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부: 마음에 기록되는 새 언약

마음에 기록되는 새 언약


새 언약은 마음에 하나님의 법이 기록되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순종은 표면적인 행위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이 마음에 새겨짐으로써 가능하게 되는 것인데, 그렇다면, 율법이 마음에 새겨진다는 말이 무슨 뜻인까?

그것은 참된 거듭남을 통해서 마음과 생각이 변화된다는 말이다. 거듭남의 경험이란, 예수께서 우리 마음에 들어오심으로써 우리의 생각과 동기와 심령이 변화되는 것을 말한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2:5.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실제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생활 속에 임하셔서 순종에 필요한 당신의 능력을 필요에 따라서 나누어 주신다. 그리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함으로써 연약한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살게 되며, 그분의 승리가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나타나게 되고, 육체적 정욕과 이기심은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된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의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 8:3~4, KJV). 예수께서는 죄있는 육신의 모양을 취하셨지만 육신에 따라서 생애하지 않고 영을 좇아서 생애하심으로써 율법의 의를 이루셨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께서 우리 마음속에 거하실 수 있도록 받아들인다면, 그분께서는 죄와 분리된 당신의 거룩한 생애를 우리에게서도 이루실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당신을 따르는 모든 자녀들에게 주어진 새 언약이며, 누구든지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절대적이고도 유일한 방법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 사실을 가리키면서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라고 기록한 것이다(골 1:27). 다음과 같은 바울의 간증은 우리를 전율케 하기에 충분하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 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

마음에 기록된 하나님의 계명

우리는 마음에 기록된 율법이 시내산에서 돌비에 새겨진 율법과 동일한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옛 언약과 새언약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점은 율법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직무에 있는 것이다. 돌비에 새겨진 율법은 우리를 단지 정죄하며 죽음에 이르게 할 뿐인데, 왜냐하면 “육신의 생각은 ...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 하기 때문이다(롬 8:7). 변화되지 않은 육신적 마음으로는 결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수 없다. 그러나 똑같은 율법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하여 변화된 마음에 받아들여지면, 율법은 우리를 구속하고 얽매는 것이 아니라 즐거움이 된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다음과 같은 간증을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요한일서 5장 3절.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율법은 결코 무거운 것이 될 수 없다.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며, 기쁘고 즐거운 일이 된다. 그러므로 시편 기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던 것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시 40: 83.

새 언약 아래서는 단 한명의 영혼도 타락한 본성의 강한 충동을 스스로의 힘으로 싸우도록 내버려지지 않는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 5:20). 선천적 혹은 후천적인 모든 결함들을 극복하기 위한 초인간적인 능력이 하늘로부터 제공될 것이라는 약속이 새 언약 속에 포함되어 있다. 죄와 유혹에 부딪힐 때마다, 그분의 능력을 구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을 통하여 전달되는 놀라운 능력을 체험하게 된다. 성령의 변화시키는 능력을 받아들이는 자마다 마음이 변화되고 부드러워져서, 모든 편견과 강팍함과 이기심과 교만을 버릴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 영광스런 새 언약을 “더 좋은 약속”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두 언약을 상징하는 두 아들

지금까지의 연구를 토대로 갈라디아서 4장을 살펴보자. 새 언약과 옛 언약을 설명하기 위해서 바울이 사용한 비유를 혼동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먼저 바울의 비유를 읽어보자. “기록된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것은 비유이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노릇하고” 갈 4:22~25.

바울은 아브라함의 두 아들, 즉 이삭과 이스마엘이 각각 새 언약과 옛 언약을 대표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바울은, 하갈의 아들인 이스마엘은 옛 언약을 상징하고, 사라의 아들인 이삭은 새 언약을 상징한다고 하였다.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28~31절. 이것은 매우 흥미있는 이야기이다.

바울은 왜 두 여인의 두 아들이 각각 두 언약을 나타낸다고 말하였을까? 바울은 이스마엘과 이삭의 출생을 실례로 들어서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차이점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의 부인 사라를 통해서 한 아들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러나 그 당시 사라의 나이는 이미 아기를 낳을 수 있는 나이가 훨씬 넘었었다. 그래서 사라는 자신의 남편 아브라함에게 여종 하갈을 취하여 아이를 가질 것을 권유했다. 왜냐하면 그러한 방법만이 하나님의 불가능한 약속을 실현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은 하갈을 통하여 한 아들을 얻었는데, 그의 이름이 이스마엘이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이러한 태도는 자신의 노력과 아이디어에 근거를 둔 옛 언약의 상태를 잘 보여주고 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그러한 시도는 시내산에서 맺어진 옛 언약이 실패했던 것처럼 철저하게 실패하고 말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믿음으로 의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얄팍한 꾀로 얻은 이스마엘을 약속의 자녀로 인정하지 않으셨다. 그리하여 아브라함과 사라는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아이를 기다려야만 하였다. 사라의 나이가 90세쯤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생리학적으로 도저히 아기를 가질 수 없는 할머니의 태에서 생명을 창조해 내셨다. 육신적으로는 도무지 불가능하였지만,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창조의 능력을 통해서 이삭을 낳게 되었던 것이다. 이삭의 출생은 새로 태어남 즉, 거듭남의 경험에 기초한 새 언약의 관계를 잘 나타내는데, 오늘날에도 이것을 잘 이해하고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모든 그리스도인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이 태어날 수 있다.

