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라오디게아 교회에 다니십니까?

라오디게아 교회에 다니십니까?


라오디게아 사람들, 그들은 나쁜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단지 뜨뜻미지근한 신앙을 가졌을 뿐이다. 그들은 좋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교회 안에 들어온 죄와 세속을 안타깝게 생각하지만 그런 것들에 대하여 언제나 애매한 중간 입장을 취한다.

그들은 자신이 원수 마귀에게 협력하고 있다고 생각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원수에게 협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부족하고 연약한 형제들에게 그리스도인의 아량과 관대함을 보이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형제에게 개인적으로 베풀어야 할 사랑과 하나님의 교회에서 분명하게 세워져야 할 진리 및 원칙을 혼돈한다. 그들은 자신의 평판과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하나님의 명예보다도 중요시 여긴다. 그들은 교회의 개혁을 갈망하지만 하나님께로부터 개혁자로서 부르심을 받기는 원치 않는다. 바로 이것이 라오디게아 사람들이 모든 의롭거나 의롭지 못한 일에 있어서 무저항적이고 관대하며, 심지어는 신앙적으로 위기의 때일지라도 “관망하고 기다리는”(wait and see) 태도를 취하게 되는 이유이다. 이 기사는 어떤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충격적인 진리가 될 텐데, 이 글을 통하여 그들이 “뜨뜻미지근한” 중간적 상태에서 빠져 나오게 되기를 기도한다.
                              

