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부: 하나님이 받지 않으시는 예배

거짓 예배


하나님께서 모든 예배를 다 받으시는 것은 아니다. 교회에서 아름다운 오르간 소리와 찬양 소리가 울려 퍼지고 수천 명의 신자들이 예배를 드린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 예배를 받지 않으실 수도 있다. 하나님께서는 참 예배만을 받으신다.

참 예배가 아닌 예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지만 그 중 하나님이 받지 않으시는 예배가 많다는 것이 참으로 비극적인 사실이다. 성령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 예배는 참 예배가 아니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수백만의 교양 있는 크리스천들이 단지 교회의 전통에 따라 관습적으로 예배를 드리기 때문에 그 예배는 하나님께 상달하지 못한다.

은밀히 사람들을 조종하거나 교묘한 방법을 써서 예배를 드린다면 그것은 참 예배가 아니다. 우리의 삶의 각 부분들을 둘로 나누어 한 부분은 예배를 드리고 다른 부분은 예배를 드리지 않는다고 해도 그것은 참 예배가 아니다. 또한 교회에서만 예배를 드린다거나, 위험한 폭풍이 불어 닥치거나 혹은 자연의 장엄한 아름다움에 압도되었을 때만 예배를 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착각이다.

성령이 함께하시지 않으면 참 예배가 불가능하다. 우리가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참 예배를 드리려면 우리 안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영이 활동하셔야 한다. 그러므로 예배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어 우리에게 찾아와 마치 거울에 반사되듯이 다시 그분에게 되돌아간다.

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을 불쾌하게 해드리는 것들이 있음을 우리가 안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온전히 기쁘게 해드리는 예배를 드릴 수 없다. 내가 교회에 가서 즐겁게 하나님을 예배했다 할지라도 월요일에 그분을 예배하지 않는다면 나는 참 예배를 드린 것이 아니다. 교회에서 즐거운 노래로 찬양하며 하나님을 예배했다 할지라도 월요일과 화요일에 사업상의 문제로 하나님을 불쾌하게 해드린다면 참 예배를 드린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불쾌하게 해드리는 것이 내 안에 조금도 없을 때에 비로소 그분은 나의 예배를 온전히 기뻐하신다. 우리는 입술로 하나님을 예배하지만, 삶으로는 그분을 예배하지 않는 일을 쉽게 저지르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다면, 결국 우리의 입술도 예배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이 받지 않으시는 예배의 종류

1. 가인의 예배

구약에서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예배를 받지 않으셨는데, 그 이유는 그가 하나님과 타락한 인간들 사이에 속죄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인이 하나님께 드린 예배에는 세 가지 중대한 잘못이 있었다. 함께 연구하여 보자.

  • A. 가인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지 못했다. 다시 말해서 그는 그분이 주권적이고 거룩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하나님의 본질과 품성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그분이 받으실 만한 예배를 드릴 수 있겠는가? 그는 하나님이 인간의 죄의 문제를 절대적으로 심각하게 여기신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 B. 가인은 그가 하나님과 참된 관계를 맺지 못했으면서도 그런 관계를 맺고 있다고 착각했다. 그는 그와 하나님 사이에 중재자가 없이도 그분이 자기를 받아들이실 것이라고 태평하게 믿었다. 그는 인간이 죄 때문에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나 있다는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 C. 가인은 죄의 심각성을 모르고 그것을 아주 가볍게 여겼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한 속죄의 필요성을 늘 상기하여야 할 것이다.

2. 공허한 예배

오늘 날 수많은 교회에서 드려지는 예배는 몹시 공허하고 무의미하다. 예배드리기 위한 모든 것들이 다 갖추어져 있는데도 한 가지 중요한 결핍 요소를 들라면 바로 성령님의 능력이 함께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경건의 모양은 충분하다. 그것은 사람들을 사로잡을 정도로 충분히 아름답고 웅장하다. 예복에 나타난 여러 가지 상징, 음악, 시, 그림, 웅변술, 엄숙한 말투, 좋은 음향 시설, 이런 것들이 어우러져서 예배 자들의 마음을 한껏 사로잡는다. 그러나 종종 성령님의 초자연적인 감동이 없을 때가 있다. 목회자와 회중은 위로부터 내려오는 능력을 알지도 못하고 갈망하지도 않는다. 이것은 비극이 아닐 수 없다.

경건의 모양은 가득하나 경건의 능력은 없는 예배, 곧 마음의 참된 회개와 거듭남이 수반되어야 할 필요성을 거의 느끼지 못하게 만드는 공허한 예배, 외양의 경건만으로 채워질 수 없는 마음의 영적인 갈망을 충족시켜 주지 못하는 인위적인 예배, 하나님 앞에 겸손한 심령으로 진정한 굴복을 하도록 인도하지 못하는 영적이지 못한 예배 등은 무의미하며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예배가 아니다.

3. 사마리아인의 예배

이것은 이단적인 예배를 뜻한다. 이단적인 사람이라고 해서 진리를 전부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은 받아들이고 자기가 싫어하는 것들은 거부하는 편협한 사람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인 성경말씀을 따라 올바른 예배를 드려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마음속에 깨닫게 하시는 진리를 아무리 육신의 생각으로 따르기 어렵다 해도 겸손하게 수용하며 그 진리에 굴복해야 한다. 진리에 입각하지 않고 자기 마음에 좋은 대로 예배를 드리는 것은 마치 옛날 성경의 사마리아인들이 자신의 성전을 따로 만들어 놓고 마음대로 예배를 드린 것과 같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가 아니다.

4. 자연 예배

이것은 장엄한 자연을 즐기며 명상하는 것이다. 자연 숭배자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해서 ‘자연을 통해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은 아주 많다. 그들은 눈과 귀가 아닌 마음을 미에 집중시킨다. 이런 사람들은 몰아의 경지를 예배라고 착각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종교음악을 예배로 착각한다. 그리하여 마음을 고양시키고 영혼을 거의 몰아의 경지에 몰아넣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예배라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나님께서 모든 예배를 다 받으시는 것은 아니다. 예배에는 성령님과 진리가 있어야 한다. 어떤 사람은 예배드리지 않고 단지 종교적 활동에 몰두하면서 자신을 속일 수 있다. 일보다 예배가 앞서는 것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순서이다. 예배를 열심히 드리는 사람이 복음에 따른 실천적 삶을 소홀히 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은 곧 거룩한 봉사의 책무를 강하게 느껴서 봉사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곧 순종과 선행으로 이어지는 법이다.

나를 성경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은 제아무리 무해하게 보일지라도 나의 적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내가 하나님과 영원한 것들에 대해 묵상해야 할 시간에 나의 주의를 다른 데로 이끄는 것은 무엇이든지 나의 영혼에 해를 끼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제시하시는 이상은 우리가 최대한 온전한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내 존재의 모든 부분이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 부분이 내 존재 안에 있으면, 내 존재 안에는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하는 부분이 없는 것이다. 마음으로 어디서든지 하나님께 참 예배를 드리자.

영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