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부:바벨론의 포도주에 취하지 않은 교회

바벨론의 포도주에 취하지 않은 교회를 찾으세요!


요한계시록 13장에는 두 짐승으로 상징된 세력이 전 세계적으로 짐승의 표를 강요하는 장면이 나오고 계속해서 이어지는 계시록 14장에는 짐승의 표를 이기고 승리하는 마지막 시대의 참 교회 즉 십사만 사천의 모습이 나온다.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십사만 사천인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 그 입에는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니라” 계 14:3~5. 십사만 사천인, 그들은 더럽혀지지 않은 순결한 진리를 붙들고 사는 마지막 시대의 참 교회이다. 계시록 14장 1절부터 5절까지는 십사만 사천의 정체와 품성에 대한 묘사가 기록되어 있고, 6절부터는 십사만 사천 즉 마지막 시대의 참 교회가 전하는 기별이 세 명의 천사가 전하는 모습으로 나타나 있다. 6절과 7절에는 마지막 시대의 참 교회가 전하는 첫 번째 기별이 나오며, 계시록 8절에는 제4부에서 다루고자 하는 두 번째 기별이 기록되어 있다. “또 다른 천사 곧 둘째가 그 뒤를 따라 말하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모든 나라를 그 음행으로 인하여 진노의 포도주로 먹이던 자로다 하더라.” 여기에 나오는 천사는 하나님의 기별을 전하는 참된 그리스도인들 즉 참 교회를 뜻한다. 마지막 시대의 참 교회는 바벨론과 바벨론이 사람들에게 먹이는 “진노의 포도주”의 정체를 드러내는 설교와 가르침을 전파한다.

요한계시록 18장에도 마지막 시대의 참 교회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이 전파하는 곧바른 기별이 나오는데, 그들은 바벨론에 속해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그 곳으로부터 불러 내는 역할을 한다. “이 일 후에 다른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권세를 가졌는데 그의 영광으로 땅이 환하여지더라. 힘센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를 인하여 만국이 무너졌으며 또 땅의 왕들이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으며 땅의 상고들도 그 사치의 세력을 인하여 치부하였도다 하더라.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서 다른 음성이 나서 가로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계 18:1~4. 마지막 시대의 참 교회가 전하는 기별로 인하여 바벨론은 그 정체가 폭로되어 무너지게 되는데, 참 교회는 부디 바벨론의 죄에 참여하지 말하는 간곡한 호소의 말씀을 전한다. 그렇다면 바벨론은 무엇이며, 그들이 사람들에게 먹여서 취하게 만드는 음행의 포도주는 무엇인가? 이러한 말씀들의 의미를 올바로 이해해야만 참 교회를 구별할 수 있으며 또한 참 교회가 전하는 기별을 듣고 바벨론에서 나와 그 죄에 참여하지 않을 수 있다.

1) 바벨론이란 누구인가?

요한계시록 17장에는 바벨론의 모습이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그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 계 17:5. 여기서 사도 요한은 바벨론에 대한 또 다른 호칭을 “음녀”라고 부르고 있는데, 그 “음녀”는 또한 자신을 따르는 자녀들의 어미로 묘사되었다. 바벨론의 또 다른 호칭인 음녀는 무엇인가? “음녀”와 반대 의미를 가지고 있는 “정결한 처녀”(여자)의 성서적 의미를 이해하면, “음녀”가 가지고 있는 정확한 의미를 알게 된다. 성경에서 “여자” 또는 “정결한 처녀”는 하나님의 진리를 가지고 있는 참 교회를 상징한다.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라” 고후 11:2. 그러므로 “정결한 처녀”(참 교회)와 반대 의미를 가지고 있는 “음녀”는 거짓 가르침과 교리를 가지고 있는 바벨론 교회를 상징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음녀는 간음을 행하는 창녀를 말하는 단어이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오류와 간음을 범하는 교회를 음녀라고 성경은 지목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기사의 서두에서 살펴 보았던 것처럼, 요한계시록 14장 앞부분에는 음행을 범하는 바벨론 교회와 완전히 대조되는 마지막 시대의 참 교회가 나오는데 그들이 바로 십사만 사천인이다. 그들은 음녀(바벨론 교회)가 가르치는 음행한 교리들에 의하여 더럽혀지지 않았으며 순결한 진리를 끝까지 따라가는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계 14:4. 그들에 의하여 바벨론의 정체가 폭로되고 하나님의 백성이 바벨론으로부터 빠져 나오게 된다.

