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꼭 알아야 할 한 가지

기적과 감정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


기적을 추구하는 사람에게 보내는 요한계시록의 기별

큰 기만이 가까운 장래에 우리 모두 앞에 공개될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말세에 적그리스도가 나타나서 사람들의 눈 앞에서 놀라운 이적을 행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마치 하나님과 사단 중간에 서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엄청난 기적이 도처에서 나타나고 짐승의 표가 세계적으로 강요되는 그 날이 오면,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경배하던지 사단을 경배해야 하는 마지막 선택을 해야만 하는데, 그 때에 세상은 완전히 두개의 진영으로 나누어 지게 된다. 하나님의 참 백성들은 하나님을 경배하게 될 것이고, 사단에게 속한 무리들은 짐승을 경배함으로써 그의 표를 받게 될 것이다. 안타깝게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짐승의 표를 받을 뿐 아니라,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기를 거절하고 그 표를 받지 않는 소수의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나아가서는 그들을 죽일 것인데, 바로 이것이 지구 역사의 마지막에 있는 선과 악의 최후의 대쟁투이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 사항은 “이방 종교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짐승의 세력에게 미혹당해서 그들과 하나로 연합하여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데 가세하게 될 수 있는가?” 라는 점이다. 요한계시록 13장에는 이 의문에 대한 힌트가 기록되어 있다.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짐승 앞에서 받은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 계 13:13,14. 바로 여기서 우리는 사단이 거짓 그리스도인들과 이방 종교인들 그리고 심지어는 신의 존재를 부인하는 세상 사람들까지라도 하나로 끌어 모으는 방법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사단의 대리자들이 행하는 놀라운 “기적과 이적”이다. 사단은 자신의 대리자인 거짓 그리스도인들에게 능력을 줌으로써 온갖 기적을 행하게 하는데,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는 이적을 행함으로써 온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경이로운 마음을 가지고 짐승의 표를 받도록 미혹할 것이다. 그 때 세상은 짐승의 세력을 중심으로해서 일어나는 경이로운 기적을 보면서 열광적인 감정의 도가니로 변하게 될 것이다.

지구 역사의 마지막이 되어 갈수록 거짓이 진리와 너무나 유사하게 제시되기 때문에 오직 성경 이외에는 그 둘을 분별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그러므로 성경은 모든 말과 기적과 행위를 시험하는 일에 있어서 유일한 기준이 되어야만 한다.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히 아침 빛을 보지 못하리니” 사 8:20. 하나님의 참 백성이라면 누구나 성경을 거짓 성직자의 영향과 마귀의 영들이 행하는 기만적인 기적에 대항하기 위한 방어책으로 사용하는데 익숙해야 한다. 사단은, 만일 사람들이 성경에 대하여 올바른 지식을 소유하게 되면, 자신의 온갖 속임수가 폭로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사단은 사람들로 하여금 성경을 진지한 마음으로 연구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사단의 공격 목표는 감정

성경 진리에 의존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감정에 의지하게 된다. 그러므로 사단은 기적과 초자연적인 현상을 통하여 사람의 감정을 집요하게 공격한다. 느낌과 감정에 의존하여 신앙 생활을 영위하는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사단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할 수 있는 아무런 보호벽도 가지지 못하게 된다. 왜냐하면 사단은 사람의 정신을 흥분시키고 자극하는 방법으로 오류와 거짓을 퍼트리기 때문이다. 진리 안에 존재하는 참된 행복과 만족을 발견하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은 헛된 감정적 환희를 추구하다가 사단이 만들어 놓은 덫에 걸려 들게 된다.

