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펭귄과 들소 그리고 연어-제2부

펭귄과 들소 그리고 연어-제2부


지난 호에서 우리는 교회 안에 존재하는 들소와 연어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아프리카 들소처럼 아무런 판단이나 비판 없이 군중심리에 끌려다니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살펴보았고, 하늘 본향으로 돌아가려고 세상과 충돌하며 필요할 때는 교회와도 충돌하면서 살아가는 연어 같은 그리스도인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군중심리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두 단계의 패턴이 있는데 첫 번째 단계는 다수에 속하고자 하는 정신이고, 두 번째 단계는 일단 다수에 속한 다음에는 그 안에 존재하는 소수의 엘리트 그룹에 속하고자 하는 정신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먼저 다수가 가는 방향으로 자신의 방향을 결정한 다음, 그 다수가 인정하는 소수 그룹에 들어가고자 하는 정신이 군중심리이다. “나는 내 생각을 갖고 살아간다.”라고 말하지 마라. 현대인들은 직장, 자녀 교육, 신앙생활 등 거의 모든 면에서 이러한 두 단계의 패턴을 따라가고 있다.

지난 호에서 군중심리를 설명하고자 아프리카의 들소 이야기를 예로 들었었지만, 사회학자들이 군중심리를 설명할 때에 가장 흔히 사용하는 예증은 펭귄 이야기이다.
 

남극의 펭귄 이야기

남극에는 수많은 펭귄 떼들이 살고 있다. 멀리서 보면 많은 사람이 얼음 위에 까만 신사복을 입고 서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들을 남극의 신사라고 부른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참 이상한 장면이 가끔 나타난다. 그중에서 한 마리가 갑자기 바다로 들어가면 그것에 뒤이어 수백 수천 마리의 펭귄들이 줄을 서서 차례로 바다로 들어간다. 아무 생각도 없이 목적도 없이 주변에 있는 친구들이 바다 속으로 들어가니까 덩달아 들어간다. 왜 들어가느냐고 묻지도 않고 대답하는 펭귄도 없다. 거기에는 경고의 음성도 없고 책망의 음성도 없다. 그 줄에서 한발만 옆으로 슬쩍 빠져 나와서 다른 곳으로 가도 될 텐데 그런 펭귄들은 없다.

이러한 현상을 GROUP THINK (단체 생각)라 하는데, 한 그룹이 똑같은 생각을 갖고 한 방향으로 나가는 것을 뜻한다. 어떤 교회나 그룹에도 다 GROUP THINK가 있는데 이것이 잘못 세워지면 완전히 잘못된 방향으로 가게 된다. GROUP THINK가 잘못 결정된 예가 있는데, 얼마 전에 미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텍사스 주의 한 몰몬 분파의 경우이다. 그들은 일부다처주의를 믿는다. 아브라함이 일부다처였고, 여러 믿음의 조상들이 둘 이상의 아내를 가졌다. 그들은 성경 속에 있는 그러한 사실들을 보면서 그들의 신앙 속에 일부다처를 GROUP THINK로 받아들였다. 그들 사회 속에서는 일부다처가 아닌 사람은 비정상이 되어 버리고 만다. 이것이 GROUP THINK가 가진 무서운 함정이다.

이유는 잘 모르지만 남들이 그렇게 하니까 나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군중심리이다. 왜 그렇게 하는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괜히 불안하고 뒤처지는 것 같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군중심리에 쉽게 빠져드는 이유는 군중 속에 있을 때 안전감과 평안을 느끼기 때문이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침례 요한과 헤롯의 경우를 잘 살펴보면 들소가 되고 싶지 않았지만 들소로 전락되고 마는 교훈을 배울 수 있다.

침례 요한 : 침례 요한은 연어인가? 펭귄이나 들소인가? 물론 연어이다. 어떻게 침례 요한이 연어인 것을 알 수 있는가? 우리가 어떤 사람을 연어라고 부르려면 다음과 같은 연어의 속성이 있어야 한다. 연어는 자신이 태어난 본향으로 돌아가고자 어떤 희생과 고통을 치르고서라도 강의 흐름과 충돌하는 속성이 있다. 침례 요한 역시 세상과 충돌하였으며 세상을 따라가는 교회와도 충돌하며 살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침례 요한을 연어로 분류할 수 있다.

