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부: 세상을 버림으로 얻는 평안

세상을 버리고 참 평안을 얻으라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살지 않는 것처럼’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한다. 이것이 세상 안에서 살되 세상에 속하지 않는 자세이다.

이런 자세로 살아갈 때 우리는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 하나님의 임재의 체험이 주는 즐거움은 온갖 문명의 이기와 문화적 산물이 주는 즐거움보다 더 크다.

1. 구원의 기회를 결코 미루지 않는다

사단에게 속지 말라. 그리스도인이 될 뻔하다가 마는 사람이 되지 말라. 참그리스도인이 되라. 가다가 중지하지 말고 끝까지 가라. 그리스도 안에 거하라. 그리고 그분이 당신 안에 거하시게 하라.

구원 받을 뻔한 사람들

나는 ‘무엇이 될 뻔하다 마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사도행전에 보면 바울이 아그립바 왕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거하며 훌륭한 변증을 한 기록이 나온다. 아그립바 왕은 바울의 복음전도에 감동을 느꼈다. 물론 그뿐만 아니라 바울을 둘러싸고 있는 다른 사람들의 마음도 움직였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의 변증이 끝났을 때 아그립바는“네가 나를 설득하여 그리스도인으로 만들 뻔했다”(행 26:28;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고 말했다.

이 말을 현대 말로 하면 이런 말이다. “사도 바울! 당신의 말이 나를 기독교로 개종시킬 뻔했소. 당신의 변증이 나의 마음을 바꾸어 놓을 뻔했소.” 이런 아그립바의 반응을 보고 바울은 어떻게 대답했는가? 그는 기품있고 진지하게 말하기를, “오, 왕이여! 오늘 밤 하나님 앞에서 내가 소원하는 것은 당신과 여기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될 뻔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오”라고 했다. 내가 여러분들에게 하고 싶은 말도 이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될 뻔하다가 마는 것이 아니라, 진짜 그리스도인이 되라는 것이다. 무엇이 될 뻔하다가 마는 것은 참으로 저주스러운 것이다. 아그립바는 “내가 그리스도인이 될 뻔했다”라고 별 생각 없이 말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일생 최대의 비극적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성(聖) 유다가 될 뻔한 사람

가룟 유다에 대해 묘사할 때 모든 사람들은 씁쓰레한 느낌을 입으로 내뱉는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팔아넘기는 극악무도한 죄를 범한 것은 사실이지만, 사실 그는 악마가 아니었다. 가룟 유다도 인간이었다. 우리와 똑같은 심장을 가진 사람이었으며, 나뭇가지에서 지저귀는 새소리를 듣고 고양이를 쓰다듬고 강아지를 안아주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아무에게도 의심을 받지 않을 정도로 신실히 예수님을 따랐으며 평소에 그렇게 악하고 저질스럽게 행동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결정적인 실수는 그가 완전히, 끝까지, 하나도 남김 없이 자신을 예수님께 굴복하지 않은 것이었고, 그것으로 인해 사단의 유혹에 완전히 넘어가 그의 지배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는 성(聖) 유다가 될 뻔했다. 그러나 그는 모든 사람에게 혐오감을 주는 가룟 유다가 되었다는 것이다.

구원의 기회를 미루는 사람들

당신은 참신자인가? 나는 ‘구원받기 위한 믿음’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부디 부탁하건대, 사탄에게 속지 말라. 그리스도인이 될 뻔 하다가 마는 사람이 되지 말라. 참그리스도인이 되라. 가다가 중지하지 말고 끝까지 가라. 그리스도 안에 거하라. 그리고 그분이 당신 안에 거하시게 하라.

혹시 당신은 내게 “내가 참신자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확인 할 수 있습니까?”라고 물을지 모르겠다. 성경이 믿으라는 대로 믿고, 성경이 행하라는 대로 행하고, 그리스도를 신뢰하라. 그러면 확신이 생길 것이다. 성령님이 당신 안에서 일하신다면, 그분은 그분의 일을 당신에게 확신시키실 것이다. 이 확신을 가질 때, 당신은 자신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음을 알게 될 것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당신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 당신은 오늘밤 스스로의 믿음을 판단할 수 있다. 당신의 마음을 깊이 살펴라. 그리고 스스로에게 물어라. “나는 그리스도인이 될 뻔한 사람인가? 아니면 진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인가?”

그리고 오늘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이렇게 외쳐보라! “나는 남들이 뭐라 하든 상관하지 않겠다. 나의 모든 두려움과 의심을 헤치고 나아가 그리스도에게 도달하겠다. 다이빙 보드에서 점프를 해서 몸을 풀장에 맡기듯이, 나는 나를 던져 그분에게 맡기겠다. 나는 그분이 나를 완전히 구원하시도록 오늘밤 나를 던져 그분에게 맡기겠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기도한다. “오, 주여! 최후의 심판 날에 주님이 제게 ‘너는 나의 제자가 될 뻔한 사람이다’라고 선언하시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소서!” 이 세상에 매우 두려운 비극, 소아마비, 팔다리를 잃는 것, 실명(失明) 같은 것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두려운 비극이 있다. 그것은 거듭날 뻔했으나 거듭나지 못한 것이다.

