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부: 성소 밖과 성소 뜰의 경험

 
1. 성소 밖에서의 경험





죄책감


제일 먼저 성소로 나아가는 첫 단계는 죄인의 마음 가운데 죄책감을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죄를 범하였을 때에 즉 하나님의 계명을 어겼을 때에 죄책감을 느끼는 것은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의 결과이다.

죄를 지은 사람은 심판과 멸망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그 때에 죄인은 마음 속의 평화를 갈망하게 되는 것이다. 죄의 용서와 기쁨을 갈망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죄인은 죄를 용서 받기 위해서 성소로 가져갈 흠 없는 동물을 고르게 되는데, 그것은 죄 없으신 흠 없는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동시에 흠 없이 순전한 우리의 전적인 헌신을 상징하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려고 나아 갈 때에는 온 마음을 다하여서 진실된 회개의 심정을 가지고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나누어진 반쪽 마음을 받으실 수가 없으시다.


성소 밖에서 보이는 세 가지

이제, 죄를 진 자는 제사 드릴 제물을 가지고 성소로 향하여 걸어가게 되는 데, 그 때에 그는 성소를 바라보며 희망을 돋구워 주는 세가지 물체를 보게 된다. 1) 하나는 흰 세마포로 만들어진 성소 바깥 벽인데, 그 흰 색깔은 죄인이 성소 안에 머물러 있는 한 하나님의 의로 가리움을 받는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줌으로써 큰 위로를 안겨다 주게 된다. 2) 또 한가지는 번제단에서 타오르고 있는 연기인데, 그것은 죄인이 죄를 자복하기만 하면 자기의 죄가 연기처럼 올라가 버리고 말 것이라는 소망을 갖게 하는 것이다. 3) 또 다른 한가지 눈에 들어 오는 것은 성소 지붕 위에 머물러 있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구름이었다. 그것은 성소 안에 하나님께서 임재해 계시다는 엄숙한 마음을 갖게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은 두렵기만한 분이 아니라 인간의 죄를 사하여 주시기 위하여 인간들 가운데 머물기를 즐거워 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인 사실을 일깨워 준다.


성소 문의 색깔이 주는 의미


성소에 다다르자 성소의 문을 통과하게 되는데, 그것은 문이라기 보다 휘장이었다. 그 휘장은 붉은 색, 청색, 자주색으로 짜여져 있었다. 1) 붉은 색은 앞으로 오실 메시야 곧 구세주의 흘리실 피를 상징하는 것이었고, 2) 청색은 그분께서 아버지의 계명을 온전하게 지키시는 충성스러운 순종의 삶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유대인들에게 청색은 언제나 율법에 대한 순종을 상징하였다. 3) 또한 자주색은 왕족들만 입는 색깔로서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분을 상징한다. 아울러 이 색깔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를 씻고 그의 말씀과 계명을 순종하는 사람이 되어서 하늘 왕국의 자녀들이 된다는 진리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었다. 양을 끌고 온 죄인은 벌써 이러한 자세한 교훈들과 배려를 통하여서 깊은 감동을 받으며 성소 뜰로 들어가게 되는데, 그를 맞아 들이는 제사장은 그를 친절하게 안내하여 들이며 가져온 제물이 흠이 없는 것인지를 먼저 확인한 후에 성소 의식 절차를 설명하여 주게 된다.



2. 번제와 속죄제를 통한 성소 뜰의 경험


성소 뜰에 들어간 죄인은 제사장의 안내에 따라서 가져간 희생 동물 앞에 무릎을 꿇고 손을 그 머리에 얹고 자기가 지은 죄를 고백하게 되어 있었다. 그것은 우리가 죄를 고백할 때에 우리의 죄가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옮겨지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 죄인은 칼을 꺼내어 양의 목을 따서 죽이는 것이다. 바로 우리의 죄가 예수를 십자가에서 죽게 만든 것처럼....

