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부: 유아 세례는 성경적인가?

침례 받을 수 있는 자격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28:19,20)

예수께서는 온 세상에 가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그들에게 침례를 줄 것을 그의 제자들에게 명하셨다. 그러므로 침례를 받기 위하여 침례 공부를 먼저 해야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우리는 알지 못하고 확실하지 못한 일에 대하여 증언하고 결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빌립이 침례를 준 그 에티오피아 내시도 침례 받기 전에 빌립과 같이 이사야서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초림에 대한 예언을 공부하고 확신을 얻음으로 침례 받기를 결심하였다. 침례 요한도 그가 침례를 주기 전에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죄를 회개할 것을 촉구하였다.

마가복음 16:16에도 “믿고 침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하여 믿음이 먼저 있어야 하며, 침례는 그 믿음을 증거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믿음이 없이는 어떠한 죄도 용서받을 수 없고, 어떠한 개심도 그 효력을 발휘할 수 없다. 믿음 없이 단지 침례를 받는 행동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기계적, 형식적인 것이 된다는 것이다. 베드로도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사도행전 2:38)라고 하여 회개가 먼저고, 침례가 나중임을 확실히 밝혔다. 침례가 있기 전에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변화되는 경험이 있어야 한다. 배우고, 믿고, 회개하고, 개심 하는 경험이 침례 전에 있어야 한다. 침례는 옛 생활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알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기들이 침례를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아기들이 성경에 나타난 침례의 조건들에 부합될 수 없기 때문이다. 아기들이나 나이가 아주 어린아이들은 성경 진리에 대하여 아직 배울 수 없으며, 죄와 회개에 대하여 깨달을 수 없다. 그러므로 아기들에게 물을 뿌림으로 주는 유아 세례는 전혀 성경적인 의식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아기들을 하나님께 드리는 봉헌식은 거행할 수 있으나 그들을 침례 줄 수는 없다. 침례는 회개와 깨달음과 거듭남의 결과를 다른 사람들에게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의식이기 때문이다. 침례를 받았다고 회개하지 않은 사람이 하늘에 가게 되는 것이 아니며,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 침례를 받았다고 저절로 거듭난 것으로 인정받는 것도 아니다. 아무 것도 모르고 아직 선택할 수도 없는 아기들이 침례 받았다고 그들이 구원받게 되는 것이 아니다. 유아 세례는 전혀 성경적인 근거가 없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천주교회도 10-11세기까지 물 속에 잠기는 침례를 주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고대 성당의 모습을 아직 간직하고 있는 천주교 성당에 가면 여러 명을 한번에 수용할 수 있는 침례 탕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시설들은 전 가족을 모두 입교시키기 위하여 필요 되는 절차에 의하여 점점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 아기들은 물 속에 완전히 잠기는 침례가 안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점점 물의 사용 양을 줄여 결국 눈 사이 이마를 살짝 적시는 것으로 정착되었던 것이다. 이교 문화의 영향을 받아 시작한 유아 세례가 침례의 방법을 바꾸게 되었다. 이러한 이교 문화의 영향은 처음에는 천주교와 동방 정교에만 국한된 것이었지만 점차 거의 모든 신교 기독교회에서도 받아들이게 되었다.

여러 해 전에 나는 인도의 방골리아에서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아침 나는 급히 문 두드리는 소리에 잠을 깼다.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사람이 급히 나를 찾아와 같이 가 주기를 간청하였다. 그 사람은 급히 목사를 찾고 있었다. 그는 기독교인이었는데, 그 사람의 옆집에 사는 가정의 아기가 지난밤에 죽었다고 하였다. 그 집으로 가는 도중 그가 말하기를 “그 가정이 나가는 교회의 목사는 그 가족에게 일어난 일에 관하여 아무 일도 하려하지 않고, 장례예식도 거행하지 않으려 하는데 그 이유는 그 아기가 유아세례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내게 그 가정을 방문하여 위로의 말을 해 주기를 원하였다.

나는 피곤하고, 몽롱하여질 정도로 좌절에 빠져있는 그 가족을 발견하였다. 그 아기의 아버지는 여러 나무 판자들을 모아서 관을 만들고 있었고 어머니는 그 죽은 아기를 안은 채 울고 있었다. 내가 그 아버지를 도와서 관 만들기를 마쳤을 때에 그는 나에게 자기가 나가는 교회의 목사가 아기에 대하여 어떻게 말하였는지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는, 부모들이 그 아기를 위하여 유아세례를 해주지 않아서 그 아기는 이제 불붙는 지옥에 가서 벌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에 자기는 그 아기의 장례도 치루어 주지 않을 것이며, 교회 매장지에 묻는 것도 허용할 수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 아기를 관속에 넣고 나는 가족들을 모아서 내 인생에서 가장 특별한 장례 예배를 거행하였다. 위로의 말씀을 먼저 나눈 뒤에 나는 가족들에게 성경적으로 유아세례가 아기의 구원과 전혀 관계가 없음을 설명하였다. 나는 유아세례를 하지 않았다고 슬픔에 잠겨있는 이 가족을 돌보기를 거절한 그 목사가 하늘에 가기 더 힘들 것이라고 설교하였다. 나는 그 관과 가족들을 내 차에 싣고 일반묘지로 향하였다. 이방 문화가 기독교 안에 만들어 놓은 결과가 얼마나 하나님의 사랑과 공평성에 대하여 잘못된 가르침을 전하고 있는지 깨달아야 할 것이다.

영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