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부: 교회 안에 존재하는 3가지 구원론

교회 안에 존재하는 3가지 구원론


우리는 가정에서, 교회에서, 그리고 사회에서 어떤 구원론을 믿으며 살아가는가? 우리가 인정하든지, 인정하지 않든 지를 불문하고, 우리는 다음과 같은 세가지 구원론 중에 어느 하나를 믿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1) 성경이 말하는 참된 구원론(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2) 율법주의의 구원론,
3) 자유주의의 구원론(신학적인 용어로는 도덕적 패배주의라고 함)

    기독교 교회 역사를 뒤 돌아 볼 때, 하나님의 교회를 타락시켜온 두 가지 구원론에 대한 교리가 있는데, 그것은 율법주의와 자유주의(도덕적 패배주의) 이다. 율법주의는 구원 문제에 있어서 율법에 대한 순종과 선한 행위를 통하여 스스로 구원의 기초를 놓을 수 있다고 믿는 매우 위험한 교리이고, 이와 반대로 도덕적 패배주의는 율법의 권위를 무시하거나 아니면 폐지시킴으로써 그리스도인의 생애를 세속적이고 방종한 상태로 이끄는데, 이렇게 믿는 사람은 죗되고 세속적인 상태에 있으면서도 자신은 구원 받은 상태에 있다고 착각하게 되는 무서운 교리이다. 사단은 이 두 교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교회를 집요하게 공격해 왔다.

    사단은 유대교회에 철저한 율법주의를 투입시킴으로써, 메시야를 십자가에 달아 매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봉사와 죽으심을 통하여 초대 기독교회가 세워졌고 참된 그리스도 교회의 신앙이 시작되었다. 초대 기독교회의 신앙이란, 자신의 씻을 수 없는 죄를 용서 받은 막달라 마리아가 자신의 모든 것을 털어서 값비싼 향유를 사서 그리스도의 머리에 부은 신앙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감사와 사랑 때문에 자신의 생애 전체를 그분의 진리에 바치게 만든 신앙이 초대 기독교회의 신앙이다. 사랑은 그 여인을 진리에 완전히 붙잡힌바 된 의의 종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고 말씀하셨던 것이다(막 14:9).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구원에 대한 참된 가르침의 한 실례인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과 사도들이 역사의 현장에서 하나씩 사라지기 시작하면서부터 교회는 형식과 의무에 사로잡히게 되었고, 서서히 율법주의의 늪으로 빠져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하여 사단은 중세기의 종교암흑시대에 천주교회를 통하여 각종 예식과 순례 즉, 행함을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율법주의를 퍼뜨리는데 성공하였다. 이로 인하여 온 세상은 깊은 영적 암흑기를 맞이하게 되었고, 이것은 오늘날까지 전수되어 기독교회 안에 깊은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그러다가 16세기 초에 종교개혁운동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제자들이 수립해 놓은 참된 그리스도 교회의 신앙이 다시 회복되기 시작하더니 요한 웨슬레 시대에 와서는 복음과 율법의 올바른 균형과 조화가 회복됨으로써 개신교회의 전성기를 맞이 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전성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언제부터인지 정확하게 말하기는 어렵지만, 산업혁명 이후부터 과학과 산업이 발달하고 부에 대한 인간이 욕구가 극에 달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이러한 세속적 흐름과 경향이 거룩한 하나님의 교회 안에도 스며들어 왔는데, 바로 그 즈음부터 그리스도 교회 안에 “하나님의 도덕률인 십계명을 범하는 생애를 살아도 구원 받을 수 있다” 는 괴이한 가르침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세속화된 교회는 성장과 번영을 최고의 목적으로 삼게 되었고, 그러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교인들을 교회 안으로 불러들여야만 하였다. 그래서 일부 거듭나지 못한 목사들과 신학자들은 세상을 향하여 교회의 문을 낮춘다는 그럴듯한 명목 하에 십계명을 폐지시키거나 그 권위를 낮추는 작업에 들어갔는데, 일반적으로 이것을 도덕률(십계명) 폐기론 또는 자유주의(도덕적 패배주의)라고 부른다. 불행하게도, 그들의 그러한 노력은 이미 세속과 유행 그리고 돈이 주는 매력에 굴복한 교회들에게 매우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타협의 결과로 인하여, 현대 기독교회 안에는 성경이 인정하는 참된 구원론 뿐만 아니라 율법주의와 자유주의(도덕적 패배주의)가 함께 공존하게 되는 괴이한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교회 안에 구원을 약속하는 서로 다른 신앙들이 공존하면서부터, 교인들은 미로 속에서 방향을 잃고 헤매는 길 잃은 양들이 되고 말았다. “결국에는 다 마찬가지인데, 구원만 받으면 되지 까다롭게 따져서 무슨 소용입니까?” 라고 묻는 무지하고 어리석은 양들이 하나님의 교회를 가득 채워가고 있는 현실을 보면서 두려움마저 느끼게 된다.

