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부: 반쪽 믿음과 반쪽 복음

반쪽 믿음과 반쪽 복음

정말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 걸까?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기독교인들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말하며 예수를 믿고 있다. 또한 그리스도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입으로 주를 시인”했기 때문에 벌써 구원을 받았으니 그 구원을 그냥 즐기기만 하면 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그리스도인들은 그저 막연하게, 믿음이 있다는 것과 또 믿는다는 것을 교회에 잘 다니고, 열심히 교회를 섬기고, 연금을 많이 내고, 선교활동을 많이 하고, 하나님의 종인 목사님을 잘 섬기고, 새벽기도회에 잘 나가는 것쯤으로만 생각한다. 그러면 구원은 따놓은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런 사람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성경절로 흔히 사용하는 성경구절은 로마서 10장 10절에 있는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는 말씀이다. 그들은 말하기를 믿고 입으로 시인했기 때문에 구원을 얻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 성경구절 뿐 아니라 성경 다른 곳에도 구원은 믿음으로만 얻게 되는 것이라는 말씀이 많이 나온다.

그런데 아주 신실한 교인들이 가끔씩 의문을 가지게 되는 때가 있다. 그것은 구원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어떤 장로나 집사나 교인이, 아니 심지어 목사님이 정말 교인(?)답지 않은 행동을 할 때, 그리고 그 사람들이 자신은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얘기할 때 그렇다. 그럴 때면 마음 속에 “정말 구원은 믿음으로만 얻고 입으로 주여 주여 하고 시인만 하면 되는 걸까? 저 사람은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는데 행동이 왜 저럴까?” 라는 의문이 떠오르고 만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는 맞다. 인류가 범죄한 이래로 인간은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에는 변함이 없다. 그런데 문제는 “믿음”에 있다. 왜 인가? 그리스도인들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믿음”과 성경에서 말하는 참된 “믿음”의 개념이 사실상 조금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영혼을 구원하는 진정한 믿음”(벧전 1:9)이란 무엇일까?

반쪽(?) 믿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요한복음 3장 16절을 읽으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 행함은 율법주의이다. 믿음만이 구원을 위한 필수 요건이다.” 그런데 정말 이러한 말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증명될 수 있는 진리인가?

믿음에 대한 오해가 많은 사람들에게 퍼져나가고 있다. 우리는 그냥 막연한 믿음이 아닌 우리 자신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는 믿음을 소유해야 한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라는 가르침 속에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세속적이고 이기적인 생활 속에서 편히 안주하게 만드는 위험이 포함되어 있다. 교회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동의하기만 하면 자신에게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는, 그리고 그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이 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 속에는 믿음과 행함이 반드시 균형지게 이루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또 다른 말씀, 곧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는 말씀도 있기 때문이다. 사실 하늘 아버지의 뜻(성경 말씀)과 그것에 대한 순종(행함)에 대한 설명없이, “믿으라, 믿으라,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라고 외치는 것은 매우 위험천만한 가르침이다. 그것은 그저 반쪽 믿음일 뿐이다.

믿음을 설명하면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성경절 가운데 하나를 함께 생각해 보자. “선생들아 내가 어찌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0,31). 많은 사람들은 이 성경절을 말하면서 “믿으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에는 또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
이 말씀은 믿음과 행함에 대한 균형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음으로써 영생을 얻지만, 그분의 말씀을 순종(행함)하지 않을 때,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된다는 말씀이 오해할 수 없게 설명되어 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도 바울의 지적을 경시해서는 안된다. “하나님 앞에서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롬 2:12,13).

사도 바울은 명확하게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구원을)”을 얻는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타락한 죄의 본성을 타고난 우리가 어떻게 율법을 지키고 행할 수 있는가? 율법은 구원을 위해 필요한 것인가?


계명과 구원

구원은 믿음으로만 얻게 되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그런데 구원이 믿음으로만 이루어진다면 율법은 필요 없는 것이 아닌가? 아니다. 율법이 없이는 구원을 논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율법의 정죄 때문에 구원의 필요성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성경 어떤 곳에서는 마치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율법을 폐하시고 우리가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 것처럼 표현하고 있는 것일까? 이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 율법의 목적
바울의 신학의 정수인 갈라디아서는 믿음으로 얻는 구원에 대해 아주 간단명료하게 설명하고 있다. 다음은 바울의 일문일답이다.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갈3:19 상단).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이유가 무엇이냐고 질문한다. 그리고 이에 대한 바울의 대답은 우리가 율법을 범하고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죄를 짓지 않았다면 율법을 주실 필요가 없었다. 다음의 성경절을 보자. “중보는 한편만 위한 자가 아니나 오직 하나님은 하나이시니라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리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갈3:20, 21). 여기서 바울은 참 흥미로운 말을 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이유는 율법을 지킴으로서 구원받으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죽이려고 율법을 주셨다는 것이다. 이것이 도대체 무슨 뜻일까?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갈3:24).

