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나는 십사만 사천 인에 속해 있는가?

구원받은 십사만 사천이 시온산에서 노래를 부르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는 요한계시록 14장에는 십사만 사천 인의 특징이 언급되어 있다. 마지막에 하나님의 증인이 되어 하나님을 변호하고, 생명을 불사하고 하나님의 진리를 위하여 충성할 십사만 사천은 매우 독특한 특징들을 가지고 있다. 함께 연구해 보자.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양이 시온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 내가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니 많은 물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은데 내게 들리는 소리는 거문고 타는 자들의 그 거문고 타는 것 같더라. 저희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십사만 사천 인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계 14:1~5). 


특징 1.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함

십사만 사천 인의 특징을 살펴보면, 제일 먼저 그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한 사람들이라고 나온다. 구약 성경에서 “행음”이나 “음행”이라는 단어는 이교의 우상 숭배와 관련이 있는 표현들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않았다.”는 것은 이교의 가르침에 물들지 않은 순수한 진리를 그대로 지키고 믿는 것을 말한다. 요한계시록에는 두 종류의 여자가 등장하는데, 하나는 하나님의 참 교회를 상징하는 정결한 “여자”이고, 다른 하나는 바벨론 교회들을 상징하는 “음녀”이다. 요한계시록 17장에는 바벨론을 “음녀”라고 표현하였다. “그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계 17:5).

“음녀”의 성서적인 정확한 개념을 이해하려면 그 반대의 의미가 있는 “정결한 처녀”(여자)에 대하여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성경에서 “여자” 또는 “정결한 처녀”는 하나님의 진리를 가진 참 교회를 상징한다.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라”(고후 11:2). 그러므로 “정결한 처녀”(참 교회)와 반대 의미가 있는 “음녀”는 거짓 가르침과 거짓 교리를 가지고 있는 바벨론 교회를 상징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십사만 사천의 특징인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했다는 구절에서 “더럽히다.”라는 표현을 쓴 것을 보아 이 여자는 정결한 여자가 아닌 음녀인 것을 알 수 있다. 음녀는 간음을 하는 창녀를 말하는 단어이다. 영적으로 오류와 간음을 범하는 교회를 음녀라고 성경은 지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십사만 사천은 음행을 범하는 바벨론 교회와 완전히 대조되는 마지막 시대의 참 백성, 참 교회로서, 그들은 음녀(바벨론 교회)가 가르치는 교리들에 의하여 더럽혀지지 않았으며 순결한 진리를 끝까지 따라가는 사람들이다. 즉, 음녀의 취하게 하는 포도주에 취하지 않은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또 다른 천사, 곧 둘째가 그 뒤를 따라 말하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모든 나라를 그 음행으로 인하여 진노의 포도주로 먹이던 자로다 하더라”(계 14:8). 현재 기독교에는 성경의 순수한 복음과 진리에서 변질된 오류의 가르침들이 성행하고 있다. 마지막 짐승의 표를 거절하고 하나님의 편에서 진리를 위하여 충성할 사람들은 변질되지 않은 복음, 바벨론의 포도주에 취하지 않은 순수한 복음과 가르침을 깨달은 사람들인데, 이것이 십사만 사천의 첫 번째 특징이다. 


