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부:부자와 거지 나사로 -1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는 비유인가? 실화인가?


    예수께서 말씀하신 누가복음 16장 19~31절에 나오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를 문자 그대로의 실제적인 예화로 이해해야 합니까? 아니면 비유로써 이해해야 합니까?

    이 질문은 오늘날 기독교회 안에서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대체적으로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해석하는 입장에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실화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견해 : 이들은, 이 이야기는 사람이 죽어서 사후 세상에 가면 실제적으로 어떤 것들이 존재하며, 어떤 상황이 벌어지는가를 말해 주고 있는 실제적인 예화라고 생각한다.

2.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비유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견해 : 이들은, 이 이야기는 지옥과 천국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예수께서 전혀 다른 교훈을 주기 위해서 말씀하신 비유라고 말하면서,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에 나오는 내용과 전혀 반대되는 내용의 성경절들을 그 증거로 제시한다.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지옥에 대한 견해가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 그런데 한가지 안타까운 사실은, 오늘날 많은 교회들에서,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가, 믿지 않는 사람들이나 신앙이 부족한 사람들의 마음에 공포심을 넣어주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이 생기는 이유는, 예수께서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왜 하셨으며, 어떤 교훈을 주기 위해서 하셨는가에 대한 심각한 오해가 생겼기 때문에 그렇다. “부자와 나사로”에 대한 이야기를 잘못 해석할 경우, 지옥에 대한 공포심으로 인하여 일시적인 “회개(?)”가 생길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의 품성과 지옥에 대한 심각한 오해가 생기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신앙 생활에 커다란 상처를 가져다 준다.
 

이 비유는 그 당시의 유명한 민화였음

    본론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한가지 분명하게 초점을 맞추어서 연구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이 이야기가 진실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하는 것과 예수께서 이야기를 말씀하신 이유와 그 배경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 당시, 가난하고 멸시받는 서민들과 아이들이 부자들에게 당하는 그들의 설움을 노래 가사로 만들어 즐겨 부르던, 사람들 사이에 잘 알려진 민화였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누구에게나 친근하고 잘 알려진 서민들의 노랫말을 이용하심으로 주시고자 하시는 교훈이 사람들의 마음에 더 가까이 느껴지도록 하신 것이다. 이 노랫말을 이용하셔서 하신 이 비유의 이야기는 예수님 주위에 둘러 서서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던 사람들, 남녀 노소를 불구하고 모두에게 아주 이해하기 쉽고 재미있는 말씀이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 대한 이해를 가질 때, 우리는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들려주시고자 하는 예수님의 교훈이 무엇인지를 더 잘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비유의 정의

    먼저, 비유의 정의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자. 램덤 하우스 대학사전에는 비유의 정의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비유: 진리나 도덕적인 교훈을 전달하기 위해 고안된 간단하고 풍유적인 이야기.” 우리는 성경의 저자들이 비유 가운데 사용하고 있는 상징(예를 들어, 사사기 9:15에 나오는 나무들이 가시나무에게 왕이 되도록 요구하는 비유)과 실제의 상황을 잘 구별해야 한다. 왜냐하면 비유가 어떤 형태로 되어 있든지 간에, 그것은 어떤 교훈을 가르치기 위한 도구일 뿐이라는 사실을 성경 안에서 수없이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비유를 사용하신 이유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가르치실 때에 비유의 가치를 인식하셨다. 그분께서는 사람들이 당신께서 주시는 말씀을 깊이 생각하고 명상할 수 있는 영적인 자극을 주기 원하셨다. 만일 그분께서 어려운 문어체의 말을 하신다면, 청중들 중의 어떤 이들은 흥미를 잃어버리거나 그 말씀의 내용을 잊어버리게 될 것을 아셨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 중 어떤 것은 어떤 특정한 사람들에게 혹독한 비난과 반대를 일으킬 것이라는 사실을 아셨다. 그리하여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한 방법으로 복음을 전파해야 할 것을 말씀하시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비유를 사용하시는 이유를 설명해 주셨다. “가라사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저희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누가복음 8:10.
    쿠루던즈 용어 해설집에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복음을 전하실 때에 주님께서는 자주 비유로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분께서는 진리를 자원하는 마음으로 알고자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진리를 가리우기 위하여 비유를 사용하셨다. 진리를 진정으로 갈급하는 사람들은 그 의미를 발견할 때까지 쉼이 없을 것이다.”
 