요한은 태어날 때부터 연어적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다. 누가복음 1장에는 늙은 어머니가 기적적으로 요한을 수태한 이야기가 나오고 천사들의 말에 불신을 나타냈던 아버지 사가랴의 혀가 굳었다가 풀어지는 기적의 이야기들이 나온다. 이런 놀라운 이야기들이 이상하게도 예루살렘 성안에서는 전혀 인정되지 못했다. “이 모든 말이 온 유대 산중에 두루 퍼지매”(눅 1:65). 왜 성 밖에 있는 유대 산중에는 두루 퍼진 소문이 예루살렘 성안에는 퍼질 수 없었는가?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진리처럼 여겨졌던 전통이 있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기별과 기적은 반드시 예루살렘 성안의 지도자들을 통해서만 전달된다는 것이다. 예루살렘 성안의 지도자들만이 하늘과 유대교회를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이 온 유대교회를 사로잡고 있었다. 그 결과 이 통로 이외의 다른 곳에서 나오는 모든 기별과 기적들은 철저하게 배척되고 무시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유대 산중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두루 널리 퍼진 침례 요한의 출생에 대한 소문이 예루살렘 성안 사람들에게는 철저하게 무시되었던 것이다. 침례 요한은 태어날 때부터 성안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결국 성에서 멀리 떨어진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로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생명의 빛이 유대교회 지도자들에 의하여 배척당하였던 것과 같이 그 후의 각 세대에 있어서도 그 역사는 반복됐다. 침례 요한이나 예수께서 유대교회에서 핍박받고 물러나신 것과 같은 역사가 거듭거듭 반복되었다. 중세기 개혁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에 그들은 기성 교회(천주교회)에서 분리될 생각은 조금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교회 지도자들이 새로운 빛을 받아들이는 대신에 가혹한 핍박을 가하자 어쩔 수 없이 교회를 떠나 빛을 받아들이는 새로운 사람들에게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 마지막 시대에도 종교 개혁자들의 발자취를 따르는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의 명백한 가르침을 선포하려면 그들이 사랑하는 교회를 불가불 떠나가지 않을 수 없는 경우들이 생긴다. 성령의 음성을 귀담아 듣고 진리가 어떤 모양으로, 누구에 의해서 제시되든지 마음을 열고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의 숫자가 매우 적다.

하나님만을 바라보면서 그토록 예리한 기별을 전했던 침례 요한도 헤롯에 의해서 허무하게 목이 잘려 죽었다. 헤롯은 개인적으로 침례 요한을 존경하던 사람이었다. 그런 헤롯 왕이 왜 침례 요한의 목을 치라고 명령했을까? 이 문제를 살펴보도록 하자.

헤롯 : 헤롯은 연어인가? 펭귄이나 들소인가? 교회 안에서 들소가 되고 싶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헤롯 역시 들소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들소가 되고 말았다. 마가복음 6:17-26을 읽어 가면서 들소가 되어 가는 과정을 살펴보도록 하자.

17절부터 나오는 상황을 살펴보면 헤롯이 요한의 부활에 대한 허망한 소원을 갖게 된 이유가 나온다. 17절부터는 장면이 과거로 돌아가 헤롯이 요한을 죽였던 과정이 나온다.

“전에 헤롯이 자기가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에게 장가든 고로 이 여자를 위하여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잡아 옥에 가두었으니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 헤로디아가 요한을 원수로 여겨 죽이고자 하였으되 하지 못한 것은”(막 6:17-19). 침례 요한은 헤롯 왕에게 동생의 아내를 취하는 것은 명백한 죄라는 사실을 말해 주었다. 이것 때문에 헤롯의 정부인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깊은 원한을 갖게 되었다.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느끼면서도 달게 들음이러라.” (막 6:20). 헤롯은 요한을 깊이 존경하던 사람이었다. “그의 말을 들을 때에”라는 표현을 보아서 요한과 헤롯의 관계는 이 사건 이전부터 알고 있던 사이임이 틀림없다. 오래전부터 요한은 헤롯에게 조언을 해왔고 그때마다 헤롯은 요한의 말을 두려운 마음으로 그의 조언을 달게 받아들였다.

