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부: 지구로 옮겨진 우주 전쟁

인류를 향한 사단의 적의와 전쟁의 음모


성부와 성자께서는 이미 계획하신 대로 위대하고 경이로운 사업-세상을 창조하시는 일-을 실행하셨다. 하나님의 손으로 창조된 세상은 지극히 아름다웠다.

언덕과 산과 매우 아름다운 평야는 각종 풀과 꽃과 거대하고 늠름한 나무들로 꾸며졌고 공기는 신선하고 맑았으며 땅은 훌륭한 궁전과 같았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이처럼 기이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바라보며 천사들은 매우 즐거워 하였다. 땅과 그리고 그 위에 모든 것들과 짐승들을 창조하신 후, 성부와 성자께서는 사단이 타락하기 전에 이미 계획하셨던 일, 즉 자기들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드시고자 했던 계획을 실현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에게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고 말씀하셨다 .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첫 인류 아담과 하와는 아름다운 용모와 또 균형지고 아름다운 신체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들의 본성은 하나님의 뜻에 조화되었고 그의 외모와 품성과 마음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다.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그들을 위하여 동산을 만드셔서 그들에 대한 당신의 크신 사랑을 나타내셨다. 그 거룩한 부부는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신 아름다운 동산 에덴에서 매우 행복하게 지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아름다운 창조물들에 둘러싸인 그들은 저희를 두른 사랑의 모든 표시들을 보면서 음성을 높여 하나님과 그 아들에게 사랑과 찬송과 존경의 노래를 불렀다.

사단이 하늘에서 쫓겨나게 되어 더 이상 마음대로 반역을 선동할 수 없게 되자 하나님께 대한 사단의 증오심은 인류에게 파멸을 가져올 또 다른 전쟁을 음모하는 가운데서 한 새로운 분야를 찾아내었다. 그는 에덴에 사는 경건한 부부의 행복과 평화 가운데서 자기가 영원히 잃어버린 행복의 환상을 보았다. 시기심에 동하여 그는 그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불순종하도록 선동하여 죄의 형벌을 가져다 주려고 단호히 결심하였다. 사단은 분기하여 고상한 아담과 그의 반려자 하와를 하나님의 손에서 강탈해 낼 계획을 세웠다. 만일 어떻게 하든지 그들이 하나님의 법을 불순종하도록 만들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어떤 방법을 세우셔서라도 그들을 구원하실 것이며 그렇게 되면 타락한 천사인 자기들도 다시 받아드릴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또 이 계획이 실패로 돌아간다 할지라도 사람이 한번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기만 하면 그들도 범죄로 인하여 자기들처럼 반역자의 대열에 들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저희는 아담과 하와와 함께 에덴동산을 소유하고 이 곳을 저희 본거지로 삼아 자기의 왕국을 건설할 수 있게 될 것이며 그리고 무엇보다 동산 한가운데 있는 생명나무를 소유하게 되면 그들의 힘은 거룩한 천사들과 같아져서 하나님께서라도 능히 내쫓지 못하리라고 생각하였다.

이와 같이 그는 이 무죄한 인류를 자기 자신이 당하는 것과 동일한 비참함 가운데로 빠뜨릴 뿐 아니라 하나님께 욕을 돌리게 하고 하늘에 슬픔을 일으키려고 하였다. 바야흐로 하늘에서 일어났던 전쟁이 땅에서도 일어나려고 하고 있었다.

