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부:방언이 중요한 이유

방언의 은사가 오늘날에도 중요한 이유


방언은 오늘날에도 꼭 필요한 은사이다. 성경은 성령의 은사 중 하나로서 방언을 소개하고 있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모든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시느니라” 고전 12:4~6,10~11.

방언에 대하여 첫 번째로 말씀한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침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막 16:15~18. 예수께서는 온 세상에 다니면서 복음을 전파할 것을 명령하시면서, 믿는 자들에게는 방언의 은사가 나타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에서, 예수께서는 복음 전파와 방언의 은사는 병 고치는 은사와 함께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오늘날에도 복음의 전파가 필요되므로, 방언의 은사가 복음을 전파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내려져야 한다. 요한계시록 14장에 나오는 세 천사들의 기별은 방언의 은사를 필요로 하고 있다.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하는 자들 곧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복음을 가졌더라” 계 14:6. 각각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모든 족속과 민족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방언의 은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Do you know this?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요한복음 3:8)

이 말씀은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모습을 나타낸다. 우리는 바람을 보지 못하지만 사람이 무엇을 하는지는 알 수 있다. 비록 우리가 바람을 보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사실에 대한 증거가 될 수는 없지만, 그분의 능력은 조용한 가운데 새로운 생명을 가져다 준다. 비록 우리가 성령의 역사를 보거나 만지지는 못할지라도, 그분께서 해놓으신 결과를 볼 수는 있다. 만일 우리의 마음이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변화된다면, 우리의 생애가 성령의 임재하심을 증거하게 될 것이다.

성령의 임재는 우리의 느낌이나 감정에 의존하여 확인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성령의 임재하심은 오직 변화된 생애를 통해서만 분명하게 확증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온전히 자신을 비우고 마음 속의 우상과 죄를 버린다면, 그리스도의 영께서 우리의 마음 속을 충만하게 채우실 것이다. 오직 이러한 사람들만이 성령의 선물을 받을 수 있는데, 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자랑치 아니할 것이며, 오직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릴 것이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심이라”(고전 2:10,12)

우리가 하나님의 영을 받았을 때, 우리는 어떤 황홀하고 자극적인 느낌을 얻기 보다는, 오히려 침착함과 예리한 판단력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생애를 바치게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정서와 생애를 생각해 보자. 그분처럼 성령이 충만하였던 사람이 있는가? 그분의 생애는 감정적 환희와 흥분으로 차있는 생애가 아니었다. 오히려 고난과 희생과 봉사로 점철된 생애였다. 그분께서는 죄와 불의를 거절하셨으며, 병자들과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고 치료해 주시는 생애를 사셨다. 그분께서는 성령이 충만하신 결과로 거룩한 삶을 사셨던 것이지, 자신에게 성령이 임하셨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구제와 치료를 베푸신 것이 아니었다. 그분께서는 단 한번도 자기 자신을 위하여 성령의 능력을 사용하지 않으셨으며, 오직 복음을 전파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일에만 성령의 능력을 구하셨다.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성령 충만함은 하늘 아버지의 뜻을 조용하면서도 진지하게 행하는 순종의 삶으로 표시되었다. 그분의 삶은 사랑과 희생과 극기와 자아부인으로 꼴 지워졌다. 마찬가지로 진실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도, 이성적인 분별력과 하나님의 진리가 감정과 느낌을 지배해야 한다. 진리는 건전한 상식 위에 세워지며, 질서 있는 가정생활을 통하여 다른 영혼들에게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의 은사를 허락하시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복음의 효과적이고 신속한 전파이다. 성령의 은사가 개인의 신앙적 만족감을 얻는 수단으로 사용되어서는 안되며, 자신의 구원에 대한 확신감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어서도 안된다. 또한 하나님께서 자신을 인정해 주신다는 마음의 안정감을 얻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어서도 안된다.

문: 방언 은사는 누가 누구에게 주는 것입니까?

답 : 방언의 은사를 내리시는 분은 누구인가? 방언의 은사를 받기 위해서는 어떤 특별한 장소에 가야만 하는가? 그것을 받기 위해서는 기도원이나 어떤 비밀스런 장소에 가서 오랜 기간 동안 기도해야 하는가? 누가 누구에게 이러한 은사를 주시는가? 앞에서 읽어본 대로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라고 성경은 은사의 출처를 밝히고 있다(고전 12:4~6). 4절에서는 성령을, 5절에서는 예수님을, 6절에서는 하나님을 은사의 출처로 소개하고 있다. 은사는 아버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성령, 곧 하늘의 세 분 지도자들에 의해서 내려지는 것이다. 즉 하늘의 세 분 지도자들이 은사를 내리시는데 참여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은사를 성령의 은사라고 주로 말하는 이유는 예수께서 하늘에 가실 때에 보혜사 성령을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성령은 은사를 전달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은사를 그리스도인에게 전하는 것은 성령이지만, 하늘의 세 분 지도자가 은사를 내리시는 일에 참여하고 있음을 안다면, 은사가 얼마나 귀하고 중요한 것인지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교인들이 다 같은 은사를 받을까?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바울은 교회를 몸의 지체로 비유하고 있다. 우리 몸이 팔, 다리, 눈, 코 ... 등 같이 기능이 다른 부분이 합쳐져서 일을 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 것처럼, 교회도 서로 다른 기능을 가진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고전 12:8~10

바울은 이 말씀을 통하여 각각 다른 사람들에게 각기 다른 은사를 주신다고 증거하고 있다. 여기에 한 가지 오늘날 기독교회가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 누구든지 성령을 받으면 그 결과로 방언을 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은 잘못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신자들은 방언을 거짓으로 만들어 내고, 어떤 이들은 실망하여 교회를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은 서로 다른 사람들에게 서로 다른 성령의 은사를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다.

고린도전서 12장 29-31절부터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하여 확실히 증언하고 있다.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병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 그 대답은 “아니다!”이다. 다 사도일 수 없고, 다 선지자일 수 없고, 다 병고치는 은사를 받을 수 없고, 다 방언을 말할 수 없다고 바울은 주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 방언을 해야 성령의 침례를 받은 증거라고 주장하는 것은 성서적 주장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