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록 3: 축제식 예배의 위험성

축제식 예배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왜 현대의 기독교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축제식 예배를 선호하는 것일까? 그 이유를 함께 살펴보기로 하자.


축제식 예배를 선호하는 이유

1. 거듭남 없이 거짓 평안과 환희를 느끼게 한다

오늘날 기독교에서 거듭남에 대한 가르침이나 설교를 듣는 것은 매우 드물다.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거듭남이란 아주 생소한 주제가 되어 가고 있다. 하나님의 성령께 굴복하고, 회개하여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과 화친하며,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거듭남이라고 부른다. 과거에 자신의 마음대로 살던 모든 생활을 청산하고, 이제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맞게 개혁하고 새로운 생활을 사는 일이 거듭난 사람의 생애에는 나타나게 된다.

거듭난 사람은 점점 영적으로 자라나 장성한 분량의 믿음을 갖게 되고 하나님의 성품으로 변화되고 성화되어 하늘에 넉넉히 들어갈 성품을 은혜로 얻게 되는 것이다. 거듭남을 경험하고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가 늘 충만한 사람은 마음에 평안과 기쁨이 넘치게 된다. 비록 주위에 어려운 시련과 고통이 둘러싸여 있고, 때때로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자신의 부족 때문에 눈물로 더 깊은 회개를 하는 일이 있지만, 거듭난 사람의 마음속에 역사하는 항구적인 평안은 세상의 어떤 것이 줄 수 없는 기쁨과 화평으로 덧입혀 있다.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하고 진정으로 거듭나는 경험을 하지 못한 신자들은 마음에 허전함을 느낀다. 신앙 생활을 해도 기쁨이 없고 늘 공허한 느낌이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그들의 공허한 마음을 무엇인가로 채우기를 원하며, 그들에게 결핍되어 있는 평안과 기쁨과 환희를 경험하기 원한다.

축제식 예배의 음악들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의 허전한 마음을 채우기에 안성맞춤이다. 복음 성가의 어떤 것들은 매우 낭만적이고 부드러운 멜로디에 비록 예수님에 대하여 쓰여졌다고 하지만 보통 연인들을 그리며 부를 만한 가사들이 섞여 있다. 또한 그런 멜로디에 곁들여지는 댄스 리듬같은 박자나 쿵작거리는 빠른 템포의 노래들은 말초적인 감정에 호소를 하게 되어 지적이거나 이성적인 면을 흐리게 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진정한 믿음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또 세상을 버린 경험이 없는 대부분의 신자들은 한바탕 신나게 축제식 찬양 예배를 드리고나면 속이 후련해지는 것을 느끼고, 가슴이 뿌듯해지고 마치 성령 충만함을 받은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된다. 더구나 용서와 하나님의 사랑만을 강조한 복음 성가의 내용들은 양심의 소리를 잠재워 주고, 은혜로 다 구원을 얻는다는 자유주의적인 신신학의 가르침과 맞아 떨어지므로 세상의 걱정이나 스트레스를 잊어버리고 흥겹게 찬양 예배를 드리고 나면 거짓 평안과 환희를 느끼는 것이다. 이것은 변화나 개혁의 요구 없이 값싸게 믿을 수 있는 감정적인 신앙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의 대부분의 신자들은 자신을 부인하고 세상을 버리고 좁은 길을 걷는 대신, 세상과 자신의 욕망을 그대로 가지고 넓은 길을 가기를 원하며, 십자가를 지고 좁은 길을 예수님과 함께 걸어가는 거듭남의 길을 원하지 않는다. 이런 성향이 축제식 예배를 선호하게 만드는 것이다.

2. 세상과의 구별을 없애주고 신앙의 독특성을 무마시켜준다

세상과 호흡을 함께 하기를 원하는 피상적인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종교 생활이 세상과 독특하게 구별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대표할 만한 거룩하고 독특한 백성이 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옷 입는 것, 말하는 것, 듣는 것, 음악과 노래하는 것, 그리고 먹고 마시는 일에 있어서 경건하고 단정하고 존절하기를 원하신다.

