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나의 고백

나의 고백


이번 호에서는 어떤 일본 목사님의 신앙 고백을 간추려서 편집하였다. 이 글의 원래 저자인 우찌무라 간조 목사님은 진실한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고 곧바른 기별을 전하는 목사로서 희생적인 생애를 살다가 간 일본 기독교계의 대표적 인물이다.

기독교의 불모지인 일본에서, 저자는 전쟁의 참화으로부터 일본을 일으켜 세우는데 공헌을 한 20명의 일본인 중에 한 명으로 선정될 정도로 일본 국민 전체에 정신적 감화를 끼친 정직한 그리스도인이었다. 그의 무덤에 세워진 비석에는 “일본은 하나님의 것이다”라는 글이 새겨짐으로서 지금도 그의 설교는 소리없이 계속되고 있다.

다음에 소개하는 그의 간추린 신앙 고백을 통하여 그 속에 비추어져 있는 우리 자신의 모습과 영적 위치를 확인해 보도록 하자. 오늘날 왜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하지 않는가? 왜 세상이 그리스도 교회의 신앙을 비웃게 되었는가? 왜 교회가 타협과 세속의 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영적 고뇌로부터 해방되어 승리와 평안의 길을 걸을 수 있는가? 여기에 답이 있다. 이번 기사는 진리를 더듬어 찾고자 하는 정직한 그리스도인들에게 통찰력 있는 답변을 제시해 줄 것이다.
                

깨어진 나의 첫 결심

내가 처음으로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을 접했을 때, 나는 그 도덕의 고결함과 위엄에 탄복하였다. 성경은 나의 불결함과 불완전함을 깊이 깨닫게 만든 유일한 책이었다. 내 말과 내 행실, 그리고 나의 사상을 성경에 비추어 보았을 때,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더럽기 이를 데 없었다. 내 생활은 은근한 기만과 거짓과 위선으로 온통 얼룩져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일말의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는 삶을 살았다. 나는 다른 사람의 실수를 보면서 좋아하였고, 다른 사람을 넘어뜨려서까지라도 성공하기를 원했다. 나의 목적은 언제나 아름답고 보기 좋은 것으로 위장되어 있었지만, 진정한 목적은 내 자신의 이기심과 명예를 채우는 것이었다. 겉으로는 도덕군자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매우 공격적인 야심가였던 것이다. 내 생애의 목적은 비루하였고, 사상은 더러웠다.

그러나 기독교인이 된 이후로부터, 나는 나의 모든 사상과 행실을 완전히 개혁하기로 결심하였다. “나는 이제부터 내 말과 행실을 완전히 뜯어 고치겠다. 다시는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 남을 비평하거나 중상하지 않겠다. 정욕을 억제하겠다. 게으름을 피우지 않겠다. 원수를 사랑으로 갚겠다. 스스로 높아지고자 하는 정신을 버리고 겸손하겠다. 술, 담배, 극장 구경도 중단하겠다. 나는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겠다.” 그야말로 전격적인 개혁을 선언하였다. “굳게 결심한 이 마음, 다시는 흔들리지 않으리!” 라는 결심과 함께 내 자신이 새롭게 거듭났다고 굳게 믿었다.

한동안 내 결심은 잘 실행되었다. 나의 개심은 정말 대단한 것이라고 다른 사람도 말했고, 내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였다. 나의 아침 기도는 뜨거웠고, 길었다. 나의 회심이 너무나 전격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어떤 친구들은 나의 그러한 변화를 싫어했다. 어제까지의 떠버리가 이제는 침묵가가 되었고, 나의 이야기 속에는 회개의 눈물과 성경절의 인용이 있었다. 나는 마치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듯한 생활을 살았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개혁이 유익한 것이긴 했지만, 인위적으로 조작된 성결은 오래가지 못했다. 나는 진정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경험을 이해하지 못한 채 기독교인으로서의 겉모양만을 흉내내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언행과 생각은 다시 옛 상태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나의 부자연스러운 생활은 내 주변 가족들과 친구들을 어색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내 자신 마저 부자유스럽고 고통럽게 만들었다. “약간의 방종이 신앙에 무슨 해를 가져오겠는가? 지나친 침묵은 오히려 우울증을 가져올 수도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머리를 들기 시작했다. 얼마가지 않아서 나는 완전히 옛날의 상태로 돌아가고 말았다. 내가 기독교인이라는 유일한 표시는 매 주일마다 냉랭한 마음으로 예배에 참석하는 것과 아침 저녁으로 머리를 숙여서 무의미한 기도를 드리는 것으로서 근근히 명맥을 유지하였다.

친구들을 만나서 이야기 할 때, 이 목사와 저 신도의 결점 그리고 다른 사람의 흉을 화제거리로 삼으면서 즐기는 나의 옛 습관이 살아나기 시작하였다. 야고보가 말한대로 “한 혀로 주되신 아버지를 찬양하기도 하고, 같은 혀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들을 저주하기도 “ 하였다(약 3:10). 야고보가 기록한 그러한 말씀을 읽을 때마다 내 양심은 끌로 쪼이는 듯한 아픔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만일 내가 나의 말많은 습관을 억제하지 못한다면, 내가 믿는 그리스도 교회의 신앙이 내게 무슨 유익이 된단 말인가? 물론, 나는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라는 그리스도 교회의 신앙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야고보는 “그렇게 믿는 것이 좋다. 그러나 마귀도 그렇게 믿고 떨고 있”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내 자신은 성경이 말하는 명백한 가르침과 교훈에 따라 살지도 않으면서, 세상 사람들을 향해서는 죄를 회개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라고 말하는 것이야말로 철면피가 극에 달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 나는 위선자이다. 참된 변화의 삶을 살고 있지 못한 내가 무슨 면목으로 남에게 기독교회의 신앙을 권하겠는가? 그리스도 교회의 신앙은 내 영혼에 해결할 수 없는 고통과 고뇌를 가져다 주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마음의 평안을 약속하고 있는데,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 이후 내 영혼은 깊은 좌절과 고뇌의 미로를 헤메게 되었다. 어떻게 된 일인가? 그 때부터 나는 영혼의 평안을 찾기 위해서 수십년 동안 방황하였다.