눈에 보이게 세워진 하나님의 법

천사들은 최초의 인류인 아담과 하와에게 사단이 타락하게 된 이유와 하늘에서 일어난 전쟁의 역사, 또 그들을 멸망시키려는 사단의 음모를 미리 알려 주었으며 질서와 공평을 유지하는 유일의 방편인 하나님의 정부의 법, 십계명을 아담과 하와가 지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그들은 죄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에덴 동산에서 그들에게 계명을 주실 수가 없으셨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말라... 는 등등의 성문화된 계명은 그들이 전혀 이해할 수 없었는데 그것은 그들이 살인하는 것이 무엇인지, 거짓 증거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계명을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눈에 보이는 십계명으로 주어진 하나님의 명령, 즉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을 먹지 말라는 명령이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 그리고 거룩한 천사들과 교통을 나누며 영원히 살 것이었지만 그들이 영원한 안전을 얻을 수 있기 전에 그들의 충성은 시험을 받아야 했다. 동산 중앙의 생명나무곁에 있었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순종과 믿음과 사랑을 시험하게 될 것이었다. 다른 모든 나무의 실과는 마음대로 먹도록 허락되었지만, 이 나무의 실과를 맛보는 것은 금지되었다. 만일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여 이 과일을 먹게 되면 죽음의 고통을 당할 것이었다. 그들은 또한 사단의 유혹을 당할 것이었지만 그들이 시험에 견딘다면 마침내 그들은 사단의 세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있게 될 것이었으며 영원히 하나님의 총애를 받으며 살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시기 위해 선악과를 주셨는데 하나님을 신뢰하며 사랑함으로 그의 명령을 따라 선악과를 따먹지 않으면 진정한 사랑을 하나님께 드리게 되는 것이었다.

지구의 첫 전쟁에 나타난 사단의 기만

천사들은 하와에게 동산에서 날마다의 즐거운 노동을 하는 동안에 남편을 떠나가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주의를 주었으나 하와는 자기의 즐거운 일에 몰두하여 무의식 중에 남편의 곁을 떠나 돌아다녔다. 얼마 후 그는 천사의 경고를 잊은 채 곧 호기심과 감탄이 뒤섞인 중에 금지된 나무를 바라보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였다. 그 열매는 매우 아름다웠다. 그 여자는 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이 과실을 금하셨을까 하고 자문하였다. 바로 이 때가 유혹자의 절호의 기회였다. 자기 기만의 목적을 이루는 데 잘 맞는 변장물, 즉 뱀을 매개물로 사용하여 변장한 사단은 이 여인의 마음의 생각들을 통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양 그 여자에게,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창 3:1)라고 말을 걸었다. 하와는 자기 생각의 메아리를 듣는 것 같았으므로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리고 그것이 뱀이 말하는 것임을 알자 더욱 놀랐다. 그는 매혹적인 그 뱀이 타락한 원수의 매개물이 될 수 있으리라고는 조금도 생각지 않았다. 유혹자가 함정에 빠뜨리려고 하는 질문에 그 여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2~5).

뱀으로 변장한 사단은 이 나무의 과실을 따 먹는다면 그들은 더욱 더 높은 존재의 영역을 획득할 것이며 더욱 넓은 지식의 분야로 들어갈 것이라고 하였다. 자기 자신도 금단의 과실을 먹어 보았으며, 그 결과 말하는 능력을 얻었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그는 여호와께서 그들이 그분과 동등하게 높아지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 그들에게 그것을 금하신 것이라고 교묘하게 암시하였다. 그는 이 나무의 실과는 지혜와 능력을 주는 놀라운 특성이 있기 때문에 그분께서 그들에게 그것을 먹는 것 뿐 아니라 만지는 것까지도 금하신 것이라고 말하였다. 유혹자는 하나님의 경고는 사실 그대로 성취되지 않을 것이며, 단순히 그들을 위협하려고 의도된 것이라고 암시하였다.

첫 인류의 패배

뱀은 금단의 과실을 따서 그것을 반쯤 싫어하는 하와의 손에 놓았다. 그리고 그 여자가 과실을 만져도 아무 해가 없는 것처럼 그것을 먹어도 해가 없으리라고 단언하였다. 하와는 그것을 만졌지만 아무런 해로운 결과도 생기지 않는 것을 알자 더 대담해졌다. 여자는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그 실과를 따 먹”었다. 그것은 맛이 좋았고, 먹는 순간 활력을 느끼는 것 같았으며, 그는 그것을 먹으면서 스스로 한층 더 고상한 생존 상태에 들어가고 있다고 상상하였다. 그리고 이제 범죄한 그 여자는 자기 남편을 멸망시키는 일에 사단의 대리자가 되었다. 이상스럽고 부자연스럽게 흥분된 상태에서 금단의 과실을 두 손에 들고 그 여자는 남편이 있는 곳을 찾아서 일어났던 모든 일을 말하였다.