* 율법은 몽학선생
몽학 선생은 학생을 도와주는 가정 교사이다. 몽학 선생의 할 일은 학생들이 학교 선생님에게 가기까지 도와주는 것이다. 우리를 예수께로 인도하는 것이 율법이 가지고 있는 가장 중요한 기능이요 목적이다. 그러므로 율법은 우리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 깨우침을 줄 뿐이지 우리를 구원해 줄 수는 없다. 만일 우리가 율법으로 구원받을 수 있었다면 예수께서 돌아가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율법의 직분은 죽게 하는 것이다. 율법은 죄를 심히 죄되게 하기 위하여 주신 것이다.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니라” (롬7:13). 그러므로 바울은 율법을 지켜서 구원얻을 자가 아무도 없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율법주의에 빠져서 방황하다가 그 반대의 극단에 빠져들어가고 있다. 그들은 마음에 이기심과 욕심을 가득 가진 채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하다가 안되자, 결국에는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정반대의 극단적 가르침을 붙잡게 되었는데, 그것이 “무조건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가르침이다. 그들은 무조건 예수님만 믿자는 식으로 신앙 생활을 하는데, 이것이야말로 율법주의자들의 종말이다. 율법을 지켜서 구원받으려고 노력하다가 안 되니까 포기하고 그와 반대의 극단으로 뛰어들게 되는 것이다.


참된 믿음

그렇다면 우리 같은 타락한 인간이 어떻게 율법을 지킬 수 있으며, 어떻게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그리고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어떻게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가? 또한 무엇을 어떻게 믿으라는 말인가? 앞에서 잠깐 살펴보았지만 “행함“과 “순종”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반쪽 믿음이며 참된 믿음은 행함이 따르는 믿음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율법을 지킬 수 있단 말인가? 우리에게는 순종할 힘이 없는데 어떻게 행함이 따르는 참된 믿음을 가질 수 있다는 걸까? 그러면 여기서 성경이 말하고 있는 참된 믿음에 대해서 알아 보자.

믿음, 곧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께서 나의 구원을 위해 이미 이루어 놓으신 역사를 믿는다는 뜻이다. 성경에서 아브라함의이야기를 생각해 보자. 그는 나이가 많아 자식을 갖는다는 것이 도무지 불가능해 보였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밤하늘의 별을 보이시면서 앞으로 네 자손이 이렇게 많아지리라고 약속하셨다. 이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을 보면서 자신에게 자손을 주시겠다는 약속도 이루실 것을 믿었다. 왜냐하면 저 많은 별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자신과 같은 늙은이에게 자식을 생산할 수 있게 해 주시겠다는 약속을 넉넉히 지키실 수 있음을 믿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이었다.
아브라함이 믿었을 때 하나님께로부터 약속을 받았던 것처럼,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도 우리에게 약속을 주신다. 그 약속은 곧 우리에게 힘, 능력을 주시겠다는 약속이다.

* 복음의 능력
로마서 1장 16절에 보면 이런 믿음에 관하여 말씀한 아주 중요한 구절이 하나 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이 성경절에 나오는 “능력”이라는 단어는 “다이너마이트” 라는 뜻인데, 헬라어의 “두나미스”에서 유래된 말이다. 그런데 이 “능력”이라는 단어는 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묘사하기 위하여 성경에서 자주 사용하는 수식어 중의 하나이다. 바울은 복음을 소개하며 말하기를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두나미스)”이라고 했다.

만약에 바울의 말이 사실이라면, 복음을 믿고 소유한 그리스도인은 놀라운 능력으로 가득차 있어야 한다. 즉, 율법을 행할 능력을 충만히 갖춘 사람들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말로만 입으로만 믿는다고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행동과 행실까지 믿음과 완전히 일치되는 사람들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여러분은 성경이 그토록 자주 말하는 복음의 폭발적 능력에 대하여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가? 현실에 있어서 여러분은 어떠한가? 불행히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이 무기력하고 나약하며 타협적이다. 힘찬 능력 대신에 실망과 패배가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그 사람들이 정말로 복음을 믿고 있는가? 아니면 믿지 않고 있는 것인가? 왜 그들의 생애 속에 그토록 능력(Dynamite, 다이너마이트)이 결핍되어 있는가?

