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부: 예배인가? 쇼인가?

종교적인 쇼를 중단하라


오늘날 기독교 안에 진정한 예배의 경험자들이 감소되어 가고 명목상의 말뿐인 적당하고 편안한 그리스도인(?)들이 늘어가자, 교회 안에서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가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그러자, 예배에서 사라진 성령의 역사의 결핍을 메우기 위한 수단으로 소위 ‘복음주의적 예배 형식’인 ‘축제교회’의 예배 형태들이 기독교를 침투하게 되었다. 지금 전 세계 수백만의 복음주의자들은 축제예배 형식인 ‘종교적인 쇼’, 연예오락에 몰두해 있다. 그들은 신나는 빠른 템포의 음악과 감정을 자극하는 낭만주의적인 분위기의 노래들을 교회 안으로 불러들여 성령의 조용하고 엄숙한 임재 대신에, 감각적이고 세속적인 음악으로 사람들의 감정을 취하게 하여 신자들을 기만하고 있다. 이러한 종교적 연예오락이 그리스도 교회를 온통 타락시켰기 때문에, 수백만의 사람들은 그것이 이단이라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 종교적 쇼에는 악취가 난다. 종교적 쇼의 진행자들이 성소로 들어갈 때 그들은 여호와께 이상한 불을 드리는 위험스러운 짓을 하는 것이다. 최악의 경우 종교적 쇼는 신성모독이 될 수 있다. 아무리 좋게 봐주어도, 그것은 기도와 성령님의 감동을 대신하려는 가련한 시도에 불과하다. 그들의 그런 예배방식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육신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애쓰는 것이다.

교회 안에 들어 온 연예오락

오늘 날에는 연예오락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그들은 연예오락 없는 삶을 도저히 견딜 수 없다. 마치 마약 중독자가 날마다 헤로인을 맞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것처럼, 그들은 연예인이나 기타 심리적 중독이 주는 위안을 얻지 않고서는 살 수 없다. 여러 세기 동안 교회는 온갖 형태의 세상적 연예오락에 대해 반대 입장을 분명히 견지해 왔다. 왜냐하면 교회는 연예오락의 본질을 간파하고 있기 때문이다. 연예오락은 우리의 시간을 빼앗는 도둑이요, 마음을 불안하게 만드는 양심의 소리로부터 피할 수 있는 피난처요, 도덕적인 책임으로 관심을 돌리지 못하게 막는 교묘한 수단이었다. 이런 교회의 태도 때문에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교회를 강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교회는 점점 세상의 비판에 염증을 내며 세상에 굴복하기 시작했다. 교회는 지금 ‘연예오락’이라는 큰 신(神)을 이길 수 없을 바에야 차라리 그와 연합하여 그의 힘을 이용하는 편이 더 낫다고 잠정 결론을 내린 것처럼 보인다. 그 결과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세상적 연예오락을 제공하는 데 수백만 달러의 돈을 쏟아 붓는 놀랍고 희한한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그리하여 기독교적 연예오락이 정말 중요한 하나님의 일들을 몰아내고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하는 일이 여러 곳에서 급속도로 퍼져나가고 있다. 많은 교회가 삼류 극장과 유사해진 것이다. 거기서 삼류 제작자들이 저급한 작품을 퍼뜨리고 있으며, 더욱 놀라운 것은 복음주의 지도자들이 그들의 비행(非行)을 변호하기 위해 성경 본문까지 인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연예오락이라는 큰 신이 그의 추종자들을 즐겁게 해주는 방법은 주로 그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다. 본래 어린아이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성향’이 오늘 날 ‘성장이 더딘 교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성숙한 신앙에 이르지 못한 부끄러운 기독교인들이 자꾸 기독교가 재미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희한한 단체들이 생겨나서 그들의 비위를 맞추려 애쓴다. 이런 사람들을 위해 기독교와 연예오락을 혼합하겠다는 목적 하나로 설립되고 존재하는 단체들이 생겨난 것이다.

이렇게 연예오락을 받아들인 현대 복음주의자들의 실패의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과거의 성도들이 소중히 여겼던 하나님과의 관계, 진정한 예배와 경건의 훈련이 그들에게 없기 때문이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런 것은 너무 진부하고 느리다. 그들은 화려한 매력과 빠른 극적인 활동을 원한다. 그들은 성경을 한 장 읽고 짧게 기도한 다음 황급히 바깥으로 나간다. 왜냐하면 또 다른 집회에 가거나 아니면 최근 먼 곳에서 돌아왔다는 종교적 모험가의 스릴 넘치는 간증을 듣고 자기 내면의 깊은 영적인 공허를 메우기 위해서이다.

