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부: 신령한 예배를 위한 준비-2

영적 예배를 위한 준비 2


2. 하나님의 황홀한 임재를 체험하라

하나님의 임재의 중요성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크고 위대하심을 알게 된다면 우리는 그분의 임재 안으로 들어가서 다시는 나오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분의 면전에 있으면 우리는 그분에게 감탄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분에 대한 감탄이 점점 더 커지면 결국 그분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과거 영적 거인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깊이 체험하고 그 체험을 평생 기억하면서 살아 갔다. 캄캄한 어둠의 공포가 아브라함에게 닥쳤을 때처럼, 혹은 불타는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부르시는 하나님을 뵙기를 두려워 하여 모세가 그의 얼굴을 숨겼을 때처럼, 처음 하나님을 만났을 때에 그들은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그러나 대개 얼마 후 그 두려움은 즐거운 외경심으로 바뀌어 그 상태를 유지하다가, 결국 하나님께 가까이 있다는 즐겁고 경건한 감정으로 변화한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체험했다는 사실이다.

만일 성도들과 선지자들이 하나님을 체험하지 못했다면 그들의 변화된 삶을 설명할 수 있을 만한 다른 근거는 없다. 하나님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그들처럼 살 수 있겠는가? 그들이 그토록 큰일들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의식적으로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며 일했고, 자신에게 임하신 하나님께 기도드린다는 확신을 가지고 기도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믿음의 조상들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느낌이 너무나 황홀하다고 우리에게 증거했고 우리도 이것을 체험적으로 알고 있다. 이런 체험적인 인식이 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기독교를 공격해도, 적이 아무리 우리를 흔들어대도 우리는 흔들리거나 쓰러지지 않는다. 자기에게 임재하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은 불신자들이 반대에 전혀 요동하지 않는다. 그들의 체험은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기에 다른 어떤 변호나 증거도 필요하지 않다.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

참 그리스도인의 체험의 본질은 하나님을 정말로 만나는 것이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외의 다른 것들은 부수적이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없다면, 종교는 실재의 그림자이며, 다른 사람의 체험을 옮기는 싸구려 모방일 뿐이다. 유년기부터 노년기까지 교회 안에서 살면서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영혼이 있어도 사랑하지 못하고 오직 신학과 논리가 합성해낸 신만을 안다면, 그것이야말로 크나큰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중요하다는 강력한 감정이 신자를 순식간에 사로잡을 수 있다. 이 감정은 그의 삶과 사상 속으로 깊숙이 파고들어가 그의 모든 판단과 가치관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면 그는 자신이 사람들의 견해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을 느낀다. 하나님께 나아갈 때 우리는, 그분과 우리 사이의 관계에서 주도권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나서는 분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확신하면서 그분의 존전으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가 시끄럽고 분주한 활동을 전부 그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을 느낄 수 있을 때까지 그분은 기다리신다. 그런 시간이 되어서야 비로소 우리는 우리의 주의를 성삼위 하나님께 집중시킬 수 있다.

성소 속의 진리 - 하나님의 면전으로

구약에 나오는 성소는, 죄악의 황무지를 떠나 하나님의 면전으로 가는 영혼의 내적 여행을 잘 설명해주는 좋은 예가 된다. 하나님께 돌아온 죄인은 성소의 바깥뜰로 들어간다. 거기서 그는 놋으로 된 번제단에서 피의 제물을 드리고 가까이 있는 물두멍에서 자신을 씻는다. 그런 다음 그는 휘장을 통하여 성소로 들어간다. 성소 안에는 자연광이 없으며,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을 상징하는 정금등대가 부드러운 빛을 비추고 있다. 또한 성소 안에는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상징하는 진설병과 끊임없는 기도를 상징하는 분향단이 있다.

성소까지 들어간 예배자는 이미 많은 것들을 누렸으나, 그래도 아직 하나님의 면전으로 나아간 것은 아니다. 성소와 지성소를 가르는 또 다른 휘장이 있는데, 이 휘장을 통해서 지성소로 들어가야만 속죄소 위에서 장엄하고 영광스럽게 거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이 지성소에는 오직 대제사장만이 1년에 한번 들어갈 수 있었다. 그는 반드시 피를 가지고 들어가서 자신의 죄와 백성의 죄를 위해 그 피를 드렸다. 우리 주님께서 갈보리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찢어진 휘장이 바로 이 두 번째 휘장이다. 성경기자에 따르면, 이 휘장이 찢어졌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예배자들이 하나님의 면전으로 나아갈 수 있는 새롭고 산 길이 열렸다고 한다. 우리는 지성소에서 하나님의 면전 앞에 나아가 개인적으로 은밀하게 주님을 만나는 경험을 해야 한다.

하나님의 임재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임재의 현시(manifestation), 즉 그분의 임재의’나타남’은 그분의 임재와는 다르다. 임재의 현시 없이 임재가 있을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고 해도 하나님은 여기에 계실 수 있다. 한편 우리가 그분의 임재를 의식할 때에만 그분은 현시하신다. 우리 편에서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영에 순종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성부와 성자를 보여주시는 분은 성령님이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랑과 순종 가운데 성령님에게 순종한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을 나타내실 것이다.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의 삶과 하나님의 임재의 얼굴빛으로 밝게 빛나는 삶을 구분하는 것도 바로 이런 하나님의 현시가 있는지 없는지를 보면 된다.

