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부: 어린 예수와 십자가

어린 예수와 십자가

죄가 시작되기 이전, 멀고 먼 태고 때에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께서 만약 인간이 죄에 빠진다면 아버지가 아들을 주고, 아들은 자신을 세상을 위하여 주어서, 지구를 자아를 추구하는 이기주의의 멸망 속에서 구원하시고자 경건한 협정을 맺으셨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같이 든 모든 자들을 하늘 보좌에 앉게 할 수 있도록 계획하셨다. 그 깊이와 높이를 측량할 수 없는 십자가의 극적인 사랑의 표현을 죄짓지 않은 우주의 존재들에게 나타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도 이 일에 그의 십자가를 지고 계셨다.

우리가 어떠한 사람이든지, 만약 그리스도를 따르기 원한다면, 우리는 우리들만의 십자가를 지고 있다. 예수를 따르고자 하는 자가 되기 위하여 사제나, 수도승, 성직자, 선교사, 교회 직원, 종교 지도자가 될 필요는 없다. 죽기를 싫어하는 씨는 결국 잃어버림을 당할 것이고, 땅속에 들어가 죽는 씨는 많은 열매를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연의 법칙 안에 바로 하늘 나라가 세워진 창조적 원칙이 숨어있는 것이다.

죄가 하나님의 정부를 공격하기 위하여 첫 번째로 하는 일이 바로 십자가를 없애려 한다는 사실은 그리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선악간의 싸움에서 하나님의 전략은 십자가를 통한 길 이외에 다른 길을 선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랑은 본능적으로 십자가를 선택한다. 그 이유는 십자가만이 완전한 사랑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너무나도 사랑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의 길 이외에 다른 어떤 것도 생각하지 않으시고 그의 독생자를 주시고자 작정하셨다. 예수께서도 그 길을, 인류를 위한 신성한 사랑으로, 따르기로 하셨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는 “태초로부터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이 되신 것이다(계시록 13:8, 참고). 어느 누구의 마음속에 들어가시든지 신성한 사랑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십자가의 역사를 시작하신다. 죄에 대항하는 여러분과 나의 싸움은 창조주께서 하시는 똑같은 원칙에 근거하여서만 승리할 수 있는 것이다.


어린 예수와 십자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그의 인생을 통하여 보여주신 진리의 십자가는 깊은 아름다움을 담고 있다. 비록 완전한 인간으로서 모든 종류의 시험을 당하셨지만 그의 마음은 죄 없으셨으며, 정결하셨다. 이 사실은 놀라운 경이요 사랑의 보고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와 이세상의 모든 인간들과의 다른 점이다.

아기로서 태어나셨을 때에 예수께서는 그가 하늘에 계셨을 때를 기억하지 못하였다. 그는 이 세상의 모든 아기들처럼 태어나셔서 인간의 아기가 생각할 수 있는 그 이상의 것을 알지 못하셨다. 그는 목자들의 숭배를 깨닫지 못하였으며 박사들의 방문을 알지 못하였다. 큰 도시에 가보았던 운 좋은 아이처럼 시골 산 동네에 사는 친구들에게 하늘에서 천사들의 사령관이었던 때를 설명할 수도 없었다. 예수께서도 다른 모든 아이들처럼 우리가 배웠던 방식으로 지식을 습득하셨다. 그래서 성경은 “아이가 자라며 강건하여지고...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라고 적고있는 것이다(누가복음 2:40, 52).

예수에 관한 신비는 바로 그의 태어나심에 있다. 신이 인간이 되시고 이 땅에 태어나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자라나셔야 하시고, 죄 없이 사신 것은 큰 신비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가 태어나실 때에 그의 지식에는 어떠한 초자연적인 과거의 기억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그 모든 것들을 하늘에 두고 태어나셨다.

아이가 12살이 되어 깊은 생각을 할 수 있는 때가 이르렀다. 그의 마음속에는 장래의 일을 형성할 수 있는 어떠한 모형이 세워지게 되었다. 예수께서 유대 나라 명절이었던 유월절에 참석하였던 때는 12살 때였다. 처음으로 그는 유명한 사원들과 하얀 두루마기를 입은 제사장들이 피 흘리는 희생 재물을 제단에 올려놓는 것을 보게 되었다. 조심스럽고 경건하게 어린 예수의 마음은 희생양이 갖고 있는 상징적인 의미를 생각하였다. 제사장도, 어느 누구도 그 의미를 설명하지 않았다. 그들은 재갈물린 말처럼 묵묵히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의식을 행할 뿐이었다. 4000년 동안 하나님의 백성들은 죄를 용서받기 위하여 짐승의 피를 바쳐왔다. 그러나 아이들이 “왜 이러한 일을 행합니까?”라고 물으면 아무도 대답하는 자가 없었다. 아무도 신비로운 그 희생의식을 설명할 수 없었다. 예수는 아마 “소나 염소의 피가 정말로 죄를 없앨 수 있을까?”하고 의아해 하였을 것이다.

