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왜 복음을 전하십니까?


생계를 위한 전도

전도의 정신으로 가장 비열한 것은 전도를 직업으로 여기는 것이다. 바울의 말처럼 “일하는 자는 그 삯을 받음이 마땅하”지만, 가정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전도자가 된 사람이 있다면, 그는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살 길을 찾는 것이 목적이라면, 전도에 기울이는 노력과 정열을 다른 사업에 기울이는 것이 더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직업으로서의 전도는 가장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일이다. 몇 해 동안의 신학 연구를 과학이나 공학 분야로 돌리는 것이 더 나은 보상을 약속받을 것이다. 직업으로서의 전도는 보수가 적으므로 부적당하고, 보상을 염두에 둔 전도는 이미 전도가 아니기 때문에 부적당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전도 사업을 생계의 수단으로 하는 사람은 그의 설교와 가르침을 듣는 사람들이 전도자의 동기와 목적을 알아차리고 그의 설교를 전혀 신뢰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실망당하게 될 것이다. 세상에는 온갖 직업인이 그 나름대로 존경을 받지만, 전도를 직업으로 생각하는 전도자는 멸시의대상이 될 뿐이다. 신자들은 금전을 요구하지 않는 목사에게는 목사직을 주기 원하지만, 금전을 추구하는 목사에게는 자리를 내주지 않는다. 세상이 목사를 좋아하는 이유는 목사가 자신의 유익을 돌보지 않기 때문인데, 목사가 자신의 앞가림을 먼저 요구하면 세상은 그를 목사로 여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보수를 목적으로 하는 전도자는 사람들의 대우에 대하여 실망하게 되고, 사람들 또한 그러한 목회자에 대하여 실망하게 된다.

이러한 목사는 자신의 위치를 유지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지 않으면 처자식이 내일부터 굶주림에 울기 때문이다. 그러나 목사가 양심과 진리의 요구에 따라서 교회를 개혁하고 진리를 세우려고 하면, 그가 반드시 유지해야만 하는 자리가 위태롭게 되니 이를 어찌하겠는가! 그렇다고 해서 조용히 입을 다문채 불의를 묵인하면, 교회 안의 정의로운 사람들의 공격을 피할 길이 없다. 목사는 결국 어느 한쪽의 손을 붙잡아 주지 않으면 안된다. 결국, 자신의 생계비를 대줄 수 있는 사람들과 손을 잡게 되는데, 이로서 정의로운 사람들은 그 목사에게서 등을 돌린다. 또한 자신에게 매달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공급해 주는 사람들 역시 마음 속으로 목사의 비굴함을 멸시하기 때문에 그를 진정한 스승으로 대하지 않게 된다. 목사가 여기에 이르게 되면, 전도도 실패로 돌아가고 생계의 유지도 어렵게 된다. 그리하여 그는 하늘과 사람을 원망하면서 다시 회복할 수 없는 깊은 실망에 잠기게 된다. 이것이 전도를 직업으로 생각하는 목사들이 예외없이 걸어가는 길이다.
                                       

명예를 위한 전도

어떤 그리스도인은 명예를 위하여 전도를 한다. 인생 50에 공이 없으면 부끄럽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공을 세우고자 한다. 무력으로 세계를 제패할 힘도 없고, 천하의 관심을 집중시킬만한 재능도 없으며, 재물의 힘으로 재벌 소리를 들을 수 없다면, 유명한 전도자가 되어 천하를 유세한다면 그러한 성공이야말로 대정치가나 장군에게 비교할 수 있지 않겠는가! 사람의 마음을 잡아 흔들 수 있는 전도자!

