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기독교 역사 꿰뚫어보기

기독교 역사 꿰뚫어보기


교회의 속성과 역사

16세기 마틴 루터 시대에도 교회는 지금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구원을 막는 걸림돌이었다. 성령께서 직접 각 개인들에게 역사하셔서 그들을 진리로 인도하시기 원하셨지만 교회는 교단의 권력과 인간의 전통을 내세워 성령의 역사를 방해하였다.

그래서 교회를 어떻게 개혁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루터의 시대에 있어서도 모든 양심인들의 고민이 되었다. 세상에 부패하기 쉬운 것이 많지만 교회처럼 부패가 잘되는 곳도 찾기 힘들다. 바다에서 금방 잡아 올린 생선이 신선하게 보이지만 잠깐 사이에 그 생명과 함께 신선도를 잃어버리는 것처럼, 교회의 거룩함과 신선한 정신도 빠른 속도로 부패가 진행된다. 기독교회가 태동하기 이전에 존재하였던 유대교회는 오랜 세월 동안 부패의 극을 달리고 있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보내시어 교회를 견책하셨다. “네가 교훈을 미워하고 내 말을 네 뒤로 던지며 도적을 본즉 연합하고 간음하는 자와 동류가 되며 네 입을 악에게 주고 네 혀로 궤사를 지으며 앉아서 네 형제를 공박하며” (시 50:17~20).

기독교회가 생기자마자 아나니아와 삽비라 같은 위선자들이 생겼고(행 5장), 그리스도의 제자들과 사도들이 하나씩 사라지면서 교회의 부패와 세속화는 급속하게 진전되었다. 기독교회 역사에 의하면 사도들의 시대가 끝나면서 시작된 암브로스, 클레멘트, 그리고 크리소스탐과 같은 교부시대에 이미 교회의 부패는 극심해졌다. 교직은 공공연히 매매되었고 뇌물을 주고 받는 일들이 왕성하였다. 교회는 이때부터 이미 의인들을 죽이고 진리를 고수하는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였다. 이러한 기독교회의 부패와 진리의 변절은 중세기의 종교 암흑시대 ,즉 1200여년 동안 계속되었고 루터 시대에 이르러는 극에 달했다. 그러한 교회의 부패의 속성은 지금까지 현존하는 모든 교단이나 교파에 지속되고 있다. 일찌기 영국 국교회의 감독 웨스트 코트는 교회의 부패 역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교회는 콘스탄티누스 대제 때(서기 312년)에 한 번 세상과 결합한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도 그것을 끊지 못하고 계속하고 있다.”

교회의 존재 이유는 세상을 교화시키고 구원하기 위함이지만, 교회는 세상에 의하여 변질되고 부패되었다. 세상이 교회를 바꾸어 놓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람이 일어나서 교회를 원래의 목적으로 돌리려고 하면 그를 미워하고 핍박하는 주체가 교회가 되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사람은 교단에 의하여 핍박을 받고 순교를 당함으로 자신의 구원을 이루게 되는 상황이 교회 안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미움과 분노를 통해서도 당신이 뜻과 목적을 이루시는 섭리를 보게 된다. 교회의 거룩함과 진리로 인하여 영혼이 구원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하나님의 사람들을 반대하고 핍박함으로써 영혼들이 연단되고 정결케 되어 구원받는 이상한 모습이 기독교회 역사를 채우고 있다. 지나간 역사 동안 나타난 교회는 구원의 기관이 아니라 박해의 기관이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들을 성경에 남겨 두신 것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의 열매로 알찌니” (마 7:13,14).

“그날에 많은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 7:22,23).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눅 18:8).
             

