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빛을 따라가는 사람들

빛을 따라가는 사람들
              

종교 개혁운동의 배경

제자들과 사도들의 죽음 이후 여러 세기를 지나는 동안에 그리스도 교회는 선구자들의 신앙으로부터 떠나기 시작했다. 어두움과 세속이 교회 안으로 밀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스도 교회는 세상에서 인기있는 종교가 되었으며, 이에 따라서 교회의 가르침 또한 세상이 요구하는대로 변질되기 시작하였다.

성경에 예언된 중세 시대의 1260년이라는 오랜 종교 암흑시간이 끝나갈 무렵, 개혁과 부흥을 외치면서 일어서는 종교 개혁자들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물론, 종교 암흑시대 동안에도 왈덴스 인들과 같은 사람들은 천년 이상 동안이나 사도들의 가르침을 고수하면서 외롭게 살아 왔지만, 하나님께서 정하신 시간이 되자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종교개혁을 외치면서 일어나는 개혁자들이 생기기 시작하였는데, 바로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보는 현대 개신교회의 시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종교 암흑기가 그 극치에 달했을 때에는 교회가 국가와 손을 잡고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교회의 배도와 잘못된 가르침을 지적하는 곧바른 말씀을 전할 수 없었다. 성경이 말하는 위대한 진리를 고수하기 위해서 용감하게 서있는 사람들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그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경에 대해서 무지하였는데, 그 이유는 자신들의 모국어로 번역된 성경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많은 평민들과 농민들은 글을 제대로 읽지 못했으며, 오직 교회만이 성경을 해석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교회는 교인들의 무지를 이용하여 수많은 잘못된 교리들을 만들어서 교회의 조직과 특권을 강화하고 교인들을 종교적으로 학대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정하신 시간이 되자, 종교 개혁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16세기에 있었던 위대한 종교 개혁운동에 참여했던 개혁자들은 처음에는 자신들의 개혁이 교회의 반대를 받으리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주장하는 바가 너무나 성서적이고 순수하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교회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개혁자들의 주장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경우, 교회의 조직과 권위에 혼란이 생기고 약화될 것을 두려워하여, 개혁자들의 요구를 거절하고 핍박하기로 결정하였다. 개혁자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하신 중보자라는 진리를 밝히 드러냈으며, 행함과 고행을 통해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만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진리를 평민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였고, 교회 안에 들어온 각종 우상들을 거절하였고, 성경을 일반 농민들도 읽을 수 있는 영어로 번역하기 시작하였다.

개혁자들의 이러한 개혁운동은 로마 교회의 견고한 아성을 깨뜨리기 시작하였다. 진리의 빛줄기는 사람들의 양심에 분명한 일깨움을 주었고, 사람들은 진리를 받고 기뻐함과 동시에 자신이 잘못된 가르침 속에서 방황하였던 사실을 깨닫고 놀라는 일이 생기게 되었다. 교인들의 종교적 양심을 억압하였던 로마 교회의 권력은 진리의 힘에 의해서 점점 약화되기 시작하였다. 교회는 개혁자들을 교회로부터 파면시키고 화형대 위해서 불살랐지만, 개혁의 불꽃은 또 다른 개혁자들을 통하여 온 유럽으로 퍼지기 시작하였다. 사람들의 마음은 오랫동안 잊혀졌던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기 시작하였다. 하나님의 손이 위대한 종교개혁의 길을 예비해 두셨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 이곳 저곳에서 개혁의 물결이 일어남에 따라서 교황권의 부패상은 더욱 밝히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인간의 전통과 유전에 의해서 가리워져 왔던 성경의 위대한 진리가 하나씩 벗겨지기 시작하였다. 사람들은 구원을 위해서 교회의 성직자가 주는 면죄부를 바라보는 대신에 오직 그리스도와 그분의 진리를 쳐다보도록 가르침 받았다. 살아있는 믿음이 형식주의를 대신하게 되었으며, 진리를 깨달은 사람들은 자신과 교회의 진정한 모습을 보기 시작하였다. 진리를 받은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에서 쫓겨나고 지옥에 갈 것이라는 공포의 정죄를 받았지만, 사람들의 양심에 박힌 진리의 말씀은 요동하지 않았다.
                                   