이런 헤롯이 왜 침례 요한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게 되었을까?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21-24절 “마침 기회 좋은 날이 왔으니 곧 헤롯이 자기 생일에 대신들과 천부장들과 갈릴리의 귀인들로 더불어 잔치할새 헤로디아의 딸이 친히 들어와 춤을 추어 헤롯과 및 함께 앉은 자들을 기쁘게 한지라 왕이 그 여아에게 이르되 무엇이든지 너 원하는 것을 내게 구하라 내가 주리라 하고 저가 나가서 그 어미에게 말하되 내가 무엇을 구하리이까 그 어미가 가로되 침례 요한의 머리를 구하라 하니.” 요한을 죽이기 위한 기회를 노리던 헤로디아에게 좋은 기회가 왔다. 헤롯의 궁전에서 왕의 생일을 축하하는 연회가 열리고 유대 사회의 지도자들이 모였는데, 이때 헤로디아의 딸이 헤롯과 많은 군중 앞에서 춤을 추게 되었다. 술이 거나하게 취한 헤롯 앞에서 살로메는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만큼 춤을 잘 추었음이 틀림없다. 헤롯은 살로메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말해 보라고 호기를 부렸다. 헤로디아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살로메는 엄마인 헤로디아에게 가서 무엇을 달라고 요구할지 물어보았을 때, 헤로디아는 자신의 부정한 관계를 지적한 침례 요한의 목을 달라고 하라고 딸에게 말했다.

사람들 관계에서 곧바른 말을 하는 사람은 언제나 원수가 생긴다. 그래서 사람들은 듣기 좋은 말만을 골라서 하게 되는 것이다. 침례 요한도 자신이 했던 곧바른 말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된 것이다.

헤로디아의 딸이 헤롯에게 나아가 요한의 목을 달라고 요구했다. 헤롯은 얼마나 괴로웠겠는가? 나이 어린 여자 아이가 기껏해야 새로 나온 마차 정도를 요구할 줄 알았는데 자신이 존경하는 요한의 목을 요구한 것이다. 헤롯은 어떤 결정을 했을까?

막 6:26 “왕이 심히 근심하나 자기의 맹세한 것과 그 앉은 자들을 인하여 저를 거절할 수 없는지라.” 왜 침례 요한을 죽였는가? 자신의 곁에 “앉아 있는 자들”의 기대를 맞추고자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요한을 죽이고 싶어서 죽인 게 아니다. 그들의 눈치를 보면서 요한의 목을 참수하라고 명령했던 것이다. 헤롯의 곁에 앉아 있는 자들이 누구인가? 그들은 21절에 나온 “대신들과 천부장들과 갈릴리의 귀인들” 즉, 유대교회의 상류 지도층이었다.

바로 이것이 군중심리를 극복하지 못한 사람의 모습이다. 군중의 압력에 굴복하고 세속적인 교회와 충돌을 피하려고 하는 사람은 언제나 위기의 순간에 진실을 말하지 않고 침묵을 지킴으로써 선지자를 죽이고, 그의 기별을 땅에 묻게 된다. 군중심리, 이것이 위기의 순간에 그리스도인이 진리를 외면하게 되는 이유이다. 교회 안에 배도가 들어오는 위기의 순간에 지도자가 입을 다물면 선지자가 죽고 그 기별이 땅에 묻히게 된다.

헤롯은 요한의 삶이 의롭고 그가 했던 설교가 진리였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곁에 있는 사람들의 눈치를 보면서 입을 다물었고 그 결과 메시아의 길을 예비하였던 선지자의 목이 떨어졌다. 왜 요한을 죽이라고 명령했는가? 침례 요한의 편을 드는 말을 할 경우 평생을 침례 요한의 파로 낙인 찍혀서 자신의 생애를 망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의 초림을 준비하기 위한 기별을 전했던 침례 요한에게 일어났던 이러한 일들이 그리스도의 두 번째 오심을 위해서 준비하는 사람들에게도 정확하게 반복된다.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의 기별과 진리를 있는 그대로 전하는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어떠한 보호도 받지 못하고,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게 될 것이다.