혼탁한 정치계에 뛰어들어도 분주하기만 했지 얻는 것은 거의 없다. 어쩌다가 우주의 한 귀퉁이를 들여다 보고서 학문가로 자처해도 손에 들어오는 것은 없다. 그러나 비록 가난할지라도 선거 시절이 되면, 정치꾼들은 유명한 전도자의 위력을 알아 준다. 대개 바리새인들은 이러한 부류의 전도자들이었다. 프랑스의 리쉐리아나 마자렝 같은 사람들도 이런 부류의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위대한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도 명예를 위하여 종교 개혁의 검을 들었다고. 사실, 전도심과 명예심은 그 본질에 있어서 전혀 다르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그 둘 사이의 차이를 매우 구별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명예, 사람이 이것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버린 예도 적지 않다. 사람은 반드시 진리만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는 말은 역사적으로 볼 때에 사실이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랑에서 비롯된 전도심과 명예심에서 비롯된 전도심을 구별할 수 있을까? 결코 쉽지 않는 일이다. 사람의 일은 백년이 지나지 않으면 그 일의 옳고 그름을 정확하게 판별하기 어렵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의거해서 분별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고 말할 수 있다. 나무는 그 열매로 알 수 있으며, 양은 자기를 인도하는 목자의 음성을 구별한다. 성실한 사람은 성실한 사람을 식별할 수 있으며, 간사한 사람은 어떤 것이 간사함인지 누구보다도 잘 안다. 간사한 자들에게 존경받는 것, 바로 이것이 그가 간사한 인간이라는 강력한 증거이다. 어떤 전도자 주변에 간사한 자들이 모여 있는가? 그가 간사한 자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살펴보라.

명예를 위하여 전도하는 사람은 모략과 책략이 빠르고 강하다. 이에 반하여 성실과 곧은 마음은 곧바르게 말하고 곧바르게 행함으로써, 자신이 확신하고 있는 바를 정확하게 드러낸다. 명예를 추구하는 자는 이익을 추구하고, 곧바른 마음을 가진 자는 의를 추구한다. 명예를 원하는 자는 이기적인 계획을 세우고, 곧바른 길을 걷는 자는 모든 것을 하늘의 뜻에 맡기는 일편단심이 있다. 명예를 쫓는 자는 어떤 말을 할 때에 먼저 상대방의 지위나 성격을 살핀 후에 말하고, 곧바른 원칙을 따르는 자는 자신이 믿는 바를 사람들에게 분명하게 제시할 뿐이다. 명예를 위하여 전도하는 자는 불쌍하고 어려운 사람을 만날 경우 한마디 조언을 하고는 식사와 잠자리가 여느 때와 다름이 없지만, 곧바른 마음을 가진 자는 가련한 생각이 마음을 떠나지 않아서 그 사람이 구제되기까지 불편한 마음을 떨치지 못한다. 명예를 생각하는 자는 부자를 즐겨 방문하며 허식으로 가난한 자를 찾아보지만, 곧바른 생각을 가진 자는 가난한 자를 즐겨 돌아보고 부자 만나기를 꺼려한다. 명예를 찾는 자는 자신의 경쟁자의 몰락을 기뻐하지만, 곧바른 마음을 가진 자는 원수의 실패에도 눈물을 흘린다. 명예를 위해 사는 자는 자신에게 굽신거리는 자를 좋아하고 강직한 자를 싫어하지만, 곧바른 원칙을 따라 사는 자는 맹종을 미워하고 강직을 존중한다.

명예심은 전도 사업을 요란스럽게 치장한다. 그러기에 이러한 부류의 욕망을 가진 자들에게는 많은 원수가 생긴다. 교회 안에서 명예를 추구하는 자는 반드시 질투를 불러 일으킨다. 위대한 무사는 자신보다 강한 적을 존경한다. 우에스 겐신은 자신의 정적인 다케다 싱겐의 죽음을 듣고 금식하며 통곡했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 안은 그렇지 않다. 정적은 원수를 용서하지만, 종적은 결코 자신의 경쟁자가 설 자리를 마련해 주지 않는 것이 교회의 실상이다. 사회적인 죄인은 용서받아도 종적은 용서받지 못한다. 국사범은 감형될 수 있어도, 종적에게는 오직 중형이 있을 뿐이다. 타교파의 목사에게는 관용을 베풀지만, 같은 교단의 목사에게는 결코 용서를 베풀지 않는다. 무신론자들은 관용으로 대할지라도, 같은 교회의 종적에게는 결코 압박의 손을 늦추지 않는다. 속좁은 종교인은 자신의 경쟁자인 종적을 땅 끝까지 쫓아가서 그를 치욕의 수렁에 밀어 넣고서야 마음을 누르러 뜨리는 것같다. 그러니 교회 안에서 명예를 추구하는 자여, 그대의 종적이 그대를 꺼꾸러 뜨리기 전에 명예심을 버리라. 교회 안에 감도는 살기를 피하고 싶은가? 그대의 명예심을 버리라. 비록 명예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지라도, 교회는 드러나는 사람을 싫어한다. 마호멧이 메디나로 피난간 것도, 그리스도께서 십자가형을 받은 것도 바로 이러한 교회의 정신에서 비롯된 비극이다.

