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부: 인기 있는 복음-5가지 문제점

세상에서 가장 인기 있는 복음


첫 번째 복음

첫 번째로 소개하는 복음은 현대 기독교회에서 가장 인기 있는 복음이다. 이 복음은 거의 모든 교회들에서 가르쳐지고 있으며,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받아들이고 있는 복음이다.

복음을 신학적으로 분석할 때, 대부분의 신학자들과 성경학자들은 그 복음이 주장하는 “죄에 대한 정의” 또는 “죄란 무엇인가?” 라는 문제를 제일 먼저 살펴 보는데, 그 이유는 이것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서 복음의 내용이 완전히 달라지게 되기 때문이다.

이 기사에서도 우리는 죄의 문제부터 먼저 살펴 보기로 하겠다. 지금부터 연구하게 될 죄의 정의를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서 그것에 고리를 물고 따라오는 복음에 관한 여러 가르침들이 전혀 달라지게 된다. 다음에 계속되는 글을 읽으면서 논리적으로 연결되는 복음의 연결 고리들을 주의 깊게 살펴 보기 바란다.

1. 죄란 “태어난 상태 그 자체” 라는 교리의 문제점

죄란 무엇인가? 첫 번째 복음은, “죄란 우리가 이 죗된 세상에 태어난 자체이다”라고 말한다. 또한 이 복음은 “죄”라고 하는 것은 어떤 행동이나 말이나 생각과는 상관이 없다고 주장한다. 첫 번째 복음은 죄를 다음과 같은 논리로 설명한다. “아담은 우리의 조상이다. 아담은 그의 범죄로 인하여 이 세상 전체에 문제를 가지고 왔다. 우리는 아담의 자손이기 때문에 그로부터 죄로 기울어지는 성향을 유전적으로 받았는데, 바로 그것이 ‘타락한 본성’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본성은 이기적이고 교만하며 복수하기를 좋아한다. 우리의 본성은 선한 것이 아니고 악한 것이다.”

그래서 첫 번째 복음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가지고 태어난 본성은 너무나 악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이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들은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잃어버린바 되었고, 지옥불의 정죄를 받았다”고 가르친다. 첫 번째 복음은 말하기를 “죄란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고 말하는 것 때문에 발생되는 것이 아니라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는 그 자체 때문에 죄인이 된다”고 죄에 대한 정의를 내린다. 죄에 대한 이러한 정의는 첫 시작부터 죄를 도무지 이길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는 것으로 결정지어 버리게 되는데, 이것은 논리적으로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믿음을 갖도록 인도한다.

2. 그리스도는 우리와 다른 인성을 취하셨다는 교리의 문제점

한 고리는 또 다른 고리로 연결된다. 만약 위에서 살펴본 바대로, 죄가 우리가 가지고 태어난 본성 그 자체라고 가정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는 전혀 다른 인성을 취하셔야만 한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죄인들의 구세주가 되시기 위해서는 그분께는 죄가 전혀 없어야만 하는데 첫 번째 복음이 죄에 대하여 내린 정의에 따라서 죄가 우리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악한 본성 자체라면,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정죄 받은 죄인이 되어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복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우리와는 전혀 다른 완전한 것으로 만들 수 밖에 없었다. 겉모습은 그분의 조상들의 죄의 결과를 받았지만, 그분의 내면의 인성은 보통 인간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을 취하였다는 교리를 세우게 되었다.