사단은 오늘날 교회 안에서 감정과 믿음을 섞어 놓으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러므로 감정이 고조되어야만 믿음의 향상과 구원의 확신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사단의 전략에 기만당하기 매우 쉬운 형편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사단은 진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그 성품과 생애에 있어서 아직 충분하게 열매 맺지 못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각종 기적과 거짓 은사를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을 줌으로써, 그들의 고조된 감정을 통하여 접근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고조된 감정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자신과 특별하게 함께 하신다는 거짓 확신을 갖도록 만든다. 그러나 이러한 경험은 성경이 말하는 참된 변화가 아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어떤 단조로운 말을 빠르게 반복하여 기도함으로써, 이전에 자신이 경험했던 감정적 환희와 만족을 억지로 이끌어 내려고 애쓰지만, 그들의 생애를 이끌어 가는 진리와 신앙의 원칙이 교정되지 않는한 진정한 변화는 이루어지지 않으며, 새롭게 거듭난 생애도 시작될 수 없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신의 신앙이 감정적으로 만족되지 못할 때마다 깊은 낙담을 맛보게 된다. 그들은 사단에게 속은 것이며, 또한 스스로의 감정에게 속은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의 영적 경험은 자신이 느끼는 감정 이상으로 깊이 들어가지 못한다.

감정적 신앙의 특징

감정적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매우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뜻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성경 말씀을 통하여 분명하게 밝히신 뜻과는 달리 그와 반대되는 길로 갈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는 억지 기도를 드리는 것이야말로 감정적인 신앙의 대표적 증거이다. 사단은 광명한 천사로 가장하여 의심을 받지 않을만한 곳에 그물을 치기 때문에 정직한 마음으로 열심히 성경을 연구하지 않는 한, 누구도 사단의 덫을 피할 수 없다.

대개 감정을 중요시 여기는 신앙은 하나님의 진리와 율법의 요구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령께서 내게 개인적으로 말씀해 주실 때까지 나는 이 길을 그대로 가겠다” 라고 고집하는 경향이 있다. 사단은 이러한 사람들에게 접근하여 그들이 원하는 감정과 느낌을 줌으로써, 그들의 욕구를 만족시켜 준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가 요구하는 바를 저버리고, 자신의 감정과 느낌이 요구하는 바에 따라서 생애함으로써 결국에는 자기 스스로를 속이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표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아와 교만이 죽은 생애이며, 자신보다 진리를 높이 여기는 삶이다. 분명하고 예리한 성경 진리를 받아들이기 원치 않는 그리스도인들은 명백한 진리 대신에 자기의 양심을 진정시키고 감정을 만족시켜 주는 설교를 좋아한다. 극기와 자아 희생을 요구하는 그리스도의 진리가 빠져 있는 교리에 큰 호감을 나타내는 것이 감정적 신앙인의 특징이다.


믿음과 느낌이 오는 순서

느낌은 믿음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둘을 명확하게 구별할 뿐 아니라 서로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믿음을 활용하는 대신에, 자신에게 어떤 특별한 느낌이 올 때까지 기다린다. 믿음은 홍해가 갈라지는 놀라운 광경을 볼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전진하는 것이다. 믿음으로 전진하였을 때, 영광스러운 감격(감정)과 감사의 정신을 축복으로 받게 된다. 믿음은 환경과 조건에 상관없이 활용할 수 있는 것이고, 느낌은 믿음을 활용한 결과로서 얻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러므로 믿음의 활용없이 어떤 느낌과 감정을 만들어 내기 위하여 인간적으로 애쓰는 것은 순서가 바뀌었을 뿐 아니라, 크게 잘못된 신앙 태도이다. 하나님께서 축복으로 허락하시는 감정과 느낌은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선물이기 때문이다.

참된 믿음은 약속된 축복이 실현되고 느껴지기 전에 그것을 붙잡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말세를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유의해야 할 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자신이 붙잡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 진리의 말씀과 일치하는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진리가 아닌 다른 것을 붙잡고 있으면, 마귀가 그 사람의 요구와 기도에 응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축복을 깨닫기 이전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축복하심에 대한 감사의 정신(감정)을 소유할 수 있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가 항상 최선의 방법으로 이루어질 것을 믿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참된 믿음을 소유한 그리스도인이 항상 만족한 감정과 느낌을 가질 수 있는 이유이다. 약속된 축복을 느끼고 그것을 즐기게 될 때에는 이미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느낌이다. 말세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기 전에 그것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을 기대하며 사는 것이 믿음이다.