제사 제도에 있어서 크게 네 가지 종류로 나뉘어지게 되는데 성경 레위기서에 기록된 순서대로 첫번째는 번제, 두 번째는 화목제, 세 번째는 속죄제, 그 다음으로는 속건제로 나뉘어 진다. 1) 번제는 헌신과 희생을 목적으로 드리는 제사요, 2) 화목제는 회개한 죄인이 감사와 서약의 의미로 드리는 제사이고, 3) 속죄제는 말 그대로 죄를 속하기 위하여 드리는 희생의 제사요, 4) 속건제는 속죄제와 같은 종류의 제사로서 손해 배상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제사이다. 죄를 속죄하는 네 가지 제사중 가장 중요한 번제와 속죄제를 살펴보기로 하자.


번제를 통한 성소 뜰의 경험


그 첫번째인 번제는 개인적으로도 드리는 것이었지만 특히 아침 저녁으로 온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드리게 되어 있었는데, 이 번제는 그리스도인들이 매일 경험해야 하는 거듭남의 경험이 무엇인지를 상세하게 가르쳐 주는 제사이다.

“그 예물이 소의 번제이면 흠없는 수컷으로 회막 문에서 여호와 앞에 열납하시도록 드릴지니라. 그가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할지니 그리하면 열납되어 그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 그는 여호와 앞에서 그 수송아지를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피를 가져다가 회막 문 앞 단 사면에 뿌릴 것이며 그는 그 번제 희생의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뜰 것이요 제사장 아론의 자손들은 단 위에 불을 두고 불 위에 나무를 벌여 놓고 그 뜬 각과 머리와 기름을 단 윗불 위에 있는 나무에 벌여 놓을 것이며 그 내장과 정갱이를 물로 씻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 전부를 단 위에 불살라 번제를 삼을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레위기 1:3-9

성소에 있어서의 의식 하나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을 의미하는 동시에 하나님을 믿는 자들의 구원의 경험과 단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설명해 주는 것이다. 번제는 회개와 거듭남의 경험을 실물교훈으로 보여주신 제사제도이다. 죄를 고백한 죄인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위에 있는 번제에 대한 하나님의 지시대로 희생 동물의 가죽을 벗기는 일이 있게 된다. 왜 그렇게 지시하셨을까? 그것은 회개하는 인간이 자기 자신의 선이나 의에 대하여 무가치함을 깨닫고 자기의 의의 옷을 벗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어야 겠다는 소원을 상징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추함과 속절없음을 뼈저리게 느끼는 겸비의 표현이다. 그리고는 배를 가르고 그 속에 있는 모든 내장을 꺼내어 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을 물로 깨끗하게 씻는 것이었다. 그것은 또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었을까? 죄를 고백하였지만, 혹시 또 마음 속에 아직도 숨어 있는 죄가 있을까봐서 자기의 마음을 활짝 열어 젖히고 “하나님! 혹시 내 속에 무슨 다른 죄가 있는지 살펴 주세요. 저는 하나님께 전적인 마음을 드리고 싶습니다. 저의 생각과 묵상이 주님께 열납되기를 바랍니다”라고 기도하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속의 내장들과 창자들까지도 다 물로 깨끗하게 씻는 것이다. 성경에서 물은 성령과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한다. 그래서 회개한 죄인은 죄만 고백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죄를 낱낱이 고백한 뒤 포기하여 내어버리고 또한 하나님의 말씀 속에 있는 진리의 말씀을 따라 잘못된 부분들을 시정하고 개혁하는 일이 반드시 뒤 따라야 하는 것이다. 형식적인 회개와 쉽게 넘어가는 표면적인 회개가 아니라, 정말 자신의 마음을 살피고 죄를 포기하여 버리며 잘못된 생활들을 진리를 따라 바꾸고 개혁하는 철저한 회개를 가르치시기 위한 제사가 곧 번제였다.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의 청사진을 비추어 볼 때에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회개가 얼마나 피상적인가! 좀 더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얼마나 엉터리인가! 오늘날 기독교회의 진정한 문제점은 대부분의 교인들에게 진정한 거듭남의 경험이 없는 데에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 열납받는 회개를 드려야 한다.


