게 영감적인 확신을 불러 일으켜 주었으며, 베드로는 신속하게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였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주 사용하시는 방법 중의 하나이다. 그분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에, 그것은 자주 구체적이 아닌 부르심으로 우리에게 들려온다. 성경에 나와 있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살펴보자;

아브라함의 부르심: “네 아들, 곧 네가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이제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산중에서 내가 네게 알려 줄 한 산에서 그를 번제로 드려라” (창 22:2). 이 성경절에는,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알아차릴 수 있을만한 내용이 담겨져 있을 뿐이다. 그 이상의 어떤 것도 없다.

베드로와 안드레의 부르심: “예수께서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하는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을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마 4:18,19. 이것이 그 두 사람을 부르신 말씀의 전부이다.

마태의 부르심: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지나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마 9:9. 여기서는 오직 두 단어만을 말씀하셨다.

앉은뱅이의 부르심: 38년 동안, 한 앉은뱅이가 베데스다 연못으로 매일 들려져왔는데, 그는 연못이 요동칠 때에 치유를 얻고자 하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요 5:6~9.

사울의 부르심: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이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여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행 9:3~6. 이것 역시 매우 극적이고 놀라운 경험치고는 그다지 많은 설명이 없는 장면이다.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믿음

위에서 언급한 모든 경우들에서, 예수께서는 믿음을 활용해서 당신의 짧고 단순한 명령에 순종해야 할 각 사람들을 남겨둔채 그 자리를 떠나셨다. 우리가 성경에 나타난 이러한 예화들을 생각해 볼 때, 예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큰 믿음을 요구하신다는 사실이 뚜렸하게 드러난다. 그 대표적인 예로서, 주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직접 행하셨던 것을 제외하고는 어떤 사람도 경험한 적이 없는 불가능한 행동을 당신의 제자인 베드로에게 요구하셨던 사실을 들 수 있다.

표면적으로는, 주님께서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의 길을 쉽고 평탄하게 만들기 위해서 어떤 특별한 노력도 기울이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그분께서는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을 수 있다는 과학적 가능성을 설명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삭의 생명을 취하지 않으시겠다는 보장을 사전에 약속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베드로와 안드레와 마태에게 먹고 살만한 적당한 수준의 월급을 지급하겠다는 보증을 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따르고자 하는 자들에게 확실한 믿음을 요구하셨다. 그리하여 예수께서 요구하시는 믿음을 행사하기 위해서, 그들은 전적인 헌신과 굴복을 해야만 했다. 바로 이러한 점이 주님께서 부르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결국에는 그분을 떠나가게 되는 이유이다.

그분의 명령은 그 때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장황한 설명을 포함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음성을 직접 귀로 들을 수 없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성경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다. 그것은 우리의 양심을 통해서 영혼을 울리는데, 그 소리는 흔들리지 않는 권위를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것은 매우 조용하고 은은하게 우리의 귀를 울린다. 우리가 이러한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게 될 때, 우리는 아브라함, 베드로, 안드레, 마태, 중풍병자, 그리고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주님의 말씀에 즉시 순종하여, 배에서 내린 다음 물 위를 걸어야 한다. 혹시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적이 없는가? “친구여, 네가 사랑하는 그 직장, 그 취미, 그 어떤 것을 내가 지금 너에게 알려주는 산 위에서 번제로 나에게 드릴 수 있니?”

만일 주님께서 결혼한지 15년만에 새 집을 장만한 그대를 찾아와서 “네가 가진 모든 것을 놔두고 나를 따르라!”고 부르신다면, 그대는 어떤 반응을 나타내겠는가? 주님께서 조용히 나를, 또는 그대를 찾아와서 “나를 따르라!”고 지금 말씀하신다면, 그대와 나는 그분의 말씀을 믿고, 굴복하여, 순종하겠는가? 바로 이러한 것들이 주님께서 그대와 나에게 요구하시는 믿음이다.
                                        