믿음이 필요한 순간

모든 것이 예상대로 잘 진행되고, 모든 일이 잘 풀려 나갈 때에는 믿음의 참된 가치가 드러나지 않는다. 믿음은 주변 상황이 최악으로 흘러나갈 때에 진정으로 그 가치가 발휘된다. 모든 것이 원만하고 평화로울 때에는 참된 믿음을 소유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상황이 변해서 모든 것이 악화될 때에는 참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높이 드러나게 된다. 자신의 감정이 잘못된 것을 요구할 때, 자신의 느낌이 건강에 유익하지 않는 음식을 요구할 때, 그리고 자신의 육체가 정욕적이고 세속적인 것을 달라고 외칠 때에 참된 믿음은 그 모든 것을 거절하고 승리한다.

믿음에 대한 오해를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감정적 신앙을 가지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성령이 자신에게 많이 부어질 때에는 큰 믿음을 얻게 되며, 자신이 성령의 큰 능력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에는 아무런 믿음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령의 결핍을 느낄 때야말로 믿음을 활용해야 할 때이다. 짜증과 속상함이 치밀어 오르고, 허전함과 외로움이 밀려올 때야말로, 우리가 믿음을 발휘하여 하나님께 구조의 손을 뻗칠 때이다. 시커먼 검은 구름이 마음을 덮쳐올 때야말로 산 믿음을 통하여 흑암을 꿰뚫고 구름을 흩어 버림으로써 암흑 저편에서 여전히 나를 바라다 보고 계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쳐다 보아야 할 때이다. 참된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인데, 그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만이 하나님의 말씀이 약속하는 축복을 주장할 수 있다. 바로 이것이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는 말씀의 의미이다(요 15:7).


무엇으로 복음을 받아야 하는가?

우리는 복음을 무엇으로 받아야 하는가? 복음을 이성으로 받아야 하는가? 감정으로 받아야 하는가? 우리는 복음을 양심과 생애로 받아야 한다. 복음을 양심과 생애로 받는 대신에 감정으로 받는 사람들은 결국에는 복음을 버리고 떠나가게 된다. 지금도 수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고 그리스도께 나왔다가, 다시 복음을 버리고 떠나가고 있다. 복음을 양심과 생애로 받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과 행복을 발견하지만, 복음을 감정으로 받은 사람들은 감정이 식어지면 복음에 대하여 싫증을 느끼고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가고 만다.

이러한 현상은 “예수께서 곧 재림 하신다” 는 기별이 전파될 때에도 그대로 반복된다. 곧 짐승의 표가 강요되고 예수께서 오신다는 경고의 기별을 들었던 많은 사람들이 시간의 흐름과 함께 격앙되었던 감정이 식어지면, 그들은 후회하면서 복음을 버리고 떠나간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시대에 그들을 “내 백성아 거기(바벨론)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고 부르셨건만(계18:4), 그들은 자신들의 고조된 감정이 식는 순간에 하나님의 부르심으로부터 등을 돌린다. 그들은 원칙과 믿음으로 움직이지 않고, 느낌을 따라서 움직인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성품과 생애를 위하여 계획하셨던 섭리와 역사가 미처 이루어지기도 전에 그들은 복음을 버리고 떠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진실함을 시험하시는 시간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말세에는 예수께서 곧 재강림하신다는 엄숙하고 두려운 기별이 그것을 들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휘저어 놓게 된다. 사람의 마음을 읽으시는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격앙된 감정과 흥분을 보시면서, 그들이 정돈된 마음으로 자신들의 신앙적 입장을 결정할 수 있는 때를 기다리신다. 사람들이 자기 스스로를 기만하지만 않는다면, 그분께서는 흥분된 감정이 정돈될 때까지 시간을 허락하실 것이며, 그 다음에 당신을 따르는 백성들의 순종과 진실함을 시험하심으로써 그들의 신앙이 어떠한가를 살피신다.


하나님의 은혜인가? 나의 노력인가?

