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죄란 무엇인가?

죄란 무엇인가?


"죄”란 무엇일까? 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죄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정확히 알아야 하는가?

사람들은 아프면 의사를 찾아간다. 의사에게 간다는 것은 무언가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가는 것이다. 어딘가에 무슨 문제가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가는 것이다. 그 때 의사가 해 줄 수 있는 제일 중요한 일은, 그 사람에게 무슨 병이 있는지 알아내는 것이다. 그 다음에야 치료가 가능하다. 복음도 마찬가지이다. 죄를 무엇이라고 진단하고 정의하는 데에 따라서 우리의 복음과 신앙과 믿는 바가 달라진다. 제 1부에서 언급했던 두 가지 다른 종류의 복음은 다 “죄”에 대한 다른 정의와 이해 때문에 생기게 된 것이다. 죄에 대한 두 가지 정의에 대하여 연구해 보자.

1). 죄의 정의

A. 원죄설; “죄는 본성이다”라는 정의
첫 번째 죄에 대한 정의는 원죄설이다. 이것은 우리의 본성이 바로 죄라는 가르침이다. 다시 말해서, 이 정의는 우리가 태어날 때에 이미 우리는 잃어버린바 되고 정죄 받은 상태에서 태어난다고 믿는 것이다. 곧, 우리는 지옥으로 갈 본성으로 태어났다고 믿는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느냐에 따라서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잘못된 본성이 있는 그 자체가 죄라고 믿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원죄설”의 정의이다. 그리고 이것이 거의 모든 개신교인들이 믿고 있고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B. 죄는 선택; “죄는 우리의 선택이다”라는 정의
첫 번째 원죄설의 정의는 “우리는 잘못된 본성으로 태어났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연히 잘못된 행동을 한다”라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죄”의 정의는 다르다. 우리가 잘못된 본성을 유전적으로 받았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멸망 당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는 인간들이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말하기를, “하나님, 나는 내 뜻대로 하겠습니다. 나는 주님 뜻대로 하기를 원하지 않아요!”라고 말하고, 하나님의 뜻(계명)을 어기고 자기 뜻대로 한다면, 그것이 자기가 한 선택이고, 그것이 “죄”인 것이다. 이것이 두 번째 “죄의 정의”인 “죄는 선택”이라는 것이다.

2). 선택으로서의 죄

앞에서도 말했지만, 기독교내에 존재하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종류의 복음은 죄에 대한 두 가지 정의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선택으로서의 죄”를 더 알기 쉽게 설명하기 위하여, 한 예증을 들어보자. 고양이는 사람에게 와서 털을 비비며 아주 좋아한다. 그런데 주인을 따라 문을 나설 때 갑자기 이상한 성격을 나타낸다. 수염과 꼬리를 바짝 세우고 날카로운 동물로 변한다. 왜 그러는가? 고양이는 본성적으로 자기보다 큰 것이 오면 무조건 도망가고 자기보다 작은 것은 무조건 잡기 때문에, 밖을 나가면 본성대로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밖에서 작은 생쥐를 잡으면 어떻게 하는지 아는가? 그는 생쥐를 금방 죽이지 않고 놓아 주었다 다시 잡았다 하는 반복을 계속한다. 왜냐하면 그는 쥐를 잡는 것에 재미를 느끼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물 가운데 하나이다. 그런데 이 창조물은 다른 창조물(생쥐)에게 죽기까지 형벌을 가하는 것이다. 이것이 죄악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하나가 아니다. 우리가 새 땅에 가면 그런 것은 없을 것이다.

고양이가 다시 주인에게 올 때 어떻게 하는가? 콧수염을 바싹 세우고 자기가 생쥐를 잡은 것에 대해 주인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온다. 그때 주인은 어떻게 하는가? 만일 당신이 주인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고양이를 정죄할 것인가? 아니면 죄가 없는 것인가 라고 갈등할 것인가? 아마 여러분은 고양이를 쓰다듬으면서 잘했다고 말하며 다시 그 살인자를 집으로 들여 보낼 것이다.

자, 여기서 악한 것과 죄에 대한 책임의 차이를 알아보자. 이 고양이가 한 일은 악한 짓이다. 그러나 그것을 가지고 우리는 “너는 죄의 책임이 있다”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왜 그런가? 이 고양이의 작은 두뇌 속에는 양심이라는 것이 없고, 옳고 그름의 차이 또한 없다. 그는 그저 타락한 본성만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타락한 본성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본성이 말하는 것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태어났을 때, 우리에게 타락된 본성은 악하게 있지만, 아직 죄의 책임은 없다. 죄를 짓기로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죄는 스스로가 짓기로 선택해야 죄가 된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고 있는 올바른 죄의 정의인 것이다.