한 가지 알아두어야 할 사실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바벨론은 영적인 세력이라는 점이다. 예레미야서에 기록되어 있는 예언, 즉 구약시대의 고대 바벨론 제국이 무너지고 다시는 건국되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을 볼 때, 계시록에 등장하는 바벨론은 실제적인 바벨론 국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세력, 즉 타락한 교회(음녀)를 말하는 것이다. “말하기를 바벨론이 나의 재앙 내림을 인하여 이같이 침륜하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니 그들이 쇠패하리라 하라 하니라 예레미야의 말이 이에 마치니라” 렘 51:64.

바벨론의 또 다른 이름인 음녀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핍박하는 세력이라고 계시록은 말하고 있다. “또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의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 땅의 임금들도 그로 더불어 음행 하였고 땅에 거하는 자들도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 하고.. 또 내가 보매 이 여자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한지라 내가 그 여자를 보고 기이히 여기고 크게 기이히 여기니” 계 17:1,2,6. 요한계시록에는 두 종류의 여자가 등장하는데, 하나는 하나님의 참 교회를 상징하는 정결한 “여자”이고, 다른 하나는 바벨론 교회들을 상징하는 “음녀”이다. 바벨이라는 단어는 혼잡을 뜻하는 말로서 진리에다 오류를 뒤섞어 놓은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이 말은 이미 구약에 설명해 놓은 말씀들을 영적인 세력에 인용하여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의 우상 숭배의 이교 가르침에 취해 있는 상태에서 나와야 한다고 구약에 이미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대저 이스라엘과 유다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를 거역하므로 죄과가 땅에 가득하나 그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에게 버림을 입지 아니하였나니 바벨론 가운데서 도망하여 나와서 각기 생명을 구원하고 그의 죄악으로 인하여 끊침을 보지 말지어다 이는 여호와의 보수의 때니 그에게 보복하시리라 바벨론은 여호와의 수중의 온 세계로 취케 하는 금잔이라 열방이 그 포도주를 마시고 인하여 미쳤도다 바벨론이 졸지에 넘어져 파멸되니 이로 인하여 울라 그 창상을 인하여 유향을 구하라 혹 나으리로다” 렘 51:5-8.

2) 취하게 하는 음행의 포도주

바벨(babel)이란 말의 어원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혼잡함 또는 섞임”(confused)이다. 바벨론이란 단어 자체에서도 우리는 성서적 진리와 거짓 가르침이 섞여 있는 상태를 확인할 수 있다. 바벨론은 시대를 막론하고 그 특성이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가르쳐준다. “바벨론은 여호와의 수중의 온 세계로 취하게 하는 금잔이라 열방이 그 포도주를 마시고 인하여 미쳤도다” 렘 51:7. 포도주는 포도즙이 발효된 것이기 때문에 냄새가 나고 취하게 하는 성질을 가지게 있다. 우리에게 활력을 주는 포도즙이 발효되어 취하게 하는 술이 된 것처럼 하나님의 진리가 오류와 섞이면 우리는 취하게 만드는 바벨론의 포도주가 되는 것이다. 바벨론에 속한 교회들이 전하는 거짓 교리를 받아들이는 사람마다 영적으로 취하게 되어 진리와 오류를 분별하지 못하게 된다. 거짓 복음과 거짓 교리에 취한 사람마다 하나님이 구원의 역사를 진리를 분명하게 식별하지 못하여 결국에는 재앙을 받게 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마지막 시대의 참 교회는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고 강력한 호소를 하는 것이다(계 18:4).

