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기록된 성소제도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시는지를 보여주는 청사진이다. 사람이 영생의 특권을 잃어 버리고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 죽게된것은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겪고 있는 이 모든 고통과 슬픔의 이유는 죄에 있다. 죄는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이다. 성경은 죄를 불법이라고 선언하고 있는데, 그 뜻은 lawlessness, 즉 법을 어기고 마치 무법적으로 산다는 뜻이다(요일 3:4).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속에 살기를 거부하는 것과 같다. 자연 법칙을 어기고 궤도를 벗어나는 별이 있다면, 만일 물이 위로 흐르기를 시작한다면 결국 우주는 큰 혼란을 맞게 되고 그 결과로 모두가 다 파괴되고 말것이다. 하나님의 법칙은 우주의 존재만큼이나 중요한 것이다.


1. 구원의 계획

더 나아가서 인간은 자연법칙뿐만 아니라 도덕적인 법칙으로 주관되고 있다. 인간은 식물이나 동물과 달라 본능 이상의 능력인 지성과 자유 의지의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주관하는 법칙을 제정하여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십계명인 것이다. 에덴 동산에서는 그 도적적인 율법이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금지의 법칙으로 표현되었다. 하나님의 명령을 존경과 사랑의 마음으로 따르고 순종하는 것이 행복과 영원한 삶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류를 얽어 묶어서 부자유하게 만드는 부담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법칙은 우리를 보호하고 살게 하는 울타리 같은 축복이다. 어떠한 모종의 법칙에 지배를 받지 않고 사는 피조물이 어디 있는가? 모든 만들어진 물건들에도 그 사용법칙이 있지 않는가? 모든 만물을 지켜 보라! 서로의 평화와 안전과 질서, 그리고 상대방의 행복을 위하여 그들은 반드시 어떤 법칙에 의하여 주관되어 오고 있지 않는가? 그러므로 하나님의 법칙을 어기는 것은 결국에 가서 온 우주를 파괴 내지는 큰 혼란으로 몰아넣는 독소 같은 존재인 것이다. 그것을 우리는 죄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인간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다시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 그들을 다시 살도록 해 주시기 위해서는 그들의 죄의 값을 대신 치루어 주는 엄청난 대가를 지불해 주셔야 했다. 왜 죄를 그냥 지나치지 않고 꼭 그 댓가를 치루게 하여야 하는가? 만일 죄의 결과를 치루게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결과가 전혀 없이 지나가게 됨으로 우주를 주관하는 그 중요한 법이 깨어져 버리고 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도 이 법을 없애거나 바꾸실 수가 없는 것이다. 이 우주 자체가 법에 의하여 운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도 천지가 없어질 지언정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룰 것이라고(마 5:18)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인간도 구원하시고 우주의 법도 지키시기 위한 구속의 계획을 고안하시게 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이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생각 한다. 십자가에서 예수께서 율법을 폐하셨다고. 그러나 실재로는 그 반대이다. 만일 예수께서 계명을 폐하실 것이었다면 무엇 때문에 계명을 어긴 인류의 죄의 댓가를 대신 지불하시기 위하여 그러한 엄청난 고난과 희생을 치루어 주셔야만 했단 말인가! 그냥 율법을 없애버리시고 그저 쉽게 용서해 주어 버리시지 않고...십자가는 범죄한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행위이지마는 동시에 하나님의 정부의 율법을 높이시고 옹호하시는 공의의 결정이기도 한 것이다.

범죄한 인간을 살리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실 것이 계획되었고 또한 그로 인하여 인류는 죄를 용서 받고 다시 영생할 수 있는 길을 얻게 되었다. 오! 얼마나 크고 놀라운 사랑인가! 죄를 지은 인류에게 소망이 생긴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우리가 반드시 이해하고 지나가야 할 매우 중요한 관건이 걸려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인류의 구원이 용서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들의 죄를 씻고 용서해 주는 동시에 그 죄를 지은 인간들을 변화시키어 다시는 법을 범하지 않고 하나님께 변치 않는 사랑과 충성심을 가지고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죄를 지은 자의 마음과 품성이 변화되는 일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야 죄인들을 구속하신 이후에도 이 우주는 안전한 곳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일은 강제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인간은 기계나 로보트가 아니라, 지성과 선택력을 가진 인격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 이 죄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시는지를 보여주시기 위하여 고안 하신 것이 바로 성소 제도인 것이다.


