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사랑인 것과 사랑이 아닌 것

사랑인 것과 사랑이 아닌 것


사랑이 아닌 것 : 계명과 분리된 사랑


기독교회에 사랑과 계명을 분리시키려는 위험한 움직임이 널리 전파되고 있다. 마치 십계명을 폐지시키는 것이 진정한 사랑인 것처럼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숫자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아마도 그러한 사람들은 예수께서 율법을 지킨다고 공언하던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을 여러 차례에 걸쳐서 공개적으로 책망하는 장면들을 성경 속에서 읽으면서 이러한 오해를 갖게 된 것같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하게 구별해서 생각해야 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의 율법주의적인 외식과 위선을 책망하신 것이지 율법과 십계명 자체를 책망하신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예수께서는 계명을 열심히 지켜야 된다고 강조하던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의 외식과 위선을 책망하면서 그들에게 “새 계명”을 지킬 것을 명령하셨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요 13:34. 그 당시 이미 십계명이 있었는데, 왜 예수께서는 “ 새 계명”을 주셨을까? 이 말씀은 예수께서 구약 시대의 십계명을 폐지시키고, 신약시대를 위한 새로운 계명을 주신다는 의미인가? 아니다. 그렇게 해석할 수 없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5장에서 이미 계명은 영원토록 불변할 것이라고 선포하셨기 때문이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함이로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마 5:17,18.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 말씀을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였다.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요일 2:7. 예수 그리스도께서 새 계명을 언급하신 진정한 의도는 유대인들이 그토록 열심으로 따르던 십계명은 행위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지키는 것이라는 진리를 밝히는 것이었다. 십계명 중에서 첫째부터 네째까지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사랑에 관한 계명이고, 다섯째부터 열째까지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사랑에 관한 계명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 이외의 다른 신과 우상을 섬기지 않을 것이며,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자는 부모를 공경하게 되고, 간음하지 않을 것이며, 도둑질이나 거짓말을 하지 않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십계명은 그 전체가 사랑에 대한 이야기 임에 틀림없다.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은 계명과 사랑은 전혀 다른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계명의 근본 정신인 사랑을 보지 못했지만, 예수께서는 계명과 사랑은 서로가 분리될 수 없는 하나라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요 14:14.


그러나 유대인들은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진정한 사랑 없이 율법을 지키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마음 속에 사랑을 품지 않은 채 계명을 지키는 것처럼 불가능한 것은 없다. 마음 속에 참된 사랑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십계명을 지킨다고 공공연히 말하면서도 그들의 삶 속에서는 거짓말과 탐욕과 돈과 재물과 정욕의 우상을 섬기며 살았다. 바로 이러한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의 모습을 지적하시면서, 예수께서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셨던 것이다. 사도 요한은 처음부터 존재하였던 십계명 자체에 문제가 있어서 새 계명을 주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였다. “서로 사랑하자 이는 새 계명같이 네게 쓰는 것이 아니요 오직 처음부터 우리가 가진 것이라” 요이 1:5. 요한은 계속해서 사랑이라는 새 계명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또 사랑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 계명을 좇아 행하는 것이요 계명은 이것이니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바와 같이 그 가운데서 행하라” 요이 1:6. 유대인들의 마음과 정신이 이기심과 물욕으로 깊이 물들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의 근원을 치료해주기 위하여 그들의 눈을 “사랑”으로 돌리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 요한은 사랑이라는 “새 계명”을 언급하였던 것이다.

 

사랑이 아닌 것 : 원칙과 분리된 사랑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우리가 한가지 기억해야 될 사실이 있는데, 사랑에는 원칙이 있다는 것이다. 원칙이 무너져 있는 사랑은 더 이상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자신이 알고 있는 도덕적 원칙과 진리 안에서 실행되어야 한다. 계명과 원칙과 진리 밖에서 사랑이 행하여 질 때, 그것은 인간적인 감정이지 사랑이 아니다. 특히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사랑은 진리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사도 요한은 원칙(계명)과 사랑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하나님)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 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요일 2:2~5


사랑은 진리와 원칙과 헌신과 희생으로 물들어져 있어야 한다. 계명과 원칙이 빠져 있는 값싼 사랑 때문에 오늘날 기독교회가 이렇게 어지럽게 되었다. 사랑이 원칙으로부터 분리될 때, 사랑은 값싼 감정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에서 사랑과 원칙이 분리되면서부터, 성경이 요구하는 계명과 진리는 어떠하든지 간에 서로 사랑하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착각이 시작되게 되었다. 자신의 가정과 사회 생활 속에 부도덕과 죄가 가득한 사람도 교회에서 열심히 사랑(?)의 봉사를 하는 생애를 살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신앙 속에 은연 중에 깊이 잠식되어 있다. 봉사와 구제와 같은 사랑의 행위를 아무리 많이 베푼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이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생활이 정직하지 못하면, 그의 사랑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자신은 이기적이고 탐욕적으로 살면서도 입으로는 “사랑 타령”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 오늘날 교회가 이토록 세상 사람들로부터 존경받지 못하게 된 커다란 이유 중의 하나이다. 원칙이 무너진 사랑, 그것은 더 이상 사랑이라고 부를 수 없다!