옛날 고대 바벨론 시대에 시작된 이방 종교의 가르침들은 중세기에 1200여 년이라는 긴 기간에 걸쳐서 교황권에 서서히 흘러 들어가게 되었다. 그래서 천주교회는 초대 그리스도 교회가 가지고 있던 순결한 진리에 이방 종교의 가르침들을 섞은 혼합된 교리를 가짐으로 바벨론 즉 음녀의 어미가 되고 말았다. 중세기가 끝나갈 무렵에 종교개혁자들이 일어나 천주교회가 이방종교로부터 받아들인 많은 가르침들을 개혁하였지만, 여전히 여러 가지 오류와 이설들이 개신교회들 속에 남아 흘러 내려오고 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바벨론을 음녀와 그를 따르는 자식들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 계 17:5. 비록 개신교회가 교황권으로부터 빠져 나왔지만, 여전히 그 어미인 교황권의 취하게 하는 포도주(거짓 교리)를 전하고 있다면 그러한 개신교회는 음녀의 딸이라고 불리울 수 밖에 없다.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의 음행의 포도주가 마지막 시대까지 전하여져서 수많은 교회들을 취하게 만들 것이라는 사실을 일곱 교회의 예언(계 2장과 3장)을 통하여 분명하게 경고해 주셨다(살아남는 이들 제14호, 54호를 참조하기 바람).

그러므로 마틴 루터와 같은 위대한 종교 개혁자들이 시작한 진리의 회복 운동은 예수 그리스도와 열 두 제자들이 전했던 진리가 완전하게 회복될 때까지 계속해서 진행되어야 한다. 이 바벨론의 포도주는 사람들로 하여금 취하여 이성을 잃게 만들어서 참 하나님과 그 분의 진리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도록 비틀거리게 만드는 거짓 교리들이다. 교황권이 중세기 동안에 몰래 들여 온 취하게 하는 음행의 포도주들은 다음과 같다. (바벨론과 포도주에 대하여 보다 자세한 내용을 공부하기 원하는 분들은 살아남는 이들 제90호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1. 원죄설

A.D. 4세기경, 기독교계는 종교암흑시대를 돌입하면서 깊은 신학적 혼란 속에 빠지게 되었다. 마리아가 중보자로 등장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세주로서의 위치가 흔들렸으며, 그리스도와 사도들에 의해서 가르쳐지던 원래의 진리가 거의 사라져갔다. 수많은 종류의 교리들이 그 원래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방황하게 되었다. 교회는 여러 차례의 회의와 결의문을 통해서 정설을 정립하려고 했지만, 그러한 것들은 교회를 점점 더 그리스도의 단순한 복음으로부터 멀어지게 하였다. 이러한 신학적 혼돈 속에서 한 사람이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면서 나타났는데, 그의 이름은 어거스틴이다. 그는 당대에 가장 영향력 있는 신학자였으며, 천주교회가 가지고 있는 신학적 오류 중의 상당 부분이 그에 의해서 시작되었거나 수립되었다. 슬픈 사실은, 그의 가르침과 신학적 영향력의 그림자 특히 원죄에 대한 그의 가르침은 오늘날까지 기독교 전체에 드리워져 있어서 수많은 교회들을 어둡게 만들고 있다.
어거스틴은 성(sex)을 원죄라고 주장하였는데, 그의 그러한 주장은 자신의 죄된 생활을 합리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사생아를 낳음으로써 불법적인 아버지가 되었는데, 이것은 그의 사생활이 경건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폭로한다. 어거스틴의 생활 속에 있는 이러한 약점은 그로 하여금 자신의 죗된 생활을 합리화 시킬 수 있는 신학적 핑계를 찾도록 유도하였다. 자신의 생애에서 죄에 대한 승리의 삶을 살지 못했던 어거스틴은 원죄의 폭을 점차적으로 넓혀서 다른 문제에까지 적용하기에 이르렀다. 즉, 태어나기를 악하게 태어났기 때문에 죗된 생활을 살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그의 신학을 지배하게 되었다. 어떤 목사나 신학자도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것 이상의 설교와 신학적 이론을 발전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어거스틴의 생애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어거스틴은 육과 영 사이에 무서운 투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였다. 그는 영이 육을 이길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사랑을 보았을 때에 생기는 마음의 놀라운 변화 즉, 거듭남의 경험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마음이 새롭게 거듭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죄에 대한 승리는 너무나 자연스런 결과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죄에 대한 승리의 경험을 하지 못했던 어거스틴, 참된 거듭남의 경험을 소유하지 못했던 어거스틴은 자신의 죄된 경험에 맞추어서 자신의 신학을 발전시켜 나갔다. 사람이 태어나면서 유전적으로 물려받는 타락하고 이기적인 본성 자체를 죄로 생각하였던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죄는 결코 이길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그리하여 그는 죄란 우리가 태어날 때에 이어받는 타락한 본성 자체를 죄라고 정의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모든 인류가 아담이 범죄했을 때에 함께 범죄한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우리도 아담의 범죄의 책임을 물려 받고 태어난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우리가 범하지 아니한 조상의 죄들로 말미암아 정죄를 당한 상태에서 태어나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그것을 우리는 “원죄” 사상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죄란 우리가 태어나는 죄된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마음과 행위로 범하는 불순종을 말하며, 성령께서 양심 속에서 들려주시는 조용한 음성을 거절하면서 선택하는 부도덕한 결정을 말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온전히 마음을 바치고 성령의 능력을 힘입으면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죄를 승리하고 정복하는 순종의 생애를 살 수 있다. 성령께서 인도해 주시고 깨닫게 해주시는 의로운 선택과 의로운 결정을 통해서 말이다. (월간지, 살아남는 이들 30호에는 오늘날 기독교회에 존재하는 구원에 대한 오류들이 망라되어 있습니다. 꼭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2. 성체들-Sacraments