    이번 기사에서 우리는, 모든 교파와 종파를 초월해서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구원론을 크게 세가지로 분류하여 그 차이점을 비교할 것이며, 어떤 구원론이 성경이 말하는 참 구원론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그 세가지는 첫번째로 성경이 말하는 참 구원론(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둘째로 율법주의, 셋째로는 자유주의(도덕적 패배주의)이다.

    이 세가지 구원론은 서로 어떻게 다르며, 율법주의와 자유주의(도덕적 패배주의)는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는가? 다음과 같은 5가지 성서적 구원론(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해서 율법주의자와 도덕적 패배주의자는 어떠한 이해와 신앙적 경험을 가지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1. 성도들은 하나님의 법을 순종해야 하지만, 스스로의 힘으로는 거룩한 하나님의 법에 순종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에 순종할 수 있는 오직 한가지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거듭남을 통해서 그들 속에 내재하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힘입는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는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2:20.

    율법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존중하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을 하지만, 그리스도께 자신의 마음과 생애를 전적으로 바치지 않은 상태에서 즉, 더럽고 이기적인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는 생애를 살고자 무모한 노력을 한다. 그들은 세상과 재물에 대한 결정적인 포기와 새롭게 거듭나는 마음의 영적 경험 없이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자신의 의지와 노력에 의해서 지킴으로써 의로운 생애를 살고, 그것에 대한 댓가로 구원을 얻어내려고 애쓴다. 율법주의자의 문제는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는 대신에 자신의 의지와 힘을 의지하는 것이다. 연약한 인간의 힘으로는 전혀 불가능한 목표를 세우고 달리는 고달픈 마라토너처럼, 결국 율법주의자들은 실패와 좌절의 늪으로 빠져들어 가게 되는데, 이것이 율법주의자들의 말로이다.

    한가지 확인하고 넘어가야 할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신은 자신이 행한 선한 행위에 의지하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를 의지함으로써 구원 받는다는 사실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매일의 일상생활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지 않으며, 그분의 은혜를 절실히 필요로 하지 않고, 양심 속에서 속삭이시는 성령의 세미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살아간다면, 이런 그리스도인들 역시 실제에 있어서는 자신을 의지하면서 사는 율법주의적 신앙을 갖고 있는 것이다. 자신은 율법주의를 믿지 않는다고 말하면서도 실생활에 있어서는 율법주의적 경험 속에서 방황하고 있을 수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과 심판에 압도되어 두려움 속에서 성경 말씀에 순종하려고 애쓰지만, 자아와 욕심을 버리지 않음으로써 실패와 좌절의 경험을 반복하는 그리스도인이야말로 율법주의적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율법주의적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속히 그들의 시선을 십자가로 고정시키고, 자신과 같은 인간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무한하신 속죄의 은혜를 명상함으로써, 죄와 이기심과 세속적 정신을 버려야만 한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기도함으로써, 자신의 교만과 위선을 버려야 한다. 심령의 비참함을 절실히 느끼는 사람, 다시 말해서 자신에게 선한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을 깊이 깨닫는 사람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선물을 받을 수 있으며, 율법주의의 함정으로부터 빠져 나올 수 있다.

    자유주의자들의 문제는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것이 자신의 구원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믿는 것이다. 그들은 대개 다음과 같은 말로서, 십계명에 대한 순종의 중요성을 무시해 버린다. “십자가에서 십계명이 폐하여졌다. 하나님의 은혜는 율법에 대한 의무감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켰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되며, 오직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 받는다.” 또한 그들은 말하기를 “하나님의 법은 지킬 필요가 없으며, 지킬 수도 없다” 고 한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인가? 하나님이 말씀인 성경은 율법의 유효성에 대해서 이렇게 선언하고 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이루리라.” 마태복음 5:17. 순종의 댓가로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스도인의 마음에 새겨진 사랑은 하나님의 진리에 온 마음을 다하여 순종하도록 반응한다는 사실을 자유주의자들(도덕적 패배주의자들)은 이해해야만 한다.