이런 얄팍한 신앙의 비극적인 결과는 도처에서 발견된다. 깊이 없는 사랑, 속 빈 신앙관, 재미에 치우치는 신앙 집회, 예배에 들여 온 세속적인 음악, 축제식 예배 형태, 사람에게 영광을 돌리는 일, 종교적인 형식에 의지하려는 태도, 동호회 모임과 같은 친교 활동, 세상적 판촉 활동의 도입, 인간의 열정을 성령님의 능력으로 착각하는 오해, 이런 것들이 바로 그런 비극적 결과들이다.

음악과 쇼

복음주의적인 교회 어디서나 음란한 이 시대의 영향력을 느낄 수 있다. 집회에서 부르는 많은 음악들에서도 성령님의 감화보다는 낭만적인 분위기가 더욱 더 지배적이다. 이미 오래 전에 기독교 음악은 ‘왜곡되고 약해진 신앙’의 희생물이 되었다. 잘못된 것을 보고도 참는 것이 ‘사랑’이라는 잘못된 생각은 우리의 찬송가와 기독교 문학을 망쳤다. 과거 나이트클럽에서나 들을 수 있었던 댄스 리듬이 소위 복음성가라고 불리는 곡들에 들어 있으며, 그런 노래의 곡이나 가사는 욕망을 자극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노래 속에서 그리스도를 모신다고는 하지만, 그들이 그분에게 나타내는 친밀감은 그분이 누구인지 전혀 모르는 무지에서 비롯된 부적절한 경우가 많으며, 또 그것은 그분을 숭모하는 성도의 경외스러운 친밀감이 아니라, 육욕적인 연인의 무례한 친밀감을 표시한 듯한 인상을 준다.

오늘날의 기독교는 너무 대중화되었기 때문에 영화관에서도 종교영화를 볼 수 있고, 라디오나 댄스파티에서도 기독교 음악을 들을 수 있다. 기독교는 또 하나의 오락이 되어 버렸다. 이제 더 이상 기독교의 능력은 찾아보기가 어렵게 되었다. 죄의 깨달음과 회개와 경건한 슬픔은 거의 없어져 버렸다. 하나님에 대한 생각보다 자신과 육신의 행복에 대한 집착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우리가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행복감을 얻지 못할 경우 다른 어떤 방법을 통해서라도 행복해지려고 매우 애를 쓴다. 그 방법 중 하나가 종교적 크리스천 로큰롤(rock-and-roll)을 즐기는 것이다. 그리고 감정에 호소하고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리듬과 화음과 곡조로 된 복음성가들을 부르는 것이다. 복음주의적 기독교인들이 무용음악에 쓰이는 그 많은 타악기들과 드럼과 전자기타들과 쇼와 영화에서나 사용됨직한 도구들을 사용하여 사람들을 부추겨 축하해 주고, 분위기를 북돋으려고 애쓰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들이 주님이 주시는 기쁨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주님의 기쁨으로 넘치는 사람은 다른 것은 아예 찾지 않는 법이다.

쾌활하고 자신감에 차 있기는 하지만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와는 그다지 닮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그들은 경축의 종을 울리는 일을 좋아하고 마치 게임 쇼의 진행자처럼 활력이 넘친다. 그들은 자기들이 그리스도를 위해서 산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외식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육신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애쓰는 것이다. 그들은 다만 세상의 나이트클럽에 마음 놓고 갈 수 없어서 교회를 나이트클럽처럼 활용하는 것뿐이다.

이제까지 기독교의 예배의 질은 점점 쇠퇴의 길을 걸어온 반면, 즐거움을 얻기 위한 종교적 연예오락은 계속 번성해 왔다. 사람들은 자기 마음속에서 기쁨을 찾지 못하면 다른 곳에서 기쁨을 찾으려고 애쓴다. 크리스천들은 성령님의 술을 즐길 수 없을 때 육신의 술을 찾는다. 지난 25년 동안 보수적 크리스천들이 그랬다. 기쁨이 없고 메말라 있는 마음을 달래기 위해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의 오락거리에서 기쁨의 단물을 짜내려고 애썼다. 그들이 아는 유일한 종교적인 기쁨이란 복음성가를 대중가요처럼 부르는 것이었다.

