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부:오해받고 있는 세 성경절의 의미를 아시나요?

오해받고 있는 세 성경 절의 의미를 아시나요?


1.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되는 때

빌립보서 1:21~23 :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었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을 근거로 해서 바울은 자신이 죽는 순간에 그의 영혼이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될 것을 기대했다고 해석함으로써, 영혼 불멸을 뒷받침하려고 애쓰지만, 성경은 다음과 같이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의 의미를 설명해 준다;

  1.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 (being with the Lord) 라는 표현은 바울의 편지서 뿐만 아니라, 복음서에도 자주 등장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표현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살펴봄으로써, 일관성 있는 의미를 찾아야 한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4장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시기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남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살전 4:15,16. “항상 주와 함께 있”을 때가 언제인가? 사도 바울은 재림의 때에야 비로소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먼저 죽는다고 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 재림의 때가 되어야만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우리가 죽거나 끝까지 살아 있는 것이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수 있는 조건이 결코 아니라고 말했다.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남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15절.
  2. 골로새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도, 바울은 우리가 언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 밝히 말하였다.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골로새서 3:4. 여기에서도 재림의 때에야 “그와 함께” 있을 수 있다고 선언하였다.
  3.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 제자들과의 이별을 앞두고 그들과 다시 만나게 될 날(때)에 대해서 분명히 말씀해 주셨다. ; “ ...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요 14:2,3. 예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이 그분과 함께 있을 수 있는 3단계를 설명하시면서, 첫번째 단계로, 예수께서 “처소를 예비”해야 하고, 두번째 단계로 예수님이 “다시 와” 야 하며(재림), 세번째 단계로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하는 것(그리스도와 함께 거함)이라고 말씀하셨다.
  4. 사도 바울은 자신의 마지막 소원을 진술하면서,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한다고 밝혔다(빌 3:10). 그리고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시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린다고 거듭 밝힘으로써, 재림시에 있을 부활만이 유일한 소망임을 확인하였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도, 그리스도의 재강림을 알리는 “나팔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살” 것을 강조했으며(고전 15:52), 만약 이러한 부활의 소망이 없으면, “너희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에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리라”고 말함으로써(고전 15:17), 죽는 순간에 즉시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의 여지를 조금도 남기지 않았다.

신약 성경에 나오는 “육신을 떠나서” 라는 표현은 죽음을 의미하며,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은 재림에 대한 확고한 신앙을 가지고 부활의 날까지 무덤 속에서 무의식의 상태로 쉬고 싶다는 말을 시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2.“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의 의미

고린도후서 5:6~8 :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여기서 다시 “주와 함께 거”한다는 표현이 나온다. “영혼은 불멸한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이 성경절을 이용하여 영혼은 육신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주장하려고 애쓴다. 그러나 문맥을 자세히 살펴보면, 사도 바울이 그렇게 표현한 의도를 알 수 있다. 편견이나 선입관을 버리고, 그 앞에 나오는 1~4절까지를 읽어보면,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한다”라는 말의 참 뜻을 이해할 수 있다;

고린도후서 5:1~4 :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있는 줄을 아나니,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사도 바울은 자신의 죽어서 썩어져 없어질 몸을 “장막 집”이라는 시적인 표현을 사용하여 기록하였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의 의미는 죽음을 뜻한다. 그래서 베드로 역시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면서 “나도 이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 안다고 표현하였던 것이다(벧후 1:14). 그렇다면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 곧 “하늘로 부터 오는 우리 처소”는 무엇인가? 4절에 그 대답이 나온다.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는 때인 재림시에 부활한 몸이 입게 될 썩지 않을 신령한 몸을 말하는 것이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성경절에서, 바울은 부활의 시간에 영원한 생명을 지닌 새로운 몸을 받기를 사모한다는 말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이 말에 이어서 바울은 자신의 의도를 더욱 더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영혼불멸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바울은 육체를 벗어나기를 원했던 것이 아니라, 오직 마지막 부활의 날에 새로운 몸을 하나님께로부터 받기를 원했던 것이다. 바울의 은유적이고 시적인 표현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때, 성경 전체에 나오는 영혼과 죽음과 부활의 사상이 크게 왜곡된다. 또한 5절에 나오는,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되는 때란 썩어져 없어질 수 밖에 없는 육체 대신에 영원한 생명이 담겨진 몸을 받는 때인 재림의 때를 의미한다.

자, 그렇다면 8절에 나오는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란 무슨 뜻인가? 영혼불멸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처럼, 사람이 죽은 즉시 몸을 떠난 영혼이 그리스도 곁으로 간다는 말인가? 계속해서 이어지는 성경절에 그 대답이 나와 있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고후 5:10. 심판대 앞에서 각각 그 행한 것에 따라 보상을 받게 되는 때가 언제인가? 재림의 때이다.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계 22:12.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다시 이 사실을 확인하고 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삼킨 바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고전 15:51~54.

