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록 2:기독교에 교파가 많은 이유-2

기독교에 교파가 많은 이유  2


요한계시록 6장에 나타나 있는 교회의 타락

우리들에게 익숙한 요한복음 17장의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에는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21절)라는 말씀이 있다.

교회에 그러한 연합이 이루어 졌는가? 오히려 수백 개의 다른 주장들과 교파로 갈라져 버리게 되었다. 같은 성경을 가지고 왜 이렇게 교파가 많이 생겼을까? 제1부에서 언급한 이유 다음에 그 두 번째 이유로 우리는 교회 조직의 타락을 들 수가 있다. 이 사실은 이미 요한 계시록에 예언 되어 있어서 지난 1900여 년간 그리스도인들을 줄 곳 경고하여 왔다. 그 예언이란 다름아닌 계시록 6장에 나타나는 네 명의 말탄자에 대한 예언이다. 사도 요한이 죄수의 몸으로 밧모섬이라는 곳에 유배되어 가 있을 때에 그는 사랑하는 주님으로부터 앞으로 일어 날 교회의 역사와 사건들에 대한 계시를 받게 되었는데, 한번은 하늘로부터 네 말탄자가 달려 오는 광경이 나타났으며 그것은 분명 어떤 불길한 큰 흉조를 나타내는 계시로 느껴졌다. 그 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그것이 자기 자신이 그렇게 사랑하며 위하여 모든 것을 바쳐 보호해 오던 하나님의 교회를 상징한다는 사실이었다.

중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던졌다. 이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세우신 바로 그 교회란 말인가? 예수께서는 지옥의 세력이 교회를 침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약속하시지 아니했던가? 그런데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어떻게 되었길래 성경에 기초하고, 그리스도 중심이었으며, 성령이 충만하였던 교회가 이렇게 깊이 타락하여 내려 앉게 되었을까?

흰말 시대 (승리의 시대)

요한 계시록 6장의 예언은 그 질문에 대한 생생한 답변을 계시로 보여 주고 있다. 그 계시의 서두에 예수께서는 장래의 사건들을 사도 요한에게 보여 주시기 위하여 닫혀진 인들을 떼기 시작하시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예수께서 그 첫째 인을 떼시자 흰말이 달려 나오는 것을 보게 되었다. “내가 이에 보니 흰 말이 있는데, 그 탄 자가 활을 가졌고 면류관을 받고 나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 2절

흰색은 순결한 초대의 사도교회를 상징하는 것이고 면류관을 쓰고 말을 탄 자는 교회를 주장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였다. 그 분은 나아가서 교회를 통하여 복음으로 세상을 정복하여 이기고 또 이기었다. 로마 시대에는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이 개선 할 때에 흰 말을 타고 오는 것이 전통이었다. 그러므로 흰 말은 순결한 사도 교회뿐만 아니라 승리하는 교회를 상징한 것이었다. 제 1세기에 하나님의 교회는 순수한 진리를 가지고 있었고 악을 정복하며 복음으로 세상을 쳐서 이기는 능력의 교회로 존재하였었다.

붉은말 시대 (핍박시대)

그러나 요한은 장면이 바뀌는 것을 보게 되었다. 사단이 교회를 무섭게 공격하는 것이었다. 두 번째 달려오는 말의 색깔은 붉은 색이었고 이 말을 탄 자는 칼을 받아 쥐고 있었으며 서로 서로 죽이는 일이 감행되고 있었다. 이 붉은 말은 핍박 시대를 상징하였다. 교회는 순교자들의 피로 붉게 물들이게 되었다. 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콜로세움의 원형 극장에서 야수들의 밥으로 또는 화형대의 이슬로 사라져 갔다. 유럽과 북부 아프리카 지방에서 무자비한 핍박과 죽음을 당하였는데, 그 기간은 역사가들에 의하여 A.D. 100 - A.D. 323으로 추정하고 있다.

검은 말 시대 (타협의 시대)

그 다음으로 요한은 검은 말을 보게 되는데, 그 말 탄 자는 손에 저울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또 무엇을 상징하는 것이었을까? 핍박이 그치자 기독교회는 갑자기 로마 제국의 공식적인 종교가 되었다. 그러더니 이제는 콘스탄틴 황제의 추천에 따라 수 많은 이교도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교도인들이 개종하여 들어 오면서 그들의 이교적인 풍습과 전통들을 가지고 교회 안으로 들어 오게 된 것이다. 더 슬픈 사실은 교회 자체가 그들을 수용하기 위하여서 이교적인 풍습들을 수용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렇게 교회에 들어 온 이교의 풍습들 중의 하나가 우상들을 들여 온 것이었다. 십계명에 금지되어 있는 우상들을 들여 오면서 그 이름들과 모습들을 바꾸어 가지고 성경적인 냄새가 풍기게 하기 위하여 베드로, 요한, 바울과 같은 형상들로 만들어 교회 안에 들여 와 달기 시작한 것이었다. 쥬피터 신의 이름은 베드로로 바꾸고 다산 신을 상징한 여신은 그 이름을 예수의 어머니인 마리아로 바꾸었을 뿐이었다.