     2. 하나님의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에 대한 감사의 정신이 동기가 되어 하나님의 법에 순종한다고 말한다.

    율법주의자들은 자신의 구원의 기초를 스스로의 힘으로 이루고자 법을 지키려고 한다. 행함은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결과임에도 불구하고, 율법주의자들에게 있어서 행함은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종교적 의무가 된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에베소서 2:8~10.

    율법주의자들은 순종하고자 하는 그들의 동기와 목적에도 문제가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감동과, 값으로 헤아릴 수 없는 놀라운 선물로서 주어지는 구원에 대해서 깊은 감사의 정신이 원동력이 되어서 율법을 지키기 보다는, 지옥불에 대한 두려움과 자신도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이기적 목적이 동기가 되어서 율법을 지키고 선을 행하고자 노력한다. 율법주의자들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안타까운 사실은 자신의 생애를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굴복하지 않은 채 율법에 순종하고자 애쓰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고린도후서 5:14.

    자유주의자들은 법을 지키려고 애쓰는 노력 자체가 율법주의라고 착각한다. 율법주의자들의 문제점은 법을 존중하고 순종하고자 하는 노력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동기를 가지고 스스로의 힘으로 법에 순종함으로써 구원의 기초를 놓으려고 하는데 있다는 점을 주목하라.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 열정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죄의 유혹과 투쟁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좁은 문에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누가복음 13:24


     3.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모본을 따라서 죄는 미워하지만, 죄인들을 사랑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깊은 동정심을 가지고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혀서 잡혀온 여인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나도 너를 정죄치 아니하나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8:11. 그 분께서는 죄와 죄인을 분명하게 구별하여 다루셨다. 죄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상하게 하였지만, 그 분께서 가지고 계신 죄인에 대한 동정은 언제나 죄인들에게 용기와 위로를 던져 주었다. 예수께서 죄인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이유는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고, 죄를 미워하시기 때문이다.

    율법주의자들은 죄와 죄인을 함께 미워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육체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사람들을 엄하게 심판한다. 비록 자신들이 극복하지 못하는 죄를 다른 사람들이 범하였을 때일지라도 그것을 확대하고 정죄하는 성향을 종종 드러낸다.

    자유주의자들은 죄와 죄인에 대해서 동일한 관대함을 나타낸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그들은 죄를 의도적으로 회개하지 않는 죄인에 대해서도 “관대한 사랑(?)”을 나타낸다. 자신의 죄를 교회 앞에서 고백해야 할 죄인의 어깨에 팔을 두르면서 다음과 같은 사랑가를 부른다. “당신의 죄에 대해서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요.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이해하실 것입니다.” 이러한 무책임한 사랑의 표현은 죄인들의 마음에 위험한 결과를 가져다 준다. 죄인을 사랑하기 위해서 죄에 대한 경계와 경각심을 느슨하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자유주의자들의 특징이다. 예수께서는 죄인을 용서해 주시면서 동시에 “가서 다시는 죄를 범죄치 말라”는 말씀으로 그의 생애를 지도해 주셨다. 자유주의자들은 죄인의 생애를 관대하게 봐주는 반면에, 하나님의 진리에 굳게 서서 생애 하는 사람들을 오히려 율법주의자로 정죄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4. 하나님의 성도들은 날마다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승리의 생애를 살지만 스스로 의롭다는 주장을 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욥을 완전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셨다.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욥기 1:8. 그러나 욥은 자신이 스스로 완전하다고 말하는 위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내가 입으로 나를 정죄하리니 나는 순전하다마는 내가 나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내 생명을 천하게 여기는도다.” 욥기 9:20,21. 이러한 태도야말로 하나님의 성도들이 마땅히 가져야 되는 겸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도라고 할지라도, 자신이 눈을 그리스도로부터 돌려서 세상과 자신을 볼 경우에는 여지없이 쓰러지게 된다. 그러한 경우에도 성도들은 요한일서 2:1에 기록된 약속의 말씀을 의지하고 다시 일어서야 한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대언해줄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라.”