하나님의 보편적인 임재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지금 여기에 계신다. 온 우주는 그분의 생명으로 가득하다. 그분은 이상하고 이질적인 신이 아니라 수천 년 동안 죄악에 빠진 인류를 사랑으로 감싸 오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친근한 아버지이시다. 이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하시고 우리와 대화하기 위해서 우리의 주의를 끌려고 애쓰신다. 우리에게 접근해 오시는 그분에게 반응하기만 하면 그분을 알 수 있는 능력이 우리 안에 있다. 믿음과 사랑과 훈련을 통해 하나님께 반응하는 우리의 수용성이 더욱 온전해질수록 우리는 그분을 더욱 많이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는 기독교의 핵심 진리이다. 그러나 아깝게도 현재 유행하는 기독교는 그분의 임재를 단지 이론으로만 알고 있다.

3. 불타오르는 열정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라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열정으로 불탈 때까지 그분을 묵상하고 그분과 교제해야 한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즐거운 일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님을 배우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 하나님께서는 구속받은 자들과 교제하시는데,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가 다른 어떤 것 때문에 방해받지 않고 편안하게 이루어질 때, 우리의 영혼은 안식과 치유를 얻을 수 있다. 우리가 우리의 행위로 그분 앞에서 완전히 의롭게 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분을 기쁘게 해드리려는 우리의 노력을 그분은 즉시 알아주시며, 우리가 연약하고 부족한 점이 있더라도 우리의 동기가 신실하다면 그분은 우리를 받아주신다.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찾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우주의 근원이 되는 분을 찾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빛을 찾지 않는다. 왜냐하면 빛이 이미 그에게 비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 안에 하나님을 만난 경험을 가지고 있으며 성령님께 직접 받은 확신으로 기쁨에 찬 삶을 살 것이다.

4. 하나님의 능력을 간절히 사모하라

만일 교회가 하나님의 능력을 소유한 교회라면 사교클럽, 뜨개질 모임, 골프나 조기 축구회 같은 것만 제공하는 교회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친구들이 하나님을 얼마나 사모하고 갈망했는지 알 것이다. 아브라함과 바울과 우리의 큰 차이점은 그들이 하나님을 찾고 발견하고, 찾고 발견하고, 찾고 발견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하나님을 끊임없이 찾았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주님을 영접하고 난 뒤에는 주님을 다시 찾지 않는다. 다른 것들을 제쳐두고 오직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만을 추구하라. 텔레비전을 꺼라. 그 대신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의 자비를 기뻐하라. 우리는 우리의 성품과 생각이 항상 온전히 하나님께 머물고, 그리하여 그분의 능력으로 우리 내면이 꽉 찰 때까지 기도로 하나님과 씨름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하나님의 진리인 성경말씀을, 마음을 열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며 쉬지 말고 읽고 명상하라. 그분의 능력이 그대를 가득 채울 때까지 그렇게 하라.

5. 모든 것을 다 바쳐 하나님을 숭모하라

감탄의 단계에 올라서지 못하는 예배는 기초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예배 자가 오로지 자신과 자신의 평안에만 관심을 쏟는다면 그는 아직 어린애일 뿐이다. 우리의 예배가 감사에서 감탄으로 발전할 때 우리는 성장하기 시작한다. 우리의 마음이’하나님의 선물’이 아닌 그분에게 가서 닿는다면, 우리는 천국에 있는 복된 사람들이 가지는 이타적인 기쁨을 조금이나마 맛보게 될 것이다. 경외심은 아름다운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는 경외심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소와 지성소를 가르는 휘장을 젖히고 들어가 이사야처럼 하나님의 거룩한 얼굴을 잠깐이라도 본 사람들은 결코 불경스러운 마음을 갖지 않게 될 것이며, 자랑과 교만이 없어지고 경외심이 넘쳐 하나님을 숭모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면전에 나아가 무릎을 꿇을 때, 인간의 말이나 언어의 표현이 무색해짐을 느낀다. 그리하여 그 경외스러운 순간에 예배자는 완전히 무력해져서 오로지 “오!”라고 소리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오!”라고 소리칠 수 있으려면 조심을 해야 한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소위 ‘평안’을 전한다는 선지자들과 ‘안전’을 판매하는 세일즈맨들에게 빠지거나, ‘복음주의적 휴머니즘’으로 전락할 위험이 늘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복음주의적 휴머니즘’은 영적 문제에 대한 고민도, 깊은 묵상이 주는 평안도 모른다.

진실성이 없는 듯한 말로 유창하게 기도하는 습관에 빠지다보면 대개 우리의 기도는 자기 자신에게 이야기하는 식으로 흐르기 쉽다. 자신의 감정을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고민에 찬 ‘진지한 기도’를 드리는 대신, 기도제목이나 예의바른 감사의 말을 차분히 나열하는 식의 습관에 빠져있다면, 우리는 이를 경계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의식하든 못하든 그 다음 단계는 대개 영적 침체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충분히 알고, 그분에 대한 신앙을 갖게 되고, 그분의 성품을 무한히 신뢰하게 되고, 그분의 위대하심 때문에 감탄하며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의 아름다움에 매료되면, 우리는 저절로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고 숭모하게 될 것이다.

영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