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부:핍박의 정신

핍박의 정신

핍박이란 과연 어떻게, 왜 생기게 되는 것일까? 흔히들 생각지 않고 지나치기 쉬운 질문 가운데 하나이다. 왜 믿는 사람들이, 같은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게 되는 것일까?

    인간의 역사 가운데서 믿는 자들이 같은 믿는 자들을 핍박하여 죽인 숫자가 일반적인 모든 전쟁에서 죽은 군인들의 숫자를 다 합친 것 보다 더 많다는 것이 정설이다. 또한 그러한 종교적인 핍박을 통하여 죽은 자들의 대부분이 기독교인들의 핍박으로 죽은 기독교인들이라는 것이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떻게 사랑과 용서와 인내를 가르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그렇게도 많은 사람들을 핍박하여 괴롭히거나 아니면 죽일 수가 있었을까? 이것은 분명 그들의 가르침이 그러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믿는 믿음의 철학이 잘못되었거나 잘못 인식 되어서 그러했을 것이다.

핍박은 영적인 전쟁

    우리는 인류 역사의 첫번째 핍박의 정신이 아담의 아들인 가인에게서부터 이미 시작된 사실을 볼 수가 있다. 가인은 동생 아벨이 드린 제사가 하나님께 받으신 바 되고 자기의 것은 용납되지 않자 화가 나서 그를 돌로 쳐 죽였다. 그것은 시기와 질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쉽게 설명하자면 거듭나지 않은 자가 거듭난 자를 핍박한 것이다. 육적인 자가 영적인 자를 핍박한 것이다. 하나님의 성령의 지배를 받지 않는 자가 성령의 지배를 받는 자를 죽인 것이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진리와 오류의 투쟁이라 할 수 있겠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사단 사이의 투쟁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와 사단 사이의 전쟁은 사람들 속에서 이루어 지는 것이기 때문이며 양편 다 사람들을 통해서 일하고 투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영적인 전쟁은 이 지구상에서 이루어 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늘에서는 이 전쟁이 이미 끝났고 그 투쟁이 이 지구에 내려와서 최종적인 결투를 벌이고 있기 때문에...
    핍박은 대부분 잘못 믿는 자가 잘 믿는 자를 괴롭히거나 죽이는 것을 의미한다. 국가와 교회가 하나로 연합되어 있었던 중세기 같은 시대에는 자기들의 믿는 바와 상치되거나 반대하는 자들을 이단으로 몰아서 옥에 가두거나 사형대에 올려서 죽게 하였다. 그러나 국가와 종교가 분리됨을 보장하는, 종교 자유의 헌법을 가지고 있는 나라나 지역에서는 육신적인 핍박을 가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말로나 고소나 따돌림을 통하여 상대방을 괴롭히는 일로 핍박의 방법을 대신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런데 우리가 한가지 알아야 할 것은, 이러한 핍박의 정신이 마치 기독교회의 교리인양 잘못 인식되어지고 공적인 교회의 차원에서 많은 사람들을 때리고 옥에 가두며 죽이게 되기까지의 뒷 배경에는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어거스틴의 교리