대종교가는 명예를 위해서 살지 않는다. 마틴 루터나 낙스가 세상에 나온 것은 스스로의 야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이었다. 누가 교계의 시끄러운 싸움과 뒤에서 목을 잡고 끌어내리는 질투를 감당할 것인가? 명예를 쫓는 자여, 하나님이 그대를 사랑하니 그것으로 만족하는 정신으로 살라. 여러 사람들 앞에 그대의 누추한 모습을 드러내기를 두려워 하라. 이것이 참 전도 정신이다. 교회에서 자신의 명예를 세우려고 하는 자는 아직 교회가 무엇하는 곳인지를 모르는 자이다. 다시 말하지만, 명예를 얻고자 하거든 교회 안에서 일하지 말라. 왜냐하면 그대에게 교회 전체의 질투가 쏟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명예를 세우려거든 차라리 의회나 정치계로 가라. 그 곳에선 명예를 세운다고 해도 세상이 그대를 배척하지 않을 것이다. 총탄과 폭연 속에서 군인의 명예를 세운다면, 세상은 오히려 그대를 존경할 것이다. 그대, 미련한 자여, 왜 교회에서 명예를 세우려고 하는가? 그대는 지금 미련의 극치를 걷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교회를 위한 전도

직업을 위해서가 아니요, 또한 명예를 위해서도 아니지만, 오직 교회만을 위하여 일하려는 사람들이 간혹 있다. 사람에게는 본성적으로 당파심이라는 것이 있다. “내가 속해 있는 당, 나는 그것을 위해 일해야 한다. 나의 당을 세우고 다른 사람의 당을 꺼꾸러 뜨려야 한다. 내 당을 확장함으로써 다른 사람의 당을 제압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전도하는 사람이 있다. 이러한 정신으로 전도에 임하는 사람들 중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찬탄과 존경의 대상이 되어 왔다.

독일의 30년 전쟁도 당파심에서 시작되었고, 유럽 역사의 1천년 갈등도 당파심에서 비롯되었다. 아시아를 복음으로 거머쥐려던 제수잇의 열심과 희생 또한 당파심이다. 당파심은 결코 가볍게 볼 것이 아니다. 당파심은 새로운 교단을 만들어 냈고, 새로운 국가를 일으켰다. 그러나 당파심은 박해의 정신을 그 속에 품고 있다. 당파심의 원 뜻은 세계를 나의 당에 굴복시키는데에 있다. 그래서 당파심을 품은채 교회를 위하여 전도하는 자는 다음과 같은 정신을 갖고 있다. “세계는 기독교를 받아들여야만 한다. 기독교이어야 할 뿐 아니라 내가 믿는 기독교이어야 하며, 무엇보다도 내가 속한 교회여야 한다.” 이러한 당파심에 이끌려 하는 전도는 자신이 속한 교회를 위한 전도이다. 자신이 믿는 신조를 거절하는 사람은 핍박하고 외롭게 따돌리는 것이 당파심에 근거한 교회 사랑의 실체이다.

그러나 당파심의 바닥은 욕심이다. “나”의 욕심을 한 단체를 통하여 성취하고자 하는 것이 교회를 위한 전도의 실체이다. 다시 말하자면, 자신이 속한 당을 이용해서 “나”를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어디에 이단이 있다고 하면, 전혀 다른 교리를 가지고 있는 교회들이 연합해서 한 교회를 공격하는 것이다. 기독교회의 수십여개의 교파가 연합하여 불교나 회교에 맞서는 따위가 바로 이러한 일들이다. 그들의 목적은 단지 내 뜻을 확장하는데 있다.