군중의 눈치와 비위를 살피는 자는 결코 연어처럼 살 수 없다. 아프리카 들소나 펭귄 같은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말하지 못한다. 그들은 그저 주변 군중이 뛰면 같이 뛰고 주변 사람들이 물에 빠지면 같이 빠질 뿐이다. 교인들이 싫어할까 봐, 교회 장로님이 싫어할까 봐, 교회 목사님이 싫어할까 봐 양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이 주시는 기별과 음성에 귀를 막는 것, 바로 그것이 라오디게아 군중의 특징이다. 그들은 사람을 기쁘게 하지만 하나님의 진리 앞에서는 비겁한 사람들이다. 마지막 시대의 라오디게아 교회는 그런 군중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 교회이다(요한계시록 3장은 마지막 시대의 교회를 라오디게아 교회로 상징하였음).
 

라오디게아 교회의 형편

구원을 잃어버렸지만 주변 사람들의 인정 속에서 완전한 안전감을 느끼고 사는 것, 이것이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삶이다. 가장 위험하지만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들이 라오디게아 교인들이다. 깊은 기만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계 3:13,17). 마지막 시대의 교회인 라오디게아의 교인들은 가장 가난하지만 부자라고 생각하고 가장 부족한 상태에 있으면서도 부족한 것이 전혀 없다고 생각하며, 벌거벗고 있지만, 옷을 입고 있다고 생각한다. 정말 놀라운 기만이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다 가난하기 때문에 자신이 가난하다고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다 벌거벗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벌거벗고 있다고 생각하지 못한다. 벌거벗은 사람들이 정상으로 받아들여지는 교회가 라오디게아 교회이다. 주변 사람들이 다 눈멀어 있기 때문에 자신이 눈멀었다고 생각하지 못하게 된다. 눈을 뜬 사람들이 오히려 비정상으로 취급받는 교회가 라오디게아 교회이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군중은 사람이 시키는 대로 행동하고 결정한다. 목사가 하는 말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지 다 받아들인다. 죄를 이길 수 없다고 가르치면 그것을 받아들이고, 예배드릴 때 손뼉치고 드럼을 치라고 말하면 그대로 따른다. 라오디게아의 군중은 사람의 뜻만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지 않는다.

마지막 시대의 참된 그리스도인은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대로 어린양이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는 사람들이다. “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계 14:4-5). 마지막 시대의 군중은 다수의 사람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방향으로 이리저리 옮겨다닐 뿐이다. 그들은 라오디게아의 벌판을 떠돌아다니는 들소들이다. 자신이 고민하고 내리는 판단과 양심적 저항이 없다. 구원도 개인적이고 심판도 개인적으로 이루어지지만 라오디게아 사람들은 군중의 판단에 모든 것을 맡기고 살아간다. 그들은 군중 속에 있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고 믿는다.

군중 심리의 특징 중의 하나는 경고를 무시하는 것이다. 라오디게아 교인들도 철저하게 경고를 무시한다. “당신은 부자가 아닙니다.”라는 경고도 무시하고, “당신은 눈이 멀었습니다.”라는 경고도 무시하며, “당신은 옷을 벗고 있습니다.”라는 경고도 무시한다. 그리하여 기만에서 벗어날 모든 기회를 잃어버리게 된다.
 

누구의 책임인가?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왜 이렇게 완벽한 기만 속에 있을까? 왜냐하면 그들의 형편을 정확하게 알려주는 사람들이 너무나 적기 때문이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들의 숫자가 너무나 적다. 라오디게아 교회를 위한 기별을 침례 요한처럼 곧바르게 전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너무나 적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이 옷을 벗고 있고, 눈멀어 있고, 가난하고 헐벗었다는 사실을 알려주어야 하는데, 그것을 말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너무나 적어서 그 목소리가 군중에 의하여 묻혀버렸다.