    옛날 교부 시대의 말기에 살았던 어거스틴은 중세기 교회의 교리들을 확립하는데 있어서 크게 공헌을 한 사람 가운데 하나이다. 흔히들 우리들은 그를 성 어거스틴으로 알고 있지마는 그것은 중세기 교회에서 그렇게 미화시켜 그려 놓은 그림에 불과하고 그는 결코 성자가 아니었다. 특히 그가 가르치고 확립한 두가지 가르침은 지금까지도 기독교회를 혼돈과 오류의 어려움 속에서 허덕이게 하고 있다. 그가 가르친 오류들 가운데 하나는 원죄설이고 또 다른 하나는 교회의 핍박을 가능케 한 가르침이다.
    첫째로 그의 원죄설은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성화의 과정을 오해케 만들었고 그리하여 예정설의 기초를 놓게 만들었다. 두번째로 그가 저술한 “Compell them to come in” 이라는 책을 통하여 그는 그 당시 중세 교회 교인들에게 이단(?)들은 육신적으로 고통을 가해서라도 다시 불러 들여 와야 하며 그것이 하나님께서 이단들의 영혼들을 구원하시는 방법이라고 가르쳤다. 어거스틴은 “신국”이라는 저술을 통하여 이 땅에서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신정정치를 펼쳐야 한다는 논리를 가르친 자였기에 그러한 논리가 가능했던 것이다. 그의 사상의 영향은 온 교회를 물들게 만들었고 드디어 교회는 공식적으로 이단을 박멸하기 위하여 또한 심지어는 그 이단들의 영혼을 청결케 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그들의 육신을 괴롭히는 잔인한 핍박의 방법들을 자행하기에 이른 것이다.

핍박은 사단의 정신

    핍박이란 믿지 않는 자가 믿는 자들에게 가하는 괴롭힘 보다는 믿는 자들이 같은 믿는 자들에게 자기들의 교리나 신앙을 달리 하거나 반대하기 때문에 가하는 괴롭힘을 말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듯 싶다. 하나님께서는 핍박하는 분이 아니시다. 원수일지라도 사랑하라고 하시는 분이시다. 자기와 다른 것을 믿고 있다고 하여서 그를 괴롭히거나 핍박하는 것은 사단의 정신이다. 물론 오류를 가르치기 때문에 하나님의 교회를 혼란케 하는 자들을 분리 시키는 일이나 경고하는 일은 교회가 하여야 하는 임무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오늘날 세상은 많은 경우에 어두움이 빛으로 인정되어 있고 빛이 어두움으로 인정되어 있다. 진리가 오류로 인정되어 있고 오류들이 진리로 둔갑 되어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러한 입장에서 큰 실리를 얻게 되는 자가 바로 사단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잘못된 가르침이나 비 성서적인 교리를 진리로 믿고 살고 있으면 그러한 환경은 마귀가 활동할 수 있는 최상의 무대가 되는 것이다. 그는 그러한 환경 속에서 오히려 진리를 믿고 수호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핍박하고 따돌리며 죽이게 하는 핍박을 초래할 수 있는 최상의 기회를 얻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리를 성경적으로 올바로 믿고 사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이요,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 믿고 있는 것이 과연 성경적인 것인지를 항상 질문하며 살아가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이다.

    사회의 정의를 구현하는 일이나, 나라의 도덕을 되살리기 위한 일이나, 교회를 부흥시키고 개혁시키는 일은 국가적인 강제 법령을 통하여서는 이루어질 수가 없다. 적어도 하나님께서는 어느 누구도 강제로 하늘에 데려 가시지는 않으실 것이다. 진정한 개혁은 마음 속의 개혁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왕국은 마음이 거듭나게 될 때에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요, 그래서 거듭난 자들만이 그 왕국의 일원들이 되는 것이다. 국가나 교회의 강압적인 법령을 통하여 사람들을 바꾸어 놓으려 하는 시도는 오히려 핍박을 낳게 되는 것이요, 또한 그것은 사단의 방법이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다. 그래서 성경은 어떤 믿는 자들이 그러한 육신적인 혈기를 사용하여 다른 믿는 자들을 핍박하는 일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오류를 진리로 알고 있는 자들이 오히려 진리를 가지고 있는 자들을 핍박하는 일이 앞으로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정말 큰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예수께서 마태복음 24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 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24:9-13). 예수님 자신도 거짓과 불법에 의하여 미움과 핍박을 받아 십자가에서 돌아 가셨다. 예수님을 핍박한 정신은 사단의 정신이었다. 진리대신 인간의 가르침을 높이는 정신이었다. 성령에 의하여 거듭나지 않은 자들이 성령의 은혜를 따라 사는 자들에게 행하는 일들이었다.