시인 코울리지는 말했다. “진리보다 기독교를 더 사랑하는 사람은 기독교보다 자기 교회를 더 사랑하는 사람이며, 그런 사람은 다른 누구보다도 자기를 더 사랑하는 사람이다.” 모든 것 위에 진리가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위하여 전도하는 사람은 모든 것 위에 자신과 교회가 있다. 그러므로 교회를 위한 전도는 자기를 위해서 하는 전도이며, 명예를 위한 전도와 일맥 상통한다. 교회를 위한 전도는 전도지 돌리기 경쟁을 야기시키며, 신자들의 숫자를 늘리기 위하여 아직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을 끌어다가 물 속에 잠그는 침례를 베푼다. 그 결과, 교회의 질서와 표준은 땅에 떨어지게 되고, 세속과 유행이 교회 안으로 밀려들어 옴에 따라서, 교회는 한 사람은 심판하고 한 사람은 바로 잡는 비판과 논쟁의 터로 변해 간다. 교회는 그 원래의 목적인 심령의 구원, 선행의 실천에 대해서는 생각할 여유가 없게 된다. 이것이 교회 성장을 목적으로 하는 전도의 피할 수 없는 결과이다.
                               

국가를 위한 전도

사리 사욕이나 명예 때문이 아니라, 또는 교회에 대한 얄팍한 충성 때문이 아니라, 국가를 위해서 하는 전도가 있다. 여기에 이르면 전도는 사욕을 떠나서 대의와 공익의 성격을 띄게 된다.

애국심은 사람의 본성이다. 자기가 태어난 나라에 대한 정은 어머니에 대한 정과 같다. 나를 생각하기에 앞서 국가를 생각하는 것이 사람의 마땅한 도리이다. 전도자는 애국자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종교는 한 국가에 제한되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종교는 그 성질 자체가 우주적이기 때문이다. 종교의 직접적인 목적은 국가를 안위하는 것이 아니다. 종교는 사람의 영을 다루는 일이며,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밝혀서 어떻게 구원의 길을 걸어가야 되는지를 밝히는 일이다. 만일 그리스도인이 애국을 논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의무로서 논하는 것일 뿐이지, 종교를 통하여 국정에 간섭하여 종교와 정치를 혼돈시키면 그것보다 더한 재난은 없을 것이다.

중세기 동안에 천주교회와 로마제국이 손을 붙잡음으로써, 천년 동안의 암흑이 유럽을 뒤덮었던 것처럼, 국가와 종교의 연합은 반드시 핍박과 순교를 몰고 온다. 종교는 정치가 아니다. 정치는 사람의 일이지만, 종교는 하나님의 일이다. 하나님을 사람의 일에 이용해서는 안된다. 그러기에 국가를 위해 전도하는 자는 하나님을 사람의 일에 이용하고 싶은 유혹과 시험에 빠지기 쉽다. 정치인들은 종교 세력을 이용해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지키려고 할 것이며, 종교인들은 정치 세력을 등에 엎고 자신들의 교세를 확장시키려고 애쓰게 된다. 그러므로 국교(국가의 종교)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종교이다. 어떤 종교인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들의 종교를 국교로 만들어서 교세를 확장하고자 하지만, 이러한 사람들은 종교의 본질조차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이다.

이러한 정신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대개 사회 개혁과 국가 혁신이라는 표어를 내건다. 그들은 종교는 현세적이어야 하기 때문에 인간 사회를 개혁하여 부조리와 부패가 없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종교를 통하여 국가를 구하고자 한다. 그러한 사람들이 말하는 바가 전혀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종교의 근본인 영의 세계를 버리고 현세에만 집착한다면,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위대한 도를 일개 국가에 가두어 놓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이러한 종교에서는, 영감적 설교 대신에 정치와 시사 연설이 예배 시간을 채우게 되며, 신자들의 제자 훈련은 국가 장래에 대한 토론회로 대체되고, 새벽 기도회는 눈물어린 회개와 간증 대신에 국가개혁을 위한 기도회로 바뀌게 된다. 그들이 최대의 목표로 삼는 것은 고작해야 국가의 법률을 자신들이 원하는대로 개정하는 것이다. 비록 그들이 목적한 바가 성취된다고 할지라도 국가의 구성원인 사람의 이기적 마음이 근본적으로 변화되지 않는 한, 국가 사회의 근본 문제는 여전히 남게 된다.

