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구원과 선택의 관계를 아시나요?

구원과 선택의 관계를 아시나요?


죄란 무엇인가?

“죄”의 정의를 어떻게 내리는가에 따라서 우리의 신앙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만일 그대가 자신의 병에 대한 올바른 진단을 받기 위하여 의사를 찾아 갔는데, 의사의 오진으로 인하여 잘못된 처방과 치료를 받는다면, 그대는 회복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를 “죄”라는 치명적인 질병으로부터 회복시키는 복음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죄”라는 질병에 대하여 오진을 할 경우, 죄의 치료제인 복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성경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죄”라는 질병을 가지고 있다는 진단을 내리고 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롬 3:23. 죄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한 답 속에는 하나님께서 인류를 어떻게 구원하실 것인가에 대한 방법이 담겨져 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죄와 구원에 대한 견해를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은 두 종류의 견해를 가지고 있는데, 안타깝게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첫번째 정의를 받아들임으로써 잘못된 복음을 따라가고 있다.

정의 1: “사람은 무엇을 잘못 행하거나 말하거나 생각하기 때문에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타락한 아담과 하와의 자손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죄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류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자동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정죄를 받게 된다” : 이러한 잘못된 교리를 믿는 사람은, 신생아가 태어나자마자 유아세례를 줌으로써 지옥불의 형벌을 면하게 할 수 있다는 또 하나의 오류를 받아들이게 된다. 또한 모태에서 태어날 때에 받은 타락한 본성(육체) 때문에 아무도 죄를 승리할 수 없다는 치명적인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이렇게 믿는 사람들은 “한번 구원받으면 나의 생애가 어떠하든지 간에 절대로 구원을 잃어버릴 수 없다”는 신앙을 받아들이게 된다.

정의 2: “사람은 타락한 본성을 유전적으로 물려받은 상태로 태어난다. 그러나 물려받은 타락한 본성 그 자체 때문에 지옥불의 정죄를 받는 것은 아니다. 오직 타락한 육체의 요구와 사단의 유혹에 스스로 굴복하여 십자가의 은혜를 거절하고 율법의 요구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만이 영원한 파멸에 이르는 죄인으로 정죄를 받게 된다. 죄에 대한 유일한 정의는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는 성경 말씀에서 그 근거를 찾아야 한다(요일 3:4)” :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사람에게 선택할 수 있는 의지를 주셨다. 그러므로 비록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육체가 죗된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인간의 의지에게 악을 행하라고 소리칠지라도, 인간의 의지는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그것을 거절하고 성경 말씀에 일치하는 거룩한 삶을 살기로 선택할 수 있다. 선과 악, 둘 중에서 선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은 그 능력을 간절히 사모하는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에게만 주어지며, 하늘로부터 내려온 능력을 받는 그리스도인마다 타락한 육체의 요구와 사단의 유혹을 거절함으로써 죄를 승리하고 죄의 세력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첫번째 정의를 믿는 사람은 죄를 태어나는 순간부터 받게 되는 자동적인 것으로 믿으며, 두번째 정의를 믿는 사람은 죄를 잘못된 선택의 결과로 믿는다. 첫번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은 비록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지라도 결코 죄에 대하여 승리할 수 없으며, 율법에 순종하는 승리의 삶은 예수께서 재강림하실 때에 의인에게 주시는 영화로운 육체를 받을 때까지 불가능하다는 복음을 가지고 산다. 두번째 정의를 믿는 사람은 선택여하에 따라서 사람은 죄를 승리할 수 있는데, 죄에 대한 승리의 선제 조건은 참된 거듭남(회개)라는 복음을 가지고 산다.
                   

악이 유죄가 되는 조건

만일 집안에서 고양이를 기르고 있다면, 그 고양이는 사람의 발에 자신의 몸을 문지르고 무릅에 올라가서 재롱을 부리기 좋아할 것이다. 훈련을 잘 시키면, 대소변을 가릴 수도 있고,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구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열려진 문틈을 통하여 고양이가 집밖으로 나가게 되었다. 고양이가 비록 잘 길들여져 있다고 할지라도, 고양이의 본성 속에는 야생의 기질이 감추어져 있다. 고양이는 뒷마당에서 쥐를 잡아서 잔인하게 죽였다. 그것도 단번에 죽이는 것이 아니라, 쥐를 가지고 한참 동안 놀다가 서서히 죽인 후에 그것을 물고서 칭찬받기 위하여 주인에게 찾아온 잔혹한 고양이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