그리스도인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

교회의 역사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교회를 떠난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다. 교회가 타락하고 부패하면서 진리가 변질되고 이방 종교의 가르침과 철학이 그 자리를 차지하자 교회는 진리를 고수하는 사람들을 핍박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성경의 진리에 충성하고자 하는 참 그리스도인들은 교회를 떠나기 시작하였다. 그들의 이러한 결심은 매우 어려운 것이었데 왜냐하면 그 당시 교회는 교회를 떠나거나 출교를 당하면 구원과 영생이 없다고 가르쳤으며 교회를 떠남으로써 모든 사회적 관계가 끊어졌고 신분이 박탈당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성경의 진리에만 의지하고 일어서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그 유명한 왈덴스인들이다. 그들은 교회가 가르치는 교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자신들이 직접 성경 속에서 확인한 진리를 받아들였다. 그들은 교황이나 신부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성경으로 가서 성경 속에 계신 진리의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였다. 프랑스 리옹시의 상인이었던 페테로 왈도라는 사람으로부터 시작된 이 진리 고수 운동은 곧 이태리와 프랑스 양국으로 퍼져나가서 온 유럽에서 개혁 운동의 토대를 만들었다. 후일에 일어난 거의 모든 개혁자들은 왈덴스 인들의 정신과 신앙에 깊은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교회를 떠나게 되는 이유는 교회의 타락과 부패 때문이다. 일부 식자(識者)들이 교회가 개혁되어야 한다는 사실에 공감했지만, 아무도 교회를 개혁하는 일에 앞장 서지는 않았다. 양심인의 절규도, 지식인의 글도, 성도의 기도도, 학자의 제안도 깊이 병든 교회를 치료할 수 없었다. 개혁을 위해서는 인간의 힘 이상의 무엇이 필요하였다.
                   

개혁자가 준비되는 과정

하나님께서는 중세기의 로마 천주교회를 개혁하기 위한 개혁자가 필요하셨다. 그래서 한 사람을 선택하셨는데 그가 바로 마틴 루터이다. 하나님께서는 개혁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루터에게 구원의 진리를 보여주셨으며 또한 그것을 루터 자신이 깊이 경험할 수 있도록 인도하셨다. 율법과 행함에 묶여 있던 사울에게 구원하는 진리를 보여주셔서 믿음과 순종의 신앙을 가진 바울로 인도하셨던 하나님께서는 루터에게 바울과 유사한 경험을 하도록 섭리하셨다.

2천 년 기독교 역사상 바울처럼 십자가의 은혜를 깊이 맛본 사람이 누구인가? 그리고 바울처럼 철저하게 유대교회의 전통을 밟아 온 사람이 또 누구인가? 그는 스스로 유대 사람 중의 유대 사람으로 자처하였다. 그러나 마침내 유대교회의 전통과 가르침은 그를 어쩔 수 없는 좌절과 고뇌의 골목으로 몰아넣었다. 결국 그는 율법의 무거운 짐을 견디다 못해 “오호라 나는 곤고한 몸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절규하였다(롬 7:24).

깊은 절망의 고통 중에 방황할 때 바울은 율법 이외의 세계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신앙을 갖게 되었다. 율법에 눌리어 죽었던 바울이 십자가에서 살아났다. 그는 낡은 멍에를 벗어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진리 이외에는 어떤 것에도 매이지 않은 자유인으로서 참된 순종의 길을 걷게 되었으며 이방인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사도가 되었다.

만일 기독교회 역사를 통하여 제2의 바울을 찾는다면, 역사는 주저없이 마틴 루터를 지목할 것이다. 바울이 유대교회의 충실한 아들이었던 것처럼, 루터도 로마 천주교회의 충성스런 아들이었다. 그러나 그 역시 바울과 마찬가지로 로마 천주교회가 가지고 있던 전통과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에 얽매여 극심한 영혼의 고통을 받았다. 루터는 혼신의 힘을 다하여 교회가 가르치는 전통과 교리에 의지하여 구원과 영혼의 평안을 찾고 찾았지만 그러한 것들은 그의 영혼의 갈증을 풀어주지 못했다. 결국 그를 구원한 것은 일찌기 바울을 구원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인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였다. 바울처럼 루터 역시 교회의 아들에서 십자가의 아들로 변화되었다. 그는 교회가 가르치던 전통과 거짓 교리에서 해방되어 자유인으로서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지키는 사람이 되었다.
바울이 성경을 유대인들의 손에서 빼앗아 이방인들의 손으로 가져갔던 것처럼 마틴 루터도 성경을 로마 천주교회의 성직자들 손에서 빼앗아 평신도의 손으로 가져갔다. 성경은 더 이상 교회의 경전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경전이 되었다.
               