온 우주에서 가장 고상한 목적을 가지고 있어야 할 전도자가 정치가의 흉내를 냄으로써, 전도자의 이름을 더럽혀서는 안된다. 정치 개혁이 목적이라면, 정치가가 되어야 하며, 사회 개혁이 목적이라면, 사회 사업가가 되어야 한다. 만일 그대가 종교를 통하여 사회와 국가를 개혁하고자 한다면 그대의 뜻은 가상하지만, 그대는 목사의 길을 떠나야 한다. 왜냐하면 종교의 목적은 길잃은 영혼들을 죄로부터 구원하는 것이지, 국운을 증진시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위한 전도

전도는 하나님을 위해서 할 때야 비로소 순수한 종교 사업에 접어들게 된다. 이것이 바로 다윗이 말한 “주의 집을 위한 열정이 나를 삼킨다”는 정신이다. 또한 이것이 사도 바울이 말한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강권한다”는 정신이며, 이것이 “너희는 인간이 세운 모든 제도에 주(진리) 안에서 복종하라”고 권면한 베드로의 정신이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 이외의 동기에서 출발하는 것은 모두 헛일이요, 장난이다. 그것은 전도라고 할 수 없다. 어떤 사람은 말할 것이다. “하나님을 위해서 전도하지 않는 전도자가 어디 있겠는가?”라고. 그렇다!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지 않는 전도는 지금까지 단 한번도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을 “위해서만” 하는 전도, 내 평판과 생명을 먼지로 여기고, 내 명예를 분토에 묻어버리는 전도는 많지 않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는 혈육과 상의하지 않고 단순한 마음으로 하늘의 음성을 믿으며, 다수의 반대를 개의치 않고, 사업의 성공 여부에 관심을 두지 않으며, 오직 하늘의 명을 쫓는 정신으로 전도하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진짜 전도자의 숫자가 적은 이유가 있다. 하나님을 위해서만 전도하려면 내가 죽어야 하기 때문이다. 당파심에 기초한 교회를 위한 전도나 애국심에 기초한 국가를 위한 전도에는 아직도 이기심이 섞여 있으며, 자아가 살아 있다. 자기에 죽고 세상에 죽어야 비로소 하나님을 위하여 살 수 있게 되며, 모든 결과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게 된다.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낸다. 두려움이 없는 자는 심령의 자유와 평안을 얻은 자이다. 하나님을 위하여 하는 전도에는 걱정이나 전략, 수단 등으로 인하여 혼란케 되는 일이 없다. 세상이 전도자를 따라야지 전도자가 세상과 야합하여 안일을 꾀해서는 안된다. 온 세상 모두가 전도자에 맞서서 반대한다고 할지라도, 전도자는 혼자 서서 진리를 지켜야 한다. 이러한 전도자에게는 태산을 움직이는 태연함이 있으며, 성난 파도를 잠잠케 하는 평안이 있다.

전도는 하나님만을 위해서 해야 비로소 인간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 대세의 흐름을 역행하고, 대다수의 위협을 두려워 하지 않는 자만이 이웃과 세상을 위하여 유익을 줄 수 있다. 하나님만을 위하여 전도한다는 말은 뜬 구름 위에 앉아서 신학을 분석하고 성령의 기적을 기대한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만을 위하는 전도는 자신의 교리와 맞지 않는 자를 괴롭히고 출교시킨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을 위한 전도라는 이름 하에 십자군을 파병하여 그리스도인들을 살해했던 것이 하나님을 위한 전도가 아니다. 정신병자를 마귀의 화신이라고 해서 물 속에 집어 넣음으로써, 그리스도인의 의무를 실천했다고 믿는 것이 하나님을 위한 전도가 아니다.

하나님을 위한 전도에는 열심이 있는 반면에 동정과 사랑이 있어야 한다. 거기에는 성실과 정직과 충성과 겸손과 온유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만을 위한 전도에도 결핍될 수 있는 정신이 있는데, 그것은 병자들을 불쌍히 여기며, 가난한 자들을 돌아보고, 슬프고 외로운 자들을 껴안아 주며, 자신과 다른 사상을 가진 사람일지라도 관용하는 정신이다.
                              