믿음을 성장시키는 비결

믿음과 헌신, 그리고 굴복은 결과적으로 모두 동일한 것이다. 여기서 굴복이란, 나의 뜻과 그리스도의 뜻이 서로 다를 때, 나의 뜻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뜻을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믿음이란, 그리스도께 자신의 모든 것을 의탁할 수 있는 전적인 신뢰이며, 동시에 그것은 굴복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만일 그대가 믿음이 있다면 그대는 굴복하게 될 것이고, 그대가 굴복한다면 그대는 그러한 경험을 통해서 더 큰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게 될 것이다. 계속적인 굴복없이 계속적인 순종을 기대할 수 없으며, 계속적인 믿음의 성장도 기대할 수 없다.
베드로의 믿음은 그의 순종에 의해서 시험받았다. 믿음은 언제나 순종을 통해서 시험받는다. 사실, 순종만이 믿음의 진실성을 증명하는 시금석이다. 그래서 야고보는 다음과 같이 말했던 것이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런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뇨?” 야고보 2:14. 야고보의 질문에 대한 답은 “결코 못한다” 이다. 야고보는 또 다시 다음과 같은 도전을 던지고 있다.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상동, 8절. 야고보는 구원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행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믿음과 굴복의 결과로서 나타나게 되는 행함과 순종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멕시코 인디언의 언어에는 “믿음” 과 “순종” 이라는 단어 사이에 아무런 의미의 차이가 없다. 그래서 멕시코 인디언들은 믿음과 순종의 의미를 구별해서 다르게 사용하는 사람들과 대화할 때에 적지않은 당혹감을 갖게 된다. “당신은 그것을 믿음에도 불구하고, 순종하지는 않을거죠?” 라는 질문에 대해서 멕시코 인디언들은 어떻게 대답할 바를 모른다. 멕시코 인디언처럼 우리도 그러한 질문에 당황하는가? 아니면, 그럴 수도 있겠거니 하고 당연하게 받아들이는가? 혹시 우리는 그 멕시코 인디언들을 천진난만한 바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가? 성경적으로 볼 때,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가 진실로 그분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지 않은가?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의심이나 타협하는 일 없이 당신께 순종할 수 있는 충분한 확신을 소유하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에 관한 증거들을 보여 주시고 들려 주시며, 당신을 찾고자 하는 자들이 확신을 가질 수 있을 정도의 증거들을 주신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에게 물 위를 걸으라고 말씀하실 때, 우리는 우리의 눈 앞, 또는 우리의 손 안, 그리고 우리의 발 아래와 같이 가까운 곳에서 항상 확실한 증거들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직 주님의 명령에 우리가 순종했을 때에만 그러한 증거들을 받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베드로가 실제로 물 위를 걸었을 때까지 그가 물 위를 걸을 수 있다는 보증을 받았었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신뢰할만한 명령인 “오라!”라는 말씀의 증거 외에 어떤 다른 증거도 없었다.

가끔 주님께서 우리에게 당신께 대한 완전한 신뢰심을 가지고 물 위를 걸을 것을 요구하시는 데에는 오직 한가지 이유가 있다. 그것은 우리가 물 위를 걷지 않는다면, 우리의 발 밑에서 느껴지는 물을 결코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순종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귀중한 체험을 소유하게 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순종을 통해서 얻게 되는 경험은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의 신뢰와 믿음을 더욱 더 깊고 높은 수준으로 이끌어 간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같이,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단순한 마음의 동의 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는 결심과 행동을 요구하신다. 그런데 그러한 행동을 하는데에는 믿음이 요구된다. 그러한 행동을 하는가 또는 하지 않는가에 따라서 그리스도께 대한 각 사람의 믿음의 상태가 드러나게 된다.
                       

물 위를 걷지 못하는 이유

안타깝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죄에 대해서 승리하기를 소원하며, 믿음이나 사랑과 같은 영적인 요소들을 소유하기를 원하지만, 어쩐일인지 그러한 것들을 소유하는 기쁨을 맛보지 못하고 있다. 왜 그런가? 왜냐하면 그들은 “주여, 나로 하여금 물 위를 걸어 당신께 가게 하소서” 라고 입으로는 외치고 있지만, 주님께서 “오라!”고 명령하시는 호소에는 결코 응답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주님의 명령과 부르심을 듣고 있지만, 두려움과 의심을 품은채 배위를 서성거릴 뿐이다. 그들 자신의 인간적인 결심과 노력에 의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고 애쓰지만 번번히 실패하고 만다. 그들은 자신의 힘으로는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에 결코 순종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대한 순종은 우리 자신의 능력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 결코 물 위를 걸을 수 없다.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어떤 것을 근거로 해서 순종하는 것이 아니고, 그분의 부르심과 명령에 순종할 수 있는 원천을 제공해 주시는 그분을 온전히 신뢰함으로서만 순종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물 위를 걷게 해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믿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것이다.
                             