아담은 놀랐다. 그는 근심하였으며 그의 얼굴에는 슬픈 빛이 떠올랐다. 하와의 말을 듣자 그는 그것이 그들이 경고를 받아왔던 원수 사단임에 틀림없으며 하나님의 선고대로 그 여자는 죽을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아담은 그의 반려자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었다는 것, 그들에게 충성과 사랑의 시금석으로 부과된 단 하나의 금령(禁令)을 무시하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심중에는 무서운 투쟁이 있었다. 그는 이제 그렇게 큰 기쁨으로 교제하던 그 여자와 헤어지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 그 여자는 아담 자신의 한 부분이었다. 그는 하와와 이별한다는 생각만 해도 견딜 수 없었다. 창조주께 대한 사랑, 감사, 충성, 이 모든 것은 하와에 대한 사랑에 눌리어졌다. 그는 땅의 진토에서 자기를 활력있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창조하시고, 그를 사랑하사 그에게 반려자를 주신 무한하신 능력자께서 그 여자 대신 다른 반려자를 주실 수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는 그 여자와 운명을 같이하기로 결심하였다. 그 여자가 죽어야 한다면, 그도 그 여자와 함께 죽을 것이었다. 혹시 현명한 뱀의 말이 참일 수도 있지 않을까? 라고 그는 추론하였다. 그는 그 과실을 쥐고 급히 먹었다. 오! 아담이여, 선악의 전쟁에서 그리도 쉽게 지다니! 그리도 쉽게 타락하여 하나님께 대한 충성을 포기하다니!...

사단은 그의 성공으로 기뻐 날뛰었다. 그는 여자를 유혹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불신하게 하고, 그분의 계명을 범하게 하였으며 그는 여자를 통하여 아담을 넘어뜨렸다. 드디어 이 땅에서 일어난 선과 악의 첫 번째 전쟁에서 사단이 승리하게 된 것이다. 범죄한 후 아담은 하와가 그랬던 것처럼 처음엔 자기가 한층 더 높은 생존 상태에 들어가고 있다고 상상하였다. 그러나 곧 죄에 대한 생각이 아담과 하와의 마음을 공포심으로 가득 채웠다. 그들이 누려 왔던 사랑과 평화는 사라지고, 그 대신 그들은 죄에 대한 의식, 장래에 대한 공포, 영혼의 벌거벗음을 느꼈다. 그들의 몸을 두르고 있었던 빛의 두루마기는 이제 사라져 버렸다. 이제 막 죄의 그늘이 인류의 역사에 드리우고 사망과 파멸과 슬픔과 고통이 그들의 운명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사람의 패배와 타락의 소식은 온 하늘을 슬픔으로 가득 채웠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는 죄의 저주로 시들게 되었고, 비참하게 죽을 운명에 처한 존재들이 살게 되었다. 계명을 범한 자들이 받을 형벌을 피할 길은 없는것 같이 보였다. 천사들은 찬양의 노래를 그쳤다. 하늘 궁정 전체가 죄가 가져온 황폐 때문에 통곡하고 있었다.

에덴 동산은 어떤 곳이었을까요?

만약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다 흰색이라면 지금의 “흰색”은 무슨 색이라고 불릴까? 만약 흰색만 있는 세상이 있다면, 그곳에서는 색을 무엇이라고 생각할까? 나무도 하얗고, 풀도 하얗고, 하늘도, 꽃도, 사람도.. 모든 것이 하얀 색인 세상이 있다면 거기서는 우리가 부르는 흰색을 “흰색”이라고 부르지 않고 “자연의 색”이라고 부를 것이다. 왜냐하면 한 색깔만 존재하는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색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검은 색의 반대되는 것을 흰색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만약 검정도, 빨강도, 초록도.... 모두 없어지고 흰색만 남는다면, 더 이상 색과 색을 서로 비교할 수 없기 때문에 흰색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될지를 모르게 된다. 그래서 “색은 무엇이다”라고 하는 이해가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색깔에 대한 이해가 없는 세계 안에서도 흰색이 다른 색으로 바뀌는 것은 아니다. 흰색은 계속 흰색이지만, 단지 그것을 흰색이라고 부르지 않고 “자연 색”이라고 그 이름만 바꾸어 붙인다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악도 없었고, 슬픔도 없었고, 고민도 없었으며, 또한 이러한 것들이 무엇인지도 몰랐던 곳이 바로 에덴 동산이었다. 이곳에서는 의로운 일들을 “의”라고 부르지 아니하고 마땅하고 당연한 일로 생각하였으며, 또한 악은 그것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였다. 에덴 동산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과는 전혀 비교도 할 수 없는 완전한 세계였다. 주님께서는 “땅의 기초를 두사 영원히 요동치 않게“ 하셨으며, 인간을 사랑하셔서 죄나 슬픔을 주는 모든 악한 것들에 대하여 알도록 허락하지 않으셨다(시 104:5).