특징 2.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

“구속함을 얻은 십사만 사천 인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계 14:3)는 구절은 참으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의미심장한 교훈을 던져 준다. 여기에는 십사만 사천 밖에는 부를 수 없는 노래에 대하여 언급되어 있는데, 왜 십사만 사천 외에는 이 노래를 능히 부를 사람이 없는 것일까? 그리고 그 의미는 도대체 무엇일까? 이 노래는 바로 십사만 사천 인 각 개인들이 겪은 경험에서 나온 노래이며, 그것을 체험한 사람 외에는 부를 수 없는 경험의 노래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렇다면, 그 경험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어린양 되신 예수께서 그들을 인도하시는 과정에서 겪은 경험들이다. 십사만 사천은 어린양이신 예수께서 그들을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순종하고 따라가는 사람이다.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간다는 말의 뜻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님이 인도하시는 곳이면 어느 곳이라도 순종하며 따라간다는 말인데, 예수님께서 가신 길, 예수님께서 당하셨던 경험을 그대로 하며 따라가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주님을 따르는 데 걸림돌이 되는 모든 것을 버리는 일, 주님을 따르는 길에 닥쳐오는 고난과 시련과 역경을 견디는 일, 또한 주님을 따르기 위해, 진리를 위해 그리고 하나님께 충성하기 위해 자아를 포기하는 일과 세상의 우상들을 포기하는 일, 그리고 세상의 쾌락이나 재물이나 명예를 포기하는 일들을 포함하고 있다. 십사만 사천은 무엇이든지 주님의 뜻이면 순종하고 따라간다. 그렇게 주님을 따라가는 과정에서 그들은 고난을 견디며 극기와 인내를 배우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꼴 지우시고자 하는 대로 꼴 지워진다. 그리하여 그 모든 과정을 견디며 그들은 그들만의 경험의 노래를 배우는 것이다. 아무도 흉내 낼 수 없고, 또 부를 수도 없는 경험의 노래를….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백성들을 훈련하시기 위하여 한 계단씩 계속해서 인도하신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것을 드러내는 데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여러 가지 점들을 제시하신다. 어떤 사람들은 한 가지 점은 견디지만, 다음 것에는 넘어진다. 걸어나가는 모든 지점에서 마음은 시험을 받고 점점 더 철저하게 연단을 받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한 가지 점을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시험하시는 다른 점을 제시하시면, 그들은 뒤로 물러서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그들 마음속에 있는 어떤 우상을 직접적으로 건드리며 그 우상을 포기해야만 주님을 따라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들은 그들의 마음속에 예수님을 내쫓는 그 무엇이 있는지를 볼 기회를 얻게 된다. 그들은 무엇인가를 주님보다 더 소중히 여기고 있다. 주님의 진리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무엇이 있는 것이다. 그들의 마음은 예수님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우상을 버리고 주님의 뜻을 따르고자 모든 것을 희생하는지를 드러내기 위하여 일정 기간 동안 시험을 받게 된다. 만일 어떤 사람이 진리를 순종함으로 순결해지지 않고 이기심과 교만과 악한 정욕을 극복하지 않을 것 같으면, 그 사람은 “그들이 우상과 연합하였으니 홀로 있게 버려두라.”는 하나님의 선고를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모든 과정을 통과하고 모든 시험을 견디고 이긴 사람들은, 어떠한 대가도 감수하고 주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인을 받고 승천하기에 합당한 자들이 될 것인데, 이런 사람들이 바로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따라가는 자들이며 자신들만의 경험의 노래를 가진 사람들이다.


특징 3. 처음 익은 첫 열매

성경은 십사만 사천 인을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라고 말하고 있다. 십사만 사천은 마지막 시대에 구원 얻을 자들을 표상하는 첫 열매들이며,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이다. 첫 열매라는 단어는 대부분 그리스도인에게 그렇게 익숙하지 않을 것이다. 첫 열매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절기에 나오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함께 공부하여 보자.

“너는 매년 삼 차 내게 절기를 지킬지니라. 너는 무교병의 절기를 지키라. 내가 네게 명한 대로 아빕월의 정한 때에 칠 일 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 이는 그달에 네가 애굽에서 나왔음이라. 빈손으로 내게 보이지 말지니라.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종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 너의 모든 남자는 매년 세 번씩 주 여호와께 보일지니라. 너는 내 희생의 피를 유교병과 함께 드리지 말며 내 절기 희생의 기름을 아침까지 남겨 두지 말지니라. 너의 토지에서 처음 익은 열매의 첫 것을 가져다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드릴지니라”(출 23:14~19).

위의 성경 구절에서 발견할 수 있는 한 가지 흥미 있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있는 모든 남자라면 반드시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지키라고 명령하신 삼대 절기에는 꼭 첫 열매를 드리는 의식이 선재한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무교절과 오순절과 장막절은 보리와 밀과 나무 열매들을 추수하는 계절에 들어 있는데, 그 각각의 절기들에서 첫 열매를 드리는 일이 선재하지 않고서는 추수가 시작될 수 없다는 사실을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주는 것일까? 첫 열매가 먼저 준비되지 않고서는 추수를 시작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첫 열매는 밭에서 제일 먼저 익고 가장 좋은 극상품이어야 한다.

성경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을 추수하시기 위하여 항상 그 세대 세대마다 첫 열매들을 먼저 준비시키시고, 각 세대마다 첫 열매들이 준비된 이후에 그들을 통하여 세상을 추수하여 오신 사실을 알게 된다. 예를 들어 보면, 이스라엘은 온 세상의 추수를 대표하는 하나님을 향한 첫 열매였고(렘 2:3 참조), 예수를 믿은 유대인들은 유대 나라에서 거두어지게 될 추수의 첫 열매였으며(롬 11:14~16 참조), 초대 교회는 온 세상의 추수를 위해 드려진 첫 열매였고, 초대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들이었다(약 1:18, 롬 8:22,23 참조).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첫째 부활의 아침에 일어날 모든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이셨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 15:20).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으면 의인들의 부활도 있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또한, 초대 교회는 첫 열매였다. 그들이 먼저 성령을 받고 준비되는 일이 없었더라면 온 세상에 복음이 전파되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십사만 사천이 첫 열매가 되는 이유도 마찬가지이다. 십사만 사천, 즉 마지막 세대가 먼저 준비되어 완전히 영그는 일이 먼저 생기지 않는다면 세상의 마지막 추수가 있을 수가 없다. 제일 먼저 잘 익은 첫 열매들을 하나님께 바치는 일이 있기 전에는 마지막 추수도 시작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이 마지막 시대에도 진리를 통하여 먼저 영글고 성품이 준비되어 인침 받은 남은 자손들이 준비되기 전에는 세상 끝의 추수 사업이 시작될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시대의 첫 열매들을 기다리고 계시는데, 이 첫 열매들은 바로 십사만 사천이다. 그들은 예수의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경험을 먼저 하는 자들이다. 첫 열매 되신 예수께서 성령 충만하시어 모든 죄의 유혹에 승리하셨던 것처럼 온전히 죄를 승리하는 경험을 먼저 하는 첫 열매인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여자의 남은 무리라고 불리는 것이며, 그래서 그들의 특징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지고 있다고 성경은 말하는 것이다.