믿음으로 행하는 순종

우리의 믿음은 순종에 의해서 시험받게 된다.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그가 무슨 말로 변명할지라도 믿음이 없는 것이다. 오직 믿는 자만이 순종할 수 있고, 오직 순종하는 자만이 믿음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순종으로 나타나는 믿음을 요구하신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해서 나왔을 때, 모세의 믿음으로 행한 순종이 홍해를 갈라지게 만들었다. 그와 같은 믿음이 없었다면, 홍해의 물결은 그들을 삼켜버렸고, 백성들은 애굽으로 되돌아 가야만 했을 것이다.

오직 믿음으로 행한 순종만이 엘리야로 하여금 아합 왕에게 담대히 나아가 삼년 반 동안 이스라엘에 비가 오지 않을 것이라는 기별을 전할 수 있게 하였다. 오직 믿음으로 행한 순종만이 온 이스라엘 백성을 갈멜 산으로 모아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옹호할 수 있게 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의 순종을 통해서 실패하지 않는 믿음을 백성들 앞에 전시하셨다.
오직 믿음으로 행하는 순종만이 베드로로 하여금 물 위를 걸을 수 있게 하였다. 그와 같은 믿음이 없이는, 결코 물 위를 걸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상식적인 생각으로는 인간이 물 위를 걸을 수 있다는 믿음은 너무도 바보스럽게 보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때 그가 순종하지 않았다면, 그는 자신이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다는 사실을 드러내었을 것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직 믿음으로 행하는 순종만이 우리를 죄에 대한 승리의 생애로 인도해 준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적인 능력은, 우리로 하여금 물 위를 걸을 수 없게 만드는 물의 수압 법칙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킨다. 세상에서 인정받고 있는 보편적인 수압의 법칙에서 해방된 자들만이 물 위를 걸을 수 있다. 율법이 육신이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육신으로 보내어 물 위를 걷게 하셨다. 그리하여 우리도 그분처럼 물리적인 수압의 법칙이 아닌 하늘의 믿음의 법칙에 의거하여 물 위를 걸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로마서 8장 2~4절이 말하는 “생명의 법”이다.
                         

너희의 믿음대로 될지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을 너무나 가볍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또는 의식적으로 창조주 하나님을 우리 마음대로 제한하며, 해석한다. 그리하여 그분께서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실 때, 우리는 그것을 “가서, 가능한한 적게 죄를 범하라”로 해석한다.

이와 같은 태도 때문에, 우리의 믿음은 너무나 약해지고 병들어서 우리로 하여금 물 위를 걷도록 허용하지 않는다. 심한 경우에는, 물 위를 걷지 못할 뿐만 아니라 확신을 잃어버리고 아예 배를 포기하고 떠나려고까지 한다. 그러한 상태로는 도무지 죄의 물결을 감당할수 없다. 그러한 상태에 처하게 될 때, 우리는 종종 이렇게 생각한다. “죄를 승리한다는 것은 정말 불가능한 일이야. 물 위를 어떻게 걸을 수 있겠어?” 이러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계속해서 물속으로 빠져 들어갈 수 밖에 없다. “너희의 믿음대로 될지니라”라는 주님의 말씀은 그런 사람들에게도 적용되는 말씀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말한 것 중에는 두가지 사상이 함축되어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해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할 수 없다. 우리는 이러한 사상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는데, 그것은 “순종에 관한 모든 책임은 우리에게 있지만, 순종을 위한 모든 능력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이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었을 때,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가 할 수 없는 모든 일을 해주셨다. 그러나 베드로가 할 수 있는 것은 어느 것이라도 그를 대신해서 해주시지 않았다. 베드로는 스스로의 결정과 힘으로 배에서 뛰어 내렸다. 그 결과 그는 한 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었고, 계속해서 걸을 수 있었다. 베드로는 물의 부력을 전혀 이용할 수 없었지만, 예수께 대한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그 믿음을 근거로해서 베드로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실 수 있었다.

믿음이란, 자신의 인간적인 확신이 이루어 내는 자기 달성이 아니다.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약속에 대한 완전한 확신인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이러한 확신을 통해서 당신의 목적과 구원을 이루신다. 바로 이것이 물 위를 걷는 믿음이다. 물 위를 걷는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의 생애와 승리의 생애로 우리를 유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