누구를 대상으로 하신 말씀인가?

    그럼 이제, 예수께서 이 이야기를 누구에게 적용시키고자 하셨는지를 알아 보도록 하자. 예수님은 어떤 부류의 사람들을 그 대상으로 다루고 계셨는가?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가 나오는 누가복음 16장에는 처음부터 비유의 말씀 즉, 돈과 재물을 사랑하는 자들에 대한 경고인 청지기의 비유가 나온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14절에는,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이라는 말씀이 나온다. 그러므로 이러한 문맥을 볼 때, 예수께서는 돈과 재물을 사랑하던 그 당시의 탐욕적인 바리새인들을 지적하면서 말씀하셨던 사실을 알 수 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뿐만 아니라 예수께서 가르치셨던 진리를 거절하던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을 대할 때에는 더욱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다루셔야만 하셨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의 죄와 이기심을 지적하는 말씀을 하실 경우에는, 비유과 풍자를 사용하시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그래서 “귀있는 자들”만이 예수께서 비유를 통하여 주시는 교훈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 중에서 많은 것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그 증거가 누가복음 10장 21절에 있는 예수님의 기도 가운데에 나타나 있다. “이때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또한 마가복음 4장 33,34절은 예수께서 많은 경우에 비유를 사용하여 중요한 교훈을 주셨던 사실을 말해 준다. “예수께서 이러한 많은 비유로 저희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씀을 가르치시되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혼자 계실 때에 그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하시더라.”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에 담겨진 5가지 교훈

    무엇보다도 우리는, 예수께서 그 이야기를 통해서 주시기 원하셨던 진정한 기별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알아야 한다. 이제부터,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의 진정한 의미를 함께 연구해 보도록 하자;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가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누가복음 16:19~21.

    이 이야기 가운데 나타나 있는 부자는 누구인가? 여기에 나오는 부자는 영적으로 유대인들을 상징한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구속사업을 아는 지식으로 인해서 놀라운 축복을 받아 왔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을 받았던 사람들이다(로마서 9:4). 이 이야기의 뒷 부분에 나오는 부자의 말처럼, 유대인만이 “아버지 아브라함이여”라고 부를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은 선택된 민족이었다.
    이와 반대로, 나사로는 영적으로 가난한 모든 사람들 즉, 이스라엘 사람들이 받은 영적 유산을 나누어 주어야 했던 이방인들을 상징한다. 구약시대의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의무와 특권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하였다. “내가 또 너로 이방의 빛을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이사야 49:6.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그들의 영적인 부유함을 이방인들에게 나누어 주는 대신에, 이방인들을 마치 주인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에도 만족하는 “개들”로 생각했다(21절). 이러한 사실은, 예수께서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시험하실 때에 사용하셨던 비유에서도 잘 나타난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이에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마태복음 15:26~27.

1.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는, 진리를 가지고 있었지만, 이기적이고 영적인 교만이 마음에 가득 차 있던 바리새인들을 책망하기 위한 말씀이다.

    영적으로 부유한 유대인들은 진리를 나누어 주지 않은 채 보관하여 왔으며, 그렇게 함으로서 그들은 교만과 이기적인 정신에 의해서 스스로 붕괴되어 왔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말씀하시기 앞서, 바리새인들의 영적인 교만을 책망하셨던 것이다. “너희는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옳다하는 자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15절. 이러한 유대인들의 교만의 결과는 무엇이었는가? 예수께서는 다시 비유를 통해서 가르치셨다.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덩이가 끼어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 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22~26절.

2.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는, 유대인들의 최후의 운명을 경고하기 위한 말씀이다.

