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신내림과 참된 부흥의 차이

신내림과 참된 부흥의 차이


어떤 절간에서 한 여승이 간절한 마음으로 100일 기도를 드리다가 신내림을 받았는데 그 여승은 그날부터 고양이 같은 소리를 내고 고양이처럼 행동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사실을 목도한 신자들은 그 여승이 부처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았다고 말하면서 여승을 따랐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여승을 보기 위하여 모여들었는데 그들은 자신에게도 그런 은혜가 내려지기를 구하기 위하여 열심히 기도하였다고 한다. 이와 유사한 일들이 지금 기독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데, 이번 기사에서 그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하나님의 영께서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란다. 
                     

부흥회

어떤 교회의 목사가 성령의 은사가 충만하다는 말을 듣고 나는 10리 길을 마다 않고 그 교회를 찾아갔다. 그 교회의 교인들은 죄 사함을 받고 기쁨에 넘쳐서 은혜가 충만하다는 말을 들었다. 그들의 모습은 나로 하여금 초대 교회의 오순절을 생각하였다. 그 교회의 청년 하나는 방언으로 교회의 어른들에게 설교했는데 완고한 노인들도 그 능력에 압도되어 죄를 회개하고 어린아이와 같이 되었다고 하였다. 그 교회에 관한 모든 이야기들 중에 평범한 것은 하나도 없었고 모두가 비상한 것들이었다.

나는 진리를 사랑하는 학자의 마음을 가지고 그 교회의 부흥회를 찾아갔다. 내가 그 교회에 들어서자 두세 형제들이 나에게 와서 속히 성령을 받을 것을 권하였다. 그들은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나를 위하여 기도해 주었다. 그들의 말은 너무나 진지하고 진정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었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따라서 울게 되었다. 부흥회를 참석하는 동안에 나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였다. 부흥사의 말에 의하면 하늘에서 불길처럼 뜨거운 것이 내려와서 신도들의 마음을 뜨겁게 할 것인데 그러한 하늘의 은혜를 받은 신도들은 이상한 변화를 느끼면서 갑자기 죽을듯한 고통을 느끼기도 하고 등줄기에 뜨거운 것을 느끼기도 하다가 하나님을 찬송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느낌 속에서 죄 사함과 구원받은 기쁨이 일시에 몰려와서 두 손을 하늘을 향하여 올리고 황홀한 표정으로 기도하며 찬송하고 심지어는 껑충껑충 뛰는 신도들을 여기저기에서 볼 수 있었다.

나는 항상 진리는 이성적이어야 한다고 믿는 그리스도인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의 균형진 판단력과 양심의 음성을 통하여 접근하신다고 믿었다. 그러나 내 눈앞에 나타난 광경은 전혀 그러한 것이 아니었다. 내 마음속에 “혹시 내가 그 동안 잘못 생각했던 것일지도 몰라”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렇다! 지금 내게는 부흥이 필요하다. 여기 있는 교인들처럼 마음의 고통과 영적 외로움에서 벗어나고 싶어졌다. 나도 하나님의 은혜를 직접 받고 싶었다. 다른 사람이 받은 은혜를 내가 받지 못할 리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부흥사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구하라 그리하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열릴 것이다.” 나도 전심을 다하여 하나님께 매달리고 기도하면 이 놀라운 은혜와 기적이 내게 임하여 마음속의 죄는 사라지고 근심의 구름이 걷히어 행복과 기쁨으로 충만한 생애를 살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나는 놀라운 은혜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하루를 기다려도 은혜는 내리지 않았다. 이틀이 지나도 마음에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그 교회의 목사를 찾아가서 물어 보았더니 당신의 열심과 기도가 부족한 탓이라고 말하였다. 나는 애써 울면서 기도하고 부르짖으면서 은혜를 간구하였다. “주여 나의 기도를 들어 주시옵소서. 다른 사람을 구하심같이 저도 구하여 주옵소서!” 나의 간절한 절규도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효험이 없는 애씀과 노력 끝에 나는 마침내 실망하고 말았다. 내 죄가 다른 사람의 죄보다 많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다른 형제자매들은 하늘에서 받은 특별한 은혜로 서로 기뻐하고 감사하고 있는데 오직 나만 고아처럼 버림받은 자식처럼 감사할 은혜도 느끼지 못하고 나타낼 기쁨도 없고 하나님께 버림받은 느낌으로 우울에 우울을 더하는 생애를 살게 되었다. 의심과 회의가 전보다 열 배는 증가되었다. 다른 신도들의 눈에 나는 믿음이 없는 자로 보이게 되었고 회개하지 않고 고백하지 않은 죄를 숨기는 자로 낙인 찍히게 되었다. 여기 저기서 나를 손가락질하여 소근거리는 것처럼 느끼게 되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교인들과의 교제를 피하게 되었고 교회에 나가고 싶지 않았다. 이런 위기의 상황 속에서 나를 구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하나님의 말씀