속죄제를 통한 성소 뜰의 경험


속죄제는 죄인이 자기의 죄를 용서함 받기 위하여 드리는 제사로서 가장 중요한 제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죄없으신 하나님의 피가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속죄하는 사실을 실물교훈을 통하여 분명하게 죄인에게 실감시키는 제사이다. 구속이란 영어로 “Redemption” 인데, 그 낱말은 “값을 치루고 도로 사옴” 혹은, “값을 치루고 도로 물러 줌”이란 뜻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피는 그 생애에 따라서 가치가 생기는 법이다. 죄를 지은 우리들의 피는 죄를 속하는 힘이 있을 수가 없다. 그러나 죄를 한번도 지은적이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보혈이 되어 우리의 모든 죄를 씻는 샘물이 되는 것이다. 율법을 제정하신 창조주의 죄 없으신 피가 우리들의 죄를 대신하여 흘려짐으로 우리가 다시 새로운 생명 가운데 살게 된 것이다.

왜 하나님께서는 성소 뜰에서 동물을 죽여서 피를 흘리는 제사를 드려야만 죄를 용서 받을 수 있도록 계획 하셨을까? 피 흘리는 장면을 보기 좋아하시기 때문이었을까? 그럴리가 없다. 하나님께서 피흘리는 제사의 법칙을 주셨던 이유는 인간의 마음에 하나님의 용서가 무슨 댓가를 치룸으로 가능하게 되었는지에 대하여 깊은 인상 갖도록 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렇다! 회개하는 죄인을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너그럽게 용서 하신다. 그러나 그 용서를 위하여서 갈바리의 십자가의 댓가를 지불하셔야만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동물이 피를 흘리는 장면을 직접 목도하도록 성소제도를 고안하셔서 죄인이 구세주의 사랑과 희생에 대하여 뼈저린 감사의 마음을 느끼게 됨으로, 그 결과로, 인간들이 죄를 미워하고 의를 사랑하도록 만드시기 위하여 제사제도를 주셨던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유대인들은 성소를, 동물을 잡는 도살장처럼 만들어 버렸다. 제사제도를 마치 죄를 용서 받는 면허증처럼 사용하게 되어 버린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죄를 그치게 되기를 바라셔서 제사제도를 주신 것이었는데도.... 그들은 다시 죄를 지으면 양을 한 마리 또 끌고 오면 된다는 식으로 죄를 짓기에 과감하여 졌던 것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의 용서를 마치 죄를 짓는 면허증인양 생각하고 죄 짓는 일을 두려워 하지 않는 것처럼....

속죄제에서는 희생 동물 전체를 번제단에서 태우는 것이 아니라 그 기름만 잘라내어서 태우게 되어 있었는데, 그 이유는 기름은 죄를 상징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성경은 “악인은 멸망하고 여호와의 원수는 어린 양의 기름 같이 타서 연기되어 없어지리로다”라고 말씀하고 있다 (시편 37:20). 그 나머지 시체는 이스라엘 진영 밖에 지정된 장소에 내다가 불로 소각해 버렸는데, 그것은 죄와 분리되지 아니한 죄인들은 결국 새 예루살렘 성문 밖에서 유황 불로 타서 멸망 받게 될 것을 상징한 것이었다 (요한 계시록 20장 참조).

속죄제에 있어서, 기름 부음 받은 제사장이 죄를 범했을 경우와 이스라엘 백성들 전체가 죄를 범했을 경우에는 그 둘을 동일한 크기의 죄로 다루었는데, 그러한 경우에는 제물의 피를 성소 안으로 가져가서 지성소 앞에 있는 휘장 앞 바닥에다가 일곱번 뿌리게 하였다. 그 피를 통하여 죄인이 고백한 죄는 상징적으로 성소로 옮겨지게 되는데, 제사장이 그 죄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서 중보의 기도를 올려야 죄를 용서 받게 되는 것을 표상하는 것이었다. 레위기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은 그 수송아지 피를 가지고 회막에 들어가서 그 제사장의 손가락으로 그 피를 찍어 여호와 앞, 장 앞에 일곱번 뿌릴 것이며 또 그 피로 회막 안 여호와 앞에 있는 단 뿔에 바르고 그 피 전부는 회막문 앞 번제단 밑에 쏟을 것이며 그 기름은 다 취하여 단 위에 불사르되 그 송아지를 속죄제의 수송아지에게 한것 같이 할지며 제사장이 그것으로 회중을 위하여 속죄한즉 그들이 사함을 얻으리라.” 레위기 4:16-20. 성경은 제사장이 성소에서 속죄한즉, 다시 말해서 중보기도를 드려야 죄가 사함 받는다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상징적으로 성소 안에 뿌려진 피는 죄인의 죄가 성소 안으로 옮기워진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것은 궁극적으로 죄인이 고백한 죄가 하늘 성소에 있는 죄의 기록책으로 옮기어 져서 하늘 성소에 계시는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죄인을 위하여 중보기도하셔서 죄를 사하여 주시는 일련의 과정을 표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들의 죄를 용서하는 일이 십자가의 죽음에서 다 끝나버렸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 인류의 죄를 위한 용서를 마련하신 것이요 또한 구속을 시작하신 것이다. 성소의 번제단으로 표상된 십자가에서 당신 자신의 죽음으로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을 마련하신 이후, 당신 자신의 피를 가지고 승천하셔서 하늘 성소에 들어가 우리들을 위하여 대제사장이 되셔서 우리 죄를 위하여 중보하시며 당신의 보혈의 은혜와 능력을 제공하고 계신 것이다.