화체설, 미사, 고해 성사, 성지 순례 등과 같이 믿는 신자에게 구원의 공로를 준다고 가르치는 예식들과 마리아 숭배 같은 비성서적인 의식들이 중세기의 종교암흑시대 동안에 천주교회에 들어오게 되었다. (역사적 배경에 대하여 월간지 살아남는 이들 제7호, 14호, 54호에서 자세하게 다루었습니다.)

3. 우상 숭배 (성모, 성자들 숭배)

카톨릭 교회는 그들의 공식적인 서적에서 자신들이 성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석상과 그림의 숭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그들에게 드리는 경배는 그들이 대표하고 있는 대상들에게 속한 것으로 본다. 그리하여 우리는 입맞추는 석상들을 통해서, 또 그 앞에서 우리가 머리에 쓴 것을 벗고 무릎을 꿇으며 그리스도를 찬양하고 그 성상이나 성화들과 닮은 성인들을 존경한다” 카톨릭 백과사전 7권, 636페이지 “우상 숭배”항.

중세기 때에 태양신 숭배는 로마 제국에서 인기 있는 종교였었다. 그래서 천주교회와 로마제국은 태양신을 믿던 이교도인들을 수용하고 그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하여 태양신전에 세워져 있던 석상들의 분위기를 만들어 내기 위하여 기독교회 건물 속에도 석상과 그림들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태양신을 믿던 이교도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할 때에 편안하게 느끼게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교회 안에 우상을 세워놓음으로써, 로마 제국은 태양신을 믿던 이교도와 천주교 사이에 불목이 없어져서 사회가 안정되어 좋았고, 천주교회는 새로 개종하는 이교도들에게 그들이 익숙한 분위기를 제공할 수 있어서 좋았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십계명은 여전히 우상을 만들거나 섬기지 말라고 선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들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출 20:3~5. (월간지 살아남는 이들 제14호와 54호를 참조하기 바랍니다.)