예수께서는 심령의 변화를 식물의 성장에 비유하여 설명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저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그 어떻게 된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니라” (막 4:28-29). 성경은 결코 사람이 갑자기 변화된다고 말하지 않는다. 먼저 씨를 땅에 묻어야 하는데 씨앗은 그곳에서 썩어서 죽는 경험을 먼저 해야만 한다. 그런 다음에야 비로서 싹이 나오는데 그런 다음에도 시간과 절차에 따라서 이삭이 나오고 서서히 자라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열매가 맺기까지 필요한 양분과 경험을 거치면서 점진적으로 성장하게 된다. 이것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그리스도인의 변화의 경험이다. 세속적이고 이기적으로 살던 사람이 부흥회에 참석하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갑자기 변화되어 은사를 받고 기적을 행하는 사람으로 변화될 수 없다. 성경은 급진적인 변화와 열매를 부인한다.

마태복음 13장에서도 예수께서는 이러한 진리를 반복하여 설명하셨다.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마 13:31-33). 겨자씨같이 작은 존재가 먼저 나물로 성장하는 단계가 필요하고 그 다음에 새들이 날라와 머물 수 있는 나무로 성장해 나가는 과정과 시간이 필요하다.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는 모두 사람이 급진적으로 하루 아침에 변화될 수 없음을 증거한다. 성경은 단 한 번도 그리스도인의 급진적인 변화와 열매 맺음을 말한 적이 없다.

예언서인 요한계시록과 다니엘서는 교회의 탄생과 투쟁과 승리의 과정을 모두 2천 년 이상으로 예언하고 있다. 성경을 깊이 연구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람의 심령 변화와 교회의 성장 기간을 하룻밤 사이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지진대와 산맥이 오랜 기간에 걸쳐서 서서히 형성된 것처럼 사람이 변화하는 과정에도 필요한 경험과 시간이 반드시 요구된다. 우리가 호흡하는 공기처럼 그리고 날마다 마시는 물처럼 진리의 효과는 확실하고 분명하지만 그 작용은 눈에 띄는 현격한 것이 아니다. 진리는 서서히 효과를 나타내는 약초와 같은 것이지 당장 효과를 나타내는 화학 약품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변화는 겨자씨가 성장하듯 서서히 그러나 분명하게 이루어지는데 그것은 이 땅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가서도 영원토록 계속되는 것이다. 구원에 대한 이러한 진리를 이해하는 사람만이 진리와 조화를 이루는 그리스도인의 진짜 경험을 할 수 있다.
                   

참된 그리스도인들의 경험

신약 성경의 대부분을 기록한 바울 역시 일정한 기간 동안 성령의 은밀한 역사와 영적 투쟁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만나서 죄 사함을 받는 경험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개신교회를 일으킨 마틴 루터의 경험도 그렇고 천로역정을 쓴 존 번연의 경험도 마찬가지이다. 루터로 하여금 루터가 되게 만든 것은 단순히 그의 스승 스타우비츠가 전해 준 한 마디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3,4년 동안 수도원 안에서 홀로 사색과 기도하는 세월을 보내야만 했으며 진리를 찾아서 방황하는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감정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존 번연의 경우도 그가 죄 사함의 위대한 진리를 깨달은 후에 오히려 1,2년 동안 베드퍼드 감옥에서 외롭게 지내는 단련의 과정이 필요하였다. 진리를 깨달았을 때는 내가 그것을 느끼든지 않든지를 불문하고 나의 신앙적 경험과 성장이 진일보하는 순간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진리와 상관없이 아무리 울고 절규하고 기도하고 매달리며 눈물을 흘려보아도 그것은 순간적으로 사라져 버리고 마는 값싼 감정에 불과하다. 냉정한 이성과 합리적인 판단 그리고 양심의 결정을 이끌어내지 못하는 어떤 부흥회나 집회도 무가치하다.

그리스도인의 생애 속에서 변화와 개혁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먼저 성경의 진리 위에서 부흥하는 일이 필요하다. 감정적 부흥을 조장하는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이 요한 웨슬리와 휘트필드의 부흥회 방법을 따르고 있다고 말하는데, 감리교회의 선구자들은 오늘날의 사람들이 말하는 그런 부흥사가 아니었다. 요한 웨슬리는 매우 논리적으로 성경에 나타난 구원의 진리를 가르치는 목사였다. 그는 진리와는 상관없이 소리만 지르는 감정적 설교가가 아니었다. 그가 진리를 가르쳤기 때문에 감리교회가 오늘날까지 내려올 수 있는 것이다. 비록 오늘날 그의 후예들이 그의 가르침을 땅에 내려 놓았기는 하였지만 말이다. 참된 부흥은 이성과 양심이 진리를 심사숙고한 이후에만 올 수 있다. 진리와 상관없이 일어나는 감정은 하나님의 구원과 아무런 상관없는 것이다.