종교 개혁자들의 공적과 그들의 실수

전 유럽을 통하여 마틴 루터, 칼빈, 파렐, 벌퀸과 같은 개혁자들이 일어나서 백성들을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가르침으로 인도하였다. 인간에게 구원을 가지고 오는 것은 로마 교회가 가르치는 것처럼 고행과 선한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의 살아있는 관계와 경험이라는 성경적 진리를 선언하였다. 그러나 종교 개혁운동의 지도자들은 로마천주교회가 가르치는 행위 중심적 신학의 오류에 대한 반발로 복음을 설명하였기 때문에 그들이 남긴 어떤 저서에서는 행위와 순종에 대한 중요성이 믿음과 올바른 균형을 이루지 못하는 아쉬운 면을 드러내었다. 종교 개혁운동이 로마 천주교회의 오류와 부패에 대한 반발로 시작되었기 때문에, 개혁자들의 구원론은 믿음을 강조하는 면으로 치우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로마 천주교회가 고수해온 오류에 의해서 가리워졌던 단순한 믿음의 중요성을 밝히 드러낸 것이야말로 16세기의 종교 개혁자들이 이룩한 가장 큰 공적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믿음과 순종(행함)에 대한 조화를 완전히 밝혀내지는 못하였다. 여기서 한가지 분명하게 이해해야 할 사실은, 대부분의 개혁자들은 로마천주교회의 잘못된 가르침에 대한 개혁보다는 교회 조직 속에 있던 부패와 타락상에 대한 개혁을 주장하는 일에 몰두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그들의 놀라운 희생과 투쟁적인 개혁 운동에도 불구하고 사도들과 제자들이 전파했던 하나님의 진리가 그들에 의해서 완전히 회복될 수는 없었다. 개혁자들은 어떤 교파를 세우기 위해서 개혁운동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백성들에게 보여주고, 교회의 부패와 타락상을 보여줌으로써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개혁과 부흥의 정신을 불어넣어 주고자 하였다. 한가지 아쉬운일은, 그들 개혁자를 따르던 후예들이 선구자의 정신을 이어받아서 계속해서 개혁을 추진했어야 했지만, 루터의 후예들은 루터 교회를 세웠고, 칼빈의 후예들은 장노교회라는 교단를 세움으로써 하나의 교파로 안주한 결과 종교 개혁운동의 정신은 중단되고 말았다.
                               

밝아지는 빛과 개신교회의 거절

그러나 1700년대에 이르러,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교회에 또 하나의 위대한 개혁자를 보내셨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 웨슬레이다. 요한 웨슬러는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설명하면서, 순종과 선한 행실은 참된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맺게 되는 열매라고 가르치는 성화의 가르침을 설교함으로써, 사람들의 시선을 다시 성경의 진리 가운데로 이끌기 시작하였다. 성경에 나타나 있는 구원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요한 웨슬레는 믿음과 순종의 중요성을 거의 완전한 조화를 이루면서 묘사하였다. 그는 한 모라비아 교도의 경건한 모습을 보면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위선적인 신앙과 행위에 의존하고자 하던 모든 인간적인 면들을 버리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오직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을 온전히 의지해야 된다는 말씀의 의미를 이해한 후, 자신이 가는 모든 곳에서 그리스도의 참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생애를 바쳤다. 그는 엄격하게 극기하는 신앙 생활을 살았으며, 순종과 절제를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열매로서 가르쳤다. 이러한 가르침은 그 당시 자유주의적인 신앙에 빠져있던 대다수의 개신교회들로부터 상당한 반대를 불러 일으켰다. 요한 웨슬레는 그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당시의 모습을 기록하였다. “개심한 그리스도인은 죄를 승리할 수 있으며, 모든 죄와 불의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다는 성경적인 가르침 위에 교회의 핍박이 가해졌다. 백성들의 발길을 파멸의 길로부터 거룩함의 길로 인도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교회의 조직적인 박해가 가해졌다.”