그런데 왜 실제로 라오디게아 교회에 경고의 기별을 전하는 사람들을 보기가 어려운가? 왜냐하면 군중의 눈총과 압력에 굴복하였기 때문이다. 다수에 속하고자 하는 군중심리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군중이 싫어하는 설교는 하지 않고 군중이 싫어하는 가르침은 피해 다니는 교회 지도자들 때문에 라오디게아 교인들이 기만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은혜와 섭리를 통하여 복음을 이해하도록 인도해 주셨고 라오디게아 교회의 형편을 정확하게 볼 수 있는 눈을 주셨지만, 당신이 종들은 군중의 눈치를 살피면서 입을 다무는 것이다. 이것이 지금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갖고 계신 딜레마이다. 그래서 성경은 그런 지도자들을 가리켜 “벙어리 개”라 부르고 있다. “그 파수꾼들은 소경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라 능히 짖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요 누운 자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니”(사 56:10).

신학적인 측면에서 볼 때, 라오디게아 교회를 깊은 기만의 잠에 취하게 한 장본인은 하나님의 진리와 계명을 무시하고 믿음만을 강조하면서 십자가 보혈의 피를 값싼 은혜로 만들어 버린 자유주의 복음이다. 세속과 죄에 대하여 승리를 하지 않고도 구원받는 길을 열어 놓은 자유주의 복음 때문에 라오디게아 교회 교인들은 깊은 잠을 자는 것이다. 자유주의 복음을 믿으면 잠을 자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죄를 승리하지 않고서도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막연한 기대를 하게 되기 때문이다. 값싼 은혜를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피 흘리기까지 죄와 싸우라.”라는 사도 바울의 권고는 무의미해진다. 그 말씀이 별 의미가 없게 되면 그리스도인은 바로 잠들게 된다.

그러나 라오디게아 교회가 그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주신 기별과 복음을 올바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의 비겁한 침묵 때문이다. 소위 스스로 보수주의자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침묵 때문에 라오디게아 교인들이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교회가 깊은 잠에 빠진 원인은 자유주의 복음을 설교하는 사람들이 제공했지만, 그 기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진리와 원칙을 올바로 이해하고 있는 보수주의자들에게 있는 것이다. 크게 외치지 않고 깨우지 않는 보수주의자들, 바로 그들이 라오디게아 교회가 가진 문제의 중심에 있는 사람들이다. 현대 기독교회가 이렇게 된 것이 누구의 책임인가? 우리는 모두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해야만 한다.

옛 신앙을 지킨다고 말하는 자들이 연어적 특성들을 잃어버리는 것이 지금 현재 기독교회가 가진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이다. 성경의 진리를 올바로 이해하고 있지만 교회를 위하여 말하지 않는 당신의 종들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 바로 이것이 라오디게아 교회를 바라보는 하나님의 고민이 아닐까?

예레미야 시대에도 이스라엘의 죄와 배도에 대해서 정확하게 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예레미야와 비슷한 설교를 하고 예레미야와 같은 가르침을 가르치기를 두려워했다. 왜 그들은 침묵을 지켰을까? 두려움 때문이었다. 예레미야가 전했던 기별은 예레미야 자신이 만들어낸 기별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당시의 유대교회를 깨우고 개혁하려고 주신 기별이었다.

노아가 전했던 기별, 예레미야가 전했던 기별 그리고 침례 요한이 전했던 기별과 같은 말씀이 라오디게아 교회 안에서 들리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 사람의 눈총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교회 지도자들과 군중으로부터 따돌림받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라오디게아 교회 속에서 경고의 기별이 사라진 이유이다.

지금 드리는 이 말씀을 잘 기억하기 바란다. 옛날 유대교회는 예루살렘 성안 사람들의 군중심리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고 메시아를 거절했지만, 마지막 시대에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군중심리 때문에 성령의 음성이 거절당하고 있다. 노아 시대에 들소 떼가 온 교회와 세상을 뒤덮었을 때 물로 심판하셨던 것처럼, 마지막 시대에도 들소 떼들과 펭귄 떼들이 온 교회와 세상을 덮으면 그때 예수께서 세상을 심판하려고 재림하실 것이다. 지금 거의 덮여가는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은가?

“의를 아는 자들아 마음에 내 율법이 있는 백성들아 너희는 나를 듣고 사람의 훼방을 두려워 말라 사람의 비방에 놀라지 말라 그들은 옷같이 좀에게 먹힐 것이며 그들은 양털같이 벌레에게 먹힐 것이로되 나의 의는 영원히 있겠고 나의 구원은 세세에 미치리라”(사 51:7,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