왜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에 선악과를 두셨나요?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단순히 모든 악을 그들의 세계에 존재하지 않게 하신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주어진 완전한 아름다움과 행복이, 그들 마음에 심어 놓으신 사랑을 통하여 완전하게 유지되기를 바라셨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만드셨다(창세기 2: 8-9). 그리고 아담과 하와에게, 이 땅의 모든 실과는 너희가 마음대로 먹을 수 있지만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이 나무의 과일은 먹지 말라고 하시고, 만일 먹으면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창 2:17 참고). 선악과는 단순히 어떤 규칙을 정한 법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류의 조상에게 선택권을 부여하는 법이었다. 아담과 하와에게 주어진 세계는 완전하여 악의 그림자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만약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만드시지 않았다면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사랑은 아무런 선택의 여지없이 단지 그들의 머리 속에 프로그램 된 무의식적 사랑이 되었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에덴 동산에 두셨던 것이다.

선택할 수 없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통하여 인간의 마음속에 사랑하기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 의지를 심어 주신 것이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하신 요한복음 14장 21절의 말씀은 바로 하나님께서 태초에 인간에게 심어주신 그 자유 의지가 어떻게 진정한 사랑을 선택할 수 있는지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선악과라는 법이 없었다면, 선악과를 따먹는 불법도 없었을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법에 대하여 어떤 의심과 오해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법이 있다는 말은 불법도 존재한다는 뜻이 된다. 만약 불법이 없었다면 어떻게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하게 되었을까?” 라고 질문함으로써, 마치 하나님께서 불법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식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이러한 질문에 정확한 답변을 하고 있다. 성경은 에덴 동산에 선악과라는 법은 있었으나, 이 법이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불법을 알게 만들지는 않았다고 창세기 2장 9절과 3장 22절에 설명하고 있다. 선악과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이였으며,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후에야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이 말씀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기 전에는 선과 악을 몰랐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악만 몰랐던 것이 아니라 선도 몰랐다. 왜냐하면 악한 행동이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에 당연히 “선”이라는 말이 갖고 있는 의미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선”은 매우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삶 자체였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주심으로 그들이 선과 악 중 하나를 선택하게 하신 것처럼 생각한다. 또한 어떤 법이 주어졌다면 일반적으로 이 땅의 법이 갖고 있는 특징처럼 에덴에서도 법과 불법의 의미가 동시에 존재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추측하에서, 하나님께서 법을 만듦으로 인해서 어쩔 수 없이 불법이 생겨났다는 상상을 한다. 그리고 이러한 추측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이 완전하지 않았으며, 하나님께서 죄를 창조하셨으므로 그것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결론으로 유도한다. 그러나 성경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후에야 악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불법을 가르치지 않는 법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법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불법이 존재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에덴에 만드셨던 법은 이 땅의 법과는 달랐다. 에덴동산의 법은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선악과를 먹지 말라” 하는 것이었고, 그 법을 어긴 결과는 “정녕 죽으리라”였다. 이 법을 나누어 보면 “먹지 말라”고 하는 규칙과, 선악과와, 그 규칙을 어긴 결과인 “죽음”으로 구성되어 있다. 선악과는 에덴동산에 있었던 다른 과일 나무와 다름이 없는 하나의 나무였기 때문에 선악과 자체에는 어떤 종류의 악의 의미도 없었으며, “먹지 말라”라는 단어 자체에도 전혀 악의 의미가 없었다. 왜냐하면 “먹지 말라”와 “살인하지 말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살인하지 말라”라고 법이 주어졌다면, 살인이 무엇인지도 가르쳐 주었어야 하며, 그것은 곧 악을 가르치는 것과 동일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는 “살인하지 말라”든지, “도둑질하지 말라”고 하지 않으시고 “먹지 말라”라는 언어를 사용하여 법을 만드신 것이다. 이 법은 지금의 법처럼 악한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 아니었고, 단순히 하나님을 선택하여 사랑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기 위한 법이었다.