* 가짜 믿음
그들은 자신들이 공언하는 바를 진실로 믿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거짓 복음을 받아들임으로서 능력을 잃어버렸음이 틀림없다. 오늘날 기독계 안에 있는 가장 큰 문제는 복음을 잘못 이해하는데에서 기인한다. 슬프게도, 수백만의 사람들이 복음이 무엇이며, 진실로 믿는 것이 무엇이며, 그 복음이 그들을 위하여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해서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복음 속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너무도 자주 넘어지게 되며, 자신들의 연약한 믿음으로 해낼 수 없기 때문에 성경에 있는 진리들을 반쪽만 언급하며 “그냥 믿기만 하라”고 외치고 있다. 머리로만 믿고 입으로 시인만 한다고 다 그리스도인이 되고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가짜 믿음이다. 믿음에는 그에 맞는 행함이 그대로 따라야 한다.

성경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하나님께서 무엇을 주겠다고 약속하고 있는가?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고 받아들이는 순간,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에 임하셔서 율법의 요구를 이루는 순종의 열매를 우리의 삶 속에서 생산해 내신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았다는 사람이 믿음이 없고, 믿음을 가진 사람이 성령이 없다면 그것은 거짓말이고 어딘가 잘못된 믿음이다. 그래서 우리는 믿을 때 우리 속에 성령(그리스도의 영)이 계신지 확인해 봐야 한다. 그래서 바울은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고 로마서 8장 9절에서 말하고 있다.

* 율법의 요구를 이루는 믿음
우리가 아무리 믿는다고 공언해도 우리 속에 성령께서 오셔서 하나님의 진리와 율법을 사랑하는 마음을 생산해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참된 믿음을 가질 수 없고, 믿는다고 하면서 율법에 어긋나는 행동을 계속한다면 그것은 참된 믿음이 아니다. 시편 119편을 읽어 보라. 거기서 우리는 율법에 대한 다윗의 존중심과 사랑을 깊이 느낄 수 있다. 율법을 사랑하는 마음이야말로 성령의 역사의 결과이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 8:2-4절). 바울은 율법의 요구를 이루되 그것을 자신의 노력과 우리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율법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이 갈라디아서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요약이다. 여기에 그 공식이 나온다.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뿐이니라” (갈5:4-6). 예수님 안에서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은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율법의 요구를 온전히 이루는 삶을 살게 한다.

* 율법을 이루는 생애
성일을 지키는 것도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남의 것을 훔치지 않는 것도 그 이웃을 사랑하기 때문에가 우리의 동기가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기 때문이다 (롬 13:10). 우리에게는 이기적인 사랑은 있으나 순수한 하나님의 사랑은 없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롬 5:5). 하나님의 사랑이야말로 율법을 지키는 근본 정신인데, 성령께서 이 사랑을 우리 마음 속에 부어주셔야만 우리가 드디어 율법을 지킬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참된 믿음, 곧 율법을 이루는, 행함이 따르는 믿음을 가지려면 성령을 받야야 한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갈 5:16). 이것이 참된 믿음이며,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다. 성령을 통하여 받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는 의로운 생애를 살 수 있다. 이것이 구원이다. 이것이 구원을 가능하게 하는 참된 믿음이다.

* 참된 믿음과 행함
참된 믿음은 선한 행실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을 가져온다. 참된 믿음은 자신이 이해하고 있는 성경의 진리에 대한 동의 뿐만 아니라 순종을 동반한다. 행함을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는 없지만, 참된 믿음은 자연의 법칙에 따라서 경건한 행실과 순종을 열매로 맺는다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믿음과 행함의 함수 관계이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에 있어서, 믿음과 행함은 서로 손과 손을 마주 잡고 함께 가는 것이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생애 속에는 이 둘이 반드시 조화를 이루면서 나타나게 되어 있다. 믿음이 없는 행함이 죽은 것인 것처럼, 행함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이다. 물론, 우리는 어떠한 종류의 행함도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는 진리를 알고 있다. 어떤 사람도 자신의 선한 행위를 근거로 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얻어낼 수 없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의해서 베풀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진실한 믿음을 소유하고 있다면, 그것은 반드시 우리의 말과 행동과 생활에서 나타나게 될 것이며, 이런 참된 믿음으로만 우리는 구원을 얻는 것이다.

당신은 참된 믿음을 소유하기를 원하는가? 영혼을 구원하는 진정한 믿음을 소유하기를 원하는가? 하나님의 능력과 힘을 믿으라. 모든 것을 포기하고 헌신하며 예수님을 따라가기를 소원하는 사람은 참된 믿음을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