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록: 하나님이 주시는 상처

세 가지 상처


하나님이 주신 상처로 세상을 이긴다

줄리안이라는 여성은 600년 전에 살았던 아주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녀가 살던 시대는 종교 개혁 이전이었기 때문에 개신교가 없었지만, 만일 그녀가 루터의 시대에 태어나서 살았더라면 그녀는 완전히 루터 편이었을 것이며, 완전한 개신교인이 되었을 것이다.

줄리안은 하나님을 매우 사랑하여 주님과 동행하는 신실한 여인이었다. 그녀에게는 하나님이 전부였다. 그녀는 딱 한 권의 영감적인 책,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들”이라는 책을 썼는데, 그 감동적이고 영감적인 책에는 그녀가 하나님께 구했던 세가지 선물에 대하여 언급되어 있다. 그녀는 “내 삶 속에 세가지 상처를 받아들이기를 원하는 강렬한 소원이 불같이 나를 사로 잡았습니다. 그 세가지 상처는 ‘회개의 상처’, ‘긍휼의 상처’,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갈망’의 상처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1. 회개의 상처

줄리안이 원했던 첫 번째 상처는 ‘회개’의 상처였다. 그녀는 자신의 죄를 뼛속 깊이 슬퍼하였다. 그녀는, 죄를 진정으로 슬퍼하지도 않고 자기를 변화시키는 노력도 없이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를 값싸게 받아들이는 것을 경계하였다. 그녀는 “하나님, 제가 교만해지지 않도록 지켜주소서, 저 같은 죄인을 위해 성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잊어버리는 교만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라고 기도했다. 사람들은 종종 죄를 범한 자신에 대한 분노를 회개로 착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분노는 회개가 아니다. 철저한 회개! 이것은 누가 참신자인지를 말해준다. 진심으로 철저히 회개하는 신자! 이런 사람은 어느 교파에 속하든지간에 참 그리스도인이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믿고, 그 은혜에 감격하고 즐거워하는 일에 둘째가라면 서러워하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내가 성삼위 하나님께 반역하여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죽을 때까지 기억하면서 살아갈 것이다. 줄리안은 “오, 하나님! 제가 회개의 아픔으로 상처를 받게 하옵소서. 제가 범죄한 것을 슬퍼하게 하시고, 그 슬픔 속에서 살게 하소서”라고 기도했다. 사도 바울은 ‘기쁨의 서신’이라고 불리는 빌립보서를 감옥에서 쓸 정도로 기쁨이 가득한 사람이었지만,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이었는지를 결코 잊지 않았다는 암시가 그의 서신들에 종종 나타난다. 죄가 극악무도한 이유는 그것이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께 반역하여 저질러진 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첫 번째 상처는 ‘회개’의 상처이다.

2. 긍휼의 상처

우리가 받아야 할 두 번째 상처는 ‘긍휼’의 상처이다. 줄리안은 예수님처럼 세상을 불쌍히 여기기를 원했다. 오늘날 기독교의 최대의 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리스도를 닮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들은 정통 교리를 믿지만, 긍휼이 무엇인지를 모른다. 내가 말하는 긍휼은 툭하면 눈물을 훌쩍거리는 감상이 아니다. 진정한 긍휼은 이웃과 형제를 향하여 예수님과 똑같은 마음을 품는 것이다. 이 험난한 시대에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긍휼이다. 나는 자주 이렇게 기도한다. “오, 주 예수님! 주님이 사람들에게 느끼시는 대로 저도 똑같이 그들에 대해 느끼게 하소서. 주님이 그들을 사랑하시는 방법대로 똑같이 저도 그들을 사랑하게 하옵소서.”

이런 기도의 응답으로 나의 마음 속에는 주위 사람들이나 세상에 존재하는 슬픔과 고통에 대해 슬퍼하는 마음이 가득하다. 이런 사람들을 불쌍이 여길 때 나의 마음은 상처를 받는다. 이것은 ‘긍휼’의 상처요, 하나님이 은혜 중에 내게 허락하신 상처이다. 나는 이 상처를 결코 치료하고 싶지 않다. 오히려 나는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과 함께 고통을 느끼고 그들의 상처에 동참하고 싶다. 무디는 말하기를,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서 심판이나 지옥에 대해 설교하는 사람은 지옥에 대해 설교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라고 했다.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발견되는 사랑과 긍휼! 이것은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고 십자가를 지신 주님이 그들 중에 임재하신다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긍휼의 상처’는 아름다운 상처이다. 그대에게 감히 청하노니, 나와 함께 긍휼의 상처에 대해 깊이 묵상하자. 나와 함께 세상의 고통에 동참하는 사람이 되자!

3. ‘하나님을 향한 갈망’의 상처

우리가 받아야 할 세 번째 상처는, 줄리안의 말을 빌려서 말하자면, ‘하나님을 향한 갈망’의 상처이다. ‘하나님을 향한 갈망’의 상처라고 말할 때 우리는 어디까지나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개념 안에서 말해야 한다. 이 말은 눈물을 짜내는 어떤 로맨틱한 사랑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복음 전도자들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이성간의 사랑에 비유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때로는 그것이 지나쳐서 나를 당황하게 만든다. 물론 이성에 대한 사랑과 갈망이 이 세상에는 존재하며,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버림을 받았거나 속임을 당했을 때 마음에 큰 상처를 받는다. 그러나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을 향한 갈망을 말하는 것이다.

이성에 대한 갈망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갈망도 있다. 하나님을 향한 갈망은 이 세상의 어떤 것을 향한 갈망보다도 큰 것이다. 이것은 다윗과 바울이 증거한 갈망이다. 바울은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빌 3:13,14)고 말한다. 여기에 나타난 바울의 모습은 선수가 결승선을 눈앞에 두고 전력을 다하여 달려가는 모습에 비유될 수 있다. 바울은 상을 얻기 위해 달려가는 것이며, 그에게 상이란 바로 하나님이시다. 그는 어디까지 달려갔는가? 그는 로마 병사가 칼로 그의 목을 자를 때까지 달려갔다. 줄리안은 “하나님! 하나님을 저에게 주소서. 하나님 한 분으로 저는 족하나이다. 하나님보다 못한 것을 추구한다면 저는 언제나 목마를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에게는 하나님이 모든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기도했다.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 이것이 오직 우리가 갈망해야 할 것이 아닌가?

4. 하나님을 향한 향수병

1차 세계대전 때에 나는 군복무 중이었다. 직접 전쟁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아무튼 전쟁이 끝나서 우리는 고향에 돌아갈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 집으로 가게 될지 확실히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같은 부대에서 일했던 한 동료는 ‘고향아, 그리운 고향아!’라는 노래를 반복해서 부르곤 했는데, 그는 심한 향수병에 걸려있었다. 만일 고향에서 멀리 떨어져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지 못하고 고향의 땅을 밟지 못하고 살고 있다면 향수병에 걸리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갈망은 병으로 발전할 수 있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을 향수병이라고 부를 수 있듯이, 하나님을 갈망하는 것도 향수병이라고 부를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영원히 돌아가야 할 고향이시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줄리안은 “오, 하나님! 불치의 향수병으로 저에게 상처를 주소서. 이 세상이 저의 고향이 아니오니, 어찌 이곳에서 정착하리이까? 어찌 하늘의 고향을 그리워하지 않을 수 있겠나이까?”라고 묻는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을 고향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하나님을 향하여 갖는 향수병은 그리스도인이 걸려도 좋은 병인 것 같다.

영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