또 다른 하나의 타협은 성경의 안식일 문제였다. 창세기에는 하나님께서 창조의 기념일로 안식일을 제정하시어 복 주시고 거룩하게 하시며 쉬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십계명 속에 포함시키시고 친히 당신의 손가락으로 돌비 위에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고 기록하여 두셨다 (출애굽기 20:8).

예수께서도 안식일에 교회에 참석하심으로 하나님의 안식일 준수에 대한 모본을 남기어 두셨고, 주님의 제자들과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 이후에도 여전히 안식일을 준수해 온 사실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누가복음 4:16; 사도행전 17:1-3; 18:1-4 참조).

그런데 성경은 다니엘 선지자를 통하여 교회가 정부의 힘과 연합하여 하나님의 율법을 바꾸려고 할 것이라는 놀라운 예언을 이미 해 두었다는 사실에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지극히 높으신 자를 대적하며”,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를 핍박하며”, 또한 “때와 법을 변개코자 할 것”이라는 놀라운 예언을 선지자 다니엘은 후손들을 위하여 기록하여 두었다 (다니엘 7:25 참조).

태양 신 숭배는 로마 제국에서 인기 있는 종교였었다. 그래서 교회와 국가는 이교도인들을 수용하고 비위를 맞추기 위하여 예배일을 일요일로 변경하기에 이른 것이다. 일요일에 예배를 드리면, 그 당시 미움을 받고 있었던 유대인들과 거리를 두게 되고, 또한 이교도인들이 기독교로 개종 할 때에 훨씬 편안하게 느끼게 만들 수 있었기 때문에 일석 이조의 효과를 가져 올 수가 있었다. 그러나 한가지 문제가 있다. 성경의 계명은 여전히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검은 말 시대의 교회는 참으로 타협의 시대였다. 진리가 저울에 달려서 부족함으로 드러난 시대였다. 그 시대는 복음의 빛 대신 어두움이 교회를 뒤 덮어 이교적인 미신적 풍습들이 교회 안으로 밀려 들어 온 그러한 시대였다.

청황색말 시대 (영적 죽음의 시대)

끝으로 요한은 청황색 말이 달려 오는 것을 보게 되었다. 청황색은 시체의 색깔이다. 그래서 그 말 탄 자의 이름이 “사망”이었다. 그 뒤에는 음부(무덤)가 뒤를 따르고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일까?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 난 것이다. 교회가 영적으로 죽은 것이다. 더 이상 하나님의 교회가 예전과 같은 교회가 아니었다. 한 때 흰색으로 상징되었던 순결하였던 교회가 이제는 죽음의 사신이 뒤를 따르는, 영적으로 완전히 죽어버린 교회가 된 것이다.

이 네 말 탄 자의 계시는 교회 역사에 대한 생생하고 적나라한 묘사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교회에 어떠한 일들이 일어 날 것에 대하여 미리 아시고 이렇게 예언하여 두신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개인이나 단체에게 순종하도록 강요하시지 않으신다. 부드러운 손으로 인도하시고 호소하실 뿐이다. 참된 성품의 변화는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선택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교파가 많은가? 그 이유 중 하나는 교회의 조직과 단체들이 타락하였기 때문이다.

남은 무리와 종교 개혁 운동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개혁자들을 일으키셔서 각 시대마다 교회의 개혁과 부흥을 가져오도록 애를 쓰고 계신 것이다. 신성 로마 제국의 챨스 대제와 그 옆에 찬란한 옷을 입고 둘러 서 있는 교회의 대표자들 앞에, 이단이란 죄목 하에 끌려가 심문을 받기 위해 서 있는 한 신부가 있었다. 그는 독일의 광부의 아들로 태어나 신부가 된 자로서 아무런 특별한 명예나 높은 직위도 없는 한갓 성직자에 불과 하였다. 그의 이름은 다름아닌 마틴 루터였다. 그는 홀로 서 있었고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대항할 아무런 인간적 권위도 없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왕과 교회의 권위자들 앞에 패기 있게 서 있을 수 있도록 만들어 준 한 권위가 있었는데 그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 성경의 권위였다. 그는 당당히 말하였다. “왜 벌레 같은 내가 감히 성경의 복음과 선지자들의 말씀에 위배되는 오류를 전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내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성경적으로 보여 주시기만 한다면 지금 당장 나의 책들을 불 속에 집어 넣겠습니다.”

루터는 선택을 하여야만 하였다. 성경의 진리를 고수하다가 죽음을 당하던지, 아니면 교회의 권위에 굴복하던지... 그는 전자를 선택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성경을 통하여 분명한 이유를 제시 받기 전에는 그 어느 누구의 권위, 설령 그것이 교황이든 의회이든 간에, 누구에게든지 복종 할 수 없으며,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매어 있으며 바로 그러한 확신 가운데 나는 서 있습니다.”