4. 고해 성사 (신부 제도)

한국 카톨릭 대사전의 설명을 먼저 살펴 보자. “AD 1215년 교황 이노센트 3세에 의하여 하나님께 죄를 고백하는 대신에 신부에게 고백하는 제도가 라테란 종교 회의에서 제정되었다. 고해성사는 참회자가 양심적으로 성찰하여 지은 죄를 생각해 내고 그 죄를 깊이 뉘우치는 통회를 하며 다시는 이 같은 죄에 빠지지 않기로 결심하고 나서 고해 신부 앞에 나아가 죄의 고백을 하면 고해신부는 죄를 용서하고 보속을 정해준다. 고해신부는 찾아오는 참회 자들에게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재판으로서 또 영혼의 의사로서의 역할을 하며 죄의 용서를 베풀게 된다” 한국 카톨릭 대사전 “고해성자”, “고해신부” 참조. 성경은 죄를 중보하고 속죄하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고 선언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천주교회는 중세기에 교회의 권위를 높이기 위하여 신부에게 죄를 속할 수 있는 권리를 주었다. (월간지 살아남는 이들 제14호와 54호를 참조하기 바랍니다.)

5. 영혼 불멸설

1513년 교황 레오 10세는 클레멘트 5세에 의하여 채택된 영혼 불멸 사상을 제5차 라테란 종교회의에서 교리로 선포하였을 뿐 아니라 영혼 불멸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정죄하고 이단으로 규정하고 징벌하였다. 영혼 불멸 사상은 중세기에 천주교회에서 이교도에서 받아들인 가르침으로 영혼은 육체와 분리될 수 있기 때문에 육체는 죽을지라도, 영혼은 의식을 가지고 있는 상태로 영원히 존재한다는 교리. 죽는 순간에 즉시로 영혼이 몸으로부터 분리되어서 천국, 지옥, 또는 연옥으로 가서 영원히 존재하게 된다는 이 가르침은 오늘날 개신교회 속에도 깊이 들어와 있는데, 사단은 이 가르침을 이용하여 마지막 시대에 각종 이적을 일으키고 있다. (이 문제는 월간지 살아남는 이들 제 56호에서 특집으로 다루었습니다. 꼭 참조하기 바랍니다)

6. 연옥설

교황 그레고리 1세(AD 590~604)에 의하여 카톨릭 교회의 교리로 인정되었는데, 그리스도교 대사전은 천주교회가 중세기에 받아들인 잘못된 교리 “연옥”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연옥이란 죄의 보상을 다 치르기까지 영혼이 괴로움을 받아서 그것에 의하여 깨끗함을 받는 곳이다 … 이 세상에서 작은 죄를 범하고 그 보상을 완전히 치르지 않은 영혼이 죽은 뒤 죄를 깨끗이 씻을 때까지 머무르는 일시적인 죄의 상태 또는 죄를 받는 장소이다.” 성경 어디에도 연옥에 대한 언급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천주교회가 믿는 자신의 행함과 고행을 통하여 스스로 죄 값을 지불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행함으로 말미암는 의와 죽음과 영혼에 대한 오류로 인하여 생성된 가르침이다. (월간지 살아남는 이들 제 56호와 62호에서 특집으로 다루었습니다. 꼭 참조하기 바랍니다.)

7. 지옥설

어떤 사람도 자신의 선택으로 태어나지 않는다. 짧은 인생을 사는 동안에 자신의 어리석은 선택과 판단으로 인하여 범한 죄악 때문에 천년, 만년, 수백만 년, 수억 만년, 아니 영원한 세월동안 죽지도 못하고 펄펄 끓는 유황불 속에서 고통 받는다면, 그것을 공정한 심판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리스도인들이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으로 믿는 그분은 그토록 잔인 무도한 분인가? 구원받지 못한 우리의 어린 자녀들과, 부모들이 영원토록 불구덩이 속에서 고통 당하는 모습을 하나님은 만족스럽게 바라보실까? 예수 재림 때에 부활하여 하늘에 간 의인들이 지옥의 유황불 속에서 영원토록 고통 당하고 있을 가족들과 친구들을 생각할 때에 그들의 마음 속에 진정한 행복과 평화가 있을 수 있을까? 지옥의 영원한 형벌을 생각하는 사람들마다 “왜 하나님께서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 악인들을 차라리 죽여서 없애지 않으시고 영원토록 타는 불 속에서 고통 당하게 하실까?” 라는 의문과 두려움을 마음 속에서 지우지 못한다.