축제식 예배에 사용되어지는 음악과 노래는 전도에 효과적이라는 명제하에 매우 세속적인 것으로 채워져 있다. 요즈음 교회에서 사용되는 음악은 세상의 음악과 별 차이가 없을 만큼 대중화 되어 있다. 특별히 축제식 예배에서 사용되는 음악은 세속적인 유행가의 리듬이나 가사나 멜로디와 너무 흡사하여 예배 음악인지 세상적인 쇼의 음악인지 구분하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축제식 예배 음악은, 세상과의 구별이나 독특함을 원하지 않는 뜨뜻미지근한 신자들에게 인기가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믿는 일이 세상과 별 구분이 없기 때문에 부담이 없어진 이들에게 이런 예배는 선호되어지고 있는 것이다.

3. 거짓 성령 운동과 함께 간다

요즈음 기독교에서 가장 인기를 끄는 것이 있다면 “성령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 세계, 심지어 한국까지도 기적과 이적을 일으키는 소위 “성령의 역사 운동”이 활개를 치고 있다. 현대 기독교는 전에 없었던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 같다. 그리스도인들은 깊은 신앙이 가져다 주는 마음의 변화보다는 눈에 보이는 현시, 곧 기적과 치유의 은사나 이적을 행하는 것에 더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성령의 역사라고 여겨지는 방언, 병 고치는 이적과 기적들, 예언하는 것 등등, 눈에 보이는 초자연적인 현상들에만 주의를 기울이는 일은 위험하다.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 위에 확고하게 세워져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이 가져오는 능력으로 회개하고 변화되고 성화되는 것이 신앙의 참 목적인 것이다. 보통 말씀에 대한 깊은 연구나 지식이나 확신이 없이 무조건적이고 광적으로 믿는 사람들이 거짓 성령 운동에 잘 빠져든다. 그런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현상과 초자연적인 현상에만 집착하여 그것을 참된 성령의 역사라고 믿는다.

그런 사람들은, 진리의 말씀을 순종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며, 말씀을깊이 연구하고 깊은 영적 경험을 하는 대신, 말초 신경을 자극하는 것과 같은 흥분적이고 광적인 것에 몰두하며, 이를 성령의 역사라고 열광하며 따른다. 그러나 진짜 성령의 역사는 눈에 보이는 기적이나 이적이 아니다. 진정한 성령의 역사는 사람의 마음을 개심시키고 거듭나게 하며 새로운 사람으로 만드는 데 있다.

그런데, 이렇게 눈에 보이는 현시에만 중요한 포커스를 맞추는 거짓 성령 운동에는 반드시 이성을 흐리게 하고 감정에 호소하는 음악이 따른다. 음향 시설을 통해 흘러나오는 쿵작거리는 시끄러운 음악 소리, 복음 성가를 리드하는 찬양팀의 현란한 노래와 몸짓과 춤에 맞추어 손을 흔들며 박수를 치며 복음 성가를 부르는 축제식 예배는 항상 거짓 성령 운동에는 함께 수반되는 것이다.

현란한 음악과 조명, 외쳐대는 군중들의 통성 기도 소리 속에서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주변의 환경에 동화되어 흥분과 열정의 도가니로 빠져든다. 그리고 마치 성령을 받은 듯, 신앙이 열렬해졌다는 도취감 속에서 만족을 느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이전의 생활과 다를 바 없이 똑같이 화를 잘 내고, 욕심이 그대로 살아 있고, 남을 미워하고 질투하는, 변화없는 생활을 연속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렇듯 축제식 음악과 춤과 율동은 감정적인 흥분을 가져올 뿐, 진정한 개심으로 사람을 이끄는 진짜 성령의 역사를 가져오지 못한다.