죄악된 쾌락들

오늘날은 경건한 예배를 찾아보기가 어려워졌다. 많은 영적인 지도자들이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하지 못하며 또 신도들에게 가르쳐주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참 행복의 방법을 모른다. 그래서 결국 먹고 마시고 요란스레 행사를 치러야만 행복을 느끼는 체질로 변하고 말았다. 복음주의적 교회는 이런 체질을 바꾸지 못할지도 모른다. 오늘날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성령님이 자기에게 반드시 필요한 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성령님의 불이 아닌 다른 불 옆에 서서 불을 쬐며 따뜻하게 기운을 북돋우는 방법을 배운 사람들이다. 더욱 잘못된 것은, 많은 출판업자들과 음반 제작자들이 그런 방법을 적극 권장한다는 점이다.

미국의 기독교 소설들은 독자의 관심을 끌기 위해 성(性)을 이용한다. 그런 소설을 쓰는 사람들은, 만일 낭만과 기독교를 결합시켜서 한편의 이야기를 만들면 순수 기독교 소설을 읽지 않을 보통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읽고 복음에 접하게 될 것이라는 얄팍한 변명을 늘어놓는다. 그러나 ‘기독교 로맨스 소설’이라는 개념 자체가 건전하지 못하다는 점이다. 육욕적 충동과 성령님의 깊고 감미로운 감동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성애, 즉 에로스가 영광의 주님을 섬기는 하나의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생각은 황당하기 짝이 없다. 관객을 끌어 모으기 위해서 광고에 관능적인 장면을 사용하는 종교 영화는 그리스도에 완전히 역행한다. 오직 영적으로 눈먼 사람만이 그런 영화에 현혹될 것이다.
죄가 우리 인간에게 가져다 준 가장 비극적인 결과 중 하나는 우리의 올바른 감정이 질적으로 타락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웃기지도 않는 것을 보고 웃고,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것들에서 쾌락을 느끼며, 정상적으로는 애정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들을 보고 기뻐한다. 참 성도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죄악된 쾌락에 대한 저항’은 다른 말로 ‘인간 감정의 타락에 대한 항거’이다.

쇠퇴해가는 예배의 질과 기독교 신앙

오늘날 교회는 도처에서 출현하고 있는 아마추어들 때문에 고통 당하고 있다. 훈련받지 못했고 준비가 되지 않았으며 영적이지 않은 야심에 찬 수다쟁이가 신앙의 길로 돌아선 것처럼 행세한다. 사람들은 그런 그를 보고 그의 말을 듣기 위해 강사료를 지불하고 무대에 세워 그를 도우려고 애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지 못하고 듣지 못한 자이다. 그러므로 그런 자에게 현혹되는 사람들은 참 예배자가 아니다. 참 예배자는 세상적이고 육신적인 종교 프로젝트에 빠지지 않는다. 오늘날 이 세상에서 영화관 다음으로 연예오락성이 강한 장소를 찾으라면 교회를 꼽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교회에서는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지도적인 위치에서 일한다. 그러다 보니 성령님의 은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인식되거나 사용되지 못한다. 성령님이 개입하지 않으시고 오직 인간의 재능만으로 교회가 지역사회에서 생존하고 번영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종교적인 활동에 불과하다. 이런 일이 계속될 경우 신자들은 그 두렵고 큰 날이 도래하기까지 거의 개선되지 않은 신앙을 품은 채 생활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날에는 자가발전하여 사용한 재능은 전부 불에 타 버리고, 오직 성령님의 인도 가운데 행한 일들만 남을 것이다. 교회는 단순한 종교 단체가 아니다. 교회는 공연 자들이 공연하고 관객이 돈을 지불하는 종교 극장이 아니다. 교회는 구속받은 죄인들이 모인 곳이다. 하나님에게 인도함을 받아 그리스도께 나아온 그들은 그분의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라는 사명을 받은 이들이다.

오늘날 아주 많은 교회 건물과 종교 기관의 건물들이 크게 건축되고 있다. 그리고 교회 신자의 증가율이 인구 증가율을 앞지른다. 갖가지 종교가 사회의 각계각층과 각 연령층의 사람들 중에서 개종자를 얻으려고 애쓴다. 특히 젊은이들과 어린이들을 개종시키려고 열성이다. 그들은 확성기를 장치한 선전트럭, 라디오, 텔레비전, 전철광고, 광고 게시판, 네온사인, 음료수병과 풍선을 이용한 광고 등을 활용한다. 또 그들은 드라마, 마술사, 훈련된 말과 개와 카나리아, 복화술을 하는 사람 등을 이용하여 사람들에게 기독교에 대한 흥미를 불러일으키려고 애쓴다. 또한 수많은 동업자 조합, 상공인 클럽, 비즈니스맨 협회에서도 기독교에 관심 있는 사람들을 위한 모임과 교제를 제공하는 데 앞장서겠다고 나선다. 직업적인 연예인들의 레퍼토리에 기독교적인 노래가 포함되는가 하면, 나이트클럽의 연예인, 프로 권투선수, 유명 영화배우, 심지어 감옥에 갇힌 갱도 기독교를 퍼뜨리는 데 앞장선다. 그러나 이 갱은 이제까지 살아온 자신의 삶의 방식에 대하여 아직까지 애통하거나 회개하는 증거를 보여주지 않았다. 놀랍게도 기독교는 이제 큰 사업이 되어 버렸다.