사랑 안에는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과 예의의 향기가 담겨져 있어야 한다. 그리고 사랑 안에는 가난한 심령과 의를 갈급하는 마음이 새겨져 있어야 한다. 사랑이 이러한 진리들로 구성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인의 사랑과 연예인들이 말하는 사랑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으로부터 도무지 흉내낼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사랑이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들은 사랑을 쵸코렛처럼 달콤한 것으로 표현하지만, 성경은 “사랑은 오래 참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고전 13장 참조). 사랑은 흔들리지 않는 원칙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강력한 힘과 충격으로 상대방에게 전달된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높은 산 위에 앉아 있는 어떤 도인의 마음 속에서만 맴도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매우 활동적인 것이며 또한 원칙과 진리에 의거하여 표현되기 때문에, 그것은 가정과 이웃과 교회에서 분명한 빛과 생명력을 전달하게 된다.
                 

사랑이 아닌 것 : 마음과 분리된 사랑


사랑은 행위로 표현된다. 하나님의 사랑도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셔서 십자가의 죽음을 허락하는 행위로 표현되었다. 그러나 사랑이 행위로 표현되는 것은 사실일지라도, 마음과 분리된 사랑의 행위 자체는 사랑이 아니다. 우리는 흔히 이웃과 형제에게 사랑을 베풀어야 된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또한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마다 가난하고 병든 사람을 도와 주는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다. 사랑은 무엇인가? 도데체 어떤 것이 사랑인가?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매우 독특한 방법으로 사랑을 설명하고 있는데, 그는 거기서 사랑이 아닌 것들을 통하여 참 사랑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다 함께 고린도전서 13장을 읽어보자.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런 유익이 없느니라” 고전 13:1~3. 바울은 방언과 천사의 말도 그 자체는 사랑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예언을 하고 모든 비밀을 알지라도 그 자체는 사랑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을지라도 그 자체는 사랑이 아니라도 말하고 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구제를 할지라도 그 자체는 사랑이 아니라도 말하고 있다. 심지어는 내 몸을 불사르는데에 내어 줄지라도 그 자체는 사랑이 아니라도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사랑이라는 말인가?


계속되는 바울의 설명은 어떤 사람이 진정한 사랑을 소유한 사람인가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치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self-seeking, 자기 뜻대로 하는),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전 13:4~7.


바울은 사랑은 솜사탕과 같은 것이라고 말하지 않고,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다 라고 말하였다. 오래 참지 아니하면 그 사람에게 사랑이 없다는 말이다. 온유하지 않으면 사랑이 없는 것이다. 투기하면 그 사람에게 순결한 사랑이 없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무례하고 예의없이 대하면 그 사람에게 사랑이 없는 것이다. 구제와 자선과 같은 사랑의 행위를 통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자는 사랑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사랑은 내가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원하는 바를 해주는 것이다. 이 말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데에도 예의가 있어야 하며, 자기가 원하는 방법대로(self-seeking, 자기 뜻대로) 사랑해서는 안된다는 뜻이 담겨져 있다. 다른 사람의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 사람의 마음에는 참된 사랑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사랑을 가진 사람은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 그의 양심은 곧바르며 언제나 진리와 진실의 편에 서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바울이 설명하는 이러한 사랑은 감정적인 싸구려 사랑이 발붙힐 틈이 전혀 없는 참 사랑이다.


바울은 자선과 구제의 행위를 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사랑은 행위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예수께서는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셨는데, 이것은 구약 성경에 기록된 모든 율법과 선지자의 정신과도 일치된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마 7:12. 사랑의 표준은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씀 속에 깊이 새겨져 있다. 어떤 것도 이것보다 부족한 것은 성경이 요구하는 사랑이 아니다.