또한 이 법을 어겼을 때 주어진다고 했던 “죽음”이 아담과 하와에게 겁을 주어서 어쩔 수 없이 지키도록 강요할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아담과 하와는 “죽음”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한번도 죽음을 본 경험이 없었다. 에덴동산의 나무가 가을 낙엽을 만들지도 않았으며, “영원한 삶”이라는 단어가 우리들에게는 이 땅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다른 세계의 언어인 것처럼, “죽음”도 아담과 하와에게는 전혀 다른 세계의 언어였다. 로마서 6:23절은 “죄의 삯은 사망이요”라고 하였는데, “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알지 못했던 아담과 하와가 어떻게 그 삯인 사망을 알 수 있었겠는가? 그들이 만약 죽음이 무엇인지 알았다면 그들은 죽음이 두려워서 그 법에 순종하였을 것이다. 또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그들에게 완전한 자유의지를 갖게 하는데 방해가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완전한 선택의 자유 속에서 자신의 의지를 사용하여 주고 받을 수 있는 사랑을 아담과 하와가 갖기를 원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 법을 만드심으로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사랑을 완전케 하신 것이었다. 이 얼마나 놀랍고 경이로운 사랑의 법인가?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흰색이라면 색의 개념이 없어진다. 더 이상 서로 반대되는 색들의 세계는 없어지고 자연 색 하나만 남게 된다. 장미는 있으나 거기에 있어야 될 것 같은 가시는 없고, 태양은 있으나 해로운 자외선은 없다. 사랑은 있으나 질투는 없고, 성공은 있으나 실패는 없다.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세계는 그 반대의 뜻이 완전히 없도록 완전하게 만드셨다. 사과의 반대말이 무엇일까? 토끼의 반대말이 무엇일까? 이러한 생각을 깊게 하다보면 실제로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들은 그 반대의 의미를 갖고 있는 사물이 없다는 것을 이 타락한 세상에서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율법은 하나님 자신을 가리킨다. 요한은 예수님에 관하여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고 말하고 있다. 말씀은 곧 예수님 자신를 의미하며, “하나님은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야고보서 1:17)므로 그 말씀인 율법도 그림자를 가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서 태초에 지으신 그 완전한 세계로 복귀하게 될 때는 지금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반대개념은 사라지게 되어, 악의 반대 의미로서의 선도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즉,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흰색이라면, “흰색”이라는 단어가 없어지는 것과 같다. 우리가 선이라고 생각하고 행하던 모든 일들에 붙었던 “선”은 없어지게 되고 “자연적인 일” 또는 “당연한 일”이라고 부르게 된다. 더 이상 우리는 선한 행동을 선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당연히 인간으로서 해야되는 자연 법칙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다고 흰색이 다른 색으로 변하는 것은 아니다. 흰색은 여전히 그 색을 갖고 있을 것이지만 그 이름만 바뀌게 되는 것이다. “선이라고 부르지 않는 선”이 존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에덴동산의 상태였으며 이 땅에서 성화를 통하여 마지막 세대가 얻어야 할 우리 마음의 최종적 목표인 것이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만드심으로 에덴에 다른 색을 만들지 않았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는 것이 하나님 사랑하기를 거절하는 것인 줄 알았지만, 그 사랑하기를 거절하는 그 행위가 갖고 있는 본질에 대한 지식이 그들의 마음에 없었으므로 그것이 에덴의 색을 변화시킬 수는 없었다. 선악과는 단지 아담과 하와가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면 가서는 안될, 어떤 다른 세계(죄의 결과의 세계)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 의지만을 주었을 뿐이다.