사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변화를 이야기 하지만, 실제 생활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힘과 의지로 자신의 신앙과 생애를 억지로 변화시키고자 하는 잘못을 쉽게 범하기 쉽다. 오직 거듭난 마음을 가진 그리스도인만이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할 수 있고, 진리와 율법에 완전히 합치된 마음에만 완전한 평화가 깃들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얼마나 자주 스스로의 노력으로 마음의 평화를 만들어 내고, 구원의 확신을 얻어내려고 노력하는가?

변화의 중심은 언제나 마음이다. 우리를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계획은 언제나 마음의 중심에서부터 시작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감정을 고조시키는 어떤 기적이나 예식이 아니라, 그분의 생명이다. 그분의 생명이 있는 삶은 언제나 어디서나 풍요롭지만, 생명이 없는 곳에는 언제나 허무와 참담함만이 존재할 뿐이다. 생명이 없는 신앙은 우리를 율법주의나 감정적인 신앙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마음의 만족과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갖기 원하는가? 감정을 끌어올리려고 애쓰는 대신, 온 마음과 생애를 다하여 그리스도의 말씀을 받아들임으로써, 그 속에 담겨져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아들이라!


교회 안에 “다른 복음”이 존재하는 이유

복음은 타락한 인간에게 변화를 요구한다. 그러나 만일 복음이 요구하는대로 성품과 생애에 참된 변화가 이루어지지 못하면, 결국에 가서는 자신의 잘못된 경험과 감정의 요구에 맞춰서 복음을 바꾸어 놓게 된다. 복음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대신에 사람이 복음을 변질시켜 버리게 된다는 말이다. 사도 바울은 바뀐 복음 즉, 다른 복음에 대해서 이렇게 경고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지어다.” 갈 1:6~8. 성경은 다른 복음에 대해서 이렇게 강력한 경고를 주고 있는데, 오늘날 그리스도 교회 안에 왜 이렇게 여러가지 다른 복음이 존재하게 되었을까? 그 이유를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잘못된 감정과 경험에 맞추어서 참 복음을 다른 복음으로 대치하였기 때문이다.

복음을 의도적으로 거절하거나, 복음대로 살아가지 않는 사람의 마음에는 평안이 깃들 수 없다. 이러한 경우에 있어서, 믿음과 원칙 위에 서있지 못하고 감정 위에 자신의 신앙을 세운 사람들은 불편한 양심을 달래고, 마음의 평안을 만들어 내기 위하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복음을 변질시키게 된다. 복음이 일단 변질되면, 사람은 죄 가운데서도 편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게 된다. 모든 사람은 선천적으로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항상 “다른 복음”을 더 선호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유의해야 한다. 오직 진정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만이 “다른 복음”이 던지는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다.


자기 기만의 위험

신약 성경에 한 가지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이 나오는데, 그것은 사도 바울이 기록한 자기 기만에 대한 경고의 말씀이다. “아무도 자기를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미련한 자가 되어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고전 3:18. 어떻게 우리가 스스로 우리 자신을 기만할 수 있을까? 어떻게 우리가 우리 자신을 스스로 속일 수 있을까? 때때로 다른 사람들의 거짓말에 의해서 속임을 당할 수는 있지만, 어떻게 자기가 자기를 속일 수 있을까?

대개의 경우에 있어서, 자기 기만의 과정은 매우 서서히 진행되기 때문에 거의 알아차리기 힘들다. 진리의 빛은 하나님의 말씀과 당신의 종들을 통하여 전달되거나, 혹은 성령의 직접적인 역사를 통하여 사람들에게 임한다. 진리의 빛은 놀라운 힘(power)을 가지고 역사한다. 그렇기 때문에 진리를 받아들인 사람은 변화함을 받지만, 진리를 의도적으로 거절한 사람은 더욱 악하게 되거나 강팍한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다. 한번 자신에게 임한 빛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거나 거절하게 될 때, 영적 감각력도 상처를 받아서 부분적으로 마비되기 때문에 두번째 나타나는 빛은 그만큼 식별할 수 없게 된다. 그 결과,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흑암의 세력은 증가하게 되고 결국에는 영혼이 밤처럼 캄캄하게 된다.