완전히 세상으로 갈까? 아니면 반쯤은 교회에 걸쳐 놓을까?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서 신약시대에 등장하는 일곱 교회에 대한 계시를 보았는데, 지구 역사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교회로 라오디게아 교회를 보았습니다. 요한이 마지막 교회인 라오디게아 교회의 교인들의 상태를 표현한 다음과 같은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깊은 교훈을 줍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계 3:15. 자녀를 가진 부모들이 이 말씀의 영적 의미를 믿는 데에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부모들은 그들의 자녀들이 완전히 세상 밖으로 나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반 만이라도 교회에 남아 있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자녀를 가진 부모로서 나 역시 그들에게 마음의 깊은 동정이 갑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이 말씀의 의미는 뜨뜻미지근한 신앙을 가지고 반만 교회에 걸쳐 있을 바에는 차라리 그들이 세상으로 나가서 양심의 가책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이 그들에게 더 유익하겠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자녀들을 세상으로 내보내야 된다고 말하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만일 자녀들이 그들의 마음을 반만 교회에 걸쳐 놓은 채 뜨뜻미지근한 신앙에 만족해 버린다면 그것은 그들의 구원에 더욱 치명적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부모인 우리가 자녀들의 어중간한 믿음을 다행으로 여기며 스스로 만족하고 위로한다면 이 얼마나 두려운 기만입니까? 우리의 자녀들이 뜨거운 신앙을 가질 때까지 우리 부모의 기도는 그치지 말아야 합니다. 자녀들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중간 상태의 신앙을 가진 것에 결코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모른 척할까? 아니면 중간에 서 있을까?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계 3:16. 왜 하나님께서는 라오디게아 사람들을 토해 내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왜냐하면 그들이 중간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미지근한 신앙은 하나님께서 토해 내치실 만큼 역겨운 신앙입니다. 하나님께서 다른 어떤 죄보다도 혐오하고 미워하시는 한 가지 죄가 있다면, 그것은 위급한 상황하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세속적 정신과 잘못된 가르침 앞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나타내는 무관심과 중립을 지키려고 애쓰는 태도는 하나님께 고통을 안겨주는 죄가 되며 하나님께 대하여 가장 악한 적의를 드러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가장 악한 형태의 죄는 진리와 오류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려는 태도이며, 세속과 거룩함의 중간에 서서 양쪽을 모두 즐기려고 하는 태도입니다. 사랑하는 친구들이시여! 바로 이것이 오늘날 가장 바람직한 것으로 여겨지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면서 중간에 서 있으려고 하는 우리의 태도가 아닙니까? 이러한 인간적 태도 때문에 우리는 교회 안에 살며시 들어오는 죄와 세속과 오류에 대하여 언제나 중간적인 입장을 취하게 됩니다. 그러나 중간적 입장에 서서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라고 말하는 사람보다는 오히려 솔직하게 악을 선택하는 사람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더 많은 가능성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나는 오늘날 현대 기독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이상한 예배 방식에 대하여 쉬쉬하고 싶지 않습니다. 예배 의식 중에 연주되는 격렬한 하드락 음악이나 텔레비전에서나 들을 수 있는 리듬에다 찬미 가사만을 부쳐놓은 음악들을 들으면서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어떻게 교회 안에서 이러한 일들이 벌어질 수 있을까?” 라고 의아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들은 그렇게 시끄럽고 요란한 예배 형식이 하나님께 드리는 마땅한 예배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그러한 예배 방식에 대하여 적극적인 반대 입장도 취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예배가 잘못되었다는 것도 모른 채 그것에 몰입되어 있는 사람들보다 그것이 매우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면서 입을 다물고 중간에 서 있는 사람들을 더욱 악하게 보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만약 우리가 시끄럽고 세속적인 예배 방식을 동의하지는 않을지라도 그 죄에 대하여 경고를 하지 않은 채 중간 입장을 지키고 있다면 우리는 그들 보다 더욱 악한 자들입니다. 그것에 대해서 지지하던지 아니면 반대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중간에 있는 자들을 토해 내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참된 도덕적 용기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그것은 잘못된 것이기 때문에 목사로서 나와 내 가족은 그것을 은근하게라도 지지하지 않을 것이며 “그 정도는 괜찮다” 라고도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성경은 죄를 덮어둔 채 부드럽고 듣기 좋은 설교를 하는 목사들을 “벙어리 개”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저주가 그들에게 임하게 될 것입니다. “짐승들아 삼림 중의 짐승들아 다 와서 삼키라 그 파수꾼들은 소경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라 능히 짖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요 누운 자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니 이 개들은 탐욕이 심하여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자요 그들은 몰각한 목자들이라 다 자기 길로 돌이키며 어디 있는 자이든지 자기 이만 도모하며 피차 이르기를 오라 내가 포도주를 가져오리라 우리가 독주를 잔뜩 먹자 내일도 오늘같이 또 크게 넘치리라 하느니라” 이사야 56:10~12. 가장 위험한 설교는 모든 사람들의 눈에 쉽게 띄는 잘못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부드럽고 건전하게 들리지만 거기에는 아무런 의미도 능력도 없는 설교가 가장 치명적인 설교입니다. 사단의 기만이 극에 달하는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의 신실한 설교자들은 침례 요한보다 훨씬 더 예리한 증언을 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부드러운 것들을 말하는 자들을 당신의 목자로서 인정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거짓 목자들 위에 무서운 화가 놓여져 있습니다. 그러나 영혼들에 대한 사랑과 하나님의 진리를 위한 열심을 마음속에 소유하고 있는 목사들은 자신들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지지 또는 호의와는 상관없이 진리를 곧바르게 말함으로써 하나님의 명예를 드높이고 그들 자신의 영혼에 평안함을 유지할 것입니다.
                 

교회 안에 존재하는 두 무리

마지막 시대에 교회 안에는 두 그룹이 형성될 것입니다. 한 그룹은 사업적 수완이 좋은 사람들로서 그들은 모든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애쓸 것이며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악에 대해서 변명하고자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매우 관대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한 그룹은 그들 마음속에 있는 평화가 자신들에 대한 사람들의 평판과 인기도에 의해서 흔들리지 않으며 죄를 죄라고 부르는 데에 있어서 주저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둘 중에 어느 그룹이 교회에서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이 다니고 있는 교회는 어떤 그룹에 의하여 이끌어져 가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참된 그리스도인은 진리를 정확하게 알 뿐 아니라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죄와 오류를 정확하게 볼 것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에게 교회가 떠내려가고 있는 악의 급류를 저지시킬 힘이 없다는 사실로 인하여 깊은 슬픔과 고뇌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빛을 소유하고 있다고 말하는 교회 안에서 조차 죄와 부도덕이 성행하고 있는 사실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서 애통해 할 것입니다. 그들은 자존심, 탐욕, 이기심 그리고 거의 모든 종류의 기만들이 교회 안에 존재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자신들의 영혼에 심한 고통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양심이 굳어져버린 사단의 종들이 교회 안에서 승리하는 동안에 죄를 책망하시는 성령의 음성은 그들의 발아래 짓밟히게 됩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명예는 땅에 떨어지게 되며 진리는 아무런 효과도 발휘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들 자신들의 영적인 타락에 대해서 슬픔을 느끼지 못하거나 다른 사람들의 죄에 대해서 애통해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결코 하나님의 구원의 인이 쳐지지 않게 될 것입니다.