2. 성소 제도의 의미

성소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의 죄 값을 치루시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며, 또한 어떻게 우리로 하여금 그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에 감동되어 다시는 하나님의 법을 범하지 않는 자들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 주시는 일이다. 성소 뜰은 예수께서 이 지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사역을 상징해 주는 제도이다. 그래서 성소 뜰 번제단에서 희생 제물을 죽여 태우지 않았는가? 그 후에 피를 가지고 들어가는 첫째칸 성소는, 예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시어 하늘 성소에 들어가셔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서 중보하시고 그 희생의 유익을 믿는자들에게 개인적으로 적용시키시는 사역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성소 안에서 죄인들을 위한 용서의 일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과 말씀을 통하여 가르치고 인도하여서 진리대로만 사는 자가 되도록 변화시켜 주시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아니하고 우리의 죄를 위하여 돌아가신 구주 예수를 위하여 살도록 교육시키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대로 순종하며 사는 사람이 되도록 성령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것이다. 바울은 그러므로 믿음을,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갈 5:6)이라고 표현하였다.


3. 지성소와 대속죄일

그러므로 성소의 제일 마지막 부분인 지성소는 하나님의 구속의 결론을 보여주시는 장소가 되는 것이다. 이 지성소야말로 성소 제도의 목적이요 그 결론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곳에서 죄인과 만나시겠다고 말씀하시었다(출 25:22). 이 지성소에서 이루어지는 일은 하나님의 최종 심판을 상징해 주고 있다. 과연 용서 받은 죄인이 영원히 다시 살기에 합당한지를 조사하시고 결정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이 날을 개인의 운명이 결정지어 지는 날이라고 믿고 가르쳐 왔는데, 바로 그 날이 대속죄일이다. 유대인 백과사전에는 대속죄일을 “그 개인의 생명이 영원히 계속 될 수 있는지 없는지 그 운명을 결정 짖는 날”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날에 그들이 서로 나누는 인사가 “좋은 인(표)을 받으셨기를 기원합니다!”였다. 바로 이러한 개념으로 성경은 대속되일을 설명해 주고 있다. 이 대속죄일은 백성들이 자기들의 모든 죄로 부터 정결케 되는 날이라고 말씀(레 16:29,30)하고 있다. 그런데 한가지 질문이 떠오른다. 실상 죄인들이 죄를 지었을 때에, 그때마다 양을 끌고가 이미 죄를 고백하고 회개 하였지 않는가? 그들은 죄의 용서를 이미 받았지 않는가? 그런데 뭘 또 새삼스럽게 죄를 살피고 또 정결케 할 필요가 있다는 말인가? 이미 회개하고 구원에 이르렀는데 말이다. 대속죄일에 다시 죄를 살피고 정결케 하는 일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4. 예수 재강림 전에 있을 심판