마태복음 5장에는 예수님의 취임 설교(팔복)가 나온다. 일반적으로 취임 설교에는 목사님이 그 교회에서 시무하는 동안 전하고자 하는 핵심 내용이 담겨지게 된다.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취임 설교 즉, 산상수훈(팔복)에도 행위와 형식에 붙잡혀 있는 유대인들에게 주는 중요한 메세지가 담겨져 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께서는 마음과 심령에 속한 문제들을 다루셨다. 마음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마음이 청결한 자 .... 예수께서는 수많은 예식과 희생 제도의 의미와 가치를 외면한 채 그것이 가지고 있는 종교적 형식에만 매달려 구원을 이루려고 애쓰는 유대인들을 보면서“너희들은 먼저 마음이 변화되어야 해” 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사랑은 철저하게 마음의 상태에 속한 문제이다. 마음에 사랑이 있어야만, 참된 사랑의 행위가 나오게 된다. 그러므로 사랑은 억지로 만들어 낼 수 없는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
                      

지금까지 사랑은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이제부터는“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에서 사랑의 대상이 되는 “네 이웃”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로 하자다. 왜 하나님께서 사랑의 대상을 설명하시면서 “먼 곳에 있는 가난한 사람을”, “아프리카와 같은 오지에 있는 병든 사람을”이라고 하지 않고, “네 이웃”이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여기서 이웃이란“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자”로서, 우리와 가까운 곳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분명하게 포함되어 있다.


사랑을 하되 나의 이웃을 먼저 사랑해야 한다. 나의 이웃에서부터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우리의 가장 가까운 이웃은 누구인가? 우리의 남편과 아내와 자녀와 부모이다. 그리고는 우리의 옆집에 사는 이웃이고 같은 믿음을 가진 교우들이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의 사랑은 먼저 가정과 교회 안에서 먼저 실현되어야 하며, 그런 다음에 사랑으로 연합된 가정과 교회를 통하여 사회로 퍼져나가야 한다. 사랑이 이러한 법칙과 질서에 의해서 실행되지 않을 때, 우리는 여러가지 모순에 부딪치게 될 수 밖에 없다.

 

행복한 사람은 희생과 봉사로 평안한 휴식에 이르고,
불행한 사람은 과욕과 과로로 불안과 죽음에 이른다.

행복한 사람은 나누어 주다가 행복을 발견하고,
불행한 사람은 끌어 모으다가 불행에 빠진다.

행복한 사람은 하늘의 방법으로 세상 기쁨을 얻고,
불행한 사람은 세상 방법으로 하늘의 기쁨을 얻으려 애쓴다.

행복한 사람은 이미 행복하기 때문에 세상 쾌락을 추구하지 않고,
불행한 사람은 자신이 처한 불행을 잊기 위해서 더 깊은 쾌락을 찾는다.

행복한 사람에게는 가난도 평안의 기회가 되지만,
불행한 사람에게는 재물도 고통의 원인이 된다.

행복한 사람은 자신과 싸워서 평화를 얻고,
불행한 사람은 남과 싸워서 불화를 얻는다.

행복한 사람은 남을 위해서 살고,
불행한 사람은 자신을 위해서 산다.

행복한 사람은 욕심을 버림으로서 행복에 이른다고 믿고,
불행한 사람은 욕심을 버리면 불행해 진다고 믿는다.

행복한 사람의 눈에는 다른 사람의 소원이 보이고,
불행한 사람의 눈에는 다른 사람의 허물이 보인다.

행복한 사람은 자신의 잘못을 자복함으로 평안을 얻고,
불행한 사람은 자신의 죄를 가리움으로 평안을 잃는다.

행복한 사람은 문밖에 나가 손님을 기다리고,
불행한 사람은 오는 손님도 내쫓는다.

행복한 사람은 자신의 조금 가진 것도 나누어 주고,
불행한 사람은 남이 가진 적은 것도 취하려 한다.

행복한 사람은 고난 속에서 교훈을 찾고,
불행한 사람은 고난 속에서 한을 품는다.

행복한 사람은 희생의 기회를 축복으로 여기고,
불행한 사람은 이익을 얻고도 불평을 쏟아낸다.

행복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분노에 온유로 답하고,
불행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실수에 크게 화를 낸다.

행복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잘못에서 자신의 책임을 찾아내고,
불행한 사람은 자신의 잘못도 남의 탓으로 돌린다.

행복한 사람은 남의 만족을 보면서 행복을 맛보고,
불행한 사람은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남을 불쾌하게 한다.

행복한 사람은 높임을 받을까봐 두려워하고,
불행한 사람은 높임을 받지 못할까봐 두려워한다.

행복한 사람은 남의 고통을 동정하다가 자신의 고통을 잊어버리고,
불행한 사람은 자신의 고통에 몰두하다가 더 깊은 고통에 빠져든다.

행복한 사람은 악인이라도 긍휼히 여기고,
불행한 사람은 의인이라도 무시하고 미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