어떤 목사들은 하나님께서는 너무나 자비하시기 때문에 당신의 백성을 심판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바로 그런 말을 하는 목사들에게 임할 것입니다. “ 평안하다. 안전하다.” 라는 거짓 설교가 백성들의 죄와 야곱 집의 죄를 나팔 같은 목소리로 고하지 않는 목사들로부터 발해질 것입니다. 짖지 않는 벙어리 개들은 분노하신 하나님의 복수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부드러운 설교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 목사님의 설교 가운데서 어떠한 잘못도 찾을 수 없습니다. 비록 그분이 신자들에게 엄숙하고 분명한 진리를 전하고 있지는 않지만 적어도 그분의 설교에는 오류가 없고 재미있는 유머와 상식 그리고 시사가 담겨 있습니다. 그분은 모든 면에 있어서 중립적인 입장을 잘 취합니다. 그 목사님 덕분에 우리 교회에는 별다른 문제가 생기지 않습니다. 정말 다행이지요.” 그리스도인 형제들이시여, 그것은 다행이 아닙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이 명백한 오류를 가르치는 목사를 가지고 있는 것만큼이나 위험한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견책과 경고의 기별을 위하여 그분의 종들과 선지자들을 부르셨던 사실을 성경 속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부르심을 받았던 사람들은 그때마다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의 부르심에 걸어 놓았습니다. 부드럽고 일상적인 설교를 하며 매 주일마다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려고 애쓰는 목사들에게 하나님께서는 화를 선언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러한 화가 그 목사들에게만 선언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 많은 교인들이 다음과 같이 생각하며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 나에게 책임을 묻지 마세요. 내가 한 것은 그저 매주마다 교회에 나간 것 밖에 없습니다. 나는 이 죄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 나는 평범한 교인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의 주역들과 죄를 무책임하게 허용하고 지지한 장로와 집사와 권사들을 똑같이 취급하십니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이 거룩함과 세속 중간에 서있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개혁하고 진리를 올바로 세우기 위하여 일어서는 개혁자를 기다리십니다. 나는 하나님의 진리를 증거하는 목사로서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주님의 이름으로 죄와 배도에 대하여 항거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지금 나는 여러분들이 다니는 교회에서 어떠한 종류의 반란을 일으켜야 한다고 촉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점에 있어서 오해가 없으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말씀드린 모든 내용은 개인적인 의견이 아니며 하나님께서 성경에 기록해 두신 당신의 뜻입니다. 나는 단순히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뜻을 여러분들께 알려드리는 것뿐입니다. 여기서 제시한 말씀들은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분명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목사로서 나는 내 자신에게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내리기를 원치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지금까지 드린 말씀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우리 자신들에게 적용하고 실행해야 될지 모르지만, 내가 분명히 믿는 것은 하나님의 모든 요구 사항과 계명들은 우리가 지키고 따르기에 모두 가능한 것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놀라운 희망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라오디게아 교인들에게 놀라운 희망의 메시지를 남겨 두셨다는 사실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계 3:20~22. 누구든지 마음 문 밖에서 서서 양심에 호소하시는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는 자들은 죄와 세속에 대하여 “이기는 자”가 될 것이며 후에 예수님과 함께 하늘 보좌에 함께 앉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