  •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약 4:17).
  •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 아들은 아비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할 것이요 아비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하리니 의인의 의도 자기에게로 돌아 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겔 18:20).

3). 결과와 죄의 형벌로서의 죽음

창세기 2:17은 하나님께서 창조 받은 인간들에게 처음 주시는 말씀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그들이 선악과를 먹었는가? 그런데, 그들이 그 날 바로 죽었는가?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열매를 먹으면 죽을 것이라고 말씀 하셨는데, 왜 아담의 사형 집행이 즉각 시행되지 않았을까? 그 이유는 대속의 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사람의 죄를 몸소 지시고 타락한 인류를 위하여 죄값을 지불하기를 자원하셨기 때문이었다.

계 13:8을 읽어 보도록 하자. 이 절의 전단에 중점을 두겠다.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영어 성경의 번역을 보면, “창세 전부터 죽음을 당해 오신 어린양”이라고 말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창세 이후로 4000년이 지난 이후에 돌아가시지 않았는가? 이것은 무슨 뜻인가? 이것은 예수님께서 인간이 타락할 경우를 대비해 창세 전부터 구속의 계획을 마련해 놓으신 것을 말한다.

아담과 하와가 사단의 유혹을 받아 들이고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신 바로 그 일을 했을 때,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앞에 서서 말씀하시기를,“나로 그 형벌을 받게 해 주소서. 제가 사람의 자리에 서겠습니다. 사람에게 기회를 한번 더 주소서”라고 하셨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살 수 있는 이유는,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즉시로 예수님께서 중재자로 서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려면 고통을 당해야 할 것을 아셨지만 인간을 대신하기로 하셨다. 아담이 죄를 범하자마자 하나님의 아들은 그가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실 때 가지셨던 동일한 능력으로 범죄자에게 선고된 운명을 막기 위하여, 당신의 생명을 인간의 구원을 위한 담보물로 제시하셨다.

그러므로 죄의 정의로서의 “원죄설”은 성경의 구속의 계획과 맞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와 에덴 동산에서 어떻게 하셨는지 에도 불구하고, 많은 기독교인들은 여전히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아담의 죄의 대가를 지불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아담이 죄를 범했기 때문에 우리는 멸망 당하고 정죄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무언가를 갚으셨을 때는, 그것은 완전히 갚으신 것이다. 인간은 더 이상 갚을 것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거절했을 때에 그들은 멸망 당할 수 있었다. 그들은 십자가를 지나쳐야 지옥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아이들은 그들의 길에 주님의 십자가를 가지고 태어난다고 할 수 있다. 어린 아기들은 지옥으로 미끄러지는 길 위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지옥으로 가기 위해서는 십자가를 짓밟고 지나가야 되는 것이다.

4). 죄에 대한 예수님의 정의

죄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말씀 하시는 지에 대해 한번 보자. 요한복음 9장 1~3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길을 걸어가시는데, 눈이 먼 맹인을 발견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에 제자들이 질문을 했다. 2절,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그들은 이 사람이 “죄인”입니까? 라고 묻지 않았다. 그들은“그의 눈을 좀 봐, 그는 자기의 죄 때문에 심판 받은 것이 아니냐?”라고 했다. 그들이 그렇게 말한 뜻은, “그는 그렇게 태어났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제자들이 알기 원하는 것은, “그의 부모들이 뭔가 잘못을 한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부모들의 죄 때문에 그는 정죄를 받는 것입니까?”, 아니면, “그가 엄마 뱃속에서 죄를 지은 것입니까?” 라고 묻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그들의 질문이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예수님께서는, “눈이 먼 사실과 죄와 혼동하지 말아라. 눈이 먼 것은 악한 것에 속하지만은, 그러나 그것은 죄와 동일한 것은 아니다”라고 하시며, 계속 말씀하시기를 “지금은 마귀의 역사만 볼 수 있지만, 너희는 조금 있으면 하나님의 역사를 보게 될 것이다”라고 하셨다. 만약 마귀가 역사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면 아무나 다 태어나면서 장님이 될 수 있다. 예수님께서 그가 소경 됨을 어떻게 취급하셨는가?“내가 너의 눈을 용서한다”라고 하셨는가? 절대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그분은 그의 눈을 치료해 주셨다. 그의 눈을 다시 재 창조해주셨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우리의 죄악들을 취급하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