4. 순종함 없이도 훌륭한 예배를 드렸다는 거짓 만족감을 준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여 모든 죄를 회개하고, 알고 있는 모든 죄를 버리며, 하나님께로부터 용서를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매일 죄를 이기고 자아를 복종시키며,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는 열매 맺는 생애를 산다.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그냥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를 다 덮어주시고 구원해주신다는 의미가 아니다.

믿음으로,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매일의 생활에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죄를 이기며, 세상을 이기며, 자신을 하나님께 굴복하고 예수님의 임재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순종의 열매가 따르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고 육신을 따라 마음대로 살 때, 또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굴복된 심령으로 살지 않을 때, 그 마음에는 항구적인 평안이 없다.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는 느낌으로 마음이 공허하고 불안하며, 평안한 행복감과 충족감을 느끼기가 어렵다.

이런 신자들에게 축제 예배는 거짓 평안을 주기에 꼭 알맞다. 인간의 감정에 호소하는 음악들과 한바탕 마음을 풀어낼 수 있는 분위기로 둘러 싸인, 또 하나님의 값싸고 무조건적인 은혜와 사랑만을 강조하는, 그리고 우리를 무조건 은혜로 모두 구원하시는 주님을 축하하고 찬양하자는 축제 예배는, 자신의 온전한 굴복 없이도, 순종의 열매를 맺지 않아도, 감정적이고 감동적인 열렬한 예배를 훌륭하게 하나님께 드렸다는 거짓 평안과 기만에 빠지게 한다. 그 훌륭하고(?) 감동적인 축제식 예배를 드리면,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굴복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성령께서 주시는 양심의 소리를 순종하지 않아도 열렬한 신자가 된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쇠퇴해 가는 예배의 질과 기독교 신앙

오늘날은 경건한 예배를 찾아보기가 어려워졌다. 많은 영적인 지도자들이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하지 못하며 또 신도들에게 가르쳐주지 못하고 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참 신앙 안에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결국 요란스러운 예배를 드리고 먹고 마시는 행사를 치러야만 행복을 느끼는 체질로 변하고 말았다.

영적인 사람들은 세상적이고 육신적인 종교 프로젝트에 빠지지 않는다. 오늘날 이 세상에서 영화관 다음으로 연예오락성이 강한 장소를 찾으라면 교회를 꼽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오늘날 아주 많은 교회 건물과 종교 기관의 건물들이 크게 건축되고 있다. 그리고 교회 신자의 증가율이 인구 증가율을 앞지른다. 갖가지 종교가 사회의 각계각층과 각 연령층의 사람들 중에서 개종자를 얻으려고 애쓴다. 특히 젊은이들과 어린이들을 개종시키려고 열성이다.

그래서 예배 방법이 하나님께 가납될 만한 영적인 것인지 아닌지 생각하지 않은 채, 더 많은 교인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세상적인 방법을 다 동원하고 있는 것이다. 요즈음 복음주의적 교회에서는 교인들에게(특히 젊은이들에게) 진지한 교육 프로그램은 최대한 적게 제공하고 연예오락을 최대한 많이 공급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오직 하나님만으로 기뻐하며 그분을 사모하는 모임으로 사람들을 인도하는 일은 이제 거의 불가능해졌다.

우리의 신조는 정통에서 이탈한 이상한 것이 되어버렸고, 우리의 신앙 관습은 세속적인 것에 빠졌다. 축제식 예배나 세속적인 연예 방식의 종교집회들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면, 사람들은 말한다. “그래도 그렇게 해서 사람들을 이끌면 되지 않느냐?”라고. 그런데 정말 그런 방식들이 하나님의 참 제자의 길로 사람들을 이끌기에 충분한 것인가? 십자가를 지는 자기부정의 삶,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게 하고,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생활과 성품으로 그들을 이끄는가?

흥분적이고 재미있는 오락성 예배로 길들여진 사람들은 경건하고 엄숙하고 진실된,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참된 예배 방식을 좋아하지 않게 되어있다. 그것이 축제식 예배의 문제인 것이다.

영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