율법의 정죄로부터 시작된 고뇌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은 나의 마음과 생애를 정죄하기 시작하였다. 그 정죄의 크기와 깊이가 너무나 컸기 때문에 “차라리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는 짐승이었으면” 이라는 생각이 떠오를 정도였다. 성경은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모두 살인자다 너희가 아는대로 살인자는 누구나 그 안에 영원한 생명이 없”다고 선언하고 있다. 그러나 내 마음 속에는 원한과 용서하지 못하는 정신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처음에는 이 말씀이 너무나 지나친 말씀이라고 생각되었지만, 그 말씀 역시 진리였다. 가인은 그의 동생 아벨을 미워하던 끝에 결국에는 아우를 죽이는 첫번째 살인자가 되었다. 증오는 결과적으로 살인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류의 역사를 통해서 잘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죄인을 형벌하실 때에는 죄의 결과로 하지 않으시고 그러한 결과를 가져오게 만든 의지를 심판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보실 때에는 그 의지의 실행 여부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그 의지 자체를 보신다. 증오심이 언제나 살인이라는 행위로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그 사람의 교육, 환경, 체면 등에 의해서 조절되기 때문이다. 만일 국가의 법과 사회의 제재가 없고, 살인자는 저생에서 지옥불에 떨어진다고 가르치는 종교가 없다면, 사람은 자기가 미워하는 사람을 결국에는 죽이고 말 것이다. 그래서 존 번연은 사형장에 끌려가는 죄수를 가리키면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였다면 저 죄수는 존 번연이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마음 속에 증오심이 뿌리를 내릴 때마다 이미 살인은 시작된 것이다. 그러므로 증오와 원한을 품고 있는 나에게 하나님께서 살인죄의 선고를 내리시기로 어떻게 변명할 수 있겠는가?

“도둑질하지 말라”는 계명 역시 나를 붙잡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 나오는 도둑질은 절도나 강도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무릇 하늘이 베풀지 않은 것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 내게 베푸신 학식과 재능의 결과로 얻는 것이 아니라, 아첨과 뇌물로서 높은 지위를 얻는다면, 그것은 그 직위와 봉급을 도둑질한 것이 된다. 하나님께서 나를 선택하지도 않으셨는데, 내 스스로 목사가 되어 성직의 권위와 존엄성을 사용한다면, 나는 엘리의 아들과 마찬가지로 성직에 따르는 명예를 도둑질한 것이다. 아, 인류가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을 때, “도둑질하지 말라”는 계명에 의해서 정죄당하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나는 위선자고, 살인자며, 도둑질한 자였다. 성경이라는 빛으로 나를 살펴볼 때마다 도무지 피할 수 없는 절망감에 휩싸이게 되었다. 하나님의 진리를 알지 못하였을 때에는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그다지 큰 고통이 없었는데, 죄와 죄의 결과를 안 후로는 죄를 범할 때마다 말할 수 없는 고통과 고뇌가 나를 압도하였다. 그런데 매우 놀랄만한 사실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칭하는 자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죄에 대한 고민과 고뇌가 무엇인지도 모른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죄에 대해서 깊은 절망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영혼을 치료하기 위해서 “교회”라는 간판을 걸고 환자들을 불러들이는 돌팔이 목사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어둠 속에서 멸망의 골짜기로 걸어가고 있다. 그러한 목사들에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계명을 지키고, 죄에 대해서 승리할 수 있을까요?” 라고 물으면, 그들은 한결같이 “연약한 인간은 원래 죄를 범한 다음, 그것을 후회하고 또한 그 결과를 두려워 한답니다. 그런 다음, 죄를 범한 자신에 대해서 절망감을 느끼게 되죠. 그러면서도 똑 같은 죄를 반복해서 범하는 삶을 사는 것이 일반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이랍니다. 비록 그러한 삶을 산다고 할지라도 교회 활동에 열심히 참석하고 잘 믿기만 하면 구원받을 수 있느니 안심하고 교회에만 열심히 나오십시요” 라고 답변한다. 그러나 정말 그러한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말인가? 정말 그러한 삶이 성경이 말하는 “이기는 자”의 경험이란 말인가? 율법을 범한 죄로 인하여 받게 되는 양심의 고통 속에서 어떻게 성경이 약속하는 평안과 화평을 얻을 수 있단 말인가? 결코 그럴 수 없다. 성경은 모든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영혼의 평안을 약속하고 있다. 아무리 고통스럽다고 할지라도 나는 반드시 이 문제에 대한 진리를 찾아낼 것이다! 왜냐하면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서 겪게 되는 고통이 미신과 오류 속에서 양심을 기만하는 것보다 훨씬 낫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