 

3.“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의 의미

벧전 3:18~20.: “ ...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한글 성경에 기록된 이 말씀을 언뜻 잘못 읽으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직후에 영으로 연옥이나 지옥 어디에 내려가셔서 노아 당시에 구원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셨다는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연옥 같은 곳이 정말 있어서 죽은 후에도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두번째 기회가 있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두번째 구원의 기회가 있다는 가르침은 없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히 9:27) 라는 말씀을 비롯하여 죽는 순간에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도 끝난다는 말씀이 여러 곳에 나와 있다(마 16:27 ; 롬 2:6 ; 겔 18:24 ; 계 22:12). 두번째 구원의 기회가 있다는 사상은 죽음 이후에는 일체의 의식이 없다는 성경의 일관된 가르침과도 크게 상반된다. 만약 두번째 기회가 주어진다면, 왜 하필이면 노아 홍수 당시에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만 그런 특권이 주어져야 하는가?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베드로전서 3장에 나오는 “육으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는 말씀의 참된 의미는 무엇인가? 이 말씀을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누어서 분석해 보자;

전반부 : “육으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이 말씀의 뜻을 자칫 오해하여, 예수께서 죽으셨을 때에 육체는 죽었지만, 영혼은 육체에서 분리되어 살아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이 말씀의 의미는, 예수께서 이 땅에서 지니셨던 연약한 인간의 속성은 십자가에서 죽었지만, 성령을 통하여 부활하심으로써 원래에 하나님으로서 지니셨던 영적인 속성이 회복되었다는 사실을 뜻한다. 그러므로 한국어 성경에는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라고 잘못 번역된 말이, 영어 성경에는 “made alive by the Spirit”(성령으로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라고 올바로 번역되어 있는 것이다. 즉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성령을 통하여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을 받으셨다는 뜻이다. 이러한 사실이 다음에 이어지는 성경절에서도 확인된다;

“이 아들로 말하자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롬 1:3~4.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부활하셨던 그리스도께 일어난 이러한 변화는 그리스도 뿐만 아니라 그분과 같이 고난에 동참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그대로 일어나는데, 성경은 그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 2:24.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롬 8:10,11.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시면, 비록 육체는 죽을지라도 성도들에게는 부활이 보장되며 영원한 생명이 약속된다. 바로 이것이 육으로는 죽임을 당하나 영으로는 살림을 받는다는 말의 의미이다.

후반부 :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옥에 있는 영들”은 누구이며, “옥”은 어디를 말하는가? 여기에 나오는 “옥”은 감시를 통하여 행동을 속박받는 뜻의 감옥(phulake)을 뜻한다. 또한 “영들”의 헬라어 원어는 앞에서 배운 바와 같이, “프뉴마”로서 “생명” 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옥에 있는 영들”이란 옥에 갇힌 사람들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옥”은 어디를 말하는가? 그것은 지옥을 의미하는 말씀이 아니라, 영적으로 어두운 이 세상을 뜻한다. 이사야 선지자도 “옥”을 어두운 세상이라는 의미로 사용하였다. “네가 소경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처한 자를 간에서 나오게 하리라” 사 42:7. 또한 시편에서는 “옥”을 영적인 어두움을 묘사하는 표현 방법으로 사용하였다. “내 영혼을 옥에서 끌어내사 주의 이름을 감사케 하소서.” 시 142:7.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신 후에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으시고, “옥”에 갇힌 사람들, 즉 “흑암에 앉은 백성”과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셨듯이(마 4:15,16), 노아 홍수 당시에도 예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죄에 속박되어 영적인 암흑에 갇힌 “옥에 있는 영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셨다.

“옥에 있는 영들”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계속해서 이어지는 성경절에서도 분명하게 밝혀 진다. “그들(옥에 있는 영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 이다(벧전 3:20). 여기에 “옥에 있는 영들”의 모습이 나오는데, 성경은 그들의 정체를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예수께서 노아 홍수 당시에 멸망을 당해서 지옥에 간 혼백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셨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께서 성령을 통하여 노아 홍수 당시에도 영적인 어두움 속에서 불순종하던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전파하셨다는 사실을 뜻한다. 베드로전서 4장 6절에 나오는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말씀도 과거에 죽은 자들 역시 그들이 살아 있을 당시에 성령을 통하여 복음을 들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과거에 죽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지 못했더라면 변명의 여지가 있겠지만, 성령을 통하여 구원의 복음을 듣거나 깨닫고도 “순종치 아니하”였기 때문에 준엄한 심판이 임하게 된다. 모든 사람의 구원은 그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에 어떠한 태도를 나타내며 살았는가에 따라서 결정되며, 일단 죽은 다음에는 구원을 위한 기회가 더 이상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다시 독자들이 답변해야 할 시간이 되었다. “가장 많이 오해되고 있는 3가지 성경절의 의미를 아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