복음주의적 교회에서는 교인들에게(특히 젊은이들에게) 진지한 교육 프로그램은 최대한 적게 제공하고 연예오락을 최대한 많이 공급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오직 하나님만으로 기뻐하며 그분을 사모하는 모임으로 사람들을 인도하는 일은 이제 거의 불가능해졌다. 이런 현상으로 미루어 보건대,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싫증이 났다고 결론지을 수밖에 없다. 그들은 종교영화, 게임, 기분전환용 오락 같은 ‘막대사탕’을 주지 않는다면 집회에 나오지 않는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교회 분위기 자체가 바뀌게 되었고, 심지어 ‘황금 송아지’를 모시느라 교회의 건축양식까지 바꾸기도 한다.

우리의 신조는 정통에서 이탈한 변종이 되어버렸고, 우리의 신앙 관습은 이단에 빠졌다. 사람들을 끌어 모으기 위한 막대사탕 작전은 우리의 사고에 너무나 깊이 파고 들어왔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사람들은 이런 잘못된 현상으로 피해를 보면서도, 그것이 그리스도의 사도들의 교훈이 아니라는 것은 상상도 못하고 있다. 황금송아지를 섬기는 현대 기독교에 대해 비판이 제기되면, 황금송아지 숭배자들은 “그래도 그렇게 해서 사람들을 이끌지 않느냐?”라고 대답한다. 도대체 그들을 어디로 이끈다는 말인가? 참 제자의 길로? 십자가를 지는 삶으로? 자기부정으로? 세상을 거부하는 믿음으로? 거룩한 삶과 성품으로? 세상의 좋은 것들에 초연해지는 성숙함으로?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그리스도를 향한 온전한 헌신으로? 유감스럽게 이런 질문들에 대한 대답은 ‘노(No)’이다. 요즈음처럼 진정한 영적 예배가 낮은 수준에 처했던 적이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을 지울 길이 없다.

목회자들에게 가해지는 압박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시대에 사는 목회자와 교회는 질적 가치를 희생해서라도 양적 팽창을 추구하고, 정상적인 성장을 통해서 얻을 수 없는 것을 과장을 통해서라도 얻고자 하는 유혹에 시달린다. 각양각색의 사람들로 구성된 대중은 소리 높여 양적 팽창을 주장하며, 영원하고 충실한 가치를 추구하는 목사를 용서하지 않으려고 한다. 목회자의 느린 방법을 비웃으며 빠른 결과와 인기 영합만을 요구하는 ‘잘못 배운’ 교인들이 목회자에게 잔인하게 압력을 가한다. 그들은 스릴 넘치는 일에 목말라 있다. 그러면서도 감히 나이트클럽에는 가지 못하겠고 그런 것들을 도리어 교회 안으로 끌어들이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연예 오락과 흥미거리에 따라서 운영되는 교회는 신약성경이 보여주는 참 교회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얄팍한 자극을 갈망하는 인간의 타락한 본성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표시이다. 주일마다 사이비 기독교의 자극으로 짜릿함을 느껴보려는 ‘세례받은 속물집단’은 참신자의 무리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말로는 성경을 믿는다고 주장해도 그들은 참 그리스도인들의 무리에 속하지 않는다.

신실한 목회자는 세속적인 방식을 교회 예배에 도입하여서라도 교인 수를 늘리고 교인들의 비위를 맞추든가, 아니면 점점 인기가 없어지는 참 예배의 경건한 방식을 그대로 따름으로 양적인 성장을 포기하든가 둘 중에 결정을 해야 하는 난감한 상황에 빠지게 된다. 그것은 목회자의 책임도 되지만, 철없는 교인들의 영적 수준 때문에 빚어지는 결과라고 할 수 있으며, 이것이 현대 목회자들의 딜레마이다.

영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