우리는 경험적으로 한가지 분명한 사실을 부인할 수가 없다. 그것은 우리 죄인들이 하나님 안에 항상 거하지 아니하면 옛날 죗된 생활의 상태로 되돌아 갈 수 있다는 것이다. 회개하였지마는 다시 마음을 바꾸어 죄의 습관으로 돌아가서 타락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겉으로는 회개한 것 같이 보이지마는 속으로는 여전히 죄를 품고 있거나 아니면 죄의 습관을 버리지 않고 있거나, 아니면 죄의 우상을 여전히 가지고 살아 갈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구원의 증거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생애인 것이다. 그 믿음이 참된 것인지 아닌지를 나타내는 증거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생기는 성령의 열매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라(마 7:20)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강제로 우리를 구원하시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자원하는 심정으로, 십자가의 사랑에 감동되어 자신을 굴복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계명대로 따라 순종하며 사는 자들에게 영원히 살 수 있는 자격을 주시는 것이다. 인간의 의의 성품은, 자기가 원하는 마음으로 순복할 때에만 이루어 지는 것이다. 심판이 두려워서 따른다든지, 아니면 자기 자신이 세상에 대하여 죽는 일이 없이 이기적인 목적으로 따라 모방한다고 해서 영원히 살 품성이 형성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대속죄일날, 즉 이 땅에 다시 재림 하시기 전에 누가 영원히 구원 받을 수 있는지를 먼저 조사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결정과 심판은 온 우주 앞에서 천사들과 모든 피조물들이 다 보고 알 수 있게 공개적으로 행하신다. 그래서 성경은 책들이 펴 놓여있고 심판이 진행되고 있는 장면들을 여러번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실례 - 단 7: 9,10; 계 5:1-5; 계 19:2; 계 20:12,13). 예수님께서도 비유로 이 사실을 여러번 가르치신바 있다. 왕의 혼인 잔치의의 예복의 비유가 그 중에 하나이다. 이미 초청 받아 와 앉아 있는 자들에게 왕이 들어와 그들이 예복을 입고 있는지를 조사하였다(마 22장). 예복을 입고 들어오지 않은 자는 밖으로 내어 쫓김을 받아 이를 갈며 슬피 울게 되었다. 계 19:7,8 은 결혼 예복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심판 사업을 통하여서 각자 개인의 생애의 기록을 보시면서 그가 참으로 처음 회개할 때의 마음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지를 알아 보시는 것이다. 하나님 자신은 이미 다 알고 계시지마는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모든 피조물들, 즉 하늘의 배심원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의 결정을 직접 보도록 하시는 것이다. 과연 구원 받아오는 인간들이 영원히 살기에 합당하고 안전한 자들인지를 펼쳐서 보여 주시는 것이다. 죄인들이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다시 영원히 사는 특권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 속에 반역과 불순종의 정신이 없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에는 우리의 양심을 씻어 옳바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하는 능력이 있다. 무슨 일이 생기든지 절대로 하나님의 뜻을 어기거나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는 일을 다시는 하지 않겠다는 충성심을 가진 자들의 이마에만 하나님의 인이 쳐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은 합리적이며 공평하시다.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거룩한 천사들과 배심원들이 하나님의 심판이 의로우시다고 찬양을 부르는 장면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우신지라...”(계 19:1,2). 성소제도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최종적으로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있다.

그러나 죄를 사함받고 주님을 온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는 자들은 이 심판에 대하여 전혀 염려할 필요가 없다. 자기 양심이 진실된 자들은 자기의 무죄를 판결하여 줄 심판날이 오히려 기다려지는 것이다. 또한 이 날은 하나님의 명예가 회복되는 날이다. 사단은 인간이 하나님의 법을 지킬 수가 없다고 늘 고소하여 왔다. 하나님의 법을 없애야 된다고 주장하면서 하나님을 이기적인 분으로 거짖 고소하여 왔다. 이 내용은 마귀가 하와를 꼬이는 장면에서 잘 묘사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신실하고 의로운 당신의 백성들을 통하여서 당신의 이름의 명예를 회복 하실 것이다.


5. 대속죄일 의식에 담겨진 의미

대속죄일 날에 드리는 제사와 의식들은 하늘 지성소에서 진행되고 있는 하나님의 심판 사업을 잘 묘사해 주고 있는데, 그 날의 제물로 드리는 동물들은 네마리 였다(레위기 16장에 있는 내용임). 수송아지 한마리, 수양 한마리, 수 염소 두마리가 그것이었다. 수송아지는 대제사장이 자기와 자기의 권속들을 위하여 드리는 속죄 제물이었고, 수양은 온 이스라엘을 위한 그 날의 속죄제물이었다. 그러나 정작 대속죄일의 제물은 두 마리의 염소였다. 한 마리는 여호와를 위한 염소였고, 한 마리는 아사셀을 위한 염소였다. 흥미있는 사실은 여호와를 위한 염소의 머리 위에 매일 드리는 속죄제 때 처럼 안수하여 죄를 고백하지 않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이 염소는 죄를 대신 지는 염소가 아니다. 이 대속죄일에는 예수님을 상징하는 이 동물이(염소) 죄를 지지 않는다. 이 날에 여호와를 위한 염소는 죄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염소의 피는 죄인이 고백한 죄를 성소로 옮겨 더럽히기 위해 뿌려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일년 내내 행해져 왔었다. 그러나 이날은 오히려 그렇게 성소를 더럽혀 온 인간의 죄들을 , 다시 말해서 성소로 옮겨져서 하늘의 기록 책에 기록되어 옴으로 하늘의 성소를 더럽혀 왔던 모든 죄들을 도말하고 씻는 효험이 있는 피를 상징한 것이다.