그 결과, 어떤 사람들은 지옥불에서 영원토록 고통 당하지 않기 위한 수단으로 교회에 나가기로 억지 결심을 하기도 하지만, 그러한 사람들의 신앙은 하나님께 대한 순수한 사랑과 애정으로 발전될 수 없다. 그와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무섭고 잔인한 하나님이라면, 나는 그러한 신을 믿지 않을 거야!”라는 말을 하면서 하나님과 진리를 떠나간다. (이 중요한 문제에 대하여 월간지 살아남는 이들 제62호에서 특집으로 다루었습니다. 꼭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8. 경외서들

트렌트 공의회(서기 1545~1563년) 에서 전통을 성경과 동등한 권위가 있다고 공식적으로 천명하였다. “트렌트 공의회 이전에는 성서의 어떤 책에 대해서는 그 경전의 경전성 여부에 대하여 의심하기도 하였다. 영감을 받아 기록되었다고 인정되는 책을 흔히 제 1경전이라고 하고, 한 때 경전으로서의 자격에 대하여 의심을 받은 책을 제2경전이라고 한다. 카톨릭 교회에서는 제1경전이나 제2경전이나 모두 동일한 가치를 가지는 것으로 본다 … 카톨릭에서는 그리스어 번역 성서(70인역)에 들어 있는 일곱 권의 책을 추가하여 제2경전이라고 부른다. 일곱 권의 제2경전이란 토비트서, 유딧서, 지혜서, 시라크, 바룩서, 마카베오서 상하 등이다” 한국 카톨릭 대사전 “경전”. 카톨릭 교회는 현존하는 성경 66권 외에도 7권의 책을 추가함으로써 성경이 말하는 가르침과 다른 사상들을 교회 속으로 들여오게 되었다. 그들은 경외서에도 하나님의 영감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경외서의 가르침이 성경의 가르침과 상반되는 경우에도 경외서의 가르침을 믿음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9. 거짓 기적들

죽음과 영혼 문제, 그리고 지옥에 대한 잘못된 교리들을 받아들임으로써 사단은 기독교회 안에 온갖 거짓 기적들을 일으킬 수 있는 사상적 기반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월간지 살아남는 이들 제22호-천사와 악령을 구별하는 방법-와 38호-방언 문제-에서 이 문제를 특집으로 다루었습니다. 기독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거짓 기적을 꼭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10. 일요일 성수 제도

로마 교회의 교황권은 계명 중 넷째 계명을 바꾸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명을 교회의 권위로 바꿀 수 있다고 선포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교회의 전통이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 보다 더 위에 있다는 것이다. 천주교회에서 공식적으로 발행된 문서와 서적들을 통하여 이 문제의 진실을 살펴보도록 하자.

◇ 카톨릭 미러, 1984년 9월 23일 :
“카톨릭 교회는 개신교회가 존재하기 천여 년 전에 이미 교회의 거룩한 사명에 의하여 그 날을 토요일에서 일요일로 바꿨다.”

◇ 카톨릭 신앙에 관한 교리 문답서 :
▶ 질문 : “오직 성경에 포함되어 있는 교리들을 믿는 것만으로 충분한가?”
▶ 답변 : “아니다. 우리는 전통도 믿어야 한다 … 예를 들면, 만약 우리가 전통 없이 오직 성경만을 참고했더라면 지금도 우리는 일요일 대신 유대인과 함께 토요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할 것이다.”
▶ 질문 : “하나님의 십계명 외에도 그리스도인들이 지켜야 할 다른 계명이 있는가?”
▶ 답변 : “그렇다. 교회의 계명들을 지켜야 한다 … 교회의 첫째 계명에 의하여 교회가 제정한 일요일과 성일들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것이다.”
놀랍게도 천주교회는 스스로 하나님의 계명을 바꾸었다고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 교회의 전통은 하나님의 말씀 성경 위에 군림한다고 믿고 있다. 이것은 누가 보더라도 데살로니가후서 2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진리에서 떠난 배도의 행위이다. 다니엘서 7장에는 중세기에 교황권이 “때와 법을 변개코자” 할 것이라는 예언이 기록되어 있다. 우리는 이 예언을 연구함으로써 일요일 성수제도에 대한 예언적 이해를 가질 수 있다. (보다 상세한 연구를 위하여 월간지 살아남는 이들 제16호, 52호, 54호를 꼭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11. 거짓 복음