교회의 가혹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요한 웨슬레가 전하는 빛을 받아들였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다니던 교회를 떠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수단을 통하여 구원을 얻고자 한다고 조롱하는 의미로 자신들에게 붙혀진 별명인 “Methodist?방법론자) 라는 이름의 교회를 설립함으로써 종교개혁의 정신을 교파라는 장벽 안에 가두어 두고 말았다(감리교회, Methodist). 감리교회의 선구자인 웨슬레는 위대한 개혁자였지만,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서 그의 뚜렷한 개혁정신과 성화에 대한 가르침은 그를 따르던 후예들에 의해서 전승되지 못하였다. 이제, 감리교회는 커다란 정통 교단 중의 하나로 인정받고 있지만, 요한 웨슬레의 정신과 설교는 더 이상 듣기 어렵게 되었다. 감리 교회의 출현 이후, 빛은 점차적으로 밝아져서 천주교회의 유물인 세례를 거절하고 웨슬레의 가르침과 침례의식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 의해서 개혁운동이 또 한번 전진하였지만, 그들 역시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서 자신들의 교회를 세운 선구자들의 정신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리스도와 제자들의 가르침

긴 세월이 흘러갔고, 수많은 개혁자들이 일어섰다가 기억 속에서 사라져갔다. 그리스도 교회의 역사를 되돌아 볼 때, 복음은 항상 믿음과 순종(행함) 중에서 어떤 것을 강조하느냐에 따라서 그 균형과 조화를 잃어버리는 역사를 되풀이 해왔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율법을 크게 오해한 바리새인들의 율법주의적인 가르침에 쐐기를 박기 위해서 율법의 근본 정신을 밝히 드러내기 위해서 십계명을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나누어서 설명하심으로써 복음의 완전한 조화를 밝히셨다. “첫째는 이것이니...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마가복음 12:29~31. 율법주의의 사슬에 묶여있던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율법과 사랑의 긴밀한 관계를 설명하는 그리스도의 이러한 가르침은 하나의 커다란 충격이 되었다. 그리하여 유대교회의 지도자들은 백성들에 대한 자신들의 영향력을 잃어버리지 않고, 그들의 조직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와 그분을 따르는 지지자들을 핍박하기 시작하였다.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저희를 무서워함이러라.” 요한복음 9:22. 율법주의에 붙잡혀 있던 유대인들에게 올바른 깨우침을 주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는 사랑과 율법의 관계를 설명하셨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요한복음 14:15.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승천하신 후, 많은 사람들이 제자들의 능력있는 말씀을 듣고 그리스도 교회로 들어왔다.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율법과 사랑의 관계를 오해하기 시작하였다. 제자들은 어떤 사람들이 사랑만을 존중하고 계명을 경시하는 풍조를 염려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요한은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고”(요한일서 2:4) 라고 강력하게 말함으로써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사랑과 율법의 관계를 더욱 분명하게 밝혔다.
                        

교회가 세속화된 신학적 배경과 마지막 시대를 위한 복음

서두에 언급했던 것처럼 사도들과 제자들의 죽음 이후, 그리스도 교회는 급속하게 세속화되고 타락하기 시작하였다. 중세기에 이르러서는 각종 의식과 예식이 교회 안에서 판을 치게 되었고, 행함과 고행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신앙이 정착되게 되었다. 그러나 개혁자들은 이에 대한 반발로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가르침을 들고 나왔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종교개혁 운동을 통해서 그 순수성을 회복하였지만, 반면에 그리스도인 신앙에 있어서 순종과 행위의 중요성이 약화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그러다가 교회는 다시 한번 커다란 부흥의 기회를 갖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요한 웨슬레가 주장한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삶이다. 한동안 교회는 다시 부흥과 개혁의 길을 걷는듯 하였지만, 그를 따르던 후예들이 종교 개혁의 정신을 이어 가는 일에 실패하였다.