과학적으로, 신체적으로 볼 때, 사라의 태에서 어떤 열매를 낸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죄인의 타락하고 이기적인 몸과 마음에서는 결코 순종의 열매를 만들어 낼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당신의 능력을 사용하셔서 늙은 사라의 속에서 새 생명을 창조하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당신의 능력을 사용하셔서 영혼 속에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시면, 마음이 새롭게 되고 거듭나서 순종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

이삭은 “육체를 따라” 태어나지 않고 “성령을 따라” 났다(갈 4:29). 모든 인간은 연약한 육체를 가졌으므로 율법의 의를 이룰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성령을 통하여 새롭게 다시 태어나야만 한다. 옛 언약 아래서 인간의 노력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모든 시도는 결국 이스마엘과 같은 종의 자녀를 생산할 뿐이다. 율법이 성령을 통해서 마음에 기록되어야 하며, “너희 안에 있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순종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사람들을 오히려 옛 언약 아래 있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고 있는 진리는 오히려 그 반대를 말하고 있다. 율법이 그리스도인의 마음에 기록되어 거듭나게 될 때, 비로서 그는 율법을 지키는 삶을 살 수 있다는 사실에 유의하라. 이러한 상태에서야 비로서, 그리스도인의 순종과 행함은 참 사랑의 증거가 된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 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요한복음 14장15절.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요한복음 5장3절.

육체가 아니라 마음에 받는 참 할례

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옛 언약의 표로서 할례를 주셨을까? 그렇게도 중요한 언약을 나타내는 표로서 할례는 좀 이상하다고 생각되지 않는가? 그러나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보면, 거기에는 매우 귀중한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성경 전체를 통하여 볼 때, 신체적인 할례는 육체를 의존하는 신앙과 관련 있음을 보게 된다. 바울은 말하기를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빌 3:3).

바울은 참 할례를 신체적인 할례와 구별하여 말하였다. 신체의 일부인 양피를 베어내는 것 자체는 참 할례가 아니다.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신체의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로마서 2장28~29절.

여기서 바울은 사람이 행하는 육체의 할례와 성령께서 행하시는 마음의 할례를 비교하여 설명하고 있다. 바울은 참 할례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을 말하는데, 그 할례는 인간의 노력과 공로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만 찬양을 돌려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참 할례는 참된 회개를 통하여 육체적 본성을 잘라내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거듭남은 참된 할례의 경험이라고 말할 수 있다.

참 할례에 대한 명확한 설명이 골로새 교회에게 보내는 바울의 서신에 나타나 있다.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골 2:11). 바울은 마음에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의 영적 역사를 할례라고 부르고 있다. 또한 그것은 손으로 하는 것이 아니며, 어떤 인간의 노력도 그것을 이룰 수 없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몸의 살을 베어내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의 내재하심을 통하여 죄의 육체적 본성을 제거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일어날 수 있는 성령의 역사이다.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룰 자니라” 갈라디아서 3장29절. 마음에 할례를 경험한 그리스도인들이 참 유대인이며, 참된 아브라함의 후사이다.

참된 순종을 이루는 새 언약

그리스도의 피를 근거로 한 하나님의 새로운 계획은 행함의 계획이 아니라, 믿음과 은혜를 통한 변화의 계획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제 행함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는 뜻인가? 율법이 인간을 의롭게 만들 수 없다고 해서 우리가 그것을 변경하거나 폐지시킬 수 있는가? 성경은 옛 언약 아래서와 마찬가지로 새 언약 아래서도 율법은 동일한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로마서 3장31절.

가장 큰 두가지 차이점은 단지 율법이 기록되는 장소가 돌비에서 마음으로 바뀐 것과, 우리 자신의 힘으로 율법의 요구를 성취하려고 노력하는 대신에,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에 의해서 율법의 요구가 성취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구원을 얻기 위해서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구원을 보면서 감격하여 그분의 말씀과 명령을 자원하는 마음으로 순종하게 되는 것이다. 비록 같은 모양을 가진 순종과 행위일지라도, 그것이 이루어지는 능력의 근원과 동기는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유의해야 한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새롭게 변화시켜 주셔야만, 하나님께 충성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충성과 사랑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사랑하면, 그분의 말씀과 뜻에 온 마음을 다하여 순종하는 생애를 살기로 결심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참된 새 언약의 삶은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에 대하여 마음의 중심으로부터 우러나오는 헌신과 순종을 의미한다.

영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