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사단의 두 가지 위조 지폐

구원의 위조 지폐


사단은 어떻게 하나님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죄를 범하도록 유도할까? 그가 사용하는 가장 효과적인 전략을 살펴보기 전에, 우리는 지금 가장 뛰어난 위조범을 상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만 한다.

매우 교활한 기만자인 사단은 종종 선과 악이 혼합된 형태의 수단을 사용하여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고자 한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심지어 성경 말씀을 이용하기조차 한다.
물론 사단이 성경을 기록하지는 않았지만, 성경을 연구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악용한다. 예수께서 광야에서 시험 받으셨을 때에 그러했듯이, 사단 역시 성경 말씀을 인용한다. 사단이 그리스도인들을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법에 불순종 하도록 이끌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속임수, 즉 율법주의와 값싼 은혜에 대한 가르침을 기독교회 속에 밀어 넣고 있다.

첫번째 위조 지폐 - 율법주의

사단의 첫번째 위조 지폐는 다음과 같은 성경절을 이용하여 조작되었다.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요한계시록 22:14(영문 킹제임스 성경 번역). 사단은 이 성경절을 언급하면서“인간이 구원 받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계명에 잘 순종하기만 하면,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받게 될 것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우리 주변에서 많이 들을 수 있는 말이 아닌가? 어떤 면에 있어서 이러한 주장은 진리이다. 사실상, 계명을 지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 속에 매우 치명적인 오류가 섞여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도 구원을 얻기 위하여 스스로 계명을 지킬 만큼 선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대개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율법주의자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세워 놓으신 구원의 계획과는 매우 상반된 것이다. 자신이 한 순종과 희생의 대가로 구원을 얻으려고 애쓰는 것은 매우 위험한 사상이다. 이러한 율법주의는 모든 이방 종교 가르침의 밑바탕을 이루고 있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러한 사단의 기만적 가르침에 속임을 당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율법주의는 사람들로 하여금 구원 받기 위한 방법으로 계명에 대한 순종을 강조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하나님의 법에 대해서 더욱 많은 주의를 기울이게 되지 않습니까?”라고 질문한다. 그럴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에덴 동산에서 인류의 시조가 죄를 범한 이후에 인간의 본성에는 매우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아담은 오늘날의 우리보다 훨씬 순종하기 쉬운 상태의 본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순결하였으며, 타락하지 않았고, 죄로 기울어지는 경향이 없는 본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받은 모든 유혹은 밖으로부터 오는 유혹 뿐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물려받은 본성은 타락한 본성이며, 우리 안에 가장 큰 유혹의 샘이 있는 본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단은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서 좀 더 열심히 노력함으로써 아담과 하와처럼 죄를 피할 수 있다고 수백만의 사람들을 설득시키고 있다. 그리하여 사단의 기만적 주장을 믿는 사람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죗된 성향을 조절하기 위해서 애쓰지만 실패에 실패를 거듭할 뿐이다. 이러한 율법주의적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결국 스스로 좌절하여 다음과 같은 엉뚱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 “나도 열심히 해보았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사람이 죄를 승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할 수 없는 어떤 것을 하라고 결코 요구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순종은 구원과 전혀 관계가 없음이 틀림없다.” 결과적으로, 율법주의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하나님의 법을 담대하게 더욱 더 많이 범하는 타락한 생애를 살아가게 된다.

이러한 율법주의에 대해서 좀더 생각해보자. 만일 그대가 지금 이 순간부터 남은 일생동안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지킬 수 있다고 가정해 보자. 즉, 남은 생애 동안에 단 한번의 실수나 죄를 범하지 않는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한 생애가 그대를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물론, 아니다. 왜냐하면 그대가 이미 지은 죄가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 범한 죄로 인하여 그대에게는 이미 죽음이 선언되어 있다. 어떠한 종류의 선한 행위로도 그대가 과거에 범했던 죄의 기록을 변경시킬 수 없다. 사람을 죽인 사람이 이웃을 많이 도와주었다고 해서 그의 죄가 사라질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이다.