    율법주의자들에 대한 사도 바울의 다음과 같은 기록은 율법주의자들의 경험을 묘사하는데 있어서 너무나 적절하다고 볼 수 있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원치 아니하는 악은 행하는도다” 로마서 7:15,19. 계속해서 사도 바울은 극심한 좌절 속에서 외치는 율법주의자들의 절규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하였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로마서 7:24.

    불행하게도 율법주의자들은 자신의 마음과 생애를 그리스도께 온전히 바침으로써 얻게 되는 마음의 평화와 구원을 이해하지 못한다. 매우 엄격한 생애를 살려고 애씀에도 불구하고 실패를 반복하게 됨으로써, 결국에는 자신에 대해서 실망하고 좌절하게 된다. 실제로 적지 않은 숫자의 율법주의적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좌절, 비관, 자기 실망 등에 빠져서 생애를 불행하게 보내고 있는데, 이것은 너무나 안타까운 현실이다. 이러한 경험을 통과하는 율법주의자들은 엄청난 정신적 갈등을 견디지 못하고 그리스도 교회의 신앙을 버리든지, 심한 경우에는 자살하는 극한 상황에까지 도달한다. 그러나 이보다 훨씬 많은 숫자의 율법주의자들은 스스로를 합리화하기 위해서 율법이 십자가에서 폐하여졌다는 도덕률 폐기론(자유주의)을 받아들임으로써, 도덕적 패배주의자(자유주의자들)의 길을 걷기로 신앙을 전향한다.

    자유주의자들은 어떤 면에 있어서 율법주의자들의 경험과 유사하지만, 매우 다른 면을 가지고 있다. 율법을 신실하게 지키지 못하는 점에 있어서는 자유주의자나 율법주의자가 모두 같다. 그러나 자유주의자들은 율법이 십자가에 의해서 폐하여졌다는 도덕률 폐기론(자유주의)을 믿고 있거나, 아무리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지라도 결코 죄를 승리할 수 없다고 믿기 때문에 율법주의자들처럼 좌절감이나 신경쇠약 증세에 시달리지 않는다. 자신들의 부도덕하고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는 삶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들은 율법을 무시하는 죗된 삶 속에서도 기만적인 행복과 거짓 안전감을 느끼면서 거의 완전한 자기 기만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심판의 날, 하나님의 법을 무시한 생애 때문에 자신이 잃어버린바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얼마나 놀라면서 두려워 떨겠는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태복음 7:21~23. 혹시, 십계명이 폐하여졌으므로 그것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형제자매들이 있는가?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경고를 부디 소홀히 여기지 말기를 바란다.


     5. 하나님의 성도들은 그들의 마음에 완전한 평화를 소유할 수 있다.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 큰 평안이 있으니 저희에게는 장애물이 없으리이다.” 시편 119:165

    율법주의자들은 아무리 애를 쓸지라도 그들의 영혼 속에 평화를 간직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의 육적인 마음으로는 결코 거룩한 율법에 순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 정죄에 빠져 들게 되고, 그리스도의 사랑과 속죄를 충분하게 받아들이지 못함으로써 용서에 대한 확신도 소유할 수 없으며, 죄악에 강력하게 저항할 수 있는 영적 스테미너도 잃어버리게 된다.

    자유주의 자들은 거짓 안전감에 도취되어, 율법과 성경이 제시하는 원칙에 대한 순종하려고 애쓰는 일은 율법주의자들이나 하는 것으로 착각한다. 오늘날 현대 기독교회는 자유주의적 정신이 팽배해 있다. 자유주의가 교회 안에 있는 거듭나지 못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고, 그 결과 각종 유행과 장신구와 짙은 화장, 그리고 각종 세속적 행습들이 거룩한 하나님의 교회를 범람하게 되었다. 심지어는 술, 담배, 도박을 즐기는 사람까지도 집사나 장로 안수를 받게 되는 회괴한 모습을 보게 되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된다는 설교와 십일금과 각종 헌금을 기억하여 철저하게 드려야 한다는 말씀은 점점 더 교회 안에서 듣기 어렵게 되었다.