주인은 비록 고양이가 잔혹한 악을 범하였다고 할지라도, 고양이에게 유죄를 선언하고 벌을 줄 수 없다. 왜 그런가? 주인은 비록 고양이가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할지라도 고양이의 뇌 속에는 도덕적인 판단력이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도덕적으로 선과 악을 판단할 수 없는 고양이에게 유죄를 선언할 수가 없다. 이제 갓 태어난 신생아가 아담과 하와로부터 유전적으로 이어져 내려온 타락한 본성을 전수받았다고 해서 신생아에게 유죄를 선언하고 영원한 지옥불의 형벌을 가할 수 있는가? 신생아가 젖을 달라고 크게 소리내서 운다고 해서 이기적인 죄를 범했다고 정죄할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 신생아는 악을 행하였지만, 유죄를 선언받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신생아는 아직 도덕적 판단력이 충분하게 발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악이 유죄 선언을 받게 되는 조건이다.
                    

누구의 잘못인가?

판단력(이해력)이 악과 유죄를 구별하는 구분점이 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요 9:41. 바리새인들도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똑같은 본성(육체)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그들이 타락한 육체를 가지고 태어났다는 사실로 인해서 죄인이라는 정죄를 받지 않았다. 그들은 진리에 대한 이해(지식)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들이 저지른 악에 대하여 정죄를 받았던 것이다. 죄의 문제는 이해와 선택의 문제와 결코 분리시킬 수 없다.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 약 4:17. 무지는 악한 행위를 가져올 수 있다. 좀더 잘 알았더라면, 올바르게 행했을 것이지만, 잘 알지 못했기 때문에 잘못을 범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자비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잘못을 죄로 정죄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진리에 대한 지식은 악을 죄로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우리는 우리의 조상이 살았던 타락한 생애나 유전적으로 이어받는 나쁜 본성 때문에 정죄받지 않는다. 우리는 아담과 하와의 죗된 선택 때문에 정죄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결정한 죗된 선택 때문에 정죄받게 된다. 지성과 양심을 가지고 있는 우리가 죄를 범하면, 그것은 아담과 하와의 죄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죄이다.

얼마나 자비로우신 하나님이신가! 얼마나 공정하고 정확한 복음인가! 죄란 무엇인가? 죄는 하나님의 법에 대한 고의적인 불순종이다.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요일 3:4
                      

거절하지 않는 자는 모두 구원받을 것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실 능력이 있으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하기를 소원하신다. 모든 사람이 회개하고 구원을 받는 것이야말로 그분의 진정한 뜻이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보증하기를,“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신”다 라고 하였다(롬 2:4). 그분께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회개로 인도하고 계신가? 물론, 모든 사람을 인도하고 계신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그분의 뜻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고 하셨기 때문이다(요 12:32). 그분의 사랑은 어떤 정해진 자들에게만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호소하신다. 그분의 선하심은 모든 영혼을 회개로 인도하며, 그분의 사랑은 모든 사람을 십자가로 이끌고 있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왜 모든 사람이 구원받지 못하는가? 그것은 그들이 구원받지 않으려고 애를 쓰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자신의 양심과 지성에 호소하시는 성령의 부드러운 인도하심과 호소에 저항하지 않고서는 멸망당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사울에게,“가시채를 뒷발질 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실인가? 구원을 받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대항하여 싸우는 것이 어려운 일이다! 우리가 저항하지만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섭리대로 우리를 당신께 이끄실 것이다.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다(딛 2:11).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났는가?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났다! 히브리서 2장 9절은, 예수께서“모든 사람을 위하여”죽음을 맛보셨다고 말한다. 또한“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하셨다(고후 5:18, 영문 성경역).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 세상이 모두 구원 받지 못하게 되는 오직 한가지 이유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의롭게 하고 거룩하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섭리를 저항하면서 거절하기 때문이다.
                     