사람을 위한 전도

사람을 위한 전도라는 말은 사람들의 요구와 기호에 맞춘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살기로 작정한 자가 어찌 사람들의 표정을 살피고, 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복음을 조작할 수 있는가! 인간적인 종교에 빠져 있는 자들은 감정적인 사랑에 빠져서 공의와 율법을 소홀히 여기며,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악을 다루는데에 있어서 매우 나약한 모습을 드러낸다. 인류를 향한 진정한 사랑은, 먼저 하나님께 대한 깊은 경외심을 마음에 간직한 자들만이 얻을 수 있는 선물이다.

그러나 사람은 사람들을 외면한 상태에서 하나님만을 섬길 수 없다. 인간은 사람과 자연을 통해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우상 숭배자들은 하늘에 걸려 있는 해와 달과 별을 섬기지만, 비록 그러한 것들이 창조주 하나님의 솜씨라고 하지만 인간의 마음과 양심을 의탁하기에는 부족하다. 그리스도인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지만, 자신의 헌신과 희생을 바칠 하나님의 모습은 볼 수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단 말인가?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눈 앞에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제물과 희생을 받을 대리자를 이 세상에 두셨다. 우리가 숭배할 하나님은 전혀 형체가 없는 존재가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신앙의 목적이 될 수 있는 분명한 대상을 가지고 있다. 거기에 봉사함으로써 하나님께 봉사할 수 있고, 그것을 섬김으로써 하나님을 섬길 수 있으며, 우리 마음의 전부를 거기에 쏟아 부음으로써 우리는 직접 하나님과의 교제를 느낄 수 있다. 하나님은 이것을 통하여 우리에게 응답하시고, 우리는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모습을 영안으로 볼 수 있다. 이 우상은 하나님과 진리의 말씀이 허락하는 아름답고 귀한 우상이다. 나의 전부를 바칠 수 있는 이 우상이란 무엇일까? 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바쳐서 성경이 지정한 이 우상을 섬기리라.

북두칠성이나 북극성이 하나님이 계신 장소 아니다. 천둥이 쳐서 산천초목이 흔들릴 때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시간이 아니다. 갓난아기가 말구유에 누운 곳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임하신 장소이다. 하나님은 사람과 함께 하신다. 사람을 통하여 우리의 경배와 순종을 받으신다. 그러므로 사람을 섬기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며, 사람을 떠나서는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 다음과 같은 로욜라 공의 이야기는 우리 모두에게 한가지 의미있는 교훈을 제시해 준다.

“로욜라 공은 중세기 때에 한 성의 군주로서 열렬한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는 항상 하나님과 교회를 위하여 큰 공을 세우길 원했는데, 하루는 그의 마음에 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제자들과 함께 만찬을 나누실 때에 사용했던 금잔, 그러나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그 행방을 알 수 없는 금잔, 그것을 찾아낸다면 교회를 위하여 매우 의미있는 봉사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음 날 아침, 갑옷을 입고 말 위에 올라 앉아 용기 백배하여 성문을 나서는데, 때마침 문둥병을 앓는 자가 로욜라 공 앞에 나타나 엎드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동냥을 구했다. 로욜라 공은 성급한 말투로 ‘나는 하늘 아버지의 명을 받들어 구세주의 금잔을 찾으러 가는데 어찌 네가 나를 번거롭게 하느냐!” 문둥병자는 로욜라 공의 소매를 붙잡으면서 애걸하였다. 로욜라 공은 크게 노하며 금화 하나를 땅에 던진 후 급히 그 자리를 떠났다.

