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부: 두 종류의 예배자

두 종류의 예배자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요 4:13-24).

예수님께서 예배에 대하여 언급하신 이 말씀은, 야곱의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씀하신 장면에 나온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에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 된다고 말씀하셨다. 영어 성경에서 이 단어들을 보면, “in spirit and in truth”으로 되어 있는데, 이 구절의 직접적인 뜻은 “성령 안에서 진리로” 예배드리라는 것이다.

신령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는 어떤 예배인가? 하나님께서는 성령 안에서 영적으로 드리는 예배를 받으신다. 그러나 그것이 다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참된 예배는 진리 안에서 드리는 예배, 즉 올바른 가르침과 말씀, 그리고 복음 위에 기초되어 드리는 예배를 받으신다. 참 예배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함께 공부해 보기로 하자.

회개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

일찌기 다윗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참된 예배가 무엇인지 알았다. 그는 시편에 이렇게 기록하였다.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시 51:16~17).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마음으로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고 드리는 예배를 기뻐 받으신다. 다윗은 그의 시에서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자신이 죄인임을 깊이 자각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죄와 부족과 허물을 하나님 앞에 내어 놓고 진정으로 통회하고 자복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심령을 어여삐 여기시며, 겸손한 자와 함께 하신다. “지존 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사 57:15).

예수께서 말씀하신 비유의 이야기 중에 두 예배자의 비유를 연구하여 보면, 하나님 앞에 예배드릴 때에 우리 인간들이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는가에 대하여 알게 된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눅 18:10). 한번은 성전에 두 사람이 예배드리러 갔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서로 너무 다른 마음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러 갔다. 그리고 그 중 한 사람의 예배는 하나님께 가납을 받았고, 다른 한 사람의 예배는 하나님께 가납하심을 받지 못했다.

1. 바리새인의 예배

바리새인이 예배하러 성전에 올라간 것은, 자기가 용서받아야 할 죄인이기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고 칭찬을 받기 위해서였다. 그는 자기의 예배가 자신을 하나님께 칭찬받을 사람으로 추천하는 행위로 생각하는 동시에 사람들로 자기의 신앙을 우러러보게 하려고 하였다. 그는 하나님과 사람의 은총을 받고 싶어했다. 그의 예배 행위는 이기심에서 발단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생각은 자기를 칭찬하는 마음으로 가득 찼다. 그의 태도, 그의 행동, 그의 기도가 그러하였다. 그는 “내게 가까이 하지 말라 나는 너보다 거룩함이니라”(사 65:5) 하는 태도로 다른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따로 서서 기도하였다. 그는 자기만족에 도취되어 하나님도 사람도 다 같이 자기를 보고 틀림없이 만족해하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자기의 품성을 하나님의 거룩한 품성에 비추어 판단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품성에 견주어 판단하였다. 그의 마음은 하나님을 떠나 사람에게로 향했다. 이것이 그가 자기만족에 빠진 원인이다.

그는 자기의 착한 행실을 다음과 같이 열거하였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이 바리새인의 신앙은 그의 심령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그는 경건한 품성, 즉 사랑과 자비로 충만한 마음을 구하려고 하지 않고 외적 생애로 나타내는 신앙만으로 만족하였다. 그의 의는 자기 자신의 것, 즉 자신의 행실의 열매요, 사람의 표준으로 정한 의에 지나지 않았다.

바리새인이 다른 사람을 기준으로 해서 자기 자신을 평가한 것처럼, 다른 사람들을 자기 자신을 기준으로 해서 평가했다. 그의 의도 다른 사람의 의를 기준으로 해서 평가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의가 낮을수록 그만큼 자기 자신은 더욱 의롭게 보였던 것이다. 그의 스스로 의롭다는 생각이 남을 비난하게 만들었다. 그는 “다른 사람”을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는 자라고 비난하였다. 이로써 그는 형제를 참소하는 사단의 정신을 나타냈다. 이러한 정신을 가지고서는 결코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예배를 가납하지 않으셨고, 그는 하나님의 아무런 축복도 받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2. 세리의 예배

세리도 다른 예배자들과 같이 성전에 올라갔으나 즉시 자기 자신이 그들과 함께 예배드릴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그들로부터 좀 떨어져서 예배를 드렸다. 세리는 멀리 서서 극심한 고민과 자책을 느끼면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기도하였다. 그는 자기가 하나님 앞에 범죄했고, 자기 자신이 죄 많고 누추한 인간임을 깊이 느꼈다. 그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그를 멸시의 눈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에 그들로부터 어떠한 동정도 기대할 수 없었다. 그는 하나님 앞에 내어 놓을 만한 아무런 공로도 없음을 알고 절망 가운데서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하고 외쳤다.