그래서 이 여호와를 위한 염소의 피를 가지고 대제사장이 일년에 한번 들어가는 지성소에 들어가 법궤위 시은좌에 일곱번 뿌리고 나오면서 성소의 분향단의 뿔에 바르고 뜰로 나와서는 번제단 주위에 뿌리고 그 네 모퉁이 뿔에 바르는 것이었다. 그곳 들은 매일 죄를 담은 피로 제단과 성소에 뿌리고 발라서 더럽게 하였던 곳들이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최종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이 모든 죄의 기록들을 다 말끔히 씻어 도말하시는 일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모든 죄들을 기록에서 도말하시기 전에 각자들의 참된 상태를 살펴보셔야 하는 것이다. 그들의 생애가 정말 어떠했는지를 조사하시는 것이다. 그것은 아주 합당하고 의로운 일이다. 조사함이 없이 집행 언도를 내리는 일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예수께서 믿는자는 심판에 이르지 않는다고 하신 말씀은 우리가 심판에 이르렀을 때에 정죄를 당하지 않는다는 뜻이지 심판에 나아가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교회가 먼저 심판을 받는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누구나 다 심판대 앞에 서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벧전 4:17,18; 딤전 5:24,25; 딤후 4:1 참조).

이렇게 구원 얻을 자들의 죄가 조사되고 씻어져서 영원히 그 기록책에서 도말된 이후에 모든 죄는 그 죄의 창시자요, 죄를 짓게 만들었던 마귀에게 다 돌려지는 것이다. 바로 이 일을 아사셀 염소에게 모든 죄를 고백하는 것으로 상징하여 주신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아사셀 염소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그 반대이다. 이 아사셀 염소는 최종적으로 모든 믿는자들의 죄의 책임을 지고 광야로 끌려나가는 마귀, 사단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자기가 반역함은 물론이요 다른 인간들을 범죄케 한 창시자이다. 그러므로 진실로 회개한 인간들의 죄를 그들에게로 부터 옮겨서 마귀에게 책임을 지우고 그에게 다 옮기는 것이다. 그리고는 정해진 사람의 손에 의하여 그를 데리고 무인지경인 광야로 데리고 나아가서 죽게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께서 재림하시고 난 후에 천년동안 황폐된 이 땅 위에 마귀만이 홀로 끌려와 갇혀 있을 것에 대한 예표인 것이다(계시록 20:1-3 참조).

성소 제도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죄를 처리하시는지를 보여주는 청사진이다. 대속죄일의 의식은 하나님께서 죄를 어떻게 심판하시며 최종적으로 어떻게 처리하시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들에게 물어야할 중대한 한 가지 질문이 있다. 이 질문을 회피할 자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언제 하늘에서 우리의 이름이 불리워지고 우리의 생애의 모든 기록들을 펼쳐 놓고 나에 대한 심판이 시작될지 모른다. “우리는 과연 진심으로 회개하였는가?” “과연 우리는 모든 죄를 고백하고 예수님께 드렸는가?” “나는 진실로 하나님의 뜻 행하기를 즐겨하며 죄를 미워하는 생애를 살고 있는가?” 말할 나위도 없이 이 심판은 죽은자들로부터 시작하여 나중에 살아 있는자들의 생애들도 취급하게 될 것이다. “당신은 예수님을 당신의 변호인으로 모시고 있는가? 당신은 예수님의 앞에 설 때에 부끄러움이 없는 진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참으로 심각한 질문이 아닐 수가 없다.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에는 더 이상 죄인의 죄를 용서하시는 구세주로 오시지 않는다.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에는 십자가의 피로 씻고 변화되어 주님의 뜻대로 살고 있는 의인을 데리시러 오시는 것이다. 심판주의 옷을 입고 오시는 것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모든 분들에게 하나님의 성령의 깨닫게 하시고 도우시는 크신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간절하게 기도드린다.