성소제도에 있어서 희생 제물의 피가 어떻게 처리되는지를 자세히 살펴 보아야 하는데, 그 이유는 그 피 속에 상징적으로 전가된 죄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이 죄를 범했을 경우나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죄를 범했을 경우는 피가 휘장안으로 옮겨져 뿌려지는데, 평민인 개인이 죄를 범했을 경우에는 피가 성소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뜰에 있는 번제단 주위에 뿌려 졌으며 죄는 다른 방법으로 옮겨져 중보의 기도를 드리게 되어 있었다. 왜 그랬을까? 거기에는 참으로 감동적인 속죄의 이야기가 내포되어 있다.

속죄제물을 가지고 성소 뜰에 들어와 제사를 드린 사람은, 제사장이 그 제물의 피를 가지고 성소 안으로 들어가 휘장 앞에 뿌리고 대신하여 중보 기도를 해 줄 것을 기대하고 있는데, 오히려 제사장은 그 속죄제의 피를 성소 뜰에 있는 번제단 뿔에만 바르고 그 주위에 피를 뿌린 후 나머지를 땅에 쏟아 버리는 것을 보면서 깜짝 놀라게 되는 것이었다. 그 때에 속죄제물을 가져온 사람은 이렇게 말하게 될 것이다. “아니, 제사장님!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 피를 그냥 성소 뜰에 쏟아 버리다니요! 성소 안에 들어가 휘장 앞에 뿌린 후 저를 위하여 기도해 주셔야 제 죄가 사함 받는 것이 아닙니까? 이제 저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놀란 죄인에게 제사장은 인자한 미소를 띄우며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형제여! 속죄제에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특별히 교육시키고자 하시는 중요한 교훈을 담아 두셨습니다. 이 속죄제에는, 장래에 올 메시야를 통하여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들의 죄를 대신 짊어 지심으로써 우리가 용서 받을 수 있게 되는지에 대하여 가르치기 위한 귀중한 실물교훈이 담겨져 있습니다. 형제가 죄를 고백하였을 때에 형제의 죄가 어디로 갔습니까?” “예! 저의 죄가 속죄 양에게 전가 되었지요!” “그렇소! 맞습니다. 그러면 이제 잘 지켜 보시지요!” 그렇게 말하고는 제사장이 그 속죄제물 짐승의 살점을 조금 칼로 도려내어 입에 넣고 씹어서 삼키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는 이렇게 질문 하였을 것이다. “형제여! 이제 당신의 죄가 어디로 갔습니까?” 그 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알아차린 죄인은 떨면서 이렇게 대답하였을 것이다. “네! 제사장님! 저의 죄가 바로 당신의 몸으로 전가되었군요! 상징적인 의미에서, 내가 지은 죄가 바로 당신의 죄가 되어 버렸군요!” 그때 제사장은 이렇게 말하였을 것이다. “이제 나는 당신의 죄, 아니 내 자신의 것이 되어버린 그 죄를 가지고 성소 안 하나님의 임재 앞에 나아가 당신의 죄, 아니 내 죄를 위하여 용서해 주시기를 기도드릴 것입니다.” 죄인은 눈물이 함박고인 눈으로 성소 안으로 들어 가는 제사장의 뒷모습을 지켜 보았을 것이다.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을 가르쳐 주는 얼마나 힘있는 실물교훈인가! (레위기 6:25-30참조).