마지막에 다시 실현될 핍박

    이러한 핍박의 정신과 원리에 대하여 우리가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어야 하는 이유는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이 이전에 없던 엄청난 핍박의 시대를 곧 맞이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니엘서 12장 1절은 이것을 개국 이래로 없던 환난일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요한 계시록은 이 마지막 시대에는 핍박의 양상이 짐승의 표를 강요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해 주고 있다. 이것은 온 세계적인 일이 될 것이다. 인류 역사의 마지막 핍박이 될 이 짐승의 표의 핍박도, 믿지 않는 자들이 믿는 자들을 핍박하는 것이 아니다. 잘못 믿는 자들이 자기들의 믿는 것이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나머지 올바로 믿는 자들을 핍박하게 되는 것이다.
    옛날 중세기처럼, 국가와 교회가 연합하여서 성경대로 올바로 잘 믿는 자들을 괴롭히고 핍박하게 되는 것이 바로 앞으로 올 짐승의 표의 핍박이다. 다니엘서 3장과 6장의 핍박의 이야기에서 그 상징과 의미를 사용하여서 (실례:짐승의 우상, 경배하라는 명령 등등) 예언된 요한 계시록에 나타난 마지막 시대의 핍박은 다니엘 시대의 핍박의 정신과 동일할 것인데, 곧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도록 강요함으로 생기게 되는 투쟁, 그리고 그것을 반대하여 일어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사단의 핍박의 정신이 다시 불타게 되는 역사의 반복이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러한 핍박을 허락하시는 이유가 있다. 중세기의 핍박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무엇이 진리이며 누가 성경대로 믿는 자들인지를 보여 주셨다. 핍박 받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품성과 진리를 옹호하는 그들의 정신을 통하여서 그 당시와 또한 후세대에 변치 않을 진리와 오류의 차이를 보여 주셨다. 그 당시 핍박의 환난들이 있었기에 우리 후세대들이 진리와 오류 사이의 투쟁을 보게 되었고 무엇이 참인지를 알게 되는 계기가 된 것이었다. 평화적인 시대에는 오류들이 조용히 들어와 판을 치게 될 수가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투쟁을 일으키셔서 믿는 자들에게 진리를 분별하도록 역사하시는 것이다.
    마찬가지이다. 머지 않은 장래에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한번 더 핍박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진리를 높이시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무엇이 진리이며 무엇이 오류인지를 밝히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실 것이다. 그래서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며 진리를 따르든지 아니면 자기 자신을 보호하고 세상의 인기를 위하여 인간의 오류를 지지하든지 간에 중대한 결정을 하게 되는 시기가 이르러 오게 되는 것이다. 이제 앞으로는 중간은 없을 것이다. 두 무리만 존재하게 될 것이다. 어린 양에게 속한 무리와 마귀에게 속한 무리 둘만 있게 될 것이다. 그런데 슬픈 사실은 그들 모두가 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공언하는 그리스도인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어떻게 믿고 살고 있느냐 하는 것이 장래에 우리가 어느 편에 속하게 될 것이냐를 결정 짓는 디딤돌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과연 진리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들 가운데 속할 것인가? 아니면 진리를 핍박하는 자들 가운데 속할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과거에 핍박 받는 광야 교회와 함께 하셨고 그들을 보호 하시며 또한 생명의 길로 인도 하셨다.(계시록 12장 참조)

    큰 핍박의 시기가 이제 막 저 모퉁이를 돌아 우리를 향하여 달려 오려고 준비하고 있다. 나는 핍박 받는 자인가? 아니면 핍박 하는 자인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성품이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여, 진리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일에, 그리고 진리를 드높이고 고수하는 일에 용감한 백성들이 되고, 모든 환난에서 우리를 능히 건지시고 힘주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므로 끝내 아름다운 상급을 받는 독자들이 되기를 기도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