   오늘날 현대 기독교회가 겪고 있는 이러한 증세들은 바로 “자유주의”가 가져온 치명적 병폐라는 사실을 직시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숫자가 얼마나 있는가? 예수께서 천국에 대하여 설명하기 위해서 사용하신 다음과 같은 비유의 말씀은 지금도 모든 자유주의자들에게 날카로운 경종을 울려 준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 마태복음 13:44~46

    보화가 감추인 밭의 값이 얼마였는가? 농부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이었다. 우연하게 찾은 좋은 진주의 값은 얼마였는가? 장사꾼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이었다. 영생의 댓가는 자기의 옛 생애를 완전히 포기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으셨던 그 길을 걷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그 길로 들어서는 문을 좁은 문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혹시 이 글을 읽는 독자 가운데 자유주의적 신앙을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인이 있는가? 조심하라! 마지막 날에 그대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근거로 해서 그대들의 신앙과 생애를 심판 받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 형제자매들에게 보내는 호소

    복음은 완전한 것이어야 한다. 믿음과 행함 그리고 복음과 율법이 완전하게 성서적 조화를 이루고 있는 복음만이 성도들을 죄로부터 구원할 수 있으며, 죄인의 성품과 생애를 변화시켜서 하늘 도성 안으로 인도할 수 있게 만든다. 교회 안에 존재하는 율법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에게 올바른 복음을 설교함으로써, 그들이 멸망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가르쳐 주어야만 한다. 무엇보다도 그들을 율법주의와 자유주의로부터 넉넉히 구원해 내실 수 있는 구세주의 구원하시는 능력을 소개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용서해 주실 뿐만 아니라 마음을 변화시켜 주심으로써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지킬 수 있는 아름다운 생애로 이끌어 주실 수 있는 분임을 가르쳐 주도록 하자.

    율법주의자들을 향한 우리의 호소는, 자포자기하여 영생으로 인도하는 좁은 길을 포기하고 인생을 방종과 자기 만족으로 살아가는 자유주의자들의 진영으로 건너가고자 하는 유혹을 조심하라는 것이다. 그대들의 문제로부터 빠져 나오기 위한 최선의 처방은, 매일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생애를 명상함으로써 그대 자신의 무가치함을 깊이 인식하고, 모든 시험과 기만으로부터 완전한 승리를 주실 수 있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간구하라는 것이다.

    자유주의자들을 향한 우리의 호소는, 율법과 원칙에 철저하지만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생활을 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위선적인 율법주의자들을 보면서 율법을 경시하게 되는 유혹을 조심하라는 것이다. 혹시, 이 글을 읽은 가운데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자신의 생애가 나태하고 방종한 삶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경우, 그대는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에 순종하는 순결한 생애를 살고자 결심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때에 반대편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단의 덫인 율법주의에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주의하라.

    자신도 모르게 십계명이 십자가에서 폐지되었다는 거짓 교리를 받아들임으로써, 자유주의적 신앙을 가지게 되었는가? 그대들이 일단 율법을 경시하는 삶을 살기 시작하면, 그대들의 생애는 아무런 원칙과 표준이 없이 표류하게 될 것이다. 그대들의 인생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대 자신이 세워 놓은 인생관과 철학에 의해서 형성될 것이다. 이러한 그대들의 모습은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 교회 신앙을 애매모호하게 만들 것이다. 세상과 그리스도 교회의 신앙 사이에는 분명한 선이 존재해야만 한다. 그대가 자유주의를 고집하며 살아가는 한, 그대의 생활은 방종의 길을 걷게 될 것이고, 결국에는 영원한 파멸이라는 쓰디쓴 후회의 잔을 마시게 될 것이다.

    자유주의를 신봉하는 형제자매들을 위한 최선의 처방은,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연구하라는 것이다. 과연 그대들이 믿는 것처럼 하나님의 법은 폐지되었으며, 하나님의 법에 불순종하는 생애를 살아도 구원을 보장 받을 수 있는지에 관하여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게 물어 보라. 또한 날마다 십자가와 그분의 은혜에 대해서 깊이 명상하는 일을 잊지 말라. 만일 그대들이 그리스도의 은혜와 희생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깨달을 수 있다면, “율법은 지킬 필요가 없다”는 말을 결코 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오늘날 현대 기독교회 안에 존재하는 가련한 율법주의자들과 깊은 기만 속에서 만족한 생활을 살아가는 자유주의자들이 십자가를 통하여 하늘 왕국에 이르는 길을 분명하게 발견하게 되기를 기원하며 이 글을 끝맺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