3. 속죄제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사랑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셨다는 의미가 과연 무슨 뜻일까? 베드로 전서 2:24은 우리에게 힌트를 제공한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어떻게 주님께서 우리들의 죄를 당신의 몸으로 지실 수가 있었는가? 몸으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신다는 의미가 과연 무슨 뜻일까?

이렇게 생각해 보자.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에 우리 몸에 어떠한 반응이 나타나는가? 예를 들어 우리가 어떤 형제에게 커다란 거짓말을 하였는데, 길을 가다가 그 사람과 마주쳤다고 하자. 그 때에 우리의 몸에 어떠한 반응이 일어나는가? 갑자기 불안과 초조함이 엄습하고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하며 식은 땀이 흐르면서 두려움이 마음속에 밀려 오지 않는가!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심판의 두려움이 가슴을 메워 오는 것이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러한 방법으로 죄를 지시는 경험을 겪으신 것이다. 우리들의 죄가 마치 당신께서 지으신 죄들처럼 그 분 위에 엄습하여 왔다. 한번도 죄를 지어 보지 않으신 분께서 죄책감을 우리를 대신하여 경험하시게 된 것이다. 우리가 죄를 범했을 때 느끼는 몸의 반응들이 갑자기 예수께 생기기 시작했을 것이다. 인류의 수없이 많은 죄악들이 한꺼번에 예수님의 영혼 속으로 밀려왔기 때문에, 그분의 마음은 그 때까지 전혀 느껴 보지 못했던 죄책감을 느끼기 시작하셨던 것이다. 십자가 상에서의 그 고뇌는 말로 다 형언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문자 그대로 우리의 죄를 대신 당신 자신의 몸으로 짊어지신 것이었다. 그래서 고린도 후서 5:21은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저희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시편 22장 전체와, 40장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계실 때에 당하신 심적 고통이 어떠하였는지를 미리 예언하여 준 장들이다. 시편 40:12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무수한 재앙이 나를 둘러 싸고 나의 죄악이 내게 미치므로 우러러 볼 수도 없으며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음으로 내 마음이 사라졌음이니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상에서 당하실 깊은 고뇌를 예언하면서 “나의 죄가 나의 머리털 보다 많”다고 표현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죄가 전혀 없으신 하나님이셨다. 도대체 무슨 죄가 그렇게 많아 하늘을 우러러 볼 수도 없고 머리털보다 많다고 하셨을까? 그렇다! 그것은 분명히 대신 지셨던 우리들의 죄들을 말하는 것이다. “내 마음이 사라졌음”이라는 영어 성경의 표현은 “Therefore my heart failed me” 이다. 다시 말해서 “나의 심장이 멈추었다” 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육체적인 고통 때문에 돌아가신 것이 아니었다. 예수께서 돌아가신 것은 우리들의 죄를 지시는 영혼의 고뇌 때문에 심장이 파열되어 돌아가신 것이다. 성경에서 예수께서 돌아가실 때의 장면을 찾아보면, 큰 소리를 지르시고 고개를 떨구시며 갑자기 운명하셨다는 기록을 읽을 수 있다. 또한 성경은 로마 군병이 예수께서 죽으셨는지를 확인하기 위하여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자 물과 피가 흘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것은 그분의 심장이 파열되었다는 의학적인 증명이다. 죄로 인한 깊은 고뇌 때문에 심장이 터지게 되었고, 그로 인하여 심장이 피를 생성하는 일을 멈추자 혈청과 혈구가 분리되어서 창에 찔린 상처로 흘러 나왔던 것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부르짖으신 말씀 가운데 우리가 잘 기억하는 말씀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이다. 그 뜻은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는 의미이다. 예수께서는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시는 과정에서 우리 죄의 악함과 두려움을 짊어 지심으로써, 하나님 아버지의 임재를 더 이상 느낄 수 없게 되신 것이었다. 우리의 죄 그 자체가 되어 버리신 것이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당하신 고통은, 죄인이 하나님의 자비없이 자신이 범한 죄의 댓가를 있는 그대로 당하는 그러한 종류의 것이었다.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 성경은 “죄를 대신 지셨” 다고 말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단 한번도 하나님 아버지의 임재를 느끼지 않고 사신 적이 없으셨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갑자기 인류의 죄를 지시고 우리들의 죄 그 자체가 되심으로써, 죄인인 우리들이 당했어야 할 그 형벌과 심판을 대신지게 되었는데, 그러한 상황에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진노만을 느끼게 되셨고 완전히 버림받은 느낌만 가지게 된 것이었다. 주님의 눈 앞에는 이제 모든 소망이 사라졌고, 마치 대신 지신 우리의 죄 때문에 영원히 아버지와 분리되어 완전히 멸망당할 것처럼 느끼게 되신 것이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그 순간에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부르짖게 되신 것이었다. 바로 그 순간, 예수께서는 한가지 선택을 하셔야만 하였다. 마귀는 지금 이렇게 죽으면 영원히 하나님 아버지와 분리되고 멸망 당해 버릴 것이라고 그분의 귀에 속삭임으로써, 예수님을 괴롭혔을 것이다. 이제 예수님의 마음에는 이전에 들었던 하늘 아버지의 모든 약속도, 삼일 만에 부활할 것이라는 희망도 다 사라져 버린 것처럼 느껴졌고, 더 이상 아무런 소망도 없는 것처럼 느끼셨다. 또한 당신 자신이 목숨을 바쳐서 구원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자신을 십자가에 메달고 조롱하는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러한 순간에도 당신 자신이 온 인류를 대신하여 영원히 심판을 받고 영원한 죽음을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인류를 포기 할 수 없다는 죽음보다 강한 사랑을 나타내시었다. 당신 자신이 영원히 없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이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대신 죽어줌으로써, 인류의 죄값을 대신 치루어 주시겠다는 놀라운 사랑을 실현하셨던 것이다. 인간의 부모의 사랑에서 우리가 희미하게나마 희생적인 사랑을 엿볼 수 있지만, 예수님의 죽음의 선택은 다시 살 수 있다는 희망이 전혀 없는 죽음에 대한 공포 상태에서 이루어졌던 것이기 때문에, 그 종류가 전혀 다른 것이다. 인간이 죄를 지었어도 회개하고 믿을 때에는 그 지은 죄에 대한 댓가를 받지 않고 용서를 받는 것은 예수님께서 그 댓가를 이미 십자가에서 치루어 놓으셨기 때문이다. 비록 인류가 타락하였지만, 그분의 사랑은 결코 인류를 그냥 죽게 내어버려 두실 수가 없으셨다. 온 우주의 천사들은 십자가 상에서 나타나고 있는 그러한 사랑의 장면을 지켜 보면서 감탄하였을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인가! 이 사랑을 어떻게 이해하고 보답하여야 하겠는가?