“이로부터 수십년 동안 로욜라 공은 유럽의 전지역을 구석 구석 뒤져서 금잔을 찾았지만 헛수고 였다. 드디어 그에게도 가난이 닥쳐 왔으며, 머리에는 하연 서리가 내리게 되었다. 마침내 로욜라 공은 자신의 뜻이 도저히 이루어지지 못할 것을 깨닫고 고향 땅에 돌아가 여생을 마치리라고 마음 먹었다. 그가 다시 고향의 성문 앞에 이르렀을 때는 눈이 내리고 강물은 얼어 있는 추운 겨울이었다. 다 낡은 옷을 걸치고 손에 지팡이를 짚고 터벅 터벅 걸어가고 있는데, 다시 문둥병자를 만났다. 그 얼굴을 살펴보니 수십년 전에 큰 뜻을 품고 떠날 때에 그의 말 앞에 엎드려고 구걸하던 거지였다. 환난과 고생으로 인하여 꺽어진 그의 마음 속에서 깊은 동정심이 올라왔다. 그러나 그는 이제 돈을 주고 싶어도 줄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베낭 속에 가지고 있던 빵 한 조각을 꺼내어 절반을 잘라 거지에게 주면서 ‘나는 이제 이 빵밖에 없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이것을 받게나’ 라고 말했다. 그리고 허리에 차고 있던 쪽박을 꺼내어 강가로 내려가 얼음을 깨고 냉수를 떠다가 문둥병자에게 주면서 ‘자비하신 주님의 이름으로 이것을 마시게’라고 말해 주었다. 로욜라 공의 친절을 받은 그 거지 문둥병자는 갑자기 그 모습을 바꾸어 영광스러운 구세주의 모습으로 로욜라 공의 앞에 섰다. 감개무량한 모습으로 넋을 잃고 서있는 로욜라 공을 향해 구세주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니 두려워 말라. 거룩한 잔을 찾으려고 여러 나라를 헤메어도 소용없다. 보라. 잔은 여기에 있다. 강물을 길어 온 그 쪽박이 바로 금잔이다. 내게 떼어 준 빵 반 조각은 찢어진 나의 살이다. 이 냉수는 십자가 위에서 흘린 나의 피다. 가난한 자와 더불어 나누는 식사야말로 진정한 성찬이다.”

깜짝 놀라 깨어보니 꿈이었다. 로욜라 공은 드디어 깨달았다. 그렇다. 세상의 가난한 자가 그리스도이다. 가난한 자들을 섬기는 것이 그리스도를 섬기를 것이다. 그는 자신의 창고를 개방하여 성밖에 있는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일로 평생 낙을 삼았다. 그 결과 그가 다스리던 모든 마을 사람들은 평안하였고, 로욜라 공 역시 기쁨과 영혼의 평안을 가지고 일생을 마쳤다.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들 속에 계신다. 비단과 보석으로 치장한 왕자의 모습이 하나님의 모습이 아니라, 헐벗고 굶주린 자의 모습이 오히려 하나님의 모습에 가깝다. “내 형제 중에 가장 작은 자에게 행한 것이 내게 행한 것이니라” 마 25:40. 그리스도인은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고, 가난한 자에게서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참된 교회의 부흥은 언제나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교회의 봉사로 증거된다. 침례 요한이 그리스도에게 사자를 보내어 “오실 분이 당신이오니까?”라고 물었을 때, 이 질문에는 “당신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며, 구세주이십니까? 만일 그렇다면 내게 그 증거를 보여주십시요” 라는 의심이 내포되어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주기 위하여 신학적 논리를 사용하는 대신에 요한의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당신 자신의 봉사를 설명하셨다. “눈먼 자가 보며 절뚝발이가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해지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며 가난한 자가 복음을 듣는다.” 예수께서는 환자들의 치료 봉사와 함께 가난한 자들이 자신의 복음을 듣는다는 사실을 지적하셨다.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은 거짓 예언자는 가난한 자에게 뜻을 두지 않는다.

높은 사람에게 아첨하고, 은근히 부자 찾기를 즐기며, 귄위를 의지하고 금력을 존중하는 자는 사람을 위한 전도자가 아니다. 그대여, 사람을 위한 전도가가 되기 원하는가? 가난한 자들에게 가라. 가난한 자를 중히 여기고 부자에게 아부하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참된 증거 중의 하나이다. 세상의 가난한 자들이 그대를 사모하고 존경하여 따른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그대와 함께 계신다는 증거이다. 부자 앞에서 머리를 수그리고, 가난한 자 앞에서 고개를 쳐드는 것은 그대 안에 그리스도가 없다는 표시이다.