감정적 부흥회를 지지하는 목사들은 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구원의 확신을 느낄 수 있는 수단으로 부흥회를 오용하고 있다. 참된 거듭남의 경험이 무엇인지 모르고 성경 말씀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부흥회를 찾아가 절규에 가까운 통성 기도와 시끄러운 음악을 통하여 황홀한 무아지경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자신의 텅 빈 마음을 채우고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신다는 감정적 확신을 얻으려고 애쓴다. 그러나 현대의 생리학자들은 오늘날 부흥회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감정적 변화들을 극단적인 신경 작용으로 해석하고 있으며 사회심리학자들은 부흥회를 찾는 그리스도인들은 죄로 인한 양심의 가책에서 벗어나고 감정적 기쁨과 행복감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부흥회를 이용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넓은 길을 선택하는 이유

사람은 죄를 지어서는 안 될 자이면서도 죄를 짓는다. 깨끗하게 살아야 할 의무와 그렇게 살 수 있는 선택의 기회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깨끗함을 잃어버린다. 천사와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존재이면서도 짐승의 수준까지 떨어져서 헤맨다. 올라가면 하늘의 사람이 될 수 있고, 내려가면 지옥의 자식이 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고 있는 것이 인간이다. 무한한 영광과 무한한 타락 이 둘 중 어느 것도 인간이 이를 수 있는 형편이다.

내려가기는 쉽게 생각되고 올라가기는 어렵게 느껴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경험이다. 그러나 지옥으로 내려가는 길에도 양심의 가책이 있고 후회와 불행이 있기 때문에 내려가는 길도 결코 쉽다고만 말할 수는 없는 길이다. 하늘로 올라가는 길에는 성령의 인도하심이 있고 성경 말씀의 뒷받침이 있으며 죄로부터의 구원이 있고 간간히 쉬어갈 수 있는 시원한 그늘이 있지만 육체의 끊임없는 방해가 있고 세상이 유혹을 던지기 때문에 올라가는 길도 쉽다고 말할 수는 없는 길이다. 두 길 모두 어려운 길이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바는 행하지 않고 자꾸 원하지 않는 것을 행하게 되는 경험을 통과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인간은 모두 두 개의 “나”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나는 또 하나의 나와 늘 싸우고 있다. 참으로 인생은 전쟁과 투쟁의 연속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다음과 같은 세네카의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 “내게 있어서 산다는 것은 전쟁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마 7:13-14). 내 속에서 일어나는 인생의 투쟁이 너무나 길고 힘들기 때문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투쟁하기를 포기한 채 살아가고 있다. 투쟁이 힘들고 전쟁에서의 패배가 싫기 때문에 아예 그것을 잊어버리기 원한다. 성령께서 양심을 괴롭혀 주는 것이 싫고 다가오는 유혹과 육체의 욕심에 맞서서 싸우기가 싫기 때문에 쉬운 구원을 찾아서 이 교회 저 교회를 찾아 다닌다. 이런 사람들이 찾아가는 곳이 소위 말하는 부흥회이다. 그곳에는 죄도 없고 양심의 가책도 없으며 계명도 없고 순종도 없으며 극기와 인내도 없다. 오직 감정만이 있을 뿐이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행복과 만족을 느끼지만 그곳은 내려가는 길로 연결되어 있는 넓은 길이다. 육체와 유혹이 끄는 대로 따라가는 것이 넓은 길이다. 존 번연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나는 가끔 개와 고양이의 신세를 부러워했다. 왜냐하면 개나 고양이에게는 사람이 겪어야 할 선과 악의 싸움과 투쟁이 없기 때문이다.” 위대한 그리스도인이었던 존 번연 역시 두 개의 내가 싸우는 전쟁이 힘들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만남으로써 구원과 평안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스도인은 선과 악의 전쟁을 포기하는 대신에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그러면 거기서 구원의 평안과 승리가 얻어진다.

“혹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 저희에게 이르시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눅 13:23-24). 구원의 길은 오직 하나인데, 그 길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그 길을 걷기 원하는 사람이 많지만 이런 이유 저런 이유 때문에 그 길로 들어서지 못하게 된다. 예수께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넓고 평탄한 길을 선택할 것이며 오직 적은 숫자의 사람들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좁은 길은 감정적인 길이 아니다. 그 길은 깊이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한 다음 인내와 극기로서 걸어가는 길이다. 그러나 그 길 위에 진리가 있고 죄를 버림으로써 얻는 평안이 있으며 은은한 성령의 인정하심이 있기 때문에 누구도 흔들 수 없는 확신을 가지고 그 길을 걸을 수 있다. 심령의 참된 부흥을 경험한 사람은 주저 없이 좁은 길을 걷기로 선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