바로 이것이 자기 기만의 늪으로 빠져들어 가는 과정이다. 자신에게 진리의 빛이 이르러 왔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이해했을지라도, 그 빛을 받아들이고 순종하여 그 진리를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지 않을 때, 그 사람은 자신이 빛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스스로 믿게 되고, 결국에는 자신이 어둠 속에 있으면서도 스스로 빛 가운데로 걸어가고 있다고 착각하는 깊은 기만 속에 빠지게 된다. 그리스도인이 순종도 불순종도 아닌 중간 상태에서 머뭇거리면서 진리를 앞에 두고 흥정하고 있는 동안, 사단은 그 사람의 마음을 점령해 간다. 진리가 무엇인지 깨달은 사람이 진리를 거절할 때, 그는 사단의 포로가 되기로 결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두려운 이야기이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들려 주시는 음성에 대하여 어떻게 반응하며 사는가? 성령께서 그대를 인도하기 위하여 보내주시는 진리의 빛에 대하여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가? 그대의 반응과 선택 위에 온 세상을 미혹하는 마지막 대 기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이 놓여 있다. 우리에게 빛을 주시는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의 변화와 개혁된 삶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스스로 기만하지만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성경 진리를 통하여 보다 더 밝은 빛 가운데로 우리를 인도하심으로써, 사단의 기만과 덫을 피할 수 있게 도와 주신다.


   Q & A 

문: 현재, 기적을 체험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가장 유의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요?

답: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연구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리 자체는 영원불변하지만, 진리를 이해하는 우리의 지식과 경험은 잘못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개의 경우,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된 지식과 경험을 토대로 진리를 검증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진리를 기준점으로서 해서 우리가 가진 지식과 경험을 판단해 보아야 합니다. 즉, 우리의 지식과 경험으로 진리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로서 우리의 지식과 경험을 시험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사단은 경험을 진리 위에 놓으려고 애씁니다. 그러나 우리의 경험은 그것이 올바른 진리의 테두리 안에 있을 때에만 가치있는 것입니다. 진리에 대한 우리의 지식과 경험은 우리가 어떤 교단에 속했으며, 어떤 사람에게 성경을 배웠느냐에 따라서 크게 다를 수 있지만, 진리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항상 동일합니다.

성령의 은사를 체험하고 있다는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다음과 같이 자신의 경험을 설명합니다. “A) 나는 어떤 놀라운 기적을 경험하였다. B) 그런데, 나의 경험과 매우 흡사한 경험을 성경에서 발견하였다. C) 그러므로 나의 경험은 진리이다.” 이와 같은 3단 논법에 의해서 그들은 자신들의 경험을 성령의 은사로 믿고 받아 들입니다. 이러한 논리는 매우 설득력 있게 들리지만, 자신의 경험이 초대 교회의 경험과 비슷하다고 해서 자신들의 경험이 진리 안에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단도 기적을 일으킬 수 있으며, 성령의 역사를 위조할 수 있고, 사람의 감정을 조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경험이 최고의 증거라고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진리는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신이 경험한 “영”에 의해서 진리를 척량하려고 합니다. 바울은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아니하고”(살후 2:10,11)

아무리 그리스도를 믿고 사랑한다고 공언할지라도, 진리의 말씀에서 벗어나거나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그 사람의 영적인 위치는 매우 위험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랑과 진리는 분리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은 진리를 끝까지 따라가게 되며, 진리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그 마음 속에 사랑을 가지고 있어야만 합니다. 성령은 사랑과 진리를 함께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성령이 주어진다고 설명하고 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성령)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니라”(요 14:15~17) 사도 요한은 여기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분의 계명(commandment, 명령)을 순종할 것인데,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러한 사람들에게 성령을 주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에 대한 순종이야말로 자신의 경험을 시험할 수 있는 최종적인 판단 기준이며, 동시에 성령을 받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