그는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도 않았다. 그는 자기의 죄에 대한 자각에 압도되어 홀로 하나님 앞에 섰다. 그의 유일한 소원은 죄 사함을 받고 마음에 화평을 얻는 것이었다. 이를 위한 그의 유일한 간구는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영적인 필요를 느끼고 우리의 궁핍과 죄를 인정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으실 수 있는 첫째 조건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 5:3).

세리의 기도가 응답을 받은 것은 그 기도가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붙잡으려는 의뢰심을 보여 준 까닭이었다. 세리의 생각에는 자기 자신은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아니요 오직 수치스러운 존재일 뿐이었다. 그는 자신을 하나님 앞에 완전히 낮추었다. 그리하여 그는 축복을 받았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을 찾고 또 하나님께 예배드리려는 모든 사람들도 이러한 자세를 가져야 한다. 교만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 자신을 겸손히 낮추며, 가난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간구하는 사람, 자신의 죄됨을 절실하게 느끼고 예수님의 의만을 간절하게 붙잡는 사람만이 하나님께 참 예배를 드릴 수 있다.

3. 회개와 구원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기업인 당신의 백성을 다시 사셔서 그들에게 한 번 더 선발의 기회를 갖도록 하기 위하여 당신의 찔린 몸을 바치셨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히 7:25).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흠 없는 생애와 순종과 갈바리의 십자가 상에서의 죽으심을 통해서 잃어버린 인류를 위하여 간구하셨다. 그리고 지금 우리의 구원의 주께서는 단지 탄원자로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승리를 주장하시는 승리자로서 간구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중보자로서 사업을 수행하고 계신다. 즉 당신의 백성들의 기도와, 고백과, 감사의 향연에 당신의 흠 없는 공로를 섞어서 하나님 앞에 올리신다. 이것들은 그분의 의로 말미암아 좋은 향기가 되어 하나님 앞에 올라가게 된다. 이 제물은 하나님께서 온전히 받으실 만한 것이 되어 그분의 용서가 모든 범죄를 덮어주게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대속자와 보증인이 되시겠다고 약속하셨으며 그는 어느 누구도 소홀히 여기지 않으신다. 인류가 영원한 멸망을 당하게 된 것을 보시고 그냥 계실 수가 없어서 그들을 위하여 당신의 생명을 버리셨다. 그분은 떨면서 간구하는 자들을 일으켜 세우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신다. 그분은 자신의 속죄를 통하여 선을 행할 수 있는 무한한 능력을 사람을 위해 예비하셨으므로 그 능력을 우리를 위해 사용하지 않으실 리가 없다.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모든 죄와 슬픔을 그분의 발 앞에 놓을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 우리는 예수님의 중보를 통해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으며, 경배와 예배를 드릴 수 있다. 그런데 예수님의 중보가 우리에게 효력이 있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는 우리 자신을 알아야 하고, 그리고 자신에 대하여 통회하지 않으면 용서와 화평을 얻을 수 없다. 바리새인은 죄에 대한 자책을 느끼지 않았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그에게 역사하실 수 없었고, 그의 예배와 경배는 참된 것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자만을 구원하실 수 있다. 그는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눅 4:18) 하기 위하여 오셨다. 그러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눅 5:31)다. 우리는 우리의 진정한 상태를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아무도 자기의 허물을 스스로 깨달을 수 없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렘 17:9).

마음에 없는 겸손을 입술로 나타낼 수 있다. 하나님께 심령이 가난하다고 말하는 중에도 마음속에는 자기의 의를 자랑하고 겸손의 덕이 풍부하다는 자만심으로 가득 찰 수 있다. 자신에 대한 진정한 상태를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리스도를 쳐다보는 것이다. 사람들이 자기의 의를 그처럼 높이는 까닭은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분의 순결하심과 탁월하심을 깊이 생각할 때에 우리 자신의 연약함과 가난함과 결점들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다른 모든 죄인들과 마찬가지로 스스로 의롭다는 두루마기를 입고 있으며 아무 소망도 없이 잃어버린 바 된 자들임을 보게 될 것이다.

자아를 포기하는 일은 그리스도인 생애를 처음 시작할 때에만 할 것이 아니라 천국을 향해 걸어가는 발걸음마다 거듭되어야 한다. 우리는 항상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을 찾는 일과 끊임없이 간절한 마음으로 죄를 통회하고 자복하는 일과 하나님 앞에서 심령을 낮추는 일이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경험 가운데서 전진하는 발걸음마다 우리의 회개는 더욱 깊어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진정으로 회개하는 심령으로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께서는 기뻐 받으신다.

영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