마틴 루터는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따라서, 그 당시의 고해 성사와 순례 제도와 사죄권을 파는 일과 행함으로 구원을 얻도록 믿게 만드는 제도들을 대항하여 일어서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한 기별을 과감하게 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로 하여금 용기 있게 일어나 설 수 있도록 만들 한 근거가 있었는데, 그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 성경이었다. 그래서 그는 거대한 중세기의 교회의 세력을 대항하여서 프로테스탄트(개신교회)운동을 전개하게 된 것이었다. 그와 함께 선 자들의 숫자는 적었고 그는 외로운 싸움을 계속하였다. 예수께서 이 땅 위에 사실 때에도 유대 교회는 인간적인 전통으로 죽은 교회가 되어 있었고 그분께서는 “기록 되었으되” 라는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로 개혁을 시도하시지 않았던가? 교회의 권위는 성경보다 높은 곳에 서 있을 수가 없으며, 성경이 교회의 조직이나 전통 위에 반드시 서 있어야 하는 것이다. 베드로는 이사야의 말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베드로 전서 1:24,25)

역사를 통하여 교회가 타락하고 실패하였어도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불변하게 견디어 왔고, 그러므로 말씀대로 사는 보이지 않는 참된 신자들이 항상 모든 시대마다 각 나라마다 조금씩 존재하여 왔다. 예를 들어 보자.

13세기에 아씨시에 살던 플란시스는 마태복음 10:5-15절에 있는 예수님의 분부를 단순하게 받아드리고 자기의 모든 재물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과 병자들을 위하여 평생 동안 봉사하는 생애를 살았다. 14세기 때 영국의 쟌 위클립은 교회를 향하여 단순하고 순수한 신약시대의 교회의 믿음으로 돌아가자고 외쳤다. 그래서 그는 소수의 추종자들과 함께 성경을 평민들이 읽을 수 있도록 번역하는 일에 큰 공헌을 세웠다. 같은 시대에 요한 허쓰는 보헤미아에서 성경의 말씀대로 교회를 개혁하기 위하여 목숨을 바쳤다. 그는 하나님만이 죄를 용서하실 수 있으며, 교회에게 그 권한이 없다는 사실을 항의하며 일어섰다.

사도 바울은 교회를 “이 집은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라”고 말하였다 (디모데전서 3:15). 그러므로 외형적으로 교회가 부패하고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 있었을 지라도, 항상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의 기초 위에 서 있었던 소수의 보이지 않는 무형적인 하나님의 교회가 꾸준히 존재하여 왔던 것이다. 그러한 그리스도인들을 성경은 남은 무리라고 부른다. “...남은 바 모든 백성이 그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와 선지자 학개의 말을 청종하였으니.” 학개 1;12.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로마서 11:5

이러한 남은 무리에 속했던 위클립과 요한 허쓰와 마틴 루터 같은 그리스도인들 이외에도 많은 개혁자들을 우리는 기억할 수 있다. 그 이후에 “아나뱁티스트” (재 침례파-유아 세례를 반대하고 성인 침례를 주장함) 가 일어나 양심의 자유 의사에 의한 침례와 또한 물을 뿌리는 세례가 아닌 성경적으로 몸을 물에 잠그는 침례를 베푸는 개혁을 시도하고 나섰다.

18세기에는 요한 웨슬레가 일어나 형식으로 죽어가는 교회에 개혁과 부흥을 일으켰으며, 신자들의 성화와 거룩함에 이르는 실제 생활의 열매를 강조하는 참된 제자의 가르침을 들고 일어났다. 그래서 교회는 죽었던 상태에서 또 다른 진리의 전진을 거듭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남은 무리들을 통하여서 하나님께서는 중세기를 통하여 감추어 지거나 타협된 진리들을 하나 하나 다시 개혁하여 내어 진리가 계속 전진해 나가서, 결국에는 사도 교회의 상태까지 회복 되도록 계획하신 것이었다. 그러나 개혁자들의 추종자들은 자기들의 지도자들이나 그 가르침이 완전한 것처럼 생각하고 그 주위에 성을 두껍게 쌓고 자체 만의 교파를 형성하여, 계속적으로, 그리고 더 밝은 빛으로 전진하여 나가기를 거절하기에 이른 것이다.

빛은 전진하는 것이다. 진리도 점점 더 밝게 전진하는 것이다. 특히 종교 암흑시대를 통하여서 진리가 많이 타협되어 버린 상태에서, 교회는 온전한 빛으로 회복되어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서는 다른 사람들이 줄 곳 발견해 나가는 감추어 졌던 진리, 아니면 채 이해하지 못했던 진리들을 접할 때에 겸손한 마음으로 그것이 성경적인지 아닌지를 살펴보고, 그것이 성경적이면 새로운 것을 계속 받아드리는 겸손함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교파의 벽을 두껍게 쌓은 개혁자들의 후예들은 이미 설립한 조직들과 편견의 벽이 너무 높아서 계속 전진하는 진리의 빛을 따라가지 못하고 머물러 앉아 있게 되어 버린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렇게 많은 교파들이 교회 안에 생겨나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이다.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의인의 길은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거니와.” 잠언 4:18.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 여러분들은 과연 어느 편에 속하여 있는가? 여러분은 점진적으로 나타나는 진리를 따라 계속 전진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