    유대인들은 지상에 있는 동안 영적으로 “좋은 생활”을 즐기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이웃을 부유케 하거나 축복하기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더 이상의 어떤 보상도 주어질 수 없었다. 예수께서는 지옥에서 고통당하는 부자의 모습을 통해서 영적으로 부유한 유대인들의 운명에 대해서 경고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여 울리로다” 누가복음 6:24, 25.

3.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는, 부자는 하나님께 복을 받아서 부자며, 가난한 자는 저주를 받아서 가난하게 되었다는 유대인들의 잘못된 사상을 지적하는 말씀이다.

4. 이 비유에는, 결국에는 나사로라는 이름으로 영적으로 마음이 가난한 자들이 하늘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는 교훈이 포함되어 있다.

    외적으로는 부요해 보였으나 영적으로 가난했던 유대인들과는 대조적으로, 나사로란 이름으로 상징된 영적으로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하늘의 왕국을 물려 받을 것이다. 영적으로 굶주리고 목마른 이방인들이 부유한 유대인들의 자리를 대신 채울 것이다. 예수께서는 독선적인 바리새인들에 의해서 업신여김을 받는 “개들” 과 죄인들이, 하늘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마태복음 21:31.

5.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는, 진리를 거절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기적도 소용이 없다는 교훈이 담겨져 있다.

    이 비유는 부자가 그의 형제들에게 자기와 같은 운명을 당하지 않도록 호소하는 것으로 끝난다. 부자는 이러한 임무를 위하여 나사로를 유대인 형제들에게 보내 달라고 아브라함에게 부탁하면서 이렇게 외친다.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30절. 아브라함이 대답하기를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31절.
아브라함의 대답을 통해서, 예수께서는 초자연적인 기적으로도 “모세와 선지자들” 의 가르침을 계속해서 거절했던 사람들의 마음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는 사실을 지적하시면서, 진리의 말씀을 거절하는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셨다. 실제로 예수께서는 죽었던 나사로를 살리심으로써, 당신께 대한 유대인들의 믿음을 불러일으키고자 애쓰셨지만, 교회 지도자들과 바리새인들은 회개하지 않았다.
 

비유일 수 밖에 없는 4가지 이유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가 지옥과 천국에 간 두 사람 사이에서 오고간 이야기라고 오해하고 있다. 그러한 잘못된 해석에 근거해서, 그들은 악인들은 죽는 순간에 그 영혼이 지옥의 유황불 속으로 던져져서 영원토록 불타게 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그러한 잘못은, 예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셨던 이유와 목적을 깨닫지 못한 채, 비유에 나타나 있는 장면에 모든 초점을 맞춤으로써 빚어진 실수이다. 그래서 그러한 해석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지금도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죽으면 천국에 있는 아브라함의 품안에 안겨진다고 믿게 된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혼백이 천국에 가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죽은 의인들의 영혼은 죽는 순간에 천국으로 간다고 생각하게 된다.

1. 아브라함이 아직 하늘에 가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비유에는 아브라함이 하늘에 올라가 있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성경은 아브라함이 아직 천국에 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다.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가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날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사도행전 2:29~34. 베드로는 그 당시 이미 죽은지 700년 이상이나 되는 다윗에 대해서 말하기를 그가 아직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고 무덤 속에 있다고 말하였다. 만일 다윗과 같은 의인이 아직 천국에 가지 못하였다면, 아브라함 역시 아직 무덤 속에서 부활의 날을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해야 되지 않겠는가? 그렇다. 바울은 히브리서 11장에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의 믿음을 소개하면서 “이 사람들이 다 믿음을 따라서 죽었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라고 말함으로써,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의 조상도 아직 천국에 들어가는 약속을 보상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였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언제 천국에 들어가게 될까?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말씀은 이 문제에 대한 분명한 대답을 준다.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누가복음 14:14. 그렇다면 의인들은 언제 부활하는가? 다시 예수님의 대답을 들어 보자.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대로 갚으리라.” 마태복음 16:27. 이제 모든 것이 분명해 졌다. 아브라함 역시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세상 끝날에 모든 의인들과 함께 천국에 들어가는 약속을 보상으로 받는다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진리이다.
    그런데,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에는 아브라함이 이미 천국에 들어가 있는 것으로 나와 있으니,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인가?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는 결코 실화로 생각할 수 없으며, 지옥 문제가 아닌 다른 교훈을 주기 위한 비유로 생각해야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이 잘 아는 아브라함과, 가난하지만 신실했던 나사로의 이름을 빌려서 그들에게 교훈을 주고자 했던 것이다.