특징 4.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

입에 흠이 없는 사람은 완전한 성품을 가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말은 그 사람의 생각과 성품을 드러낸다.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눅 6:45). 성경은 십사만 사천은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라고 말하고 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흠 없는 성품을 가진 사람들이다.

성경은 “네가 언어에 조급한 사람을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바랄 것이 있느니라”(잠 29:20), “자기의 마음을 제어하지 아니하는 자는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것 같으니라”(잠 25:28)라고 말한다. 인생의 어려운 일, 괴로운 일, 불쾌한 일들 대부분은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는 데 원인이 있으며, 그 다스리지 못한 감정으로부터 나오는 말이 화근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혀를 재갈 먹이고 사납고 참지 못하는 말은 하지 않기로 굳게 결심하여야 한다. 자기의 입의 말과 혀를 제어하는 사람은 통과하도록 부름을 받은 모든 인내의 시험에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은 자신의 힘으로는 자신을 다스리지 못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분의 능력으로 생각과 말을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킬 수 있다. 참된 신앙은 정서를 의지의 지배 아래 두고 혀를 훈련시킨다.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하나님 앞에 있는 것처럼 생활하며, 우리를 상관하시는 분의 눈앞에 모든 생각이 공개되어 있다는 것을 의식하며 살아야 한다. 셋째 계명인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말씀은 모든 의미 없는 빈말과 어귀들에 관련되고 있다. 이것은 사교계와 사업계에서 유행하는 가식적인 인사, 진실을 떠난 속임, 아첨하는 말, 과장, 상업상의 속임수 등을 정죄한다. 이것은 또 자신의 본 모습이 아닌 것을 나타내고자 애쓰고, 감정을 있는 그대로 나타내는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든지 진실하다고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가르친다.

한 번의 눈짓, 한마디의 말은 물론 음성의 억양까지도 거짓의 결정적인 방조자가 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 하는 모든 것은 햇빛과 같이 투명해야 한다. 우리의 마음이 진리이신 분의 인도를 끊임없이 받지 않는 한 진리를 말할 수는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도 바울을 통하여 이렇게 명령하셨다. “너희 말은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르게 함같이 하라”(골 4:6).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 4:29). 이 성경 말씀에 비추어 보면, 농담, 실없는 소리, 상스러운 대화 등은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을 거역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성경 말씀은 우리의 말이 진실할 뿐만 아니라 순결하기를 요구한다.

그리스도를 배운 사람들은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예하지 말”(엡 5:11)아야 할 것이다. 생활에서와 마찬가지로 말에서도 단순하고 정직하고 참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남은 백성인 십사만 사천은 “그 입에 거짓말이 없”는 순결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시듯이 우리 자신을 볼 수 있다면, 철저한 회심이 없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이 마음속에 분명해질 것이다. 만일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평가하든지 그것이 다시 우리를 평가할 것이라는 사실을 마음에 둔다면, 우리는 말하는 데 더 조심하게 될 것이며, 우리의 태도는 더 부드럽고 관대해질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을 그분 자신에게 복종시키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지만, 논쟁의 힘이나 명령의 소리로 순종을 요구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선을 행하시고, 평화와 사랑에 속한 것들을 가르치고 다니셨으며, 투쟁을 불러 일으키지 않으셨고, 개인적인 상처에 분개하지 않으셨으며, 모욕과 거짓 고소와 잔인한 채찍질을 겸손하고 온유한 복종으로 대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모본이시다. 그분의 생애는 그분의 가르침의 실제적인 예증이었다. 그분의 품성은 선을 행하고 악을 극복하기 위한 살아 있는 모범이었다.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몸도 굴레 씌우리라”(약 3:2).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다. 보물이 어디에 있는지 우리의 말이 알려 주고, 우리의 행동이 나타낼 것이다. 만일, 그것이 이 세상에 있는 것이라면 세상적인 것이 될 것이고, 그것이 하늘 불멸의 유업에 있는 것이라면 말과 행동은 하늘에 속한 흠 없고 순결한 것이 될 것이다. 마지막 십사만 사천 인에 속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매일 자아에 대하여 죽고, 혀를 굴레 씌우듯이 제어하고, 말을 지배하고, 불평과 비난의 말은 한마디도 입술에서 새어 나오지 않게 해야 할 것이다. 성경은 십사만 사천을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영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