가난한 자란 반드시 경제적으로 가난한 자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 이것이야말로 예수께서 직접 돌보시는 진짜 가난한 자이다. 그 영혼에 심한 허기를 느껴서 자신의 영혼을 가득 채워줄 수 진리를 사모하는 자가 가난한 자이다. 그러므로 비단 옷과 대궐 같은 집에서 좋은 음식으로 배부른 사람들 중에도 가난한 사람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백만의 재산이 있지만 그 마음이 하늘과 같이 비어있는 사람들이 간혹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을 위한 전도란 심령의 가난함을 고쳐주고, 육신의 가난함을 위로하는데 있다. 전도는 심령적 자선 사업이다. 내게 하나님의 은혜가 풍족하기 때문에 나는 내 심중의 무한한 위로를 남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이다. 나에게 만일 금과 은이 있다면, 나는 그것을 즐겨 하나님께 바쳐 가난한 인생들을 구제하리라. 그러나 내게는 재물이 없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받은 나사렛 예수의 구제력으로 가난과 고통을 덜어주고자 한다. 전도자가 되려는 사람은 먼저 하늘의 부유함을 받아야 한다. 그래야 세상에 있는 가난한 자들의 심령을 채워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고후 6:10.

구제의 어려운 점은 항상 나누어 줄 것이 부족한 데서 생긴다. 그러나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이 왜 나누어 줄 것을 걱정하겠는가? 나누어 줄 것을 잔뜻 쌓아 놓고 나누어 주는 자가 아까워 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심령적 자선 사업에 있어서는, 나누어질 은혜가 하늘로부터 무한하게 공급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가난한 자들을 찾아 나누어 주기만 하면 된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삯을 받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주는 것이 쾌락인 사람이 왜 삯을 요구하겠는가?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전도가 어렵게 되는 것은 나누어 줄 영의 결핍에서 온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롬 1:16. 바울은 복음 전하기를 부끄러워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의 전도는 생계를 위한 전도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혹시라도 명예를 위하여 전도하고자 하는 유혹이 그의 마음에 떠올랐다면, 그는 이런 생각을 일으킨 악마를 꾸짖고 분연히 자신의 마음에 붙으려고 하는 야심의 꼬리를 떼어버렸을 것이다. 세계를 전도하고자 하는 그의 분명한 목적은 그로 하여금 바리새당파를 버리도록 하였으며, 유대인들에게만 머물러 있을 수도 없게 만들었다. 그는 대양을 건너 헬라와 유럽으로 전진하였다. 자신의 마음과 생애 속에 부끄러운 것이 없었던 바울은 복음 전하는 일에 있어서 부끄러움이 없었다. 마음 속에 부끄러운 것이 감추어져 있는 자는 감히 복음 전도에 나서지 말아야 한다.

부끄러워 할 것이 없다는 말과 부끄러워 할 줄 모른다는 말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맹자는 말하였다. “부끄러움은 사람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이다. 잔꾀를 부리는 자는 부끄러워할 줄 모른다.” 아직 전도자가 됨을 부끄러워 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전도가 무엇임을 모르는 사람이다.

전도자에게는 연민의 정이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전도 사업은 깊은 연민의 정에서 시작되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마 23:37.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전도하시는 모습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 마 9:35~36. 바로 이것이 사람을 구원하는 연민의 정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을 불쌍히 여겨 이 더러운 세상으로 내려오신 것이 기독교회의 시작이며, 이 정신을 실천하는 것이 교회의 목적이다.

사람을 위한 전도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전도이다. 여기에는 교회가 발급하는 면허증이 필요 없으며, 교회의 인정도 필요없다. 진리 그 자체가 유일한 조력자이며 증인이다. 내 머리 위에 유명한 목사의 손이 얹혀지고, 내 이름 앞에 목사, 박사와 같은 부담스러운 칭호가 넘치게 붙는다고 해도, 가난한 자가 나로 말미암아 하늘의 위로를 받지 못한다면 내가 받은 안수는 허식이고 허례이다. 오해하지 말라. 지금 나는 사람을 앞세우고 하나님을 뒤로 미루는 전도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사람을 섬기며, 진리를 존중하는 전도이다.

어떤 세인은 말하기를 “쓸모없는 인간은 중을 만들라”고 하지만, 나는 그 말을 전혀 인정할 수 없다. 전도자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자기를 버리기로 결정한 자만이 전도자로 설 수 있다. 전도의 직은 자신이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영혼 속에 있는 그리스도께서 정해 주시는 것이다. 그리스도께 강권함을 받은 자만이 전도의 직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전도의 직에 부름받지 않은 자가 그 직에 매달리는 것은, 하늘의 선택을 받은 사람이 그 직을 담당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큰 죄를 짓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