2. 고독하더라도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한다


하나님께 싫증난 이스라엘

예레미야서 6장 16절 상반절은 하나님의 선지자 예레미야가 2,500년 전에 남긴 기록이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런데 이 말씀은 16절 하단의 내용으로 이어진다.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행치 않겠노라 하였도다.” 이 말씀에서 하단 부분이 없다면 얼마나 좋을까! 당시 이스라엘은 영적 타락 때문에 국가적 위기에 처했다.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길을 버리고 스스로를 의지하는 길을 선택했기 때문에 점점 더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이스라엘이 위기에 빠진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께 싫증을 내어 그분을 떠났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주 여러번 하나님께 반역하였는데, 그 이유는 결국 하나님의 방법과 길에 싫증을 내고 자신의 방법과 길을 따르기를 원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하늘의 기적이었던 만나의 맛까지 싫증을 내었다.

신앙 침체의 원인

오늘날 보수적 기독교인들은 여러가지 면에서 신앙적 침체 상태에 빠져있다. 내가 보기에, 그 침체의 근본 원인은 하나님께 싫증을 내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요즈음 그리스도인들은 무신론자처럼 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십자가에 완전히 만족하지 못한다. 하나님 한 분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고 느끼는 우리는 그 부족한 부분을 메우려고 짜릿한 세상적인 것들을 찾는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고 느끼는 것이 사실이다. 하나님 보좌 앞에 있는 천사들이나, 역사에 이름을 남긴 성자(聖者)들처럼 오직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는 사람들은 소수이다.

이런 사람들은 심지어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도 별종, 극단주의자, 광신자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심지어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도 왕따가 되는 한이 있어도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 단계에 도달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파묻혀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살아서는 안된다.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살지 않는 것처럼’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한다. 이것이 세상 안에서 살되 세상에 속하지 않는 자세이다. 하나님의 임재의 체험이 주는 즐거움은 온갖 문명의 이기와 문화적 산물이 주는 즐거움 보다 더 크다. 그런데 이것을 체험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깊은 진리를 알지 못하고, ‘옛길’(렘 6:16)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조심을 해야 하는데, 무미건조함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치다가 자칫 세상의 것들을 교회 안으로 끌어 들이지 않도록 해야 한다.

선한 ‘옛적 길’이 정도

그리스도인들이 또 조심해야 할 점은, 양쪽 극단이나 편견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첫 번째 극단은, ‘옛것은 무조건 좋고 새것은 무조건 나쁘다’는 편견인데, 이런 태도는 독창성을 말살하고 진보를 가로막는다. 복음적 진리로 무장하고 성령님의 인도를 따른다면, 진부한 관점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진리를 독창적인 방법으로 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세상의 방법을 교회 안에 끌어 들여서는 안된다. 두 번째 극단은, ‘새것은 무조건 좋고 옛것은 무조건 나쁘다’는 편견이다. 어설프게 배운 사람들, 잘못 배운 사람들, 조금 배웠다고 우쭐대는 사람들, 약삭빠른 사람들, 성령님이 없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새것이라면 무조건 열광하는 경향이 있다. 새것은 무조건 좋고 옛것은 무조건 나쁘다는 편견이 신학에 침투하면, 사람들을 자유주의자로 만들어 버린다.

극단적인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는 정도(正道)는 무엇인가? 성령님의 음성을 들어보자.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렘 6:16). 이 선한 ‘옛적 길’에서는 진리가 발견된다. 이 진리가 우리가 굳건히 서야 할 반석이다. 이 진리는 시간을 초월하는 진리이다. 성경의 진리는 아담이 에덴 동산에 있을 때에도 진리였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도 진리이며, 앞으로도 영원한 진리이다. 우리는 ‘선한 옛적 길’로 돌아가 진리와 하나님을 찾을 때 비로소 영적으로 제자리에 있게 될 것이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께 싫증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 때 우리는 단지 지옥에 가지 않기 위해서 구주를 믿는 단계에서 벗어나 삼위일체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는 성숙한 단계로 나아갈 것이다. 성령님이 주시는 영적인 기쁨이 우리 마음에 충만할수록, 우리는 세상적인 기쁨을 덜 찾게 된다. 하나님뿐만 아니라 다른 것도 필요하다고 말하지 말라. 하나님 한 분만으로 충분하다. 하나님 한 분으로 완전히 만족한다고 거짓 없이 말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이 시대에 올바로 적응하고, 문명의 이기와 문화적 산물을 지혜롭게 이용하고,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 싫증내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사랑하여 그분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나는 하나님께서 이 비극적이고 위험하고 중차대한 시대에 하나님의 길을 따를 수 있는 용기를 우리에게 주시기를 기도한다.

마치면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는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그 길은 고독과 외로움과 멸시와 따돌림을 받는 길이며, 세상과 충돌하며 살아가야 하는 길이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진리대로 살기를 원하는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고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며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서 살기 원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세상과 충돌하며 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세상과 충돌하며 사는 것을 두려워 하지 말자! 성경의 역사에 길이 남을 선지자들이나 성자들, 아니,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세상과 충돌하며 사셨다. 넓은 길을 가며 세상과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 평안한 삶을 살기보다는, 좁은 길에서 외롭고 힘들고 고통스럽게 살지라도 하나님의 인정만을 바라며,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평안 속에서 사는 것이 훗날 주님 앞에 떳떳한 것이 아닐까? 세상과 충돌하며 사는 신실한 독자들이 되기를 바란다.

영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