그 결과 오늘날, 그리스도 교회는 다시 세상에서 가장 인기 있는 종교가 되었고, 세속과 타협이 판을 치게 되었다. 물론, 그리스도 교회의 한쪽 구석에는 아직도 종교 개혁자들의 정신과 사상을 이어받아서 전진시키는 하나님의 종들이 있지만, 그 숫자는 너무나 적어서 교회 안에 들어온 배도와 타협을 몰아내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리스도 교회가 요한 웨슬레의 성화의 가르침을 거절내지는 그 중요성을 잃어버린 결과로 인하여, 오늘날 교회 안에는 각종 자유주의적인 가르침들이 난무하게 되었다.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사상이 팽배하게 되었고, 율법은 십자가에서 폐하여졌다는 가르침이 온 교회를 휩쓸게 되었다. 16세기의 종교 개혁자들은 로마 천주교회의 행함 위주의 구원론을 반박하기 위해서 믿음을 강조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십계명의 권위를 여전히 인정하였었다. 그러다가 17세기에 와서 요한 웨슬레는 거룩한 열매를 강조함으로써, 하나님의 법의 권위를 한층 높이고 믿음과 순종의 균형을 이루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요즈음에는 십계명에 대한 미묘한 오류들이 기독교회에 들어와서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충성심을 흔들어 놓았다. 그리하여 계명에 대한 순종과 율법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율법주의자로 몰리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아이러니칼하게도, 예수 그리스도 당시와 완전히 반대되는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그 당시에는 바리새인들과 유대 지도자들이 율법의 의미를 잘못 왜곡하여 율법주의로 빠진 반면에, 오늘날에는 십자가에서 율법이 폐하여졌다는 이론 때문에 교회가 도덕적으로 크게 타락하게 된 것이다. 교회 안에서 율법에 대한 순종의 중요성이 희미해지자, 교회는 급속하게 자유주의로 흐르게 되었으며, 세속이 범람하게 되었고, 교인들은 율법을 범하는 죗됫 생활을 살면서도 자신은 구원받았다고 믿는 기만 속에 빠지게 되었는데, 바로 이것이 소위 복음주의자들이 교회에 가져온 재앙들이다. 복음주의자들은 겉으로 듣기에는 십자가의 사랑을 높이는 아름다운 설교를 하지만, 실제에 있어서 그들은 십자가의 사랑이 율법을 폐하였고 지금은 새언약의 시대이기 때문에 더 이상 율법에 제재받지 않고 살아도 된다는 두려운 가르침을 교회 안에 퍼트리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사단은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의미를 무효화시키기 위해서 최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사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율법에 대한 순종을 불필요하게 만들었다는 가르침을 교회 안에 퍼트려 놓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십자가는 율법을 범한 사람들의 죄 때문에 생긴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는 것은 곧 죽음이라는 댓가를 지불해야만 한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로마서 6:23. 그런데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고 선언하고 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더라.” 로마서 3:23.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인류가 범한 죄의 삯을 치루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이 땅에 세워졌던 것이다. 그러므로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범죄하였던 순간부터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준비되었는데, 구약시대에는 십자가의 죽음이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어린 양의 죽음으로 상징되었다. 십자가는 죄가 하늘의 왕인 그리스도의 죽음을 몰고왔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말해주는 두렵고 엄숙한 경고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사랑의 새언약 때문에 율법(십계명)은 더 이상 필요없게 되었다는 믿음 속에 빠져 있다. 이제, 율법에 대한 순종과 계명의 중요성은 사라지게 되었고, 사랑과 믿음이 그리스도인 신앙의 전부인 것처럼 인정되는 시대가 되었다. 복음을 구성하는 믿음과 순종의 균형이 마지막 시대에 와서 또 다시 깨어진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시대에는 복음이 완전한 균형을 가지고 전파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완전한 복음만이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짐승의 표를 거절하고 마지막 환란을 통과하게 지켜주기 때문이다. 마지막 시대를 맞이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성경은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써 율법과 믿음의 완전한 조화를 설명하고 있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요한계시록 14: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