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부: 사도바울이 설명하는 예정설

사도바울이 설명하는 예정설


질문1


인간의 죄의 본성은 악해서 어느 누구도 죄를 안 지을래야 안 지을 수가 없는 입장에 있기 때문에 은혜만 바라보고 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다음의 말씀을 해석해 주십시오!

사도 바울의 답변 요약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이 질문에 대한 바울의 답변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말하고 있는 경험은 그리스도인이 거듭남의 경험을 하기 전에, 머리로는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에 깊은 죄책감을 느끼고 있으면서도 아직 성령으로 중생의 경험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죄의 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갈등을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바울 자신이 바리새인으로 있으면서 하나님의 율법이 거룩하며 선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는 하지마는 계명의 요구를 순종 할 수 없는 형편에서 울부짖고 있었던 과거의 자기 자신의 옛 모습을 그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기 자신이 죄 아래 팔려 있다든지, 원하지만 선을 행하는 대신에 악을 행한다는 표현은 성령으로 거듭난 자의 간증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거듭나기 이전의 갈등에 대한 묘사를 가지고 중생한 그리스도인이 경험하는 매일의 생활처럼 생각하는 것은 이 말씀의 의도를 오해하여 잘못 적용하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의 속절없는 상태를 깨닫고 울부짖는 모습을 그리면서 성령의 능력으로 죄의 힘에서 해방되지 못한 자는 아무도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의로운 생활을 살 수가 없다는 사실을 7장에서 강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7장의 울부짖음에 대한 해답을 그 다음 장인 8장에서 명쾌하고 적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이 정죄 받지 않는다는 말씀을 하면서, 그는 성령을 좇는 자들은 죄와 사망의 힘에서 벗어나게 되며 하나님의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다시 말해서 죄의 본성을 이기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생애를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7장에서 울부짖던 사람이 성령의 힘으로 거듭나게 된 이후에 더는 죄와 죄의 본성의 힘에 눌려서 노예가 되어 끌려 다닐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승리가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바울의 말씀을 직접 읽어 보도록 합시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로마서 8:1-14.

질문2 : 바울은 예정설을 믿고 가르쳤나요?


사도 바울의 답변 요약

성경에 기록된 바울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선택력을 무시한채 누구는 구원 받을 것이고, 누구는 아무리 잘 믿으려고 해도 멸망 당하게 될 것이라는 식의 예정론을 믿거나 가르친 적이 없습니다. 바울이 말한 미리 예정하셨다는 의미는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이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신다는 하나님의 사랑의 예정의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에베소서 1:5,6. 이와 같은 말씀들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말씀한 것이지, 우리의 선택이나 자유 의지를 무시하고 강제로 구원하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미리부터 모든 것을 이미 아시고 계시기 때문에 그러한 표현을 쓴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예지 예정이지요. 사도행전 2장 23절은 하나님의 미리 아신 대로 예정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 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렇게 할 것을 미리 알고 계시다는 뜻이지요. 베드로전서 1장 2절에서도 같은 의미의 말씀을 발견하게 됩니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 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로마서 8장 29절에서 바울은 보다 분명하게 설명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만일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구원을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정해 놓으신 것이라면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 말씀하신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씀은 이치에 맞지 않는 초청이 되고 마는 것이며, 또한 불신자를 전도하는 일 조차 아무 의미도 없고 필요 없는 일들이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과 멸망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선택을 할 수 있는 능력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놀라운 선물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선택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아무도 타락하고 이기적인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기 싫다고 해서, 자신이 원하는 대로 그렇게 태어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이면 누구나 싫든 좋든 간에 이기적인 죄인의 본성을 가지고 태어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출생에 관한 결정은, 이미 오래 전에 우리의 선조들에 의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가 태어나면서부터 갖게 되는 죄의 본성에 대해서는 아무런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의 본성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만약 그리스도의 능력을 통하여 죄의 본성이 변화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영원한 죽음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우리가 영생을 잃어버릴 수 밖에 없는 죄인으로 태어나긴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본성을 바꿀 수 있는 선택권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그 어느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는, 우리 자신들의 당당한 권리입니다. 이 선택이야말로,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 하게 되는 가장 중요한 결정입니다. 이 선택은, 죄의 본성을 따라서 살다가 영원히 죽을 것인가, 아니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새로운 품성을 받아서 영원히 살 것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제공된 이 선택에 대해서 사람들은 서로 매우 다른 견해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그들에게 하셨다고 생각하는 듯 합니다; “너희들의 불행한 운명을 바꿀 수 있는 한가지 결정권을 줄게! 일단 네가 구원받기로 선택하기만 하면, 너는 결코 다시 멸망 당할 수 없단다. 너는 그 결정을 바꿀 수 없어. 네가 그리스도를 너희 구주로 받아들이게 될 때, 그것은 너의 영원한 운명에 대하여 네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선택이다. 나중에 네가 생각을 바꾸어서 너의 결정을 포기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이미 너무 늦었단다. 아무리 네가 멸망 당하기를 원하고, 네가 과거에 하였던 회개를 후회한다고 할지라도, 너는 결코 영생을 피할 수 없단다. 네가 아무리 큰 반역을 일으키고 고의로 신성을 모독하고 악한 생애를 산다고 할지라도 구원 받기로 한 너의 결정은 바뀔 수 없지. 나는 네가 예수를 너의 구주로 받아들인 후에 더는 어떤 선택도 하도록 허락할 수 없단다.”