독자들이시여! 예수님께서는 우리 자신의 죄 때문에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깊이 명상하라. 십자가에서 치루어진 희생과 죽음 때문에, 우리에게 값없는 용서와 구원의 소망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또한 인류를 위한 값없는 용서와 구원이 마련되기 위해서 치루어진 댓가는 엄청난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이다. 십자가는 쇼(show)가 아니다. 당신의 생명까지 포기할 정도로 보여 주신 엄청난 사랑의 현시이다. 우리가 2000년전에 갈보리 산 위에 서있지 않았다고 해서, 유대인들과 로마인들이 예수님을 죽인 것이지 내가 예수를 죽인 것이 아니라고 말하지 말자! 우리의 죄가 예수를 죽인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어떤 순교자의 죽음과 같은 것이 아니었다. 어떠한 순교자의 죽음도 우리에게 영생의 기회를 제공해 줄 수 없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 인류에게 다시 한번 영생의 기회를 주기 위하여 죽으신 대속의 죽음이었다. 속죄제는 바로 이 감동적인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 보고 그 의미를 이해하게 될 때에야 비로서 우리는 믿음을 가질 수 있다. 그 믿음은 단순히 지적인 이해나 동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믿음은 우리의 온 생애를 바쳐 하나님을 순종하며 따르기를 원하도록 만드는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인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소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기별의 중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