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부:죽은 사람들은 무덤 속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죽은 사람들은 무덤 속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죽은 자들은 부활의 순간까지 무덤 속에서 어떤 상태로 있을까? 성경은 죽음 후의 상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A) 죽음 이후의 상태

  1. 자식이 잘되고 못되는 것도 전혀 느끼지 못할 정도로 현실과 완전히 단절된 상태이다 : “그 아들이 존귀하나 그가 알지 못하며 비천하나 그가 깨닫지 못하나이다.” 욥기 14:21
  2. 일체의 감정과 의식이 없다 : “죽은 자는 아무 것도 모르며.” 전도서9:5,6.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plan, 계획)가 소멸하리로다.” 시편 146:4
  3. 아무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는 무활동의 상태이다 : 전도서 9:10
  4. 고통도 느끼지 못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찬양할 수도 없는 무감각의 상태이다 : “사망 중에서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 음부(무덤, grave)에서 주께 감사할 자가 누구리이까” 시편 6:5. “내가 무덤에 내려갈 때에 나의 피가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어찌 진토가 주를 찬송하며 주의 진리를 선포하리이까.” 시편 30:9. “죽은 자가 여호와를 찬양하지 못하나니 적막한데 내려가는 아무도 못하리로다.” 시편 115:17. “음부가 주께 사례하지 못하며 사망이 주를 찬양하지 못하며 구덩이에 들어간 자가 주의 신실을 바라지 못하되 오직 산 자 곧 산 자는 오늘날 내가 하는 것과 같이 주께 감사하며 주의 신실을 아비가 그 자녀에게 알게 하리이다.” 이사야 38:18,19.

B) 잠이라고 불리우는 죽음 이후의 상태

성경은 위와 같은 죽음 이후의 상태를 “잠”(sleep) 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러한 성경의 단순한 표현은 죽음에 대하여 일어날 수 있는 여러가지 다른 이론들을 잠재우고 있다.

다니엘은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하여 예언하면서, 흙으로 돌아간 죽은 자들이 잠에서 깨어 날 것이라고 말했다. “그 때에 네 백성 중 무릇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얻을 것이라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다니엘 12:1,2.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저자들이 죽음을 잠이라고 말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잠”은 죽은 자의 상태를 가장 완전하게 묘사할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몹시 피곤에 지쳐서 밤에 잠자리에 누으면, 눕자 마자 깊이 잠들게 되는데, 이러한 경우에 다음 날 아침에 깨어날 때까지의 시간은 마치 한 순간이 지난 것처럼 느껴지게 된다. 그는 자기가 잠든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를 전혀 모르는 상태로 깊은 무의식 세계 속에서 잠을 잔 것이다. 죽음이라고 불리우는 잠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성경이 죽음을 잠이라고 부르는 또 하나의 이유는, 죽음은 마치 잠과 같아서 시간과 공간과 주변 사물을 전혀 의식할 수 없으며, 아침이 되어 잠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언젠가는 죽음이라는 잠에서 깨어나 부활할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죽음을 “잠” 의 동의어로 사용한 경우가 66번이나 기록되어 있는데, 다음에 열거하는 성경의 위인들은 모두 죽음을 “잠”으로 표현하였다;

  • 욥 : 욥기 3:13 ; 7:21 ; 14:12 ; 17:16
  • 모세 : 신명기 31:16
  • 다윗 : 시편 13:3 ; 사무엘하 7:12 ; 열왕기상 1:21, 2:10
  • 솔로몬 : 열왕기상 11:43
  • 예레미야 : 예레미야 51:39,57
  • 다니엘 : 다니엘서 12:2,13
  • 예수 그리스도 : 마태복음 9:24 ; 마가복음 5:39 ; 누가복음 8:52 ; 요한복음 11:11
  • 마태 : 마태복음 27:52
  • 베드로 : 베드로후서 3:4
  • 누가 : 사도행전 7:60, 13:36
  • 바울 : 고린도전서 11:30, 15:6,18,20 ; 데살로니가 전서 4:13~15, 5:10

영감을 받은 성경의 기자들이 가장 자주 언급한 죽음의 성격은, 죽으면 아무 것도 모르는 무의식 상태가 된다는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계 뿐만 아니라 여타의 모든 종교계에 공존하는 대표적인 사상은“죽음 이후에도 생명이 있다”는 가르침인데, 이러한 가르침은 성경의 어느 곳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사상이다. 중세기 때에 이방 종교인들이 믿고 있는 가르침이 그리스도 교회에도 스며 들어왔던 것이다.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plan, 계획)가 소멸하리로다”고 말했던 시편의 말씀은 죽음을 매우 단순하고도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다(시편 146:4). 솔로몬도 죽음에 대한 시편의 기록에 다음과 같이 동의하고 있다. “무릇 산 자는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는 아무 것도 모르며 다시는 상도 받지 못하는 것은 그 이름이 잊어버린 바 됨이라 그 사랑함과 미워함과 시기함이 없어진지 오래니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에 저희가 다시는 영영히 분복이 없느니라 ... 무릇 네 손이 일을 당하는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음부(무덤)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전도서 9:5,6,10.