기본적으로, 이것이 구원에 대한 영원한 보장의 교리를 주장하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의 생각입니다. 한편 또 다른 그룹의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언제든지 우리가 마음을 자의로 바꿀 수 있도록 문을 열어 놓고 계신다고 믿습니다. 그들은, 구원은 과거에 이루어진 단 한번의 번복할 수 없는 선택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신자들의 그리스도와의 지속적인 개인적 관계에 기초된 것으로 믿으며, 고의적인 불순종에 의해서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가 깨어질 때, 신자는 이제 참 신자가 아니며 구원에 대한 어떤 보장도 가질 수 없게 된다고 믿습니다.

구원은 잃어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비유를 또 하나 읽어보면, 신자들에 대한 용서는 조건적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이야기는 마태복음 18장 23-35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용서하심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어떤 왕이 자기 종의 간청에 응하여 엄청난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하루는 그 종이 자기에게 약간의 빚을 진 동료 종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가 자신에게 빚을 갚을 수 없다고 해서, 무자비하게 그를 감옥에 집어 넣었습니다. 이 사실을 왕이 듣고 나서 분노하여, 그가 전에 그 종에게 탕감해 주었던 많은 빚을 취소하고, 그 종이 빚을 다 갚을 때까지 옥에 가두어 놓았다는 이야기 입니다.

아무도 이 비유의 분명한 가르침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용서를 구하는 모든 사람들을 용서해 주시지만, 그 용서가 조건 없이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대함으로써, 이미 받은 용서를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은 에스겔 33장 13절의 말씀과 일치하는 말씀입니다. “가령 내가 의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살리라 하였다 하자 그가 그 의를 스스로 믿고 죄악을 행하면 그 모든 의로운 행위가 하나도 기억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지은 죄악 중 곧 그 중에서 죽으리라.” 이 원칙은 18절에서 다시 되풀이되고 있습니다. “만일 의인이 돌이켜 그 의에서 떠나 죄악을 지으면, 그가 그 가운데서 죽을 것이”라.

영원한 구원의 비결은 구원의 근원되시는 그리스도와 올바른 관계를 계속해서 유지하는데 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태복음 24:13)고 하셨습니다. 시험과 유혹을 받을 때,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여서 그것을 물리치지 않는 사람들은 결국 구원 받지 못할 것입니다. 끝까지 견디지 못하는 자들은 그들의 이름이 생명책에서 제거될 것입니다. 영생에 대한 무조건적인 영원한 보장을 주장하는 자들은 다음에 나오는 성경 말씀이 말하고 있는 진리를 부인하지만, 요한계시록 3장 5절은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죄에 대해서 승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기는 자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에 함축된 의미는 명확합니다. 이기지 못하는 자 -끝까지 견디지 못하는 자- 는 그들의 이름이 지워진다는 말씀입니다.

이 모든 구절들은 똑같은 진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고의적으로 범하는 죄는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관계를 단절시킵니다. 영생에 대한 보장에는 항상 조건이 따른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한일서 1:7.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의 안과 아버지의 안에 거하리라” 요한일서 2:24.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히브리서 10:38.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어 말라지나니” 요한복음 15:6.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 요한복음 8:51.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로마서11:22.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 베드로후서 1:10.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로마서8:13.