어린 예수는 다른 아이들처럼 친구들과 잡담과 놀이를 하지 아니하고, 심지어는 부모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깊은 생각에 빠지게 되었다. 피를 뿌리는 그 장면이 그의 마음속 깊이 어른거렸다. 바울은 예수께서 처음으로 짐승들의 피가 우리의 죄를 속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에 그 마음에 어떠한 변화가 일어났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이 땅에 오시기 전 하늘에서뿐만 아니라, 이제 인간으로서도 무릎을 꿇고 깊은 심오한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말이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히브리서 10:5-7).

“아버지여 당신에게는 이러한 짐승의 피가 필요 없나이다! 당신은 그 안에서 아무런 기쁨을 찾을 수 없으니, 그 이유는 이것들이 어떠한 인간의 죄도 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나를 만드셨고, 내가 바로 그이오니 나는 줄 수 있는 몸이 있고, 나눌 수 있는 피가 있나이다. 제가 여기 있나이다, 아버지여. 저로 하여금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게 하소서. 제가 세상 죄를 위하여 죽겠나이다. 제 피가 속죄제물이 되겠나이다. 제가 이사야가 말한 그 ‘고통받는 일꾼’이 되겠나이다. 저로 인간의 죄를 위하여 상처받게 하시고, 멍들게 하시고, 채찍질 받게 하소서. 당신의 의지를 따르리이다...”

바울은 계속해서 말하기를 예수께서 구약의 표상적인 봉사를 제하여 버리시고 자기 자신을 그 자리에 세우셨다고 하였다.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브리서 10:9,10).

영원 전에 미리 존재하였던 과거의 기억이 유월절 의식의 신비를 대신 설명할 수 없었다. 하늘에서 이 지구가 만들어지기 전에 있었던 “평화의 협정”은 “그 두 사람 사이에” 있었으며 (스가랴 6:13),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삼아 세상의 죄를 씻기로 하였지만, 예수께서는 이 세상이 있기 전에 하나님 아버지와 하신 그 계약을 기억해 내실 수 없었다. 그러나 예수의, 죄로 더럽히지 않은 정결한 마음은 유월절 의식을 통하여 본 상징들을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하였다.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의지하여 드리는 예물과 제사가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나니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히브리서 9:9).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히브리서 10:1).

“이것은 모두 비유이지...” 예수께서는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무죄하고, 순결하고, 거룩하고, 깨끗한 누군가가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죽임을 당하여 잃어버린 인류를 대속 해야 한다... 이렇게 의미 없이 계속되고 있는 무의미한 의식은 이제 극적인 마지막을 맞게 함으로 의식의 실제적인 의미가 거룩한 희생으로 나타나야 한다... “

이것은 이스라엘의 박사들과 제사장들이 수 천년간의 의식을 통하여서도 깨닫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사람들이 셀 수 없이 많이 보아왔던 상징을 단지 한번 봄으로서 12살 짜리 어린 예수는 그 의미의 중심을 이해하였다. 그의 어린 마음은 강한 의지의 힘으로 감싸지기 시작하였다. 인간의 힘으로 구원을 이루어 보려는 불쌍한 영혼들의 노력은 하나님의 은총의 자비 없이 그대로 내버려두어서는 안 되었다.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시고 그 공평이 없는 것을 기뻐 아니하시고 사람이 없음을 보시며 중재자 없음을 이상히 여기셨으므로 자기 팔로 스스로 구원을 베푸시며 자기의 의를 스스로 의지하사 의로 호심경을 삼으시며 구원을 그 머리에 써서 투구를 삼으시며...” (이사야 59:15,16)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히브리서 9:14).

이 놀라운 사랑의 사업을 보라! 그는 인간의 몸에 거하셨고, 영원전의 모든 기억을 알지 못한 채 10년 동안 어린이로서, 단지 성경말씀만 믿음으로서 사신 그리스도.. 그는 영원 전 하늘의 사령관으로서 내리신 그 결정을 인간으로서도 선택하셨다. 그는 십자가로 가시기를 선택하셨다.


구원받을 수 있는 오직 한 길

하나님의 사랑이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우리 마음에 비춰지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아드님께서 영원 전에 선택하신 그 길, 또한 어린아이로서 옛날 예루살렘 성전에서 결심하신 그 길을 선택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의 마음을 품고 있든지, 죄인의 마음을 갖고 있든지 간에 오직 십자가의 길만이 부활로 우리를 이끌 것이다.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요한복음 12:25).

두 십자가! 예수님의 십자가와 너와 나의 십자가. 그리스도를 선택한 그 강도가 졌던 그 십자가는 곧 우리들의 십자가이다. 또한 갈바리에는 세 번째 십자가가 있었다. 그러나 그 십자가에는 구원이 내릴 수 없었다. 그는 고통과 죽음 속에서도 그의 마음을 굴복하지 않았다. 반역적인 그의 정신은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 예수와 동료를 저주하였다. 우리도 그 강도처럼 십자가의 사랑을 거절하고 그를 따라서 영원한 어둠으로 떨어질 것인가?

우리의 거룩한 모본께서 보여주신 그 십자가는 우리가 우리의 십자가를 지기에 쉽게 하신다. 그의 십자가를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십자가를 발견할 수 있고 또한 기쁨으로 이것을 지게 하는 힘을 찾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