개혁자가 나타나는 이유

처음에 루터는 개혁 같은 것은 생각지도 않았다. 다만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만나서 구원에 이르겠다는 생각에 몰두하였다. 스스로 원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거대한 개혁을 시작할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섭리로 인도함을 받았다. 그는 개혁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 안에서 거듭났으며 진리를 분명하게 이해하였다. 교회와 세상을 개혁하기 전에 먼저 스스로를 개혁하였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자신의 힘으로 자신을 개혁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능력에 의하여 자신이 개혁되었던 것이다. 마틴 루터가 다른 개혁자들보다 현격한 개혁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이 점에 있다. 하나님은 먼저 루터의 마음에 내려오셔서 유럽을 개혁하고 교회를 개혁하셨다. 교회가 개혁되기 위해서는 먼저 개혁자가 준비되어야 하며 개혁자의 마음과 신앙 속에 하나님께서 거하실 수 있는 준비가 이루어져야만 한다. 그 준비는 성령의 은혜와 진리의 가르침으로만 가능하다.

역사는 하나님의 행위의 기록이다. 교회의 역사는 부패의 역사이다. 교회의 역사는 하나님의 참된 백성들이 언제, 어떻게, 왜 교회를 떠나게 되었는지를 밝히는 기록이다. 교회의 역사는 선지자가 왜 필요하게 되었는가의 역사이며 개혁자가 왜 나타나게 되었는가를 밝혀 주는 기록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토마스 칼라일은 다음과 같은 말을 자주 하였다. “역사는 깊이 연구하면 성경이다.” 이 말이 가장 잘 적용되는 것이 16세기에 있었던 유럽의 종교 개혁사이다.
             

개혁이 교회 밖에서 시작되는 이유

역사를 통하여 볼 때 개혁은 항상 교회 밖에서 시작되었다. 매우 드물지만 개혁이 교회 안에서 시작된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교회의 지도자가 경건하고 진리를 올바로 이해하고 있었던 때였다. 예를 들어 모세의 때는 지도자인 모세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경건하고 진리를 올바로 이해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개혁을 교회 안에서 시작하실 수 있으셨다.

교회가 개혁되어야 한다는 말은 교회라는 조직이 부패해서 스스로 개혁할 수 없는 상태에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에 개혁은 항상 교회 밖에서 시작되게 된다. 구약 시대에도 하나님께서는 유대교회의 대제사장인 엘리를 버리시고 한나의 아들인 사무엘을 택하셔서 새 신앙을 이스라엘 안에 일으키셨다. 하나님께서는 개혁자 중에 가장 큰 개혁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내리실 때에도 유대교회의 대제사장의 아들이나 왕족을 택하지 않으셨다. 유대교회에서 전혀 주목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무슨 선한 자가 나오랴고 한 그 나사렛의 목수 집안을 예수 그리스도의 집안으로 선택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개혁의 시작을 교회의 밖에서 시작하기로 결정하셨던 것이다. 침례 요한 역시 교회가 그에게 개혁의 자리를 내주지 않았기 때문에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로 그의 개혁을 시작하였던 것이다.