2.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다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있을 수 없다.

    만일 천국에 간 의인들이 실제적으로 아브라함의 품에서 쉼을 얻는다면, 아브라함은 누구의 품 안에서 쉼을 얻고 있는가? 만일 예수께서 나사로가 정말 천국에 간 것을 표현하신 것이라면 아브라함의 품 대신 하나님의 품에 안겼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것이다.

3. 천국과 지옥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 마주 보면서 대화를 나눌 수 있다면, 어떻게 하늘에 있는 의인들이 지옥에서 불타고 있는 가족 친지들을 보면서 행복을 느낄 수 있겠는가?

    정말 이 이야기에 나오는 것처럼, 천국과 지옥 사이에 실제로 깊게 갈라진 계곡이 있어서 서로 마주보면서 대화를 나눌 수 있다면, 어떻게 하늘에 있는 의인들이, 지옥의 유황불 속에서 아우성치고 있는 악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천국의 안락함과 기쁨을 즐길 수 있겠는가? 그리고 천국이 지옥과 어떻게 그렇게 가까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비유는 비유로서 해석해야만 한다. 비유를 비유로서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이상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4. 비유에 나오는 부자와 나사로가 모두 육체를 가지고 천국, 또는 지옥에 간 것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그렇다면 부자와 나사로의 무덤 속에는 그들의 시체가 없다는 말이 된다.

    이 이야기에 대한 잘못된 해석으로 인해서 야기되는 또 다른 딜레마는 “빈 무덤의 신비” 이다. 이 이야기를 실제적인 예화로 생각한다면, 다음과 같이 엉뚱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부자와 나사로가 죽었을 때에 그들은 무덤에 장사되었을 것이다. 그리고는 무덤에 들어간 나사로의 시체를 즉시로 천사들이 받아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준다.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22절. 그리고는 곧 이어서 지옥에 있는 부자가 그의 눈을 치켜 뜨고 천국에서 아브라함의 품 안에서 쉬고 있는 나사로의 손가락으로부터 떨어지는 물한방울로 그의 혀를 시원하게 하기를 갈망하는 장면이 나온다.
    만일 이 이야기가 실제적인 예화라면, 우리는 이 장면을 근거로 해서 그 두 사람이 몸 전체 즉, 손가락과 혀와 갈증을 느끼는 육체를 가지고 천국과 지옥에 갔다고 믿어야 한다. 손과 발이 없고 형체를 알 수 없는 연기 같은 혼백이 간 것이 아니고, 육체가 천국에 간 것이기 때문에, 즉 부자와 나사로가 사후에 육체를 가지고 천국과 지옥에 갔기 때문에, 두 사람 모두 무덤 속에서 누워 있지 않고 사라졌다는 희안한 결론이 내려지게 되는 것이다. 두 사람 모두 육체를 가지고 천국과 지옥에 갔다면, 두 사람의 무덤은 그 주인을 잃어버린 채 비어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죽은 몸이 무덤에 묻혀진 직후에 천국이나 지옥으로 옮겨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중국과 이집트의 고대 왕실의 무덤을 발굴해 보면 지금도 여전히 시체가 발견되고 있지 않는가!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가 실제적인 예화라면, 사람이 죽으면, 종국에는 흙먼지가 되었다가 세상 끝날에 하나님의 재창조의 능력을 통하여 새롭게 부활하게 된다는 성경의 가르침과도 정반대로 어긋나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