버림 받을 위험이 있음

사도 바울은 육체적 죄의 성향을 재갈먹이지 않는다면, 결국 하나님의 면전으로부터 버림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잘 깨닫고 있었습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고린도전서 9:27. 바울이 여기서 사용한 “버림”이라는 말은 꽤 흥미로운 말입니다. 그것은 헬라어로 “아도키모스”로서 다른 곳에서도 버리운다는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3장 5절은 예수그리스도께서 버리운(아도키모스) 자의 마음에 거할 수 없음을 말합니다. 디도서1장16절은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아도키모스)” 자들의 가증함과 순종치 아니함에 대하여 말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생애가 다시 죄에 사로잡히도록 허용한다면 멸망 당할 수 밖에 없음을 생각한 것입니다.

바울은 또한 중생(거듭남)을 경험한 신자들이 파멸을 당할 가능성에 대하여도 말하고 있는데, 이는 그들이 주의 만찬을 합당하게 먹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고린도전서 11:29. 이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이며, 구원을 함께 나누어 가졌던 교인들임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심판을 받아 멸망 당할 수 있습니까? 바울은 그렇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심판을 받습니까? 디모데전서 5장12절에 그 대답이 나옵니다. “처음 믿음을 저버렸으므로 심판을 받느니라.” 신자가 “처음 믿음을 저버리고” 마지막 때에 심판을 당하게 될 수 있음이 얼마나 분명합니까?

나는 영생에 대한 영원한 보장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비유로 들면서 자신들의 주장을 설명하는 것을 많이 들어왔습니다. “내 자녀는 나의 가족으로 태어났으므로, 그들은 항상 나의 자녀이다. 그들은 이미 태어난 존재이다. 나의 자녀와 나의 관계 즉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는 분리될 수 없다. 자녀가 순종하든지 불순종하든지를 불문하고, 그는 항상 나의 자녀인 것이다.”

이 논리는 중대한 것 하나를 빠뜨리고 있습니다. 문제는 자녀가 다시 태 속으로 들어갈 수는 없지만, 자녀가 병들어서 죽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의사들은 어머니들에게 여러 가지 주의 사항을 이야기 해줍니다. 아이가 죽지 않고 건강하게 잘 살아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해주어야 할 권고와 경고들이 많이 있습니다. 만약 아기가 잘 먹지 않는다면 그 아기는 죽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도,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요한복음 6:53)고 하셨습니다.

자 이제, 최종적인 구원을 위해서는 계속적인 순종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이해하셨습니까? 바울은,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 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로마서 6:16)라고 말했습니다. 사람이 더는 그리스도를 순종하지 않기로 선택한 후 사단에게 순종할 때, 그는 이제 그리스도께 속하지 않고 사단에게 속하게 됩니다. “의를 행하는 자는 ... 의롭고,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요한일서 3:7,8.

히브리서 저자는 믿음에서 떠나는 일에 대하여 특별한 경고를 거듭해서 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0장 23절은, 일단 한번 구원 받으면 그 구원이 계속되며, 아무도 그 구원을 번복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입장을 곤란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을 것에 대해서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 후에, 신자들의 모임에서 뒤로 물러가도록 유혹 받을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한 권면이 주어집니다. 이것은 분명히 뒷걸음질에 대한 경고 중의 하나입니다. 이 편지서의 저자(나는 그가 바울이라 생각합니다만)는 이 경고의 대상에 자기 자신도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그는 기록하기를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 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 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히브리서 10:26-29.

여기에 묘사된 사람들은 진리에 대한 이해와 지식을 가지고 있지만, 고의적으로 배도에 빠진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확신을 버리고 멸망에 빠질 가능성이 없다면, 하나님의 위대한 사도가 왜 이러한 분명한 경고를 남겼겠습니까?

히브리서 6장 4-6절에서, 우리는 또 다른 두려운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중생을 경험했으나 후에 하나님을 거역하고 그리스도를 부인하며 성령을 버린 자들에 대해 이보다 더 잘 묘사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이 성경절이 경고하고 있는 사람은 자신의 행동과 결정에 의해서, 하나님의 영향력 밖에 자기 자신을 두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사람은 자신의 불순종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계속해서 십자가에 못박는 한, 구원 받을 수 없습니다.


구원의 확신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이해하며 끝을 맺도록 합시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손을 붙잡고 끝까지 따라가며 놓지 않는 이상 우리의 구원은 영원히 확정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주님의 손을 뿌리치지 않는 이상 주님께서 우리의 손을 놓으실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