회개할 때에 생기는 변화의 경험

죄는 언제나 두가지 결과를 가지고 오는데, 그것은 악과 정죄이다.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이 두가지를 다루시는가? 하나님께서는 죄를 범한 죄인이 진정으로 회개할 경우, 죄인에게 내려진 유죄 선언을 즉시로 제거해 주신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요일 1:9. 죄인에게 내려진 유죄 선언이 제거되면, 죄인에게 내려질 영원한 형벌도 함께 사라지게 된다.
그런데, 회개를 통하여 유죄 선언과 영원한 형벌이 제거될 때에 죄인의 육체 속에 있는 타락한 본성도 함께 제거되는가? 아니다. 죄인이 회개한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육체는 고통과 슬픔과 유혹을 느끼면서 살아가게 된다. 죄가 용서함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인간의 육체 속에 숨겨져 있는 타락한 본성은 예수께서 재강림하시는 그 날까지 제거되지 않는다. 그러나 죄인이 회개할 때에 놀라운 변화가 한가지 일어나는데, 그것은 마음의 변화이다. 죄인이 진정으로 회개하고 마음을 주님께 드릴 때, 타락한 본성이 제거되는 것은 아니지만, 예수께서는 죄인의 마음을 변화시켜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재창조 해주신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 2:5.

바로 이러한 변화를 통하여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타락한 본성(육체)의 요구를 거절하는 승리의 생애를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안으로부터 육체가 죗된 요구를 하고, 밖으로부터 사단이 던지는 유혹이 다가올지라도, 변화된 마음과 의지를 통하여 선을 선택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각 개인의 영생과 멸망에 대한 운명을 이미 결정해 놓으셨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죄에 대한 용서와 구원을 말할 때에, 죄인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변화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는다. 그들은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것에 대해서만 이야기 할 뿐이며,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는 “우리 안”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은 변화될 필요가 있는 죄인이다. 모든 사람은 율법 앞에서 어떠한 은혜나 용서도 받을 수 없는 범법자로서 정죄 받는 존재이다. 율법 앞에 서있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의로움도 찾을 수 없다. 또한 옳은 행동을 할 수 있도록 만드는 어떤 능력도 없다. 죄인은 율법의 저주 하에서 정죄받은 상태로 힘없고 무기력하게 있어야만 하다. 그러나 십자가의 희생과 죽음을 바라보는 자들의 “마음 안”에는 이 모든 저주와 정죄로부터 피할 수 있는 변화가 생기게 된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용서가 죄인의 마음 속에 남기는 변화이다.
                   

받기로 선택해야 주어짐

성경은,“한 범죄로 모든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롬 5:18 영문 성경역)다고 가르치고 있다.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다는 말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영혼들을 의롭게 하기 위한 예비책이 마련되었다. 그분의 죽으심은 온 세상을 다 구원하기에 충분하다. 십자가를 통하여, 지극히 합법적인 구원이 영광스런 구속의 경륜으로써“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다.

그러나 십자가의 구원은, 그것이 개인적으로 인식되고, 개인적인 믿음으로 받아들여져야만 각 개인에게 유효하게 된다. 다시 말하자면,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구원은 그것을 받는 사람의 믿음을 전제 조건으로 주어진다는 것이다. 성경은“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심이니라”롬 3:24~26.

비록 십자가가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제공해 주었다고 할지라도, 오직“예수 믿는”자들만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전기 회사가 충분한 전력과 빛을 각 집에 공급해 주고 있지만, 집안에 있는 각 사람이 스위치들을 누르지 않고서는 아무런 유익도 얻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하나님의 구원하시며, 정결케하시고, 의롭게 하시는 능력을 개인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러한 은혜가 개인에게 아무런 유익도 주지 못하게 된다.
                     

인간은 생각하는 상한 갈대

범죄한 인간은 이미 부러졌고, 하챦은 바람에도 또 다시 부러지는 상한 갈대에 불과하다. 그러나 인간은 상한 이성과 꺽인 의지를 가지고도 여전히 생각하는 갈대로 존재하고 있지 않은가? 이 상한 갈대 위에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성령을 통하여 이슬처럼 임할 때, 놀랍게도 상한 갈대는 반응한다. 구원받기 위해서 반응하고, 반응할 수 있고, 또 반응해야 하는 것이 인간이다. 이것이 반응하는 인간, 곧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책임이 있는 인간의 참 모습인 것이다.

인간의 의지가 죄 때문에 독립할 수 없을만큼 손상되기는 했어도 인간성의 흔적도 없을만큼 파멸되지는 않았다.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푸”시며(사 42:2),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데 이르기를 원하”셔서(딤전 2:4), “독생자를 주”심으로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하신(요 3:16)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는 사람마다 성령의 음성에 반응하게 된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 나오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구속의 계획이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예정된 계획이 자신의 운명이 되도록 지금 믿음으로 반응해야 한다. 그것은 누구나 피해서는 안될 숙명이다. 그대는 어떤 운명을 선택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