교회나 교단이 부패하여 영적으로 몰락되어 갈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조직 밖에 있는 사람들을 일으키셔서 당신의 개혁 사업을 시작하신다는 것은 참된 개혁의 진위를 판가름하는 역사의 중요한 법칙이다. 16세기 종교 개혁 사업에도 역사의 이 법칙이 그대로 적용되었다. 옥스포드 대학의 개혁자 위클립도 아니고 이태리 명문가 자제인 개혁자 사보나 롤라도 아니며 물론 교황의 집안 사람도 아니고 독일 퉤링겐의 깊은 산 중에서 가난하고 정직한 생애를 보낸 광부 한스 루터의 장남으로 태어난 마틴 루터를 통하여 유럽의 종교 개혁은 이루어졌던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와 반복되는 교회의 역사

루터의 개혁은 독일의 평민들로부터 시작되었다. 개혁이란 어떤 종류의 개혁이든지 간에 항상 평민들로부터 시작된다는 또 하나의 역사의 법칙이 있다. 귀족으로부터 시작되거나 교회의 지도층에서 시작된 개혁은 언제나 그 힘이 미약했으며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실패하였다는 것이 역사가 말해주는 교훈이다. 그들은 개혁을 시작했지만 결국에는 현실에 안주하고 말았다. 그러나 루터는 평민을 지도했고 그 평민을 대표해서 당시 유럽 전체를 주도하던 교회에 맞섰던 것이다. 이러한 루터에 의해서 로마교회의 신학과 미신적 가르침은 산산조각이 났으며 그의 부패의 진상이 드러나게 되었다.

역사는 목적 없는 혼란한 사건의 흐름이 아니다. 루터가 태어나기 오래 전부터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실행되어 왔다. 루터가 태어나기 30년 전,즉 1453년에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어 터키의 손으로 넘어가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로 인하여 로마교회는 외형적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 또한 이 사건은 르네상스로 인한 문예부흥을 한층 활발하게 만들었다. 루터가 태어난 해에 콜럼버스는 세계 일주의 계획을 세워 스페인으로 갔다. 1453년에는 구텐베르크에 의하여 인쇄술이 발명되어 라틴어 성경 전체가 처음으로 인쇄되는 역사적 사건이 생겼다.

역사는 하나님의 섭리의 실현이다. 루터의 개혁이 시작되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을 드러나게 하심으로써 루터의 글과 책자들과 번역된 성경이 온 세상으로 쉽게 퍼져나갈 수 있는 기초를 놓으셨다. 또한 콜럼버스로 하여금 신대륙이라는 거대한 땅 덩어리를 발견케 하심으로써 개혁의 결과로 일어나는 교회의 핍박을 피할 수 있는 피난처를 마련하셨다. 위대한 장군이 세운 전략과 같이 하나님의 섭리가 정확한 때에 맞추어 역사적 사건들이 하나씩 이루어졌다. 루터와 콜럼버스와 구텐베르크는 비록 태어난 곳이 다르고 사업의 종류가 다르고 종교를 달리했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의 거룩한 뜻 안에서 그들 모두는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세상에 보내신 바된 사람들이었다.
콜럼버스가 발견한 미국이라는 거대한 신대륙은 유럽으로부터 피신하는 청교도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제공하는 피난처가 되었고 루터의 개혁과 정신을 분명하게 실현할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하셨다. “땅이 여자를 도와 그 입을 벌려 용의 입에서 토한 강물을 삼키니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 (계 12:16,17).

모든 사건은 루터의 개혁을 완성시키기 위해서 일어나고 존재하였지만 어두움에 속해 있던 교회는 교회 밖에서부터 비추어 온 빛을 이해할 수 없었다. 교회는 루터와 함께 서있던 하나님의 사람들을 향하여 핍박과 반대의 정신을 드러내었다. 지난 역사 속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거대한 교회는 언제나 개혁을 반대한다는 역사의 법칙을 반복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의 법칙들을 통찰력 있게 꿰뚫어 보는 사람만이 마지막 시대에 존재하는 혼돈과 기만에 길을 잃어버리지 않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