지금까지 오직 한 사람만이 단 하나의 죄도 범하지 않은 완전한 생애를 살았는데, 그분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이다. 그러나 우리의 기록에는 반복되는 더러움과 추함만이 있을 뿐이다. 어떤 사람도 자신이 과거에 행한 기록에 근거하여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 성경은 하나님께서는 오직 완전한 의만을 인정하시며, 의로운 행위만을 가납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 중의 어떤 사람도 그러한 생애의 기록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어쨌든지 간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거룩함을 얻지 못한다면, 그리고 그러한 의로움이 실제적으로 우리의 것이 되지 못한다면, 우리는 구원 받을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그러나 감사해야 할 사실은,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우리 모두에게 놀라운 배려가 베풀어져 있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가장 놀라운 말씀 가운데 하나가 로마서 5장 10절에서 발견된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시므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 여기서 잠깐 멈춰서 이 성경절의 전반부를 검토해보자. 왜냐하면 이 말씀은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기별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성경절은 말하기를, 우리가 죄를 범하였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과의 화해이다. 하나님과 우리를 분리시키는 죄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죄를 속하는 대속이 완성되어야 한다. 성경 말씀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만이 이와 같은 화해를 이룩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어떻게 십자가가 원수 관계를 없애고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켰는가?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 무엇을 지시고 가셨는가? 하나님의 법은 죄의 대가로 죽음을 요구하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당신의 육체로 아담과 하와의 모든 자손들이 범한 죄의 책임을 지셨던 것이다. 사실상, 예수께서는 우리 각자의 죄에 대한 책임과 그분의 죽음을 교환하셨던 것이다. 그분께서는 우리 위에 내려져 있는 정죄와 사형 명령을 취하셔서, 그것을 십자가로 지시고 가신 후, 우리에게 내려져 있던 죄의 값인 형벌을 대신 당하셨던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분께서는 우리가 과거에 범죄한 죄들에 관한 추한 기록들을 덮어주신다. 또한, 그분께서는 당신 자신이 완전한 의로운 생애를 사심으로서 우리에게 그분의 의를 전가 시켜 주시는데, 이로서 하나님과의 화목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마련된 구원과 영생을 어떻게 우리 자신의 것으로 받을 수 있는가? 우리가 그분의 생명을 받기 위해서는 자아가 죽어야 한다. 그 결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과거에 전혀 죄를 범한 적이 없는 것처럼 취급하시며, 예수께서 우리 죄의 책임을 십자가 위에서 담당하신 것으로 취급하신다.

로마서 5장 10절의 후반부를 살펴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것을 설명한 후, 바울은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생애,life)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여기서 완전한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생명 즉, 둘 모두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과거의 죄들은 예수께서 이루신 대속의 죽음에 의해서 덮어짐을 당하게 되며, 미래의 승리는 인간의 육체를 쓰시고 죄없는 삶을 사신 그분의 생애로부터 나오는 공로와 모본을 보면서 확신할 수 있다.

우리는 하늘 기록책에 이미 기록된 행위들을 변경할 수 없다. 그것들은 오직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종결되는 완전한 순종의 생애를 우리의 것으로 주장함으로써 만 지워질 수 있다. 그리고 장래의 행위들은 예수께서 우리와 같은 육체를 취하시고 사시면서 경험하셨던 승리를 나누어 받음으로써 변화될 수 있다. 이러한 진리를 사단이 공격함으로써, 그는 사람들을 죄짓게 만드는데 놀라운 성공을 거두고 있다.

두 번째 위조 지폐 - 값싼 은혜의 복음

사단은 이 문제에 대해서 매우 교묘한 공격을 감행해 왔다. 놀랄 만큼 설득력 있는 위조물을 만듦으로써 많은 사람들을 혼돈 가운데로 몰아가고 있다. 사단의 주장은 이렇다: “어떤 사람도 하나님의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 받을 수 없다. 우리는 행함에 의해서 의롭다고 인정 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통한 은혜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이다. 우리는 율법 아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은혜 아래에 있다. 계명을 지키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한 불필요한 것이다.” 사단의 이러한 논리 중에서 어떤 부분은 진리이다. 그러나 그 속에 무서운 오류와 기만이 숨어 있다는 모습을 직시해야 한다. 물론, 우리가 행함에 의해서 의롭다 하심을 받지 않는다는 말은 진리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말이 우리가 순종의 의무로부터 면제 받았다는 뜻은 아니다.