율법의 기능은 무엇인가요?

이제 선이라는 개념은 악이 있을 때에만 존재하게 되고, 선이 있기 때문에 악이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자유의지를 갖고 있다는 것과 불법을 아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로마서 7:7절을 통하여 이러한 상태가 어떤 상태인지를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다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바울이 죄와 율법의 다른 점을 몰라서 “율법이 죄냐”고 묻는 것이 아니다. 어린아이들까지도 율법과 죄가 다르다는 것을 안다. 여기서 묻는 물음은 그 차이점을 묻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죄를 갖고 있느냐” 또는 “율법이 죄를 만드는 것이냐”는 것이다. 바울은 “그럴 수 없느니라”고 강력히 반대한다. 율법이 죄를 포함하고 있거나, 죄를 만들지 않고, 단지 율법은 내가 죄를 지었을 때에 그것이 죄라고 가르쳐 준다고 말하고 있다. 즉 율법이 죄를 어떻게 짓는 것인지 가르쳐 준다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얼굴에 검정이 묻었는지 아닌지를 알려면 거울에 비추어 보아야 한다. 그런데 거울을 통해서 자기 얼굴에 검정이 묻었는지를 알았다고 하여 그 거울이 자기 얼굴에 검정을 묻혔다거나 어떻게 묻힐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율법의 기능은 거울처럼 우리의 잘못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우리가 잘못을 하지 않았으면 거울로서의 율법이 아무 것도 반사하지 않을 것이므로 우리에게는 악도, 선도 나타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타락하기 전의 세상에는 “살인하지 말라”와 같은 불법의 의미가 포함된 법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타락한 후에, 법의 거울은 타락한 인간의 마음에 갖고 있는 악한 본성을 비추기 위하여 “살인”이나 “간음”, “도둑질”같은 불법을 반사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죄를 짓지 않으면 이 법이 거울로서의 역할을 하지 않게 되므로, 죄가 존재하지 않았던 에덴동산에서는 율법이 오직 사랑을 완성케 하기 위한 도구로서 사용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의 율법을 갈라디아서 3장 24절에서 “몽학선생”(schoolmaster, 교장)으로 표현한 것이다.

법은 우리에게 단지 당연한 일을 행하라고 말하고 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아 나는 오늘 휴지를 버리지 않았어! 아 나는 오늘 내 아기에게 먹을 것을 주었다!, 아 나는 오늘 살인을 하지 않았어, 도둑질도 하지 않았다고! 아 나는 참 선한 일을 했다”라고 말을 한다면 이 사람은 분명히 정신병자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은 당연히 인간으로서 행해야 할 도리이기 때문이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도 당연한 것이고, 자기 자녀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도 당연한 것이다. 들에 나는 새들도 그들의 새끼를 양육한다. 그런데 만약 이 당연한 일을 행하지 않으면 율법이 나타나 불법을 행하였다고 선언한다. 거울이 존재하지 않는 물체를 반사하지 않는 것과 같이, 법은 우리가 당연히 해야할 일들을 행하지 않기 전까지는 절대로 불법을 나타내지 않는다. 법이 있지도 않는 불법을 가르치거나 반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신 법이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하나님의 속성을 얼마나 완벽히 반사하고 있으며, 이것으로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사랑을 어떻게 완전케 하셨는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처음 창조받은 인간이 어떻게 죄를 지을 수 있었을까?

우리의 첫 조상은 비록 거룩하게 창조되었지만 범죄할 가능성이 없지는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당신의 품성의 지혜와 사랑 그리고 당신의 요구 사항의 공의로움을 이해할 수 있는 존재로, 그리고 하나님께 순종하거나 거역할 수 있는 완전한 자유를 가진 자유로운 도덕적 행위자로 만드셨다. 즉 선택의 자유의지를 가진 사람으로 만드셨다. 하님께서는 인류가 창조주에 대한 사랑과 감사함에 넘쳐 자원하는 순종을 그분께 드리기를 원하셨는데 그 까닭은 선택할 수 없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