지금까지 언급한 “죄”와 “그리스도의 인성” 문제는 복음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 중의 하나이다. 왜냐하면 이 두 가지 문제에 대한 가르침은 복음의 가장 밑바닥에 위치하여 그 기초를 놓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기초가 잘못 놓여지면, 그 위에 쌓여지는 모든 가르침과 복음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만약 우리가 첫 번째 복음이 말하는 대로 본성적으로 죄인이라면, 우리는 항상 죄를 범하지 않을 수가 없다. 비록 우리가 침례를 받고 거듭났다고 할지라도, 타락한 본성은 없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까지나 우리 안에 그대로 있다. 우리가 아무리 성령의 감화 감동하심에 따라서 선한 행위를 하고 선한 말을 하며 살지라도,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악한 본성은 여전히 우리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정죄 받은 죄인으로 살아가게 된다. 참 하나님의 백성이 이마에 하나님의 인을 받은 다음에도, 그리고 지구의 은혜의 시간이 끝난 후에도 악하고 이기적인 본성은 결코 변하지 않기 때문에 악인과 의인 모두는 예수께서 재 강림하시는 그 날까지 죄를 범하며 살게 된다는 것이 이 복음이 말하는 바이다. 요한계시록 22장은 은혜의 시간이 끝난 이후에는 거룩한 자와 불의한 자가 최종적으로 결정된다고 선언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복음은 모든 사람은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순간까지 계속해서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태로부터 가지고 태어난 본성 그 자체가 죄이기 때문에 단 한 순간이라도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없다. 침례 받고 거듭난 이후에도 본성적으로 계속해서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계속적으로 범하는 죄를 계속적으로 용서 받아야만 한다. 요한계시록이 우리에게 예언하는 것처럼 이 세상에 짐승의 표가 내려지고 전 세계에 일곱 재앙이 내려서 인류에 대한 은혜의 시간이 끝난 다음에도 나는 계속해서 죄를 범할 수 밖에 없고 계속해서 용서를 받아야만 한다. 어느 누구도 죄를 가지고는 천국에 갈 수 없기 때문에 계속적인 죄에는 계속적인 용서가 필요하게 된다.

자, 그러면 다시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로 하자. 만약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이 죄로 인하여 타락한 본성을 갖고 태어나는 우리와는 다른 것이라면, 그 분께서는 어떻게 유혹을 받으셨을까? 이 복음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기 이전의 모습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혹 받으신 상태를 엿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이 복음은 예수께서는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기 이전과 같은 완전한 인성을 취하셨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범죄하기 이전의 아담과 하와는 사단으로부터 어떻게 유혹을 받았는가? 지금 사단은 우리를 공격하기 위하여 어디든지 우리를 따라다니는데, 에덴 동산에서도 사단은 아담과 하와를 공격하고 유혹하기 위해서 어디든지 그들의 뒤를 밟으면서 따라다녔는가? 사단이 원할 때마다 아담과 하와를 계속해서 유혹하고 시험에 빠뜨렸는가? 아니다! 사단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 주변으로 올 때에만 그들을 유혹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 복음은 “예수께서는 모든 면에서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하여 “아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처럼 유혹을 받지 않으셨다. 예수께서는 교만과 실망, 화를 내고자 하는 유혹 같은 것들은 결코 받은 적이 없다. 하나님의 뜻 대신에 자신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시험을 받지 않으셨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과 같은 성경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예수 그리스도)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히 4:15.

자, 그러면 우리는 다시 첫 번째 복음을 믿는 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해야 한다. “만약 예수께서는 우리가 유혹 받는 식으로 시험을 받지 않으셨다면, 그분께서는 어떻게 시험을 받으셨는가? 그들은 이렇게 대답한다. “예수께서는 오직 3번만 유혹을 받으셨다. 첫 번째 시험은 광야에서 받으셨고 두 번째는 겟세마네에서 받으셨으며 마지막으로는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였다.” 우리는 가만히 앉아 있어도 마귀가 시험하기 위하여 우리의 본성을 건드리지만, 예수께서는 시험과 유혹을 받기 위해서는 의도적으로 시험이 있는 장소로 나가셔야만 했다는 것이 이 복음이 말하는 바이다. 하와가 시험을 받기 위하여 에덴 동산 중앙에 있던 선악과 나무로 나갔던 것처럼, 예수께서도 광야나 겟세마네 동산이나 갈보리로 나가야만 했다는 것이 첫 번째 복음의 설명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외부와 우리의 본성 내면으로부터 시험을 받지만, 예수께서는 외부로부터만 시험을 받았다는 것이 이 문제의 골자이다. 지금까지 설명한 내용을 요약하자면, 타락한 본성을 지닌 우리는 호흡하는 것처럼 죄를 계속적으로 범하게 되지만, 예수께서는 우리와는 달리 죄의 흔적이 전혀 없는 완전한 인성을 취하였기 때문에 그분은 우리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유혹을 받으셨고 그러므로 그분은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있었다는 것이 이 복음의 바닥에 깔려 있는 논리이다. 이러한 가르침은 우리를 논리적으로 또 다른 신학적 고리로 인도해 가는데, 그것은 칭의에 관한 문제이다.