셀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사단의 교묘한 논리에 이끌려서 그의 먹이가 되고 있다. 나는 나의 복음 전도 사업 중에서 그러한 그리스도인들을 수많이 보아왔다. 불신자들 뿐만 아니라, 여러 교파와 교단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을 대상으로 전도회를 개최했을 때, 첫 며칠 동안은 하나님의 진리에 열렬하게 동의하다가도, 하나님의 법과 은혜에 관한 문제에 들어가면 즉시로 다음과 같은 반응이 나온다: “목사님, 우리에게 옛날 구약시대에 있었던 법을 강요하지 마십시요. 우리는 행함에 의해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니쟎습니까? 우리는 지금 은혜 아래에서 살고 있습니다. 계명을 지키는 것이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줄 수 없다는 사실을 아시쟎아요?” 여기서, 우리는 문제에 부닥치게 된다. 하나님의 법에 대해서 강력한 반응을 나타내는 분들 역시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율법주의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 했다. 그러나 율법주의에 대한 그들의 그러한 태도는 그들을 반대편에 도사리고 있는 또 다른 기만인 값싼 은혜 속으로 끌고 들어갔으며, 결국에는 하나님의 법이 폐지되었다는 주장을 받아들이도록 유도하였다.

믿음과 행함, 그리고 순종과 은혜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 성서적인 균형을 잃어버리기란 얼마나 쉬운 일인지! 오늘날, 두 가지 극단이 있는데, 사단은 우리 모두를 이 두 가지 극단으로 몰고 가기 위해서 온갖 이론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 믿음과 행함에 관한 균형은 믿음과 행함이라는 글자를 양쪽 끝에 새긴 노를 젓는 것과 같다. 만일 두 가지를 균형 있게 움직이지 않는다면, 배는 제자리에서 원을 그리면서 맴돌게 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의 신앙 생활이 전진하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맴돌고 있는데, 그 이유는 구원에 관한 두 가지 중요한 면들이 올바르고 균형 있게 활용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믿음과 행함은 서로가 부딪치거나 투쟁하는 것이 아니며, 서로가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 협력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된 믿음은 항상 순종이라는 선한 행위를 생산해 낸다. 성경은“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다(야고보서 2:26).

우리 모두의 가장 큰 원수인 사단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가르침을 교활하게 위조해 놓았다. 그는“의로움”위에 율법주의라는 보자기를 뒤집어 씌어 놓았으며,“믿음”은 순종을 생산해 내지 못하는 값싼 것으로 만들어 놓았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진짜“의로움”과 진짜“믿음”을 보지 못한 채, 가짜 의와 가짜 믿음을 받아들이고 있다. 수많은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더럽고 추한 것으로 둔갑 되어 있으며, 믿음이 값싼 감정에 불과한 것으로 추락되었다.
성경에서, 우리는 세가지 믿음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는 사단이 가지고 있는 믿음인데, 사도 야고보는 그러한 믿음은 행함이 전혀 없는 믿음이라고 분명하게 말하였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 하는 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 것인줄 알고자 하느냐?”야고보서 2:19~20. 야고보가 지적인 동의나 정신적인 동의에 불과한 믿음을 귀신의 믿음으로 묘사하였던 사실을 유의해야 한다. 두 번째 종류의 믿음은 행함이 있지만, 잘못된 동기와 목적을 근거로 이루어 지는 것을 말한다. 신호등이 있는 네거리에서 정지 신호를 보고 있는 운전사의 예를 통하여 두 번째 부류의 믿음을 설명할 수 있다. 그는 자동차를 정지시켰다. 그가 왜 자동차를 정지시켰는가? 다른 편에서 달려오고 있는 자동차와 충돌하여 죽는 것이 무서워서 정지하였는가? 아니면, 교통 경찰관이 자신에게 법규 위반 티켓을 줄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정지하였는가? 이러한 종류의 믿음은 하나님께 가납될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러한 행위들은 두려움에 근거해서 나오기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두려움에 근거한 신앙 생활을 하고 있다. 그들의 신앙은 마치 불을 피해 도망가는 것과 같다. 그들은 자신들이 걷고 있는 길의 끝에 불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들은 그 불 속으로 들어가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선한 사람들이 하는 선한 행위를 하기 위해서 애를 쓴다. 그러나 이러한 부류의 믿음은 율법주의가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 세 번째 믿음에 대해서 살펴보자. 세 번째 믿음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유일한 믿음인데, 그 믿음은 갈라디아 5장 6절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할례나 무 할례나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뿐이니라.”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의 율법에 일치하는 모든 순종의 행위가 사랑에 그 근거와 동기를 두고 이루어질 때에 그것은 참된 믿음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