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하나님이 받으시는 참 예배

참 예배에 필요한 요소


1. 첫 번째 요소 - 신령과 진리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 4:24). 참 예배가 되려면 먼저 성령님과 진리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예배는 그분의 속성과 부합해야 한다.

예배는 성령님 안에서 성령님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성령님이 없이 우리가 예배를 드릴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성령님을 구석으로 몰아넣고, 그분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그분의 감동에 불을 끄고, 그분의 인도에 저항하면서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예배를 드리겠다는 생각은 반드시 교정되어야 할 이단이다. “영성”은 예배의 한 요소이다. 그러므로 영성이 없다면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를 드릴 수 없다.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예배를 드리는 방법을 아는 분은 오직 성령님이시다. 당신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예배를 드려서는 안 된다. 회심과 중생의 경험을 거치지 못한 채, ‘자기가 원하는 방식대로’의 예배를 드리면 안 된다. 구속과 관계없이 종교적 체험을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 아니면서, 회심하지 않고서도, 멸망으로 달려가고 있으면서도 종교적 체험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또한 예배는 진리로 드려야 한다. 진리는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입각하여 예배를 드려야 한다. 사실 우리가 예배하려는 분에 대한 어느 정도의 지식이 없이는 그분이 받으실 만한 예배를 드리는 것이 불가능하다. 우리가 말씀의 올바른 지식 없이도 하나님의 신비를 체험할 수 있다고 하여 다른 것은 필요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2. 두 번째 요소 -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무한한 신뢰

참 예배를 드리는 데 중요한 요소 중 두 번째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무한한 신뢰”이다. 오늘 날 예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을 이러저런 모습으로 바꾸어 놓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본래의 하나님의 모습 - 사랑이 많으시고, 인자하시고, 오래 참으시고,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뿐 아니라, 죄에서 우리를 건져내어 의롭게 살도록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키시는 능력이 있는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모습 - 이 다른 모습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과거 신앙의 위인들처럼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무한한 신뢰가 없다. 신뢰가 없으면 존경심도 생기지 않는 법이다. 하나님을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은 하나님을 존경할 수도 없고, 존경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예배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그분의 성품에 대하여 깊이 있게 알아야 한다. 하나님을 온전히 알게 되면 우리는 그분을 신뢰하고 존경할 수 있게 될 것이고,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을 굴복하고 바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며, 그렇게 될 때 우리의 예배는 받으실 만한 예배가 될 것이다.

3. 세 번째 요소 - 사랑

영적 예배의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요소는 “사랑”이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 22:37).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므로 당신 자신의 모든 것이 되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주셨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전부”를 하나님께 드릴 것이며, 인간이 감히 이해할 수 없는 놀라운 구속의 사랑을 보여주신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배할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고 기뻐하면서 그분을 진심으로 예배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적은가! 그 사랑을 매일 매 순간 묵상하는 사람들은 저절로 하나님을 찾게 되고 끊임없이 그분께 예배드리고 싶어 할 것이다.

성 버나드, 성 프랜시스(St. Francis), 리처드 롤(Richard Rolle, 1295~1349. 영국 사람으로서 영어와 라틴어로 된 열 두 권의 성경 주석 및 성경 번역서를 남김),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 미국의 신학자 및 철학자로서 ‘대 각성 운동’을 일으킴), 스코틀랜드의 신학자 사무엘 러더퍼드 같은 사람들을 사로잡았던 ‘그리스도를 향한 미칠 것 같은 아름다운 사랑’은 오늘 날 찾아보기 힘들다. 종교의 본질과 진정한 예배는 관습적인 종교 행위나, 축제일 준수, 종교적 의식과 의복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영과 하나님의 영이 사랑 안에서 연합하는 연합에 있다.

아담의 타락으로 생긴 가장 큰 비극은 인간의 내적 성소에서 하나님의 영이 떠나신 것이다. 성삼위 하나님은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중심에 자신이 거하실 곳을 마련해 놓으셨다. 그리고 이 성소에서 안식하며 인간과 깊은 도덕적 영적 교제를 나누려고 계획하셨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죄 때문에 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이 놀라운 특권” 을 박탈당하고, 그곳에 혼자 거하게 되었다. 이 성소는 너무나 은밀한 곳이어서 어떤 다른 피조물도 침입할 수 없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들어오실 수 있다. 그러나 그분은 그냥 들어오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믿음으로 초대할 때 들어오신다. 사랑으로 마음의 문을 열 때만 들어오신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4. 네 번째 요소 - 경이

예배의 또 다른 요소는 “경이”이다. “예배는 초월적 경이이다. 예배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한한 경이이다” 라고 토마스 칼라일(Thomas Carlyle, 1795~1881. 영국의 평론가)은 말했다. 우리는 종종 예배드릴 때 하나님에 대하여 “즐거운 놀람”에 빠진다. 이런 예배는 성경의 이곳 저곳에서 발견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아브라함은 거룩한 경이감에 사로잡혀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다. 모세는 하나님이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셨을 때 얼굴을 가렸다. 바울은 셋째 하늘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영광”을 보았을 때 자신이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는지 몰랐다. 요한은 교회들 사이에 거니시는 예수님을 뵈었을 때 엎드려서 죽은 사람처럼 되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우주를 창조하신 무한하신 능력의 신이시다.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할 때, 그렇게 위대한 신을 예배하는 특권을 감사하며 경이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

 진정한 예배의 본질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갈망이 있다. 그러나 우리만이 갈망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도 갈망을 가지고 계신다. 그 갈망이란 하나님을 다른 어떤 것보다 더 높이겠다고 영원히 결단하는 자들을 찾으시는 갈망이다. 그분은 이런 사람들을 땅과 바다의 모든 보화보다 더 소중히 여기신다. 그분은 그들을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을 향한 놀라운 인자하심을 보여 주신다. 그분은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그들과 동행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우리 마음의 깊은 곳에서 내가 그분과 단둘이 만난다는 것이다. 내가 아무리 많은 무리들 틈에 끼어 있다 할지라도 결국 나는 혼자이고, 나 혼자서 그분을 만나는 것이다.

신비는 언제나 우리의 이성을 무색하게 만들고 우리를 놀라게 한다. 형언할 수 없는 신비 앞에서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온다. 기독교 신앙에서 언제나 신비의 여지를 남겨두어야 한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복음주의적 이성주의자들이 되어, 모든 것들을 이성으로 설명하려고 시도할 것이다. 자연의 도처에 신비가 도사리고 있듯이, 하나님의 나라에도 무수한 신비가 숨어있다. 가장 지혜롭고 정직한 사람이란 그가 거의 아는 것이 없다고 솔직히 고백하는 사람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마음의 눈으로 본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현인인 체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더 이상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행동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와 견해를 조금 달리 하는 사람을 정죄하지 않을 것이다.

본래 인간은 무엇인가를 높이고 그것에 감탄하면서 살도록 만들어졌다. 이해할 수 없는 신비에 감탄하여 넋을 잃을 지경에 도달하는 것, 그것이 바로 예배이다. 어떤 사람들은 모든 것에 감탄하고, 어떤 사람들은 아무것에도 감탄하지 않고, 또 어떤 사람들은 잘못된 것에 감탄한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에게 찾아오셔서 “나는 하나님이다. 나를 보고 감탄하고 열광하라”고 말씀하신다.

영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