3. 칭의(용서)만으로 구원받는다는 교리의 문제점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천국에 가려면 죄가 없어야 되는데 이 첫 번째 복음의 가르침에 있어서는 인간은 죄 속에서 태어나고 죄를 몸 속에 가지고 있기 때문에 결코 죄를 이기거나 버릴 수는 없다. 그러므로 죄를 해결하고 구원받기 위해서는 용서만이 유일한 수단이다. 타락한 본성(죄)을 가지고 태어난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구원받기 위하여 용서(칭의)를 필요로 하게 된다. 그래서 천주교회에서는 갓 태어나서 아무 것도 모르고 울고 있는 신생아에게 영아 세례라는 의식을 통하여 용서를 베푸는 황당한 아이디어까지 만들어 내게 되었던 것이다. 이 복음의 도표에는 성화가 포함되지 않는다. 왜 이 복음을 믿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복음에 성화를 포함시키지 않을까? 왜냐하면 그들은 칭의만이 전적으로 예수께서 하시는 일이며 성화와 같은 인간의 불완전한 행함은 구원의 조건에서 배제되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여기서 특이할 만한 사실은, 그들은 성화를 인간 스스로의 불완전한 노력과 애씀으로 여긴다는 사실이다. 성화에 대해서 이러한 이해를 가질 때, 성화는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지게 되고 구원과는 무관하게 된다.

이러한 가르침은 사람들에게 어떤 경험을 가져다 줄까? 이 복음을 믿고 따라가는 사람들의 삶에는 어떤 경험들이 실제로 일어나게 될까? 만일 독자 여러분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 분을 믿어서 구원을 얻게 되었고 또한 주의 날을 거룩하게 지키면서 교회에 잘 다니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직장에서 여러분에게 주일에도 일터에 나와서 근무해 달라는 요구를 받았다면, 여러분은 어떤 결정을 하겠는가? 직장을 잃어버릴 경우 가족들을 먹여 살릴 길이 막연한데 이러한 상황에서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위기는 매우 어려운 상황이지만, 이 첫 번째 복음은 주의 날에 직장에 나가서 일하는 것은 구원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가르친다. 왜냐하면 주의 날을 지키는 행함 자체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 복음은 말하기를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 넷째 계명인 안식일을 지키는 행함이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 그러므로 주의 날을 범하여도 멸망하지 않는다” 고 한다.

이 복음은 매우 단순한 복음이다. 구원에 이르는 길도 한 가지이고 구원을 잃어버리는 길도 한 가지라고 가르친다.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이미 구원이 이루어졌고, 이와 반대로 예수께로부터 등을 돌리고 거절하면 구원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이 이 복음을 믿는 사람들의 신조이다. 이 복음에 의하면, 구원을 잃어버리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주의 날을 지키지 않아도, 마약을 복용해도, 술에 취해 중독이 돼도, 십일조를 드리지 않아도, 오직 예수를 인정하고 믿기만 하면 구원은 보장된다는 것이 이 복음이 의미하는 바인데, 왜냐하면 이 모든 행위들은 성화에 속한 문제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복음을 믿는 목사는 그들의 설교 중에 이렇게 말한다. “잘못 행하고 잘못 말하고 잘못 생각하는 것은 예수를 거절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양심에 꺼리는 일을 계속해서 하고 있으면서도 예수를 믿기만 하면 우리의 구원은 계속적으로 유지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이기적으로 태어난 상태 그 자체가 죄이기 때문에 인간은 도무지 죄로부터 해방될 수 없기 때문에 오직 용서(칭의)를 통해서만 구원이 주어지고 유지될 수 있으며, 성화는 인간의 불완전한 행위에 불과하기 때문에 구원의 조건이 결코 될 수 없다. 구원은 용서(칭의)를 통해서 넉넉히 이루어지며 성화(그리스도인의 영적 성장)는 있으면 좋고 없어도 구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 이 복음의 가르침이다. 구원과 칭의에 대한 이러한 생각은 논리적 고리를 또 하나 연결하게 되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완전 문제이다.