● 예정론 : 중세기의 천주교회 신학자인 어거스틴은 의지를 자유롭게 사용해서 선과 악 중에 어떤 하나를 택할 수 있다는 성서적 사상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버지가 가졌던 이교의 영향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절대적이고 독재적인 신으로만 이해했던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인간에게 선택의 자유를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은 받아들이기에 너무나 어려운 사상이었다. 그는 성경에서 어떤 사람은 구원을 받고, 어떤 사람은 구원을 얻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러한 장면을 자신이 가지고 있던 신학적 개념에 끼워 맞추기 시작하였는데, 바로 이것이 예정론의 시작이 되었다.

태초 이전에 하나님께서 이미 어떤 사람은 구원받고 어떤 사람은 멸망 당하도록 예정해 놓으셨다는 이론인 예정론은 어거스틴의 생존하고 있을 당시에도 많은 도전을 받았는데, 어거스틴은 도전에 대한 응답으로서 누가 구원을 얻던지 간에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일 뿐이며, 연약한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심판과 공의에 대해서 질문할 자격조차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자신의 이러한 주장을 합리화시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에게는 영원한 구원을 지정해 놓으셨으며, 어떤 사람에게는 영원한 저주 가운데 있도록 지정해 두셨다는 예정론을 세울 수 밖에 없었다.

●“한 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라는 가르침 : 어거스틴이 세운 잘못된 견해는 예정론을 만들어 내는 데에서 그치지 않았다. 예정론의 오류는 논리적으로 또 다른 오류를 만들어 내었다. 즉, 예정론은 한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게 된다는 개념(once saved, always saved)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초석이 되었다. 예정론은 “절대적인 군주인 하나님께서는 누구를 구원할 것인가를 독단적으로 결정하신다. 그러므로 한 번 구원받은 사람은 결코 잃어버림을 당하지 않는다”는 논리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오류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 거짓 안전감에 도취되게 된다. 현재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고 비도덕적인 죄된 생활을 살고 있으면서도, 자신은 구원받았다는 깊은 자기 기만 속에 빠지게 만든다. 예정론은 복음을 전파하는 면에 있어서도, 설명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의문을 제기한다. 만일 모든 사람들의 구원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결정에 의해서 이미 결정되었다면, 복음을 전파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전도를 해야하는 이유와 목적이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예정론을 받아들인 사람들의 대답은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라는 궁색한 설명을 한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선언하고 있다(디모데전서 2:4).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구원에 이르게 되기를 원하시지만, 인간인 우리의 죄된 선택과 이기적인 결정으로 인하여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는 것이다.

한 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는 오류는 “예수를 믿기만 하면 죄된 생활을 살면서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이론으로 발전되어 나갔다. 한 가지 오류에 대한 믿음이 또 다른 오류를 받아들이도록 만든 것이다. 이러한 오류를 받아들인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구원과 죄에 대한 승리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문제가 되며, 경건한 그리스도인의 삶 역시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되어 버리고 만다. 그리하여 비록 그리스도인이 거듭나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 안에 있다고 할지라도 결코 죄를 이길 수는 없다고 주장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오류들은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선택의 자유를 부여하지 않았다는 이단적 견해에 근거를 둔 어거스틴의 주장으로부터 나온 망상에 불과하다. (월간지, 살아남는 이들 30호와 54호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 참 교회를 찾고 있는가? 바벨론의 포도주가 섞이지 않은 성서적 교리를 가르치는 교회를 찾는 것이 참 교회를 찾는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