죽음 이후의 상태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과 선입관은 너무나 깊이 뿌리 박혀 있기 때문에, 매우 분명한 성경 말씀을 눈 앞에 보여주면서 읽어주어도 그 말씀을 받아 들이지 않는 경향이 있다. 만일 다음과 같은 말씀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고 가정한다면, 죽음에 대한 모든 논쟁은 이미 오래 전에 확실하게 끝났을 것이다; “그 사랑함과 미워함과 시기함이 계속될 것이니 네가 장차 들어갈 음부에는 일도 있고 계획도 있고 지식도 있고 지혜도 있음이니라.” 누가 감히 이러한 성경절에 맞서서 자신의 주장을 펼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정말 믿기 어려운 일들이 기독교회 안에서 펼쳐지고 있는데, 성경에는 그러한 기록이 전혀 없을 뿐아니라, 오히려 그와 정반대되는 사실에 대해서 거듭 거듭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믿기 원하는 것만을 고집하고 있다. 죽음에 대한 진리를 증언하고 있는 수 많은 성경절들을 보면서도, 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유교와 불교에서 가르치는 가르침을 맹목적으로 따르고 있다.

죽음에 대한 진리를 다시 한번 읽어 보자! “음부(무덤)가 주께 사례하지 못하며 사망이 주를 찬양하지 못하며 구덩이에 들어간 자가 주를 찬양하지 못하며 구덩이에 들어간 자가 주의 신실을 바라지 못하되 오직 산 자 곧 산 자는 오늘날 내가 하는 것과 같이 주께 감사하며 주의 신실을 아비가 그 자녀에게 알게 하리이다” 이사야 38:18,19. 만일 죽은 의인들이 자신들이 죽는 순간에 하늘나라로 인도된다면, 그들은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겠는가? 다윗은 죽음에 대한 진리를 이렇게 기록하였다. “죽은 자가 여호와를 찬양하지 못하나니 적막한데 내려가는 아무도 못하리로다” 시편 115:17.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 음부에서 주께 감사할 자가 누구리이까?”시편 6:5.

C) 사도 바울의 장례식 설교

신문에 가끔 실리는 장례식의 부고 광고문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글을 보게 된다. “홍길동 님께서는 향년 52세의 나이로 1998년 1월 16일 0시 55분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천국으로 가셨기에 이에 부고합니다.” 또한 장례식장에서도 이와 비슷한 설교들이 흘러 나오고 있는데, 형체도 없는 죽은 사람의 영혼이 훨훨 날아서 하늘로 올라갔으니, 후에 하늘에 가서 다시 만날 수 있다고 위로하는 목사님들의 설교를 듣게 된다. 그런데 과연 신문에 나오는 부고문이나 장례식장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전형적인 장례사들은 성경이 말하는 진리와 일치하는가? 정말로 죽은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아들 딸들은 하늘로 올라갔는가? 이 질문에 대한 확실한 대답을, 우리는 데살로니가전서 4장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장례식 설교에서 찾을 수 있다.

데살로니가전서 4:16~18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장례식 설교에서, 바울은 유가족들을 위로하는 말씀으로 그의 설교를 끝맺는다.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 우리는 데살로니가 전서 4장에 나오는 바울의 설교만이 유가족들에게 완전하고도 참된 위로를 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면 이제, 바울의 장례식 설교문을 함께 읽어보도록 하자.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살전 4:16~18절.

여기서 바울은 하늘에서 예수님과 함께 있을 수 있는 방법을 말하고 있다. 그의 설교 가운데 나오는“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란 말을 쉽게 간과하지 말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그 말은“이런 방법을 통해서만 주와 함께 있을 수 있다”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주님과 함께 있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성도들의 부활을 제시한 다음에, 유가족들에게 말하기를“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고 말했던 것이다. 사람이 죽었을 때에 어떤 보이지 않고 만질 수 없는 연기같은 형체가 몸을 떠나서 천국에 가거나 지옥으로 떨어진다는 식의 설교는 유가족들에게 아무런 위로가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도 어긋나는 설교이다. 사랑하던 사람을 사별했을 때, 그가 하늘나라에 먼저 가서, 지상에 남겨두고 온 가족들이 세상에서 겪는 온갖 마음 아픈 상황들을 내려다 보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유가족들에게 참된 위안을 가져다 줄 수 있는가? 바울은 사람이 죽은 후에 주님과 함께 있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을 설명하면서, 예수님의 다시 오심과 부활을 지적하였던 사실을 기억하도록 하자.

바울의 말은 죽음과 무덤이 끝이 아니라는 영광스러운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바울은 유가족들에게 죽음의 잠으로부터 깨어나는 부활을 말하면서 위로하였던 것이다. 의인들은 불멸의 몸을 선물로 받을 것인데, 그 일은 순식간에 일어날 것이다.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고전 15:51~53. 모든 죽은 자들은 완전한 무의식 세계 속에서 잠을 자다가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최종 선고를 듣기 위해서 일어날 것이다. 그들이 1000년 전에 잠들었든지 또는 예수께서 오시기 5분 전에 잠들었든지 간에, 그들에게 있어서 부활하는 순간까지의 시간은 0.01초도 안되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어떤 분들은 예수께서 오래 전에 죽었던 모든 사람들의 갈갈이 헤지고 썩은 시체들을 어떻게 회복시키실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서 염려한다. 물론, 어떤 시체들은 폭탄에 맞고, 또 어떤 시체들은 불에 타고, 또 많은 사람들은 깊은 바다에 빠졌다. 그러나 모든 생명의 근원이신 창조주께서 각 사람의 개성을 완전하게 회복시키는데에 어떤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각 개인을 완전하게 부활시키는데에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몸을 빠져 나간 죽은 사람들의 혼은 살아 있는 가족들과 친지들을 도와주기 위하여 공중을 이리저리 날아다니고 있을까? 죽은 영혼들은 제사 때마다 자신의 집에 찾아와서 제사상 위에 차려진 음식들로 배를 채우면서 만족한 미소를 띄우고 있을까? 성경은 죽은 자들은 완전한 무의식 속에서 부활의 시간까지 “잠”을 자고 있다고 선언하고 있다. 이제 다시 독자들이 대답할 차례가 되었다. “죽은 사람들은 무덤 속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