4. 완전한 순종은 불가능하다는 교리의 문제점

죄를 이기적으로 태어난 상태로 규정한 결과 어떤 그리스도인도 결코 죄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가르침이 생기게 되었고, 이것은 결국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생애(성화)를 구원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으로 몰아갔다. 이러한 논리는 그리스도인의 완전한 순종과 굴복은 불가능하다는 또 하나의 결론으로 발전된다. 이 복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50%나 80%의 순종은 가능할지 모르지만 계명에 대한 100%의 온전한 순종은 불가능하다고 가르친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타락한 본성 자체부터 죄일 뿐 아니라 그러한 불완전한 본성으로는 결코 죄를 승리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는 다르다. 예수께서는 우리와는 다른 인성을 가지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완전한 순종의 생애를 사실 수 있었지만, 우리는 타락한 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결코 완전한 순종의 생애를 살 수 없다. 그리스도인의 완전한 순종은 예수께서 재 강림하셔서 우리의 육체(본성)를 완전한 것으로 바꾸어주실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5. 복음의 열매들에 나타나는 문제점

복음에는 그에 합당한 열매들이 맺히게 된다. 지금까지 살펴 본 이 첫 번째 복음에도 그에 합당한 열매들이 맺힌다. 이 복음은 설교 단상에 다음과 같은 열매를 맺히게 만든다. “우리는 죄인으로 태어났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용서뿐이며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은 보장됩니다.” 교회마다 이런 복음으로 가득 차 있는데, 심지어는 보수적이고 성서적이라고 불리는 교회들까지도 이런 복음의 도전을 거세게 받고 있다. 복음은 반드시 열매를 가져온다. 그것이 참 복음이든지 거짓 복음이든지를 불문하고 복음은 그것을 받아들인 교회와 개인에게 분명한 결과를 가져다 준다. 먼저 심판 문제를 생각해 보자. 복음을 앞에서 언급한 식으로 믿는다면 심판도 필요가 없게 된다. 주일을 올바로 준수하지 않아도 구원이 보장되는데 심판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십일조를 바치지 않고 술에 취한 삶을 살아도 구원이 보장되는데 심판이 무슨 필요가 있는가? 이런 복음에서 구원을 위한 조건은 단지 천사 한 명이 기록책에 “1994년 1월 12일 홍길동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받아들였음”이라고 쓴 기록만 있으면 된다. 물론, 기록하는 천사는 “홍길동”의 삶을 주시하여 바라보지만 비록 그가 주의 날을 범하고 노름을 하고 술을 먹어도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궁극적으로 거절하지 않기 때문에 천사는 “홍길동”이 계속해서 구원 안에 머물러 있다고 기록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복음에서는 심판이 필요 없게 된다. 그래서 이러한 복음에서는 심판의 의미와 용도에 대한 여러 가지 의문들이 생기게 된다.

이러한 복음에서는 십계명 또한 그 효용성과 의미를 잃어버리게 된다. 죄를 인간이 가지고 태어난 죗된 상태(본성)로 간주하는 이 복음에서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지라도 항상 죄를 범하고 있는 상태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명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교리가 무력화되고 만다. 또한 죄는 인간의 본성 자체이며 동시에 계명을 범하는 것이라고 믿는다고 할지라도, 결과는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본성적으로 계속해서 죄를 짓고 있는 상태에서 율법을 지키고자 하는 노력과 행위 자체가 무의미해지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 다른 인성을 취하셨기 때문에 완전한 순종의 삶을 사실 수 있었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완전하게 순종할 수 없다고 믿기 때문에 이런 복음 하에서 완전한 순종이란 불가능할 뿐 아니라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만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대개 이 복음을 믿는 사람들은 “예수께서 재 강림하시면 그 때야 완전한 본성을 받게 되므로 그 때에야 비로서 내가 하나님의 계명을 완전히 지킬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지금은 불가능하다. 아무도 율법을 지킬 수 없다”고 말한다. “어차피 인간은 본성적으로 죄를 계속해서 범할 수 밖에 없는데, 십계명을 조목 조목 지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라는 말이 이 복음을 따라가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하는 말이다. 이러한 논리 하에서 하나님의 도덕률(십계명)이 용도 폐지되면 교회는 도덕적으로 철저하게 파괴되고 만다. 간음이나 부적절한 결혼 관계가 교회 안에서 묵인되기 시작하며, 공공연하게 하나님의 십계명을 범하는 사람도 집사와 장로로 안수 받는 길이 활짝 열리게 된다. 간단히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부인하는 것 이외의 모든 것이 교회 안에서 일어나게 되며, 온갖 세속적 행습들이 교회 안에 들어와서 활개를 칠 수 있는 문이 활짝 열리게 된다.

이 복음을 믿는 어떤 목사가 얼마 전에 이런 말을 했다. “하나님의 구원은 너무나 넓고 크기 때문에 우리가 무엇을 먹고, 무엇을 마시며, 무엇을 입고, 무엇을 듣고, 무엇을 보며, 무엇을 읽는다고 할지라도 그런 모든 것들은 성화와 행함에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과는 상관이 없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 성경에 나오는 어떤 표준을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들은 우리가 완전한 본성을 받은 다음에야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그런 것들에 대해서 더 이상 이야기하지 말자. 그런 문제들은 오히려 교회의 분열을 조장하기만 한다.” 이런 가르침 하에서는 성경에 나오는 모든 교훈과 건강 문제와 절제 문제와 위생 문제들도 “구원과 상관없는 것들”이라는 이름 아래 그 의미와 목적이 사라져 버리고 만다.

도표에서 본 바와 같이 이 복음의 제일 밑바닥에는 “예정설”이 있다. 첫 번째 복음의 뿌리를 찾아서 내려가다 보면 그 맨 밑바닥에서 예정설이란 교리를 만나게 된다. 예정설이란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은 구원받고 어떤 사람은 멸망 당하게 될 것을 미리 결정해 놓으셨다는 교리이다. 구원과 멸망이 결정되는데 있어서 인간의 선택과 결정은 전혀 개입되지 않는다는 것이 예정설이다. 최초로 이 복음이 시작될 시기인 3~4세기경에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예정설을 믿었었는데, 그들이 믿었던 복음 또한 다음과 같은 논리로 구성되었다. “우리는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죄인들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완전한 본성을 취하셨기 때문에 죄가 없었고 또한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런데 우리의 죄는 용서를 받을 수 있으며, 장차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에 예수님처럼 완전한 본성을 받으면 그 때 나도 예수님처럼 완전한 순종의 생애를 살 수 있다.” 이 얼마나 그럴듯하게 들리는 말인가?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이러한 인간의 논리를 한마디도 동의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받을 자와 멸망을 당할 자를 미리 결정해 놓지 않으셨다. 다음에 이어지는 제2부에서는 기독교회 안에 존재하는 두 번째 복음에 대해서 다루고자 한다. 독자 여러분께서는 제2부를 공부하심으로써 기